사도의 마지막 7일 나남창작선 132
김상렬 지음 / 나남출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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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를 먼저 보고 책을 접했다.

<사도의 마지막 7일>은 8년전 김상렬 작가의 <목숨>을 수정해 영화 개봉에 맞춰 출간 됐다.

 

<목숨>을 접하지 않았기에 무엇이 어떻게 수정됐는지 알 수 없지만

<사도의 마지막 7일>은 영화 <사도>를 먼저 접하고 읽었기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소설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면서 부터 시작 한다.

 

p.11

쾅, 세상의 문이 닫혔다. 당신의 성난 고함이 다시 들려온다.

"네 놈은 반드시 그 안에서 죽어야 한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읽으면 영화의 첫 장면이 오버렙된다.

송강호의 영조, 유아인의 사도세자...

 

영화의 의미지가 너무 깊게 남아서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의 장면들이 하나 둘 오버렙 된다.

 

김상렬의 소설은 영화를 소설화 한게 아니기 때문에 영화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소설속의 사도세자와 영화속의 사도세자를 비교할 수 밖에 없게 되며, 비교를 하다 보면 배우 유아인이 대단했음을 느끼게 된다.

 

소설속의 사도세자는 '광증'에 시달려 죽는 그 순간까지 허상에 허우적 된다.

잠시 정신을 차리기도 하지만, 갇혀있다는 것, 뜨거운 여름, 굶주림, 죽어감을 느끼며 보내는 지옥같은 하루들

사도세자가 아닌 인간 '이선'으로 느끼는 공포와 죽음을 그린다.

 

영화 사도는 아버지와 아들관계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고, 하루가 지날때 마나 하나의 사건을 통해 행복했던 날 부터 차츰 사이가 멀어지며 벌어짐을 그려 왕과 왕세자가 아니라 아들을 죽인 아버지, 죽임을 당한 아들로 그려진다.

당쟁은 배재된다. 오로지 관계와 관계사이에 집중된다.

 

소설은 영화와는 다르다.

사도세자에게 집중이 된다. 죽음과 함께하는 날들. 점점 미처가는 사도

그러면서도 함께하기로 했던 이들을 생각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억울하게 죽을 순 없다!, 조금만 기다리면 따르던 충복들이 구하러 올것이라는 헛된 희망.

 

이 모든건 사도세자의 '광증'으로 설명하려 함이였을까?

지워진 기록들사이의 진실은 결코 복원될 수 없지만 여러 짐작을 해본다.

기록과 기록사이. 소설은 임오화변을 당쟁을 원인으로 설득해 간다. 당파싸움으로 갈라 놓은 관계.

억울하게 희생된 사도세자, 그렇게 본다면 영조 역시 당쟁의 희생량일 뿐이다.

 

소설은 그래서 아쉽다.

구성은 영화와 비슷하지만 집중력에서 흐려진다.

비구니 '가선'이란 인물때문에 이야기에 힘이 빠짐을 느낀다.

당쟁에 집중했거나, 영화처럼 관계에 집중했거나, 그도 아니면 첫 제목이였던 <목숨>

삶과 죽음의 비극에 집중했더라면 단테의 신곡의 주는 교훈 쯤은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은 '사랑'이였나? 하는 생각에...

 

'가선'이란 인물이 있어, 도피처, 은신처가 아니라 '광증'의 원인이 되어 버린 것 처럼 보였다.

동정심으로 인한 관심에서 '사랑'으로 커져 나간 마음을 담았지만, 애달픔에 집중한 것도 아니였다.

 

뒤주에 갇혀 죽는 그 순간 까지의 7일... 결국 억울함만 남았다.

당쟁도, 가선도, 아버지도, 모두 억울함 속에 묻힌다.

 

소설은 결국 소설로 남았다.

작가도 서문에서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소설'일 뿐이라고.

소설이라서 이해 한다. 소설이라서 아쉽다.

 

지워진 기록. 어떻게 채울지 확립되지 않은 시간들.

그때를 살아내지 못한 미래의 사람들은 결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복잡함.

진실에 다가갈 순 없지만, 진실처럼 보이는 가정은 수도 없이 만들어 질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을 '가선'이란 인물의 등장부터는 '사랑'에 집중 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까?

슬픔을 공유하지도, 억울함에 공감하지도 못했다.

아무래도 영화의 잔상이 너무 깊게 남아서 그런가 보다.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에 이어지는 비극은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유교국가라는 것, 왕정이라는 것, 당쟁이 치열했다는 것, 영조(연잉군)도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고 철저했다는 것.

성장과정에서 지금과는 분명 다른 것들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 시대적 상황에 의한 비극으로 기록된 사건.

 

그 마저도 대부분의 기록이 지워졌다는 것.

지워진 기록속에 우리가 건질 것은 무엇인가?

 

최근 몇년 영조와 사도 정조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 만큼 그 시대의 불확실성과 지워진 기록이 가진 매력이 현시대에 살아있다는 것이겠지.

시대가 흘러도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목숨>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였으면...

 

소설의 장면 장면마다 오버렙 되는 영화의 장면들이 있어 소설을 읽는데 색다를 재미가 있었다.

 

자결하라며 칼을 던지는 영조의 모습, 뒤주에 갇히는 장면, 뒤주속에서 미쳐가는 장면, 어린 정조가 물한잔을 주겠다며 우는 장면, 영화속의 장면들 덕에 소설을 깊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좋았지만...

어쩔 수 없이 영화와 비교하게 되며 마지막 까지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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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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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07번째 작품

책을 읽고 어떻게 남겨야 할까 한참을 생각하다 이제서야 리뷰를 쓴다.

 

책은 너무나 쉽게 읽힌다.

또 너무나 깊게 공감이 된다.

 

짧게 요약하자면 계나의 호주이민 정착기로 줄일수 있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간단하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계나의 이야기에 빠져들기도 하고 반박해 보기도 한다.

 

소설과 해설을 모두 읽고 견해가 궁굼하다며 담화를 시작해보자는 허희님의 마지막 글을 읽고나면

책을 다시 한번 펼쳐들고 더욱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행복론'일 수도 있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고찰의 시간이 될 수도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나는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현실이 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계나가 호주로 떠나는 이유는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이고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몰 살겠서다. 좀더 깊히 들어가면 한국에서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직시한 것이고, 살기 위한 대안이 호주로의 이민이다. 소설 마지막에서는 결국 호주로 가려는 이유가 사람대접 받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계나가 직접 밝히는 한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p.11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p.44

'한국에서는 딱히 비전이 없으니까.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

 

그렇다. 작품해설에서도 말하고 있는 바로 이부분.

책을 읽으면서 여러번 읽게 된 이부분... 나또한 비슷한 처지라 더욱 공감이 갈 수밖에 없는 이 부분을 보면 호주로 이민을 가고 싶은 생각이 들긴 한다.

 

그럼에도 나라면 한국을 선택하고 싶다. 그렇게 비전이 없고 가진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조건을 따지며 출발선부터 불평등한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계나의 선택은 결국 도망이고, 이 도망은 문제 해결에 아무것도 도움될 수 없다는 것. 호주로의 이민이 정답 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장소만 옮겼을 뿐... 세상은 바뀐것이 없는 선택이다. 다시 보면 그건 가진것 없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는 아주 작은 가능성. 쉽게 말해 보이지 않는 신분 상승을 위한 선택일 뿐이다. 문제를 인식했음에도 바꾸기 보다는 다른 곳에서 부족함을 채워 신분을 상승한 계나의 선택... '행복'이란 가치를 놓고 생각하면 과연 계나는 '행복'할까?

 

아무리 힘들어도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

사회구조가 잘못됐으면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문제라면 그 시선을 돌리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그것이 나라면 한국에 남는 것을 선택한 이유다.

'가치'를 선택하는 것. 잘 살고 못사는 것의 기준을 돈에서 '행복'과 '자유'로 돌려 놓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 분야에서 이런 저런 힘든 일들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노력하는 '사회복지사'란 직업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p.61

'아니, 난 우리나라 행복 지수 순위가 몇 위고 하는 문제는 관심 없어.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난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어.'

 

p.97

'여기서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거야. 이런 일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겪어야 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었어. '

 

p.103

'주가 사라지자 바퀴벌레가 들끓었고, 바퀴벌레 다음에는 개미가 나오고, 그랬던 거야. 뭐가 바뀌긴 했는데 나아진 건 아니었어.'

 

이렇듯 소설 곳곳에서 계나는 한국에서 살수 없는 이유들을 늘어 놓는다.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할 수 없는 상황들 그래서 도망가고 싶어 했고, 한국에서도 무엇인가 나아지는 것이 있었다면 남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기에 떠날 수 밖에 없었음을 역설한다.

 

데체 한국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그래 이런 질문은 문제가 너무 많기에 쓸데 없는 질문이겠다.

 

저출산, 고령화는 기본이요, 양극화에 점점 줄어드는 중산층이라는 계급, 아니 그런걸 다 떠나서 모든걸 '돈'으로 평가해 버리는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그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란 가치 조차 이젠 '돈'으로 환산해서 수량화 된 사회. 여기서 '돈'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일 까.

자본의 세습! 사람들의 욕심이라 하겠지만... 가끔은 우리가 인간이길 포기하고 퇴화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하긴 얼마전 발표된 최저임금안... 아니 최저임금을 정하기 위한 협상과정들...

사용자측에서는 8년 연속 고정하길 희망했다고 한다. 그래 사용자 측에서는 인건비를 어떻게든 줄이는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면(여기선 인간을 단순한 재료로 봐야 한다.) 그들은 그렇다 치고 조정위원회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조정안을 내놓을 수 있는지 그것또한 불가사의다...

 

이런 뉴스를 접하게 되면 나 역시도 한국을 떠나고 싶다.

태어날 때 부터 가진거 하나 없이 났으니...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 무엇은 재능이 없어 그저 평범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하지만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그 가치를 증명할 길도 없다는 것이 되어 버렸으니. 공부라도 잘하라는 말...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태어날 때 부터 있던 그들은 절대 공감할 수 없다.

 

어느 통계에서는 상위 10%에 들어 가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그만큼 노력을 했기에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가난해 지는 것은 '노력'부족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들에게 묻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과연 노력 안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노력'이란 것을 수치화 한다면 어쩌면 상위 10%의 그들보다 나머지 90%의 사람들이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에 막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그래 어쩌면 계나의 선택이 옳은 선택일 수도 있다.

바뀔수 없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바뀔 수 있는 세상으로 도망이라도 가야 된다는 것. 그 선택이 호주이민이였고 결국 계나의 입장에서는 성공적인 선택이 되었다는 것. 비록 한국에서 사는 것 보다 더한 경험들과 고생을 했지만 결국은 호주의 주권을 가진 사람이 되어 한국에 있을 때 보다는 높은 계급에 올라 선것.

 

보이지 않는 계급속에서 방법을 찾아낸 계나가 성공했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소설속에서는 그럼에도 한국에 남아 있는 계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계나의 동생이 있다.

비록 공시생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듯이 그려져 있긴 하지만, 언젠간 이라는 희망을 잡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그녀, 조건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서 이름없는 밴드의 멤버지만 괜찮다는 그녀가 어쩌면 소설가 장강명이 말하고 싶어한 숨은 뜻은 아닐까.

 

그 무엇보다 '사람'그 자체를 바라보고, '사람'으로써 '사람'답게 살 고 싶다는 말을 이 소설을 통해서 하는 것은 아니였을까? 아니 계나의 문제들, 우리들의 문제들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모순, 사회구조의 문제, 호주이민의 현실등등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들에 꼭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터틀맨의 안타까운 죽음에서는 거북이의 경쾌한 멜로디 속에 숨어있는 슬픈 노랫말들이 생각 났고,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마지막 노래하는 모습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장강명은 계나를 통해서 호주사회와 한국사회를 비교했고,  한국사회를 그대로 옮겨간 한국 교민사회의 문제들을 바라보며 어쩌면 한국인의 속성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는 것 역시 '우리들'이기에 한국사회에 '글'을 통해서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 같이 이 문제를 고민해 보고 답을 찾자고, 우리들은 할 수 있다고, '행복'이란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우리도 '사람대우'를 하며, '사람대우'를 받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아니였을까...

 

그래 나 역시 다른 분들의 견해가 궁굼하다.

우리 모두 담화를 시작해 보자!.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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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국가 - 우리가 목도한 국가 없는 시대를 말하다
지그문트 바우만 외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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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국가> 우리가 목도한 국가 없는 시대를 말하다.

 

지그문트 바우만과 카를로 보르도니의 대담집이다.

국가와 위기에 대한 두 석학의 폭 넓고 깊은 생각들이 담겨있다.

 

솔직히 쉬운책은 아니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두권을 읽고 세번째 읽는 책이기에 그동안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과 글, 그리고 옮긴이의 번역에 익숙해 졌기 때문인지 앞선 두권보다는 편하게 읽었다.

여전히 불친절한 번역임을 느낀다. (글쓰기 특강 덕분에 글을 보는 눈이 높아져서 그렇다. 단점은 내글을 어떻게 고치든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

 

<위기의 국가>

우리는 '위기'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현 시대는 '위기'의 시대로 정의 해도 의견이 없을 정도로 우리 삶 주변에는 다양한 위기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위기는 역시 '경제 위기'다. 우리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언제나 문제는 '경제 위기'라고, 하지만 이것이 다일까? '경제 위기'가 문제라고 알고 있다면, 정확히 무엇을 '경제 위기'라고 말하는지 알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 하고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정확한 정의 없이 써오고 들어 오던 용어이니까.

뉴스에서 쉽게 접하는 '경제 위기'라는 단어, 청년실업이 문제되는 것은 '경제 위기' 때문이다. 환율이 폭락하는 것은 '경제 위기'때문이다.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역시 '경제 위기'다. 무역 적자, 무역 흑자도 '경제 위기'가 원인이자 결과가 된다. 자유경제무역협정, 중산층의 몰락, 부익부 빈익빈 현상, 빈부의 격차, 노숙문제, 자살, 복지 그 어떤 문제와 결과들에서 '경제 위기'라는 단어가 꼭 들어간다. 정말 그럴까?

 

거의 모든 문제에 '경제 위기'가 원인이지 결과라면 결국 '자본주의'가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소비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것, 현 시대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이념, 경제 원리인 '소비 자본주의'가 지금의 문제들을 만들어 온것은 아닐까?

 

세상에 '자본주의'가 등장한지 200여년이 됐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 문명의 역사에서 보면 지극히 짧은 200여년의 시간동은 우리는 너무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산업혁명, 문화혁명, 정보혁명,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국가, 자유국가 등 많은 용어들이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너무 갑작스러웠던게 문제였을까? 미처 변화는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없는 것일까?

인류는 지금껏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걸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렇다 할 수 없는.

어느 방향으로 바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환상, 과거를 돌아보며 현 시대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지금 '문제', '위기'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원인과 결과들을 분석하고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길 끝에 희망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위기'에 대해서 카를로 보르도니와 지그문트 바우만은 같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두 석학의 대담은 '위기'라는 말의 어원부터 더듬어 간다.  '위기'는 어디서 부터 왔는지, 어떻게 '위기'라 불리고,  왜 현대 사회에 '위기'가 만연해 있는지.

 

카를로 보르도니는 위기가 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위기와 함께 살아가는데 익숙해 져야 한다고 말한다.

위기와 국면, 두 단어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현시대의 위기는 결국 '책임자'의 부재로, 모든 것을 '개인'이 '책임'지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위기에 대해 이야기 하며 현대의 문제는 결국 정치와 권력의 분리라는 상황에서 '주체'가 없기 때문이라 진단 한다.

 

가를로 보르도니는 '공위기'를,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사회'를 말하면서 때로는 같으며, 때로는 다른 의견들을 폭 넓고 깊게 이야기 하며, 주제에 대한 깊은 생각을 불러온다.

 

국가의 위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위기'와 '국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해야 한다.

두 사람이 말하는 '국가'역시 흥미롭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가'에 대한 정의

영토와 영공, 영해가 있고 국민이 있는 국가의 정의 에서 더 넓게 나아가 이념, 이데올로기 문화까지 포함한 '국가'의 의미와 그런 의미로 인해 역으로 '국가 없는 국가'가 되어버리는 상황, 현대의 지구적 범위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의견까지 따라가다 보면, 지금껏 갇혀 있던 생각의 틀이 깨진다.

 

21세기, 2015년의 지구는 인터넷 공간과 '경제'의 흐름속에 많은 부분이 '지구적'이 된 세상이다.

'지구적'이란 말 그대로 물리적 공간의 범위가 지구 전체라는 것, 원한다면 지금 이곳에서 미국으로 돈을 보낼 수 있고, 순간 순간의 생각들을 지구 반대편의 이름 모를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문화역시 곳곳에 퍼져 있다.

거의 모든 것이 국적을 초월해 가는 세상에서 아직까지 '국가'의 틀에 얽혀 있는 것은 '정치'단 하나다.

 

두 사람은 '위기의 국가'를 말하면서 '근대의 위기'를 집어준다.

현대는 근대의 연속이기에 근대를 꼭 알아야 현대를 진단 할 수 있다.

근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티를 지나 훗날 정의 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의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용어가 익숙하지 않아 개념을 따라가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내가 이해하기로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더니티'는 산업혁명이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정치적인 모든 것들을 말한다면 포스트모더니티는 확실성위에 점점더 불확실해 지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19~20세기를 포스트모더니티라고 한다면, 21세기 이후는 포스트모더니티를 벗어난 그 '무엇'이 된것. 지그문트 바우만은 '무엇'을  '액체 사회'라는 새로운 '이론'을 말한다.

 

근대를 벗어서 인류 역사상 처음 가보는 현대와 미래, 여기서 두사람은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포스트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는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중은 무엇인가? 민중을 강력하게 통제했던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민주주의란 '자유'와 '위협'이였고, 지금의 민주주의는 그때와 또 다른 의미가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란 어떤 의미일까? 과연 민주주의는 죽었을까?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이 민주주의의 모습일까? 민주주의 역시 앞에 '대의'라는 말이 들어간다. 소수의 의견 보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많은 것들이 정해지는 정치형태,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투표권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는 지금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요즘 교과서에는 어떻게 다룰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시절 사회선생님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가 떠올랐다.

"다수의 사람들이 예외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

이때 그 소수의 사람들이 부자들이냐고 따졌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우리들만의 정의를 내렸었다.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게 소통하며 작은 의견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지그문트 바우만과 카를로 보르도니의 이야기를 힘겹게 따라가며, 제대로 이해 했는지 아직까지 의심스럽지만

그 들이 말하는 '위기'에 대한 것들, 결국에는 '사람'의 문제이며, '관계'의 문제가 아닐까?

 

'사람'이 사람보다 '자본'을 위선시 하는 도덕 없는 '자본주의'에 빠지면 서부터 문제들이 시작 된 것은 아닐까?

혁명이란 이름아래 굴복했던 많은 사람들... 그들을 '재화'로만 바라보면서 시작된 문제,

현대의 모든 문제는 '사람다움',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는 것은 아닐까?

 

단체에서 개인으로, 다시 개인에서 단체로 관계가 '사람대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둘 모두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해결해 나갈 길이란 생각을 해본다.

모든 것을 '자본의 재화'로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사람'답다는 것을 찾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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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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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최근 베스트 셀러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책 한권!

친구덕분에 먼저 읽던 책을 미뤄 두고 하루 만에 읽어 버렸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것은 고가 후미타케와 기시미 이치로 이 두사람이 필터링한 심리학자 아들러의 이론.

"개인의 심리학"을 플라톤의 대화편의 형식을 빌려 표현한 책이다.

 

저자는 '아들러'가 유명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다 보니 조금이나마 접했던 경험이 있어 많이 친숙했다. 프로이트와 융을 조금 배우고 나면 바로 배우게 되는 아들러의 이론.

 

사회복지사나, 직업상담사쪽에 조금이라도 공부를 한적이 있다면

아들러의 성격발달이론 하면 기억 저~편에서 어! 들어보긴 했는데! 라는 반응은 나올 수 있을 거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개인의 심리학 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개인 이란 더이상 쪼개지지 않는 하나의 개체!

어!! 이건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봤던 분인 이란 개념!!

아! 이런 정의를 처음 한 사람은 일본의 히라노 게이치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래프 아들러였구나!

 

이제서야 알았다는 건.. 역시 공부를 게흘리 했다는 증거..;; (반성...)

 

<미움받을 용기>에서 말하는 것은 간단한 공식 하나 이다.

그 누구나가 행복해 질수 있는 방법!

세상을 간단하게 바라보며, 행복하게 사는 방법.

 

자! 우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인다.  그 어떠한 환경에 있어도 지금 이순간 '존재'하는 '나'라는 것.

언제나 '지금'에 진심으로 임하는 삶의 자세가 될 수 있겠지.  말은 참 간단한데.. 생각 보다 '나'를 바라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어렵다.  그동안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면 더더욱 어렵다.

 

그럼 두번째! 나를 알고 나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내 선택이란 것을 알아 두고, 남! 타인을 신뢰한다!

타인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든 상관 하지 말고, 그저 내가, 지금의 내가 판단하고 선택하면 된다. 저 사람을 신뢰한다! 라고,

 

타인을 신뢰했으면 이젠 마지막! '공헌'하기!

남이 알아주기 위한 공헌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한 공헌을! 역시 무엇이 되었든 상관 없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막 살라는 것은 아니고. 음... (자세한 설명은 책을 참고..ㅎㅎ)

 

미움받을 용기란... 결국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재'함을 인정하는 용기다.

내가 내존재를 인정하면, 자연스럽게 타인을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하고 수평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수직의 관계 소유의 관계가 아니기에 이를 통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존재'를 인정하고 나면, '존재'그 자체에 감사하게 된다. '존재'함으로 써 행복함을 느끼게 되고.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서 극단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두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런 말이 떠오른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이건 미국의 철학자가 한 말인가?)

초등학교때 교실에 멋진 한자로 이런 비슷한 말이 쓰여있던게 떠오르는데..

그때 그 말이 정확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아마 위의말과 비슷했는데.

 

이는 역시 '나'를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진다는 말.

<미움받을 용기>에서 하는 말과 같다.

 

세상은 결코 객관적 일 수가 없다. 사람은 개개인 마다 다르기 때문에 개개인의 주관적인 세상이 있는것,

그렇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 했던것.

주어진 것은 바꿀수가 없다, 다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가에 따라서 많은 것이 바뀐다.

'나'는 태어날 때 부터 '나'로 주어져 있으며, 자라온 환경 역시 이제와서 바꿀 수는 없는것.

그렇기에 과거, 미래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을 있는 힘을 다해서 어떻게 선택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미움받을 용기>는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을 그대로 소개한 책은 아니다.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을 그리스 철학을 빌려, 저자의 필터로 필터링한 내용.

 

하나 하나 대담을 따라가다 보면 어? 나도 이런 생각을 저런 질문을 던졌는데 하기도 하며,

명쾌한 답을 얻을 수도 더욱 혼란스러워 질 수도 있지만. 누구나 살면서 한번 쯤은 들어 봤던 이야기들,

뭔가 특별한게 없는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고, 그 평범함 속에서 그 이야기들, 내가 익히 알던 그 내용들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두려워서, 삶이 각박해서, 변하고 싶지만 그럴수 없는 현실, 등등 수 많은 이유와 또 수 많은 이유 없음으로 인해서 한 발작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린 '용기'가 필요하다. 단 한발작을 걸을 '용기!'

그 '용기'를 가져보라고, 우린 할 수있다고 330페이지에 걸쳐 이야기 하고 있다.

 

아들러의 심리학을 이야기 하기 때문일까? 저자는 플라톤으로 부터 시작하는 그리스의 철학을 빌려와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과의 같음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문득 든 생각은 굳이 서양철학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우리 삶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들의 철학으로도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공,맹으로 부터 시작해서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만의 방식으로 발전한 성리학, 유교, 또는 불교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 아니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서당교육에서 배웠던 '사자소학'의 내용과도 일맥상통일 듯 싶다.

 

'사자소학'역시 삶과 관계에 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물론 중국의 고사를 빌려오긴 했지만...

관계와 인간의 도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글자들...

 

가만 보면 <미움받을 용기>속에 있는 아들러의 심리학과 같은 부분들이 많다고 느겼다.

 

어느 순간 잊고 있었던 우리들의 전통? 교육?

그 속에 담겨 있는 삶과 자연을 바라보는 자세야 말로 우리들이 가장 잘 해오던 것이며,

서양철학의 수많은 질문들에 답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다.

 

공동체 속에서의 소속감, 바로 여기 있음의 의미, 목적을 선택하는 삶.

 

언제부터인가 눈에 많이 띄기 시작한 단어 '분수'라는 말.

'분수를 알라!' 역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내'가 '나'를 아는 것. 용기의 출발은 여기서 부터.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를 받아 들이고 부족한 만큼을 채우기 위해 노력 하는 삶.

100에서 깍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0에서 부터 하나하나 채워 나가는 것.

 

무엇 하나를 하더라도 '용기'있게 '나'부터! 시작하자!

 

내가 읽은 <미움받을 용기>란, '지금의 나인체로 행복한 것.'

그렇기에 '지금에 충실하며 진심으로 지금을 사는 것.'

지금 이시간의 공기와 바람, 온도를 느끼고, 지금 여기 생각을 이렇게 풀어 보기도 하는 것.

지금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 다름아닌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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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저블 - 자기 홍보의 시대, 과시적 성공 문화를 거스르는 조용한 영웅들
데이비드 즈와이그 지음, 박슬라 옮김 / 민음인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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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홍보의 시대 과시적 성공 문화를 거스르는 조용한 영웅들

<인비저블>


[인비저블이란 단어의 뜻을 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릴때 부터 1등만 기억하는 세상!! 1등을 강요받는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성공의 기준역시 "내"가 아니라 "남"의 시선에서 일정한 경제적 수준 이상을 벌어야 되며 사회적 지위라는 것역시 높아야만 되는 세상... 결국 1등이 아니면 모두가 우울해지는 세상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란 생각이 강력하게 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비저블이란 책에 많은 관심을 받지는 못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해내고 마는 사람들의 삶. 그 삶은 어떤 것인지 많이 궁굼합니다. 뭔가 제가 알고 느끼던 세상과는 많이 다른 것을 느끼게 될 것 같아요.]


인비저블 서평단 응모를 위해 쓴 글이다.

대중의 관심은 없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해내고 마는 사람들의 삶.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직업에 삶에 대해서 뭔가 좀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서평단에 응모했고,

기회가 주어져 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 까지고 머릿속에서는 참 많은 생각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다시 모이길 반복하고 있다.

부정적 이였다가 긍정적이기도 하고... 딱 한쪽으로 정의 할 수는 없겠다.

긍정과 부정적인면이 동시에 존재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비저블 이란 단어는 숨겨진, 보이지 않는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책의 제목 처럼 우리 같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또는 전혀 모르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들이 담겨 있다.


초고층 빌딩을 안전하게 건축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공학자,

밴드의 앨범을 최고의 상태로 녹음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기술자,

강렬한 향으로 사람들을 사로 잡는 많은 종류의 향수를 만들어 내는 조향사.

락밴드의 투어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게 전자 장비의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자.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피아노의 소리가 멋들어 지게 만들어 내는 조율사

저자의 직업이였던 사실검증가


등등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비저블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처음 부터 말하는 인비저블의 특성은 첫째 타인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 둘째 치밀성, 셋째 무거운 책임감 이다. 어쩌면 그저 기본적으로 상각해도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라면 가지는 특성들과 같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인비저블은 여기에 한국사람이라면 쉽게 이해 가능한 '겸손'이란 개념도 필수 사항이다.

또 '분수'라는 말처럼 자기 자신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저자가 한국사람이였다면.. 동양의 유교권의 문화속에서 살아왔다면 아마 이책은 탄생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버린 대가 들이다.

당연히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한 인사이지만,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또 한 분야의 최고라는 것은 돈과 명예가 없을 수도 없는 위치 이다.

돈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고의 타이틀이라는 명예는 있다. 그것 만으로도 인비저블이란 말에는 뭔가 좀 맞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비저블이라면 이 책의 가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이 떠나지를 않았다.


이들의 공통점을 또 찾자면, (저자가 말하는) 남들에게 인정받든 그렇지 않든 크게 연연하지 않다. 그래 첫번째 특성이지 그리고 자신의 하는 일에 매우 만족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건... 당연하다. 누구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엄청난 부는 아니지만 꽤 많은 부를 벌고 있으며, 그 분야의 최고전문가라면, 그리고 그 일을 즐기고 있다면, 일에 만족하는 것은 당연하며 자부심도 있어야 되겠지.


단순히 인비저블과 인비저블이 아닌 이들을 생각해보자.

저자가 말하는 인비저블이 위의 3가지 특성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는 전재 조건이 있다면, 여기에 소개된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으로 그 범위를 늘려도 언제나 그렇듯이 3%~10% 정도는 인비저블이고 나머지는 아닌게 되겠지.

딱히 인비저블이란 이름이 없어도 직업 만족도와 급여, 행복, 삶의 질, 뭐 등등의 그래프를 그려보면 거의 대부분의 것들의 산? 모양으로 나올테니... 그렇게 특별히 인비저블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저자도 인비저블을 소개하면서 뜨끔했는지 위의 소개하는 사람들 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어느날 문득 등장해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게 결국 거품이여서 한동안 바닥을 치다가 다시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 (이걸 읽으면서 MC몽이나... 유승준이 생각나는건 왜인지...)


그리고 거의 마지막에 가서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권 차이에 따른 인식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개인을 홍보하는 문화와 집단에 속하는 문화의 차이를..


이런 저런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늘여 놓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

이책 마지막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남들의 칭찬이나 찬사가 아니라 내 일의 가치가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나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고 성공하고도 싶다. 하지만 궁국적으로 나를 지탱해 주는 것, 어두운 불안감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는 것은 바로 내가 하는 일 그 자체이다.


내가하는 일 그 자체!! ..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 하다.

주변에서 많이 했던 말일까? 그래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 이것과 같은말 아닐까?

직업, 또는 진로 상담에서 항상 나오는 말이기도 하고,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자아실현의 설명에서 빠지지 않고 하는 그말. 결국은 이말을 저자는 하고 싶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인비저블 역시 다른 자기계발서와 마찬가지로 질문하나를 툭 던져 버린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직업에 만족을 하고 있으며 사회적 인정과 금전적 보상에는 크게 연연하지 안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찾았고, 그것을 향해 꾸준히 노력했으며, 그 무엇보다 자신의 호기심과 열정을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킨 사례들이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일부 있고, 나는 어쩌다가 인비저블이란 생각이 번득임과 동시에 이런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고 인터뷰를 했고 책으로 만들어서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따라하라는 방법이 없는 것에는 잘했다는 칭찬을 해주고 싶다.

어떤 책들은 자신처럼 따라하면 다 잘될거라고 말하기도 하니까...그런 책들에 비하면 이책이 100배는 좋다고 생각한다. 그저 보여줄 뿐이니까.


그리고 선택은 이책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니까.


인비저블이 던지는 질문도 단 하나다.

"당신은 어떤가?"


세상 사람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슷하게 살고 있으며 비슷한 생각을 한다.

우리들도 '인비저블'이라 지칭한 그들 처럼 살고 싶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책 역시 그 현실에서 많이 멀었던 모양이다. (읽는 동안.. 뭔가 불편한 느낌이.. 이거 였나보다. 적어도 한국사람으로써 한국의 상황에는 뭔가 맞지 않는 그런 모양의 책이니까...)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이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으려면, 취업해서 돈을 버는 것은 필수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겠다! 이건 정말 배부른 소리 취급이다. 말 그래도 태어날 때 부터 집에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 돈이 있다면.. 이라는 전재 조건이 붙어 버릴수 밖에 없다.


그래 그럼 취업을 하자.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고 싶은 일이 단 하나 일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원하는 것은 비슷할 거다. 좋은 직장에서 좋은 상사를 만나 좋은 대우를 받고 일하는 것.

거기에 내 적성에도 맞는다면, 그야 말로 대박!

여기서 좋은 직장이라하면 딱 눈에 들어오는 기업들을 생각하게 되며, 그 기업들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젠 스팩 전쟁을 치른다. 그 시작은 초등학생때 부터 이미 경쟁이다. 경쟁은 유치원 부터일지도 모르겠다. 국공립 유치원을 가기 위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경쟁하니.. 그리고 초등학생이 되면, 소문난 중학교를 가기 위해서, 그리고 특목고, 자사고가 있고 명문대가 있다. 언제나 수용인원은 적을 뿐이고 원하는 학생들은 많다.

대학을 나오고 나면, 이젠 취업전쟁이다. 그 많은 기업들 중에서 가고 싶은 기업은 정해져 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우린 이걸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인비저블'이란 이들이 되고 싶어도... 취업을 못한다면.. 하루 하루 살기 위해 일용직 일자리도 못구한다면, 알바를 해도 최소한의 삶의 공간인 주거에 들어가는 비용과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한 비용 조차 벌지 못한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인비저블'이 되는 길을 볼 수 있을까?

잠잘 시간 까지 줄여서 알바를 해도 빚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지경에서 탈출하고 싶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렇게 그렇게 힘들게 빚을 청산하고 나면... 뭐가 있을까?

빚을 갚느랴 돈을 버느랴 일을 했고, 그동안 나이는 먹고있고, 연예와 결혼은 포기한지 오래, 정규직의 꿈은 있지만 남들 준비하는 그 스펙마져 만들기 어려운 생활, 어떻게 겨우 겨우 만들었다 해도 겨우 남들과 같은 출발 선에 서있을 뿐이다. 아니.. '나이'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그래도 한발짝 뒤쳐지겠지.


그래 '취업' 목숨 거냐고 할 수도 있겠다.

무엇을 위해 취업을 선택했는지 물을 수도 있다. 결국 '돈'이 목적이냐고 물어 볼 수도 있다.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왜들 그렇게 '돈'에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는지...

인간의 욕심때문? 그저 생존때문에 어쩔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무엇인가 하고 싶어도.. 그 '무엇'을 찾고 싶어도 아주 기본적인것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힘든 현실이라면...'인비저블'이란 역시 다른 세계의 이야기 겠지...


너무 부정적인 감상일까?...


이책을 통해서 배운 것도 있다. 또 다른 느낌..

어쨌든 여기서 소개된 '인비저블'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소통과 조율의 대가들 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역량은 확실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주변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이들.

또 하나는 앞서기 보다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길 좋아 하는 사람들 이라는 것.

'겸손'과 '자기 분수를 아는'사람들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는 공통된 점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또 들긴 하지만...

이것은 많은 경험과 사색이 필요한 능력 이겠지...


내가 책을 잘 못 읽은 듯한 느낌이다.

자기 홍보의 시대, 과시적 성공 문화를 거스르는 조용한 영웅들 이라는 부제가..

이 책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는 느낌과, 번역된 문장들이 책을 읽는 동안 뭔가 부자연 스럽고 억지스럽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단번에 무엇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한지 잡아 내지는 못 하겠지만...

다시 읽고읽으라 한다면...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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