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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그린비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후줄근하고 언제나 지쳐보이던 선생님이 있었다. 정교수도 아니고 부교수도 아니고, 시간강사의 이미지에 걸맞는 사람이라 항상 안쓰러워 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BMW를 끌고 다니고, 옷이 모두 명품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안도감이 든 건 왜였을까. 언제나 무기력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휴강도 밥먹듯이 했고, 나 역시 선생님의 목소리가 붕붕 허공에 뜬 것만 같은 수업시간에 졸기 일쑤였지만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고, 수업도 참 좋아했다.
매 학기 선생님의 수업을 신청했고, 벤야민과 료따르, 아도르노, 라깡의 이름을 수도 없이 들어서 난 그들의 철학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세의 미학, 르네상스의 매너리즘, 해골과 썩은 사과, 시든 장미의 미학,대중문화의 복제에 대한 회의감 등 나의 미학적인 관점은 물론, 인생관도 선생님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밥 한번 함께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이게 판타지의 완성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도서관에서 책등을 쓸며 부유하다가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발견했을 때, 스트레스에 절어 잔뜩 찌푸리고 있던 나는 갑자기 선생님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대충 보니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져왔는데, 문장 하나 하나가 웃기고, 슬프고, 설레이고, 너무 좋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에게서 긍정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부분이 몇몇 엿보이고(이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아샤에 대한 애정, 러시아 말을 못해서 오는 고립감, 러시아의 대단한 추위, 미술관, 영화관, 연극에 대한 감상, 장난감 가게로의 매일같은 출근, 무기력감 등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고,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꼭꼭 씹고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페이퍼도 몇번 썼었는데, 그렇게 쓰다가는 책 한권을 서재에 다 옮겨놓을 것만 같아서 자제했다.
벤야민의 일생은 왜인지 무력한 지식인의 표상으로 박혀 있는데, [모스크바 일기]는 내가 상상하던 벤야민의 모습과 일치하는 동시에 리뷰 서두에서 언급했던 선생님의 모습과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우울하고 약간 히스테리적이어서 무척 귀여운데다가 지적인 자극을 콕콕 주는 이 사람들. 벤야민의 말대로 우리는 그림이나 책, 영화 등 영감을 주는 대상에 감정이입하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의 담백하고 솔직한 문장들이 눈을 통해 들어와서 가장 알맞는 기억의 문을 찾아 '똑똑' 두들긴다. 대부분 다 읽고 반납했지만 소장할 예정이다.
+ 옮긴이의 말 중 로쟈님의 닉이 언급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 러시아에 대한 자문을 해주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