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추리 소설이 다른 나라에 비해 약세인 이유중의 하나가 셜록 홈즈로 대표되는 명탐정의 캐랙터가 부재 때문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국내에도 그러 명탐정이 없던것은 아닙니다.다만 잊혀졌을 뿐이죠.30~40년대 국내 추리 소설계를 이끈 김래성작가의 유불란 탐정이 있고 이제는 이름조차 완전히 잊혀진 방인근작가의 탐정 장비호도 있지요.
인터넷을 보다보니 방인근 선생에 대한 글이 있기에 올립니다.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mulim1672&folder=29&list_id=10879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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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근의 잊혀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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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7-07 22:09:20
- 조회 (333) | 추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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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근의 잊혀진 세월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21>
| 제121호 | 20090705 입력
얼마 전 이근배는 한 시 잡지와의 대담에서 “중학교 때 방인근의 소설을 많이 읽고 처음에는 소설가가 되려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다소 농담이 섞여 있는 듯한 말이었지만 실제로 1950년대에 방인근의 소설을 ‘탐독’한 청소년들은 많았다. 해방 후 애정·추리·탐정·공상 등 대중소설에 몰두한 방인근은 50~60년대에 걸쳐 무려 100권 가까운 소설들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서도 ‘장미’가 등장하는 선정적인 소설들과 ‘장비호 탐정’이 활약하는 탐정소설들의 인기가 높았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 무렵 『벌레 먹은 장미』라는 아주 ‘야한’ 소설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읽히고 있었다. 대개는 표지가 뜯겨진 채 나돌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어른들에게 들키면 혼쭐이 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누구나 방인근의 소설임을 의심치 않았다. 방인근의 ‘벌레 먹은 청춘’과 ‘장미부인’이 오버랩되면서 나타난 혼동 탓이었다.
그러나 그 소설은 방인근이 아닌 최인욱이 썼다. 아직까지도 『벌레 먹은 장미』를 읽었던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방인근의 소설이라 믿고 있다.
어쨌거나 그 방인근이 75년 1월 1일 파란만장한 삶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19세기 태생(1899년생)의 마지막 문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때 백만장자였다가 몰락한 한 대중작가의 비참한 말로’로 축약되고 있었다. 물론 한국문학 초창기에 문예지 ‘조선문단’을 창간하는 등 그가 기여한 공로에 대해서도 언급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곁가지에 불과했다.
충남 예산 태생의 방인근은 부친이 포목상 등을 운영해 큰돈을 벌어놓고 사망한 덕으로 청년기까지도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아오야마학원을 거쳐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려다 낙방한 그는 그 무렵 사귄 전영택 등 조선 유학생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귀국하면서 문학판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전영택의 여동생인 전유덕과 결혼하고 이광수와 친교를 맺은 뒤 1924년 2만원이라는 거금을 쾌척하여 ‘조선문단’을 창간했다. 편집에 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은 이광수에게 맡겼다.
방인근보다 일곱 살이 위인 이광수는 자신의 아호인 ‘춘원’에서 ‘춘’자를 따 방인근에게는 ‘춘해(春海)’, 그의 아내에게는 ‘춘강(春江)’이라는 호를 지어줄 정도로 가까웠다. 하지만 편집에 관한 의견 충돌로 이광수가 손을 떼고 난 후 5호부터는 방인근이 편집을 주도했다. ‘조선문단’은 채만식·박화성·최학송·이장희 등 신인들을 배출해낸 공로도 공로지만 무엇보다 김동인의 ‘감자’, 나도향의 ‘물레방아’,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 등 수많은 문제작을 잇따라 발표해 초창기 한국문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문예지였다.
그러나 2~3년이 지나면서 ‘조선문단’은 재정난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그 자체로서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운영자금을 염출해낼 수 없을 정도로 방인근의 재산이 바닥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당한 재산을 이복동생에게 빼앗긴 데다가 주색에 탐닉하는 등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호방한 기질 탓이었다. 휴간을 거듭하다가 ‘조선문단’을 종간한 뒤 재기를 노려 29년 ‘문예공론’을 새로 창간하기도 했으나 몇 호를 버티지 못했다.
방인근이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34년 동아일보에 ‘마도의 향불’을 연재하면서부터였다. 뒤이어 ‘새벽길’ ‘방랑의 가인’ 등 낭만적 대중소설을 발표했지만 소설가로서 크게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54년 가산을 정리하여 설립한 ‘춘해영화사’도 오래 버티지 못했고,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대중소설들도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판매되지 못했던 탓에 그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그는 몇 달에 한 차례씩 셋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딱한 처지가 돼 가고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방인근은 당시 문협 이사장이던 조연현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장 입원을 하든지 약을 먹든지 하면 수명을 조금은 연장할 것 같은데 그럴 돈이 없어 날마다 울음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편지를 받은 조연현은 곧 윤주영 문공부 장관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윤 장관은 5만원이 든 봉투 네 개를 만들어 역시 딱한 처지에 있던 김광섭·이봉구·박기원 등 네 문인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하지만 방인근은 이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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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장비호의 추억
그해 겨울 땅거미가 어슬어슬 물들어 오는 저녁 무렵. 종로 4가 설렁탕으로 이름난 감미옥. 구석에 혼자 앉은 한 노인이 낯익었다. 춘해 방인근이었다. 다가가 덥석 인사를 하자 그는 반갑다고 웃으며 자리를 권한다. 소주잔을 든 그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그는 수척한 얼굴을 들어 힘없는 눈길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칠순의 이 노인이, 당대 미남으로 장안 지식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국민적 사랑을 받은 춘해 선생이란 말인가.
“건강은 어떠십니까?”
“견딜 만해요. 밤마다 이 궁리 저 궁리 잠이 안 와. 지난날이 후회만 되고 마음이 괴로워….”
“선생님은 온 재산 열정 바쳐 춘원과 함께 ‘조선문단’을 창간, 한국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죠. 그 공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30, 40, 50년대 이 나라 방방곡곡 선생님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춘해 선생님, 이제 필생의 대작을 쓰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마음은 그런데, 쓰다 지우고 쓰다 지우고 뭐 그래요. 도통 붓이 나가지를 않아. 눈뜨면 생활에 쪼들려 하루가 막막하고, 친구들은 모두 먼저들 가버렸지. 월탄하구 나만 남았어.”
자괴의 말 끝에 춘해는 눈시울을 붉힌다. 전매청 옆 성당에서 아련하게 울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남기며 버스는 그를 싣고 창경원 쪽 눈발 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 1974년 겨울 저녁이었다.
춘해는 1932년 동아일보·조선일보에 ‘마도의 향불’ ‘방랑의 가인’ 등을 연재, 전국적 대호평을 받는다. 춘향전·장한몽 등 딱지본만 읽어 온 독자들에게 현대소설 베스트셀러 작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때까지 독서 습관이 없던 대중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해줘 국민의 지적 수준 향상에 큰 역할을 한다. 1948년, 당장 살길이 막막한 춘해는 이북(李北) 옛 중앙일보 사장을 찾아간다.
“여보, 잘 팔릴 탐정소설이나 하나 써 보구려.”
썩 내키진 않았지만, 춘해는 원고료가 필요했다. 그는 영국의 코넌 도일, 프랑스의 르블랑, 일본의 에도가와 란포 등의 탐정소설들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을 더듬으며 플롯을 구상했다. 호구지책으로 열어 놓은 구멍가게 뒷방에서 개다리밥상을 놓고 공책에다 연필로 첫 탐정소설을 써 나갔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홈즈와 루팡이라 할 명탐정 장비호를 탄생시킨다. 춘해의 한국판 탐정소설 ‘국보와 괴적(怪賊)’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열광했다. 6·25 전란이 일어나자 인민군에게 끌려가 문초를 받는다. “동무가 그 유명한 소설쟁이 방인근이오? 탐정소설 ‘국보와 괴적’ 말이야. 국보는 국방군이고 괴적은 인민군이란 말이지?” 춘해는 며칠간 곤욕을 치르며 잡혀 있다가 자술서 몇 십 장 쓰고 가까스로 풀려난다.
그 시절, ‘장비호 탐정’ 하면 방인근이요, ‘유불란 탐정’ 하면 김내성이었다. 그는 잇따라 걸작 탐정소설 ‘대도와 보물’ ‘방화살인사건’을 써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때 12살짜리 나 또한 장비호 탐정에 밤새워 열광하는 애독자였다. 춘해는 초등학생에서 대학생, 일반인, 가정주부들까지 애독한 그야말로 국민적 작가였다. 일본 주오대학 독문과 출신의 한국 신문학 개척자 춘해 방인근. 그러나 오늘날 그를 아는 이 찾기 어려우니 인생의 무상함이런가.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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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문인이셨던 방인근 선생은 국내 문학 발전을 위해 가산을 쓰신후 참 쓸쓸히 만년을 보내시다가 돌아가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