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번역한 소설이 나왔는데, 출판사에서 제목에 쓴 저 문장을 카피로 삼아 띠지에 인쇄했다. 며칠 전 내가 무지 좋아하는 소설가님이랑 밥을 먹으면서 이 책을 드렸다. 책이 예쁘다고 하시면서 

"사랑을 겁낼 필요 없어요... 우리는 이런 말은 안 하잖아요."라고 하셨다. 

어색하다거나 번역투라고 지적하는 말이 아니라, 그런 정서(또는 언어생활)가 신기하다는 뜻으로 하신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당연히 그 말을 듣는 순간 철렁했다.  


집에 오면서 다르게, 뭐라 할 수 있었을까 고민했다. (이 말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남자주인공에게 여자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왜 사랑을 겁내요... 이건 분위기가 안 맞고. 사랑을 겁내지 말아요, 라고 하면 밋밋하긴 해도 더 자연스러울까? 사랑이 뭐가 무섭다고 그래요.. 이건 너무 농담 같고.. (원문은 No need to be scared of love.였다.)


생각 끝에, 자연스러운 말투, 우리가 입말로 하는 말투로 번역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어 소설과 번역 소설은 절대 비슷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아무리 날고 기는 번역가가 등장해도) 생각이 들었고 아마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님이 그 문장을 읽고 즐거워하신 까닭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한국 사람으로 살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문장을 말할 일이 과연 있을까? 언어로 이루어진 삶과 문화는 번역 과정을 거쳐 외형적으로는 비슷해질 수 있을지 몰라도 어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어색하고 생경한 맛, 그게 독이면서 동시에 약이라는 걸 알게 됐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orthshore 2015-05-3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을 겁낼 필요 없어요... 입말로 번역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정말 저리게 실감합니다. 어색하고 생경한 맛이 독이면서 약이기도 하다는 말씀에도 깊이 공감합니다.

bluegoby 2015-06-02 10:41   좋아요 0 | URL
정말 입말로 하자고 하면 정말 다른 책, 새로운 창작물이 되겠지요..구한말 번안 작품 같은 게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가 생각나네요. 세르반테스 작품과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아도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주장하던... 하물며 번역을 거치면 얼마나 달라질까요.

나무 2015-06-0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이 무섭냐? 겁나냐? 일단 한 번 사랑을 해봐! 이럴 수는 없겠는데요? 하하하하하

bluegoby 2015-06-02 10:42   좋아요 0 | URL
그건 실제로 할 수도 있을 법한 말이네요. 공효진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하긴 드라마 같은 것 보면 인물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도 하더라구요 ㅋㅋㅋ 제가 못한다고 다른 사람도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속단이었네요.
 

곧 출간될 청소년 소설 마지막 교정을 봤다. 남자 고등학생의 일기 형식인 책인데 (어릴 때 봤던 수 타우젠드의 <비밀일기>가 생각나기도 하고 그랬다) 그 녀석 말투를 살리기 위해 시쳇말들을 좀 넣었었다. "헐" "쩐다" "고딩" "ㅅㅂ" "밀당" "뭐래" 이런 거. 넣으면서도 과연 편집하시는 분들이 봐주실까 싶었는데, 헐, 교정지를 받아 보니 모두 살아 있었다. 아주 생생하게... 너무 튈 정도로... 다시 읽어 보니 이 책을 읽는 젊은이들이 '친근한 말투'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완전어색한 흉내'라고 느낄 것도 같다. 아니, 내가 이런 말들을 우리 애들한테 배웠으니 고딩이 보기엔 초딩 말투라고 느낄지도. 언어의 사회성은 어려운 문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orthShore 2015-03-1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라 밖에서 사니까 저런 말, 신조어, 유행어, 혹은 종래 쓰던 말이라도 새로운 뜻을 담게 된 경우를 놓칩니다. 아마도 그래서 저런 유형의 소설은, 한국에 살면서 실제로 쓰이는 입말을 잘 알지 않는 한, 번역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고비 2015-03-19 09:3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유행 따르는 게 꼭 좋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쩐다˝만 해도 요즘 잘 안 써서, 촌스러운 느낌이 나는데, 1호한테 요새 쩐다 대신 좋다는 뜻으로 뭐라고 하냐고 했더니 ˝연다˝ (open?) 아니면 ˝요다굿잡˝이라고 한대요 ㅋㅋㅋ 이건 도무지 쓸 수가 없다......
 

오늘 신문을 보니 장정일과 이택광이 지젝의 말을 두고 번역해 가면서 싸우는 것 같은데 (자세히 읽지는 않았다) 해석학적 논쟁은 끝이 나지 않기 마련이니 자기 말을 가지고 싸우는 게 좋을 듯하다. 


갑자기 이 일이 생각난 까닭은, 번역하다가 프로이트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프로이트를 실드 쳐주고 있는 것 같아서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모든 걸 성적 욕망으로 설명하려다 무리수를 많이 둔 것도 사실이다. 이 책 저자가 보기에는 프로이트 자신의 기차 공포증이 세 살 때 고향을 떠나게 되어 기차를 탈 때 느꼈던 불안에서 비롯된 게 분명한 것 같은데, 프로이트는 "기차 안에서 어머니의 벗은 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억지해석을 했다. 어머니가 벗은 모습을 본 기억은 당연히 없다. 보았더라도 무의식으로 억압했을 테니. 그래도 (자기 이론에 따르면) 그랬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기차 공포증은 억압된 성적 욕망에서 나온다"고 일반화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만나본 일은 없지만) 내 젊은 날 프로이트와 인연도 있고 해서... 조금 덜 억지스러운 표현으로 나도 모르게 다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은 다음에는 과거를 부정하듯 더 어처구니 없는 표현으로 번역했을지도...) 

이런 개인적 취향을 두고 정치적이랍시고 거창한 말로 표현하기는 우스우니 독자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아마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번역과정을 등가교환을 이루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답답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수전 손택이 번역은 "윤리적인 선택"이라고 한 것을 가끔 생각하게 된다. 내가 번역하는 책들이 윤리적 정치적으로 첨예한 내용인 경우는 별로 없었으므로 나의 취향과 성격이 가미되어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orthShore 2015-03-19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번역은 윤리적인 선택... 유명한 작가, 사상가들은 어쩌면 말을 이렇게 멋있게 -만이 아니라 핵심을 찌르느까 더 그렇겠지만 - 하는지, 부럽기도 하고 시샘도 납니다. 김화영 선생의 인터뷰에서,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정말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고, 역시 대인배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언젠가...ㅎ

고비 2015-03-19 09:4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와 김화영 선생님이 <이방인> 해프닝 뒤에 그러셨어요? 진짜 대인배이심........
문제의 ˝괄호 안에 든 지젝의 말˝은 이택광이 잘못 읽은 것 같던데 이미 자존심 싸움이 된 듯해요.. 싸움 구경은 재미있으니 나도 모르게 자꾸 보게 된다는.. 김화영 선생님 따라가려면 멀고도 멀었지요 ㅎㅎ
 



전에 <노팅힐 미스터리>가 에밀 가브리오의 <르루즈 사건>보다 몇 년 앞서 나왔기 때문에 최초의 추리소설로 평가받는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도서관에 갔다가 가브리오의 작품 번역본이 작년에 재출간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르루주 사건>(페이퍼하우스, 2011)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신기하게도 번역자가 신소설작가 안국선의 아들인 안회남이고 번역연도가 1940년이다. 안회남은 김유정과 절친했고 소설도 많이 발표했는데, 월북한 뒤에 문단에서 잊힌 듯하다. 1940년이면 사실 원작보다 거의 한 세기 뒤의 번역이긴하나, 현대의 독자가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고색창연한 문체가 19세기 소설에, 더군다나 최초의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작품에 (<노팅힐 미스터리>에 그 타이틀은 내준다 하더라도 <르루주 사건>이 '최초의 탐정소설'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썩 잘 어울리는 듯했다. 첫 대목을 베껴 놓는다. 


일천팔백육십이년 봄도 아직 이른 삼월 육일, 바로 사순재의 참회 화요일에서 이틀 지난- 목요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파리 가까이 있는 부지바르라는 읍 경찰서에 그 근처 존셰르란 촌의 여자 사오 인이 심상치 않은 모양으로 달려 왔다. 

"큰일 났습니다. 살인이 났습니다."

하고 고하였다. 

내용을 들어 본즉 그 촌에 사는 르루주라는 과부의 집은 문이 잠긴 지 사흘이 되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을뿐더러 그 후로 마을에서 그 과부의 모양을 볼 수 없다는 것으로 필시 집 안에서 누구에게 피살을 당하였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책이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10년, 20년 전에 나온 책만 해도 요즘 책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르고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번역도 물론 마찬가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굳이 계속 새로 번역하기는 좀 뭣한, 고전이 되지 못할 책들의 경우는 어떨까? 시간이 얼마나 흐르면 읽을 만했던 번역이 낡게 느껴져 폐기해야 할 때가 되는 걸까? 아니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그 책의 수명이 다하거나 호소력이 약해지는 걸까? 그런 한편으로 나의 언어감각도 나이를 먹어, 현대인들이 쓰는 언어에 가깝지 않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번역의 시간에는 지금 현재와의 동시대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작품과의 동시대성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르루주 사건>은 원작과 번역이 동시대는 아니고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기에 '둘다 옛날'일 뿐이지만, 그래도 옛문체가 주는 느낌이 작품의 신파성과 잘 어울렸다. 오늘날의 건조한 문체로 옮겨 놓으면 맛이 덜할지 모르겠다. 또 그 작품이 처음 국내에 소개되던 시점, 대중에 주목받고 인기를 누릴 당시에 사람들이 읽던 형태로 책을 읽으면서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지금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도 (고전을 제외하면) 요즘 작가가 요즘 쓴 책을 번역하는 일이 대부분일 것이다. 내가 번역하는 책이 한 세대가 지난 뒤에도 잊히지 않고 읽힌다면, 내 번역이 낡고 촌스럽게 여겨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원저와 동시대성을 가졌다는 의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적어놓고 보니 별것도 아닌 생각을 했다.


사실, 번역에 시간성이 있다, 세대마다 달라져야 한다, 아니면 혹은 원저 생산연도와 비슷한 시기에 번역된 책이 그 책의 시대적 배경을 더 잘 반영할지도 모른다, 이런 주장들에 조금 깊게 들어가면 번역계의 영원한 논쟁, 직역주의냐 의역주의냐, 출발어우선이냐 도착어우선이냐, 충실성이냐 가독성이냐, 랑그냐 파롤이냐,... 기타 등등 여러가지로 변주되는 그 유명한 논쟁이 다시 나올 수도 있다. 후자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은 번역이 언어의 사회적 변화에 따라 끝없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할 것이고, 전자를 우선시하는 사람은 원저의 '정신'에 가장 가까운 원저-동시대 번역을 선호할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번역비평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내가 기억하기에, 번역가의 이름이 최초로 각인되었던 것, 작가나 장인에 걸맞는 취급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 1990년대가 아닌가 싶다. 안정효, 이윤기 선생 등이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그전에는 거의 투명한 존재였던 번역가가 실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훌륭한 번역과 그렇지 않은 번역이 있다는 개념이 대두한 게 그때가 아닌가? 안정효, 이윤기 선생이 번역가이기 이전에 소설가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때는 번역을 평가하는 데 있어 후자-가독성 쪽에 훨씬 무게가 실렸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 딱한 일이지만 이윤기 선생님은 여러 사람에 의해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내가 알기로 굳이 책까지 내서 이윤기 번역을 비판한 사람도 두 사람은 된다(강유원, 이재호). 요즘은 영어를 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원서를 손에 넣기도 쉬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독성-우리말 표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고 정해진 기준도 없고 꽤 주관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원문충실성만이 유일한 절대적 기준으로 군림하면서, 많은 번역가들이 아마추어 번역비평가들에게 쉽사리 까이는 일이 흔해졌다. 작년인가 올해 초인가 스티브 잡스 평전 번역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질 때 드는 생각은 이랬다. 여러가지 번역이 있을 수 있는데, 정확성이 미덕인 번역, 아름답거나 재치있거나 읽기 편하거나 아무튼 좋은 우리말 표현이 미덕인 번역, 빠른 속도로 나와서 독자들에게 빨리 안겨줄 수 있는 번역, 기타 등등...문학이건 이론서건 대중서건 정확성 하나의 잣대만 가지고 보는 건 무리다. (예로 든 세 가지 번역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뜻은 아니고. 특히 3번 미덕이 가장 취약하구나) 사실 완전히 정확한 번역이라는 것은, 이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도 하고. 


번역비평은 필요하나, 양쪽에 균형을 두지 않으면 반쪽 비평이 될 수밖에 없다. 번역비평에 뛰어들 분들은 그런 고민도 함께 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정확하냐?뿐 아니라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까지 가늠하고 평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0종이 넘는다는 <위대한 개츠비> 번역을 두고 말이 많길래 나도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독자 입장에서는 구매 전에 포럼을 통해 누구 번역이 최고인지 판정이 내려지기를 바라는 게 당연할 거다. 그런데 아마도 번역자 입장일 내가 보기에는, 여기 저기에서 한두 문장씩 떼어 내어 비교하는 방식이 우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샘플링이 공평한 비교 방식이 될 수 없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글의 전체적 정조, 맥락의 연결, 문체, 인물의 성격과 관계 설정, 심지어 책의 물리적 형태까지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읽기 경험을 한두 문장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도 없을 터이니. 


그리고 이런 비교 방식에서 한 가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은 요소가, 시간 순서다. 

좋은 번역을 내놓고 싶은 번역가라면 당연히 이전 번역본이 있다면 그것들을 참고할 터이고, 따라서 나중에 나온 번역은 앞선 것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다. 번역 원고가 좋은 편집자의 손을 거치면서 품질이 개선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면 적어도 <개츠비> 번역에서 원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터무니 없는 오역이 나올 가능성은 이제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번역을 할 때 참고할 수 있는 다른 번역본이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으려고 노력할 테지만 이미 누군가가 좋은 단어/표현을 썼다면 그걸 (눈에 뜨이지 않게) 훔치고 싶은 충동을 굳이 억누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적당한 단어/표현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당연히 그걸 써야하지 않겠는가. 이런 경우에, 문장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으므로 표절은 아닐 테지만 다른 번역가의 아이디어를 훔쳤으니 정신적으로는 표절을 한 셈이다. 아니면 의미 파악에 도움을 얻는다거나, 혹은 반면교사로 쓰이더라도, 어쨌든 간에 다른 사람의 번역이 변증법적 발전의 토대로 쓰이게 된다. 그것에 대한 부채의식을 버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번역 작업도 (암묵적으로, 때로는 눈에 뜨이지 않는 표절을 통해) 축적, 계승, 발전이 이루어진다. 번역이건 창작이건 (혹은 그 사이의 무엇이건) 표절 혹은 모방/변용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시간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비교를 한다면, 극단적인 비유를 들자면 다빈치 그림과 피카소 그림을 놓고 누가 더 잘 그렸는지 비교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최근 판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츠비>처럼 꾸준히 수없이 많이 번역된 작품 가운데에서는 '오역이 적다는 의미에서 안전한' 번역본을 여럿 찾을 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오역 문제는 크게 고민하지 말고 취향에 따라 자기와 잘 맞는 번역가를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 전체적인 읽기 경험이 어떠할지는 말했듯이 한두 문장 맛보기로 미리 알 수 없을 테니, 적어도 몇 페이지 정도는 읽어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비교 논의 방식은 일단 번역자 입장에서 보기에 너무 불공평하고,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