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문을 보니 장정일과 이택광이 지젝의 말을 두고 번역해 가면서 싸우는 것 같은데 (자세히 읽지는 않았다) 해석학적 논쟁은 끝이 나지 않기 마련이니 자기 말을 가지고 싸우는 게 좋을 듯하다.
갑자기 이 일이 생각난 까닭은, 번역하다가 프로이트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프로이트를 실드 쳐주고 있는 것 같아서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모든 걸 성적 욕망으로 설명하려다 무리수를 많이 둔 것도 사실이다. 이 책 저자가 보기에는 프로이트 자신의 기차 공포증이 세 살 때 고향을 떠나게 되어 기차를 탈 때 느꼈던 불안에서 비롯된 게 분명한 것 같은데, 프로이트는 "기차 안에서 어머니의 벗은 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억지해석을 했다. 어머니가 벗은 모습을 본 기억은 당연히 없다. 보았더라도 무의식으로 억압했을 테니. 그래도 (자기 이론에 따르면) 그랬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기차 공포증은 억압된 성적 욕망에서 나온다"고 일반화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만나본 일은 없지만) 내 젊은 날 프로이트와 인연도 있고 해서... 조금 덜 억지스러운 표현으로 나도 모르게 다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은 다음에는 과거를 부정하듯 더 어처구니 없는 표현으로 번역했을지도...)
이런 개인적 취향을 두고 정치적이랍시고 거창한 말로 표현하기는 우스우니 독자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아마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번역과정을 등가교환을 이루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답답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수전 손택이 번역은 "윤리적인 선택"이라고 한 것을 가끔 생각하게 된다. 내가 번역하는 책들이 윤리적 정치적으로 첨예한 내용인 경우는 별로 없었으므로 나의 취향과 성격이 가미되어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