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간절히 원하는 삶은 익숙한 풍경속에서 헤매지 않고 당황하지 않고 안정감 있게 능란하게 모든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지만, 익숙해질 만하면 그 지반이 흔들릴 일이 다가오곤 했다. 이 동네가 좋아질 만하면, 더이상 낯선 길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성인 여자의 미숙함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면, 영락없이 또 새로운 풍경이 밀고 들어온다. 나에게는 순발력이 없고 삶은 관성과 멀다. 그러니 이 간극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으려나 보다.


분석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태도는 머지않아 어떤 식으로든 부적절해지는 경향이 있고 반드시 그렇게 된다. 지속적인 삶의 흐름은 거듭 새로운 적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적응은 결코 최종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앤서니 스토 <처칠의 검은 개 카프카의 쥐>














"적응은 결코 최종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융의 얘기는 절망적이지만 안심이 된다. 그렇다면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적응은 신기루다. 도달했다고 믿으면 그것은 사라진다. 그것이 삶의 양태인 셈이다. 저자 앤서니 스토는 정신분석학자이자 정신과 의사다. 그는 "결코 만난 적 없는" 처칠과 카프카와 뉴턴의 성격 연구를 행한다. 그것은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위험하고 모호하고 논쟁적이다. 살아서 항변할 이가 없는 일방적인 판단과 분석은 그래서 모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앤서니 스토의 그것은 그 한계 안에서 생생하고 예지적이고 통찰력이 있다. 이 세 명의 고독한 인물들이 빛나는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충족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정신과 의사의 예리한 분석은 개별적이지만 평범한 우리들이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보편적인 각성의 단초들을 제공해 준다.


처칠도 카프카도 뉴턴도 유년 시절 모친과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는 데에 실패한다. 이 결손은 자존감의 원천 자체를 내면이 아닌 외부의 성취에 의한 대중들의 지지와 인정에서 찾게 하는데 일조를 담당하고 역설적으로 고독하고 우울했던 그들의 결핍은 역사에 남을 업적을 향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승화된다. 


'예술적 관심'도 사실이 아닙니다. 실은 모두 틀렸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틀린 말입니다.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게 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는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없습니다.


연인 펠리체에게 한 카프카의 고백은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다. "문학으로 만들어져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작가가 쓴 글을 읽는 일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가 사라지고 남은 시간들을 사는 일에 대하여 고민한다. 그것은 함부로 얘기되어지거나 불평할 부수적인 일이 아닌 것 같다. 뉴턴의 이야기도 그렇다. "나는 그 문제를 밀쳐두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으면서 최초의 여명이 서서히 차츰 그득하고 분명한 빛으로 이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 과정에 가족이나 친밀한 관계는 없었다. 


어쩌면 이러한 우울들과 많은 고독들은 한 성인의 건강한 삶의 초상의 구도로는 적합치 않지만 하나의 기여, 빛나는 성취 앞에서는 필수불가결한 희생이자 재료였을지도 모르겠다. 건강한 삶, 온전한 정신에 대한 청사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상지이자 

허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평범한 나에게 완전한 적응은 영원히 먼 일일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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