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털만 안 삐져 나와도 욕은 안 먹었던 남자에게도 외모가 경쟁력인 시대가 도래했다. 웬만하면 꾸미시라고 부추기는 미디어와 웬만하면 사시라고 부추기는 시장에서 이제 남자는 소비의 대상이자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새로 쓴 영화 <왕의 남자>. <왕의 남자>의 흥행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여자보다 더 고운 피부와 선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이준기가 흥행의 한 축을 담당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왕의 남자>를 본 여성 관객 중 상당수는 이준기의 예쁘장한 외모에 반했고, 그를 다시 보기 위해 극장을 또 찾았다. 영화 개봉 기간 중 방영됐던 SBS 드라마 <마이걸>도 예쁜 남자 이준기 덕을 봤다. 영화와 드라마의 동반 흥행 속에 이준기는 단숨에 스타가 됐다. 이준기는 CF도 접수했다. 톱스타 정우성을 밀어내고 지오다노 CF에 입성했으며, 새빨간 입술로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라고 노래하며 여심을 유혹했다.
얼굴 ‘값’도 해야 하고
예쁜 남자 신드롬이다. 이준기가 그 선두주자지만 그토록 비현실적인 외모의 소유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꾸준히 가꾸고 노력하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나아질 수 있다. 얼굴형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몸매는 노력 여하에 달렸다. 매주 일요일 저녁 가족 시간대에 방송되는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차승원의 헬스클럽’에는 남자들만 출연한다. 균형 잡힌 근육질 몸매를 가진 차승원이 배우 유해진, 개그맨 이윤석, 가수 천명훈 등 동료 연예인들을 몸짱으로 만들어주는 8주간의 과정이 주 내용이다. 차승원은 매주 출연자들에게 미션을 주고 출연자들은 그 미션을 수행하며 자신의 몸을 만들어가고, 카메라는 이들의 몸을 쫓는다. 근육이 잘 발달한 실제 헬스클럽 트레이너 최성조 코치가 프로그램에 동참해 아직 몸이 덜 만들어진 다른 남자 출연자들과 비교대상이 되어주기도 한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총괄하는 MBC 예능국 권석 차장은 “<일요일 일요일 밤에>는 남성 시청자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프로그램이다. 최근 남자들은 자신을 가꾸는 일에 열심이다. 헬스클럽에 가보면 중학생도 근육을 키우고 지방을 없애는 등 몸매 가꾸기에 힘을 쏟는다. 여기서 착안해 기획했다”고 말한다.
이 프로그램은 남성 시청자에게는 몸매 가꾸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여성들에게도 강하게 어필한다.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몸매의 최성조 코치가 상의를 벗고 등장하는 순간에는 시청률이 일시적으로 올라갈 정도로 남자의 몸을 바라보는 여성 시청자들의 눈길도 뜨겁다. ‘차승원의 헬스클럽’은 남자들의 ‘몸짱’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남성을 소비의 주체로 이끄는 동시에, 여성들에겐 남성을 대상화해 지켜보는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최근 남성성의 대상화는 TV속 예능 프로그램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KBS2 <상상플러스> ‘올드 앤 뉴’, MBC <강력추천 토요일> ‘무한도전’은 문제를 내는 여자 아나운서를 제외하고 다른 출연자 모두가 남자다. 남자 출연자들은 여자 아나운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때로는 오버하며 자신을 스스로 대상화시키기도 한다.
사실 이 같은 흐름은 1~2년 전부터 케이블 TV를 통해 감지돼왔다. 지난해 온미디어 소속 케이블 채널 온스타일은 게이 트렌드세터(trandsetter, 유행을 만드는 사람들)가 외모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보수적인 남성들을 스타일리시하게 바꿔주는 <퀴어아이>와 잘빠진 남성들 20명 중 최고의 남성 모델을 선발하는 <맨 헌터>를 내보내 호응을 얻었다. <퀴어아이>는 남성을 소비 주체로 부각시키는 프로그램인 반면 <맨 헌터>는 남성성을 상품화한 프로그램이었다. 국내 제작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이들 프로그램의 인기는 자신을 가꾸는 데 열심인 국내 메트로섹슈얼들의 삶을 다룬 <싱글즈 인 서울 2>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공중파 방송에서 소비의 중심이 된 남성들을 만나기 이전에, 대중들은 이미 케이블 TV를 통해 이런 남성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온미디어 홍보팀 안애미 씨는 “당시엔 메트로섹슈얼이 유행이었고, 우리가 트렌드를 약간 앞서서 방송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젠 한 가지 스타일이 트렌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남성들의 모습 자체가 소비문화에 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안애미 씨의 말처럼 남성성의 소비가 이젠 어느 한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강동원이나 이준기처럼 여성적 이미지의 크로스섹슈얼이 인기를 끄는 반면, 한편에선 거친 남성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영화를 예를 들자면 <야수>의 권상우, <태풍>의 이정재, 장동건, <사생결단>의 류승범, 황정민 등이 이에 해당된다. 한 배우가 극단적인 여성성과 극단적인 남성성 양쪽의 이미지로 모두 소비되는 경우도 있다. 권상우는 영화 <야수>에서 거친 남성의 전형을 연기했지만 동시에 화장품 CF에서는 여성처럼 고운 피부를 강조한다. 현빈 역시 드라마와 영화 <백만장자의 첫사랑>에서는 무뚝뚝한 남성을 연기했지만, ‘꽃을 든 남자’ CF에서는 마사지 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뽀얗게 표현한 마스크와 대비되는 체지방 1%의 몸으로 화제를 모은 배용준도 이에 해당된다.
이런 남성성 상품화는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CF에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인터넷 포털 네이버 CF는 장보러 나온 주부들이 전날 본 축구 경기 속 남자 선수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뤄져 있다. 남성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부들 수다의 소재로 대상화된 남성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네이버 브랜드 마케팅팀 임지인 과장은 “네이버를 통해 주부 계층도 축구와 같은 이야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기획된 광고다. 하지만 광고가 나간 뒤 남성성을 대상화했다는 면에서 기억에 남는 광고로 받아들이는 소비자들이 많았다”고 말한다. 여자 모델들의 전유물이었던 가전제품이 속속 남성 모델로 교체되고 있는 현상 역시 남성이 상품을 광고하는 데 더 호소력이 있음을, 나아가 남성이 구매의 주체로 서서히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옷발’도 살려야 하고
대중매체에서 재현되는 이미지에 있어 시선의 역전까지 일어났다는 건 아니다. 여전히 시선의 주체는 남성이고, 그 대상은 여성인 것이 대세다. 하지만 보는 주체였던 남성이 보이는 대상으로 빠르게 자리 이동하고 있고 여자 연예인의 잘록한 허리가 노출되는 것만큼이나 흔하게 ‘웃짱을 깐’ 남자 연예인의 상반신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미디어는 남자 연예인을 상품화함으로써 일반적인 남성들이 외모를 통해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일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도록 고무시키고 있다.
지난해 광고기획사 대홍기획이 15~39세 남성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외모는 남성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전체의 86%였다. ‘요즘 남성이 여성화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75%였고, ‘남자도 화장, 액세서리 등을 할 수 있다’고 답한 응답자도 40%를 넘었다. 제일기획도 20~30대 미혼 남성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 정도가 한 달 용돈이나 월급의 절반 정도를 ‘의류 구입비와 미용비’에 지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응답자의 51%가 ‘의류를 구입할 때 사전 정보를 탐색한다’고 답해 남성들이 외모에 투자하는 비용과 노력에 무척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에서는 남성들의 실제 구매가 전에 없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자동차나 하이테크 제품 등 메카닉 제품과 술, 담배 같은 일부 기호식품에 머물러 있던 남성들의 소비 행태가 과거 여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패션, 미용, 성형 같은 뷰티 분야까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는 도처에 널렸다. 대표적인 온라인 쇼핑몰 옥션의 경우, 지난해 남성 화장품 매출이 2004년 대비 74% 신장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여성 화장품 매출 증가폭(53%)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또 다른 쇼핑몰 사이트 GS이숍의 최근 고객 구매실태 조사에 따르면 전체 구매고객 중 남성 비율이 45%로 3,4년 전의 30% 수준에 비해 크게 신장된 것으로 나타났다. GS이숍은 구매력에서 여성을 앞서는 남성의 소비가 늘어나 남성을 겨냥한 전용 매장이 당분간 증가세를 지속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렇게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유명 화장품 업체들은 남성을 위한 옴므 계열 라인을 앞 다투어 내놓고 있다. 심지어 남성용 화장품만을 모아놓은 별도의 매장을 꾸리고 있는 실태. 과거 백화점의 화장품 코너는 여성들만을 위한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아라미스 랩 시리즈’ ‘랑콤 옴므’ 등 남성 전용 매장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또한 포털 사이트 다음이 운영하는 쇼핑몰 디앤샵은 지난해 남성 쥬얼리 전문 매장을 선보인 데 이어 지난 2월에는 남성 화장품만을 취급하는 사이버 매장 ‘디앤옴므’를 오픈했다. 디앤옴므는 스킨케어 보디케어 향수 헤어케어 등 1,000여 남성 화장품 브랜드를 취급하고 있는데, 매달 매출신장률이 두 배에 달할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팔려나가는 상품도 예전처럼 스킨, 로션 위주의 기초 화장품이 아니다. 이 쇼핑몰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은 눈가의 붓기와 다크 서클을 완화해준다는 기능성 수분공급 화장품. 물건을 제때 공급하기 힘들 정도로 남성 직장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남성들의 소비행태가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성 고객들을 겨냥한 성형외과와 피부과, 두피모발 관리 전문업체들의 등장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본사를 두고 있는 ‘까망’은 개인별 맞춤 두피 관리 서비스업체다. 이 업체는 남성들의 고민 가운데 하나인 탈모 현상을 체계적으로 관리, 방지하는 데 주력한다. “외모를 중시하는 경향 탓인지 과거보다 손님들이 배로 늘었다”는 관리자의 말에서 달라진 시대상이 느껴진다. 상호에 ‘옴므’ 혹은 ‘남성전용’이라는 문구를 삽입한 성형외과와 피부과의 성장 역시 두드러진다. 남성 전문 성형외과의 선두주자인 ‘옴므 앤 팜므’의 황규석 원장은 “남성 환자들이 계속 늘고 있는 추세”라며 “젊은 층들은 주로 쌍꺼풀과 코 성형을, 중년층들은 눈 밑 주름제거 수술을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남성 전문을 표방하고 있는 ‘듀오 피부과’의 홍남석 원장도 젊은 남성 고객들의 증가추세를 거론하면서 “피부 치료와 레이저 제모술 등 피부 미용 시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20∼30대뿐만 아니라 10대 고객층도 두터워지는 형세다”라고 분석했다.
거리로 나가보면 시대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패션의 메카 동대문을 찾았더니 남자 손님들이 반이다. 이곳에서 삼삼오오 짝을 이룬 남자 일행들이 옷을 고르고 있는 풍경은 조금도 어색한 것이 아니다. 유행을 직접적으로 읽어볼 수 있는 동대문 쇼핑몰의 ‘수입멀티’ 층은 아예 남자 옷으로 점령당하다시피 했다. 10개, 아니 20개의 매장이 있으면 그중 하나가 여성 옷을 취급할까 말까다. 동대문 쇼핑몰 ‘청대문(구 거평 프레야)’ 5층에서 멀티샵을 운영 중인 박상진 씨는 “오후 6시만 넘으면 학교를 마치고 찾아온 남학생 손님으로 북새통을 이룬다”며 “딱히 뭘 추천해줄 필요도 없이 자신들이 알아서 가장 어울리는 옷을 골라낸다. 요즘에는 다리에 딱 달라붙는 스키니 진과 빈티지 반팔 티셔츠가 인기”라고 설명했다. 길거리 로드샵의 성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넥타이 전문 로드샵 ‘앤드류스 타이’와 남성 토털패션 로드샵 ‘에스티코’는 최근 인기 급성장 중인 남성 전용 로드샵이다. 이들은 4만9천 원, 9만9천 원 식의 ‘9천 원 전략’을 활용, 개성 있는 스타일을 연출하고자 하는 남성 고객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앤드류스 타이‘ 이대점의 판매직원 김솔미 씨는 “남자친구에게 선물을 하고자 하는 여성 고객들이 전체 구매층의 70% 정도를 차지하지만, 남성 고객들도 꾸준히 늘어가는 추세다. 남성 고객들은 주로 한 번에 여러 장의 넥타이를 사가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여자도 공부해야 하고
지난 3월, 두 개의 라이선스 남성지가 창간했다. <우먼센스> <앙앙> 등을 발행하는 서울문화사는 영국 <아레나>의 한국판을, <행복이 가득한 집> <마이웨딩> 등을 발행하는 디자인하우스는 미국 <맨스헬스>의 한국판을 내놓아 기존에 시장을 선점한 <에스콰이어> <맥심> 등과 남성지 시장에서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됐다. 하반기에는 <엘르> <프리미어> 등을 발행하는 아쉐트넥스트미디어가 프랑스 <뮤슈>의 한국판을 내놓을 예정이며 이 밖에도 2개 정도의 라이선스 남성지가 창간 준비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남성 패션지, 남성 스타일지, 남성 라이프 스타일지, 남성 피트니스지 등 매체마다 색깔은 다르지만 전반적인 잡지 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남성지의 창간 붐은 남성 소비재 시장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아레나>의 마케팅팀의 서동준 부장은 “서울 강남권의 전문직 젊은 독자를 타깃으로 마케팅을 했는데 근래 보기 드물게 창간호 재판을 찍었다”며 “소득 상위 20% 젊은 남성의 경우 패션, 뷰티, 스타일, 건강에 대한 욕구가 다양하고 구매력이 있기 때문에 고급화 전략이 주효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검은 슈트에 갈색 구두를 신어도 되는지 아닌지, 각질 제거는 주 몇 회가 적당한지, 체중을 줄이기 위해 최대 심박 수의 몇 %까지 유산소 운동을 해야 하는지, 토라진 여자친구는 어떻게 달랠 것인지에 대한 정보는 차기 서울시장 당선자가 누가 될 것이며, 아파트 청약은 어디가 유리한지만큼이나 현대 남성들에게 중요하다. 그리고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에세이집에서 여자들에게 마음껏 꾸미고 당당하게 표현할 것을 권유했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마광수 교수는 “남자인 내가 여자를 가장 부러워했던 이유가 꾸밀 수 있는 자유였는데 이젠 그 자유가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며 “요즘 잘 꾸미고 다니는 남학생들은 스스로 그걸 즐기는 게 반, 어느 정도는 꾸며야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하는 게 반인 것 같다. 앞으로는 남성들의 화장이 선택이 아니라 지금의 여성들에게 그렇듯 어느 정도는 의무가 될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단순히 외모의 문제로 볼 게 아니라 문명의 진화에 따른 남녀의 성 역할 전반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광수 교수는 남성들이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는 헤게모니를 쥔 여성들에게 선택 받기 어렵기 때문에 이 같은 추세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0월 ‘타임’의 아시아판 ‘Modern Male’이라는 제호의 커버스토리에서 경제 성장에 따른 수입 증가 및 패션 산업의 시장 확대에 따른 남성성에 따른 인식 변화로 아시아 각국의 남성들이 외모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김현미 교수는 “아시아 여성들의 독립성이 증가하면서 원하는 남성들을 선택하는 것”이라며 “신뢰성 등 전통적인 남성상은 더 이상 여성들에게 매력이 없다”라고 말해 새로운 남성성의 등장 배후에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독립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밝혔다. 여성 경제활동 인구가 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더 이상 ‘돈만 잘 벌어오는 남자’는 그다지 환영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 잘 차라고 뽑아놓은 축구팀 대표 선수도 “누가 축구 경기에서 공만 보냐”는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 땀이 났을 때 예쁘게 젖는 헤어스타일로 기르고, 볶고, 물들이는 시대 아닌가?
남자는 부지런해야 한다
물론 미디어는 미디어고, 트렌드는 트렌드다. 모든 남성들이 TV나 남성지에 나오는 남자처럼 따라할 수도 없고 따라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을 향한 시선이 “사내자식이 쯧쯧쯧….”이나 “기생오라비처럼 생겨가지고….” 등 기존 남성상에 비추어 터부시하고 무시하는 시선만은 많이 없어졌다. 그런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오히려 구닥다리, 자기관리에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쉽다. 엄마나 아내가 사주는 팬티만 입고 다니는 남자는 통장을 엄마나 아내가 관리하는 사람만큼이나 덜 떨어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도래한 소비자본주의와 개인주의는 기성세대가 전통적인 성과 연령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을 대거 등장시켰다. 신세대, X세대 등 세대 담론은 나이든 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 했던 담론이고, 미시족은 늙은 아저씨가 젊은 아줌마를 이해하려 했던 담론이며, 키덜트족은 다 자란 어른이 덜 자란 어른을 이해하려 했던 담론이다. 주체는 성인 남성이고 타자는 어리거나 여자였다. 이제 메트로섹슈얼, 위버섹슈얼, 크로스섹슈얼, 꽃미남이라는 족속들의 연착륙으로 남성 자신이 타자가 되어 이해받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또 남성성 안에서 다양한 분화로 남자들은 다른 남자를 이해하고 배우려는 노력 없이는 연대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술과 군대, 주식과 축구 얘기만으로는 ‘싸나이’에서 빠져나간 다른 남자들과 소통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헷갈리십니까?
여피와 보보스의 차이를 간신히 익혔는데 메트로섹슈얼, 위버섹슈얼, 크로스섹슈얼, 테크노섹슈얼 등 더 헷갈리는 단어들이 몇 달 간격으로 상륙하고 있다. 얼짱이나 몸짱만큼 외우기 쉽진 않지만 족보를 따라가다 보면 그리 어렵지도 않다. 우선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은 패션에 민감하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여성 취향의 남성을 이르는 말이다. 외모 가꾸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쇼핑을 즐긴다. 20~30대 초반의 도시 남성들에게 이런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 영국의 작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마크 심슨이 1994년 ‘인디펜던트’ 지에 기고한 글에서 처음 썼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이다. 메트로섹슈얼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레트로섹슈얼(retrosexual)'이 등장하기도 했다. 외모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몸 치장에도 무관심한 남성들이다.
미국의 사회분석가인 매리언 샐즈먼의 저서 <남자들의 미래 The Future of Men>에서 처음 등장한 위버섹슈얼(ubersexual)은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를 대표적인 인물로 꼽는다. '위버'는 독일어로 '더 높은' '초월한'의 뜻으로, 메트로섹슈얼처럼 요란하게 꾸미기보다는 터프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추구하며 여성에게는 자상한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남자'다. 메트로섹슈얼보다는 상대적으로 남성성이 강해 마초와 메트로섹슈얼의 장점만을 모은 이상형으로 꼽히기도 한다. 크로스섹슈얼(crosssexsual)은 여성의 의상이나 머리 스타일, 액세서리 등을 하나의 패션 코드로 생각해 치장을 즐기는 남성으로 외형상 대단히 여성적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양성성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영화배우 이준기나 보이 밴드 SS501의 김형준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가장 최근에 등장한 테크노섹슈얼(technosexsual)은 최신 기술에 관심이 많으면서 똑똑하고 세련된 남자를 지칭한다. 소위 ‘디지털 미남’으로 불리는 이들의 감성은 여성적이지만 활동은 남성적인 경향을 지닌다.
한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