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법인 한국연구원에서 간행하는 학술지 [한국연구]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이 논문은 제가 준비 중인 [을의 민주주의 철학적 기초](가제)에 수록될 일부분입니다. 


논문에 대한 토론이나 인용은 [한국연구]에 수록된 최종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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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정치적 존재론

 

 

1. 머리말: 존재론적인 문제로서의 갑을 관계

 

갑을 관계는 최근 10여 년 사이 한국의 사회적 담론의 주요 주제 중 하나였다. 재벌 기업과 하청관계를 맺고 있는 중소기업,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차별적인 지위와 권리를 지니고 때로는 부당한 대우를 감내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프랜차이즈 본사와의 종속적인 계약관계 속에서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가맹점들, 우리나라의 권력과 부, 사회적 서비스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과 비교하여 늘 차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지방들, 권위적인 도제관계 속에서 교수들의 부당한 횡포를 감내해야 하는 대학원생들, 성적 불평등과 억압적 제도 및 관행에 종속되어 있는 여성들, 더 나아가 이성애적인 규범과 제도, 관행 속에서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성적 소수자들,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모욕, 그리고 배제의 대상이 되는 장애인들, 인종적민족적국민적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이들(조선족, 다문화 가정, 이주노동자들, 난민들)과 같이,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불평등과 불공정, 차별과 배제의 구조 및 현상을 집약하는 용어가 바로 갑을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갑을 관계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다양한 형태의 갑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분하고 을들의 고통에 공감과 연민을 느끼고 있으며, 이는 언론 사회면과 포털,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온라인 게시판의 논의 주제가 되고 있다. 아울러 정치권에서도 갑을 관계를 시정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013년부터 당 내에 갑을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을지로위원회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비정규직 투쟁 현장을 비롯한 각종 갑을 관계의 현안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보인 바 있다. 또한 야당인 국민의힘에서도 약자와의 동행위원회를 설치하여 약자들인 을들에 대한 관심을 표방한 바 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더불어민주당이 집권여당이 된 이후 범정부 을지로위원회를 설치하여 대통령 직속 기구로 만들겠다는 약속은 1년도 못돼 폐기되었고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의 활동 역시 갈수록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국민의힘의 약자와의 동행위원회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제도 정치권에서 갑을 관계의 문제점을 시정하고 을들을 위한 이런저런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유익하고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만으로 갑을 관계의 문제점이 해소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갑을 관계의 문제는, 우리가 뒤에서 보여주겠지만, 구조적이면서 인간학적인 문제, 요컨대 존재론적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층적인 성격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해결의 노력이란, 이런저런 형태의 갑질에 대한 임기응변적이고 보여주기 식의 대응 이상의 것일 수 없다.


더욱이 갑을 관계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중요성에 대해 진보적인정치 세력 및 연구자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분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급진적이라고 간주하는 정치 세력이나 연구자들일수록 대개 예외적인 것’(the extraordinary)에 기초를 둔 과거의 영광”[Facundo Vega, “On Populist Illusion: Impasses of Political Ontology, or How the Ordinary Matters”, in Bernardo Bianchi, Emilie Filion-Donato, Marlon Miguel & Ayşe Yuva eds., Materialism and Politics, ICI Berlin Press, 2021, p. 327.]에 사로잡혀, 총파업이나 무장봉기 아니면 적어도 수십만의 대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비상한 정세에서만 정치라는 이름에 값하는 투쟁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제도적인 정치 바깥의 대중정치를 통해서만 그러한 정치가 가능하다고 믿는다.[알랭 바디우나 자크 랑시에르가 주장한 바 있는, “정치란 드물게 발생한다.”는 명제는 예외적인 것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생각을 핵심적으로 요약해준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국가권력의 장악이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의 철폐와 연결되는 투쟁만이 의미 있는 정치적 투쟁일 것이며,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나타난 다양한 방식의 좌파 메시아주의 정치철학에 따르면, 명칭이야 어찌 되었든(메시아주의든 공산주의든 아니면 안-아르케(an-arkhe)로서의 아나키즘이든 간에) ‘자본주의 이후내지 자본주의 너머또는 전체주의로서의 자유주의 너머’(특히 조르조 아감벤의 관점)를 추구하지 않는 정치는 진정한 정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지난 2000년대 이후 국내외 학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바 있는 좌파 메시아주의(특히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에 관한 비판적 고찰은, 진태원,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 그린비, 2019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갑을 관계는 실로 사소한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관대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그것을 구조를 변혁하기 위한 변혁의 정치와 구별되는 일상성의 정치라고 규정하겠지만, 조금 더 냉정하거나 투철한 좌파 쪽 사람들은 갑을 관계를 정치의 쟁점으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를 사고하고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주요 장애물 중 하나라고 일축할 수 있다. 요컨대 그것은 갑질에 대응하는 을질을 하자는 것에 불과하며, 그런 것을 할 시간이 있거든 위대한 변증법을 다시 일정에 올리는 것이 진정한 좌파가 해야 할 일이 될 터이다. 하지만 국민의힘 같은 보수 정당만이 아니라 민주당 같이 진보를 자처하는정당에서도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갑질(특히 여성 및 성적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이 발생했으며, 심지어 제도권 진보 정당의 대표 격인 정의당에서도 당 대표가 갑질로 사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아울러 노동조합이나 진보적 사회단체들 역시 이러한 갑을 관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위대한 변증법은 사소한 갑을 관계의 유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또는 공산주의)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갑을 관계의 구조를 변혁하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가 사회주의의 본질을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고 할 수 있다면,[여기에 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와 독재󰡕,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및 루이 알튀세르,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배세진 옮김, 생각의힘, 2018을 각각 참조.] 결국 현실 사회주의는, 그것을 스탈린주의라고 하든 아니면 마오주의라고 하든 또는 김일성주의나 기타 어떤 ‘~주의라고 하든 간에,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였음이 입증되었으며, 그것이 곧 사회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핵심 원인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알튀세르의 촌철살인의 표현에 따르면, 단순히 정치적 오류라고 비난하는 것만으로,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하는 것만으로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이는 어딘가 그 자체의 사회적 관계들 속에 이 같은 오류에 대한 정치적 필요가 이들 관계들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고, 나아가 그 오류를 지속시켜야 할 필요가 또한 존재하기 때문”[Louis Althusser, “Histoire terminée, histoire interminable”, in Yves Sintomer ed.,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PUF, 1998, p. 242; 미완의 역사, 이진경 엮음,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될 것󰡕, 새길, 1992, 15~16. 강조는 원문.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강조 표시는 모두 원문의 것이다.]이다. 이러한 정치적 필요’”, 이것이 바로 갑을 관계 및 그것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아닐까?


그렇다면 갑을 관계야말로 인민대중에 대한 과두제 지배의 근원이자 그것의 환유적 표현, 따라서 주체를 주체로 구성하지 못하게 하는 근원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전치(傳置, Verschiebung, displacement)의 메커니즘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꿈의 작업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로 규정했던 것의 의미에서[Sigmund Freud, Die Traumdeutung, S. Fischer Verlag, 1942;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2003(개정판).]으로 인해, 그 자체 원인으로서 인식되지 못하거나 원인으로 인식되는 경로 자체가 굴절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곧 갑을 관계는 갑의 지배를 위한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집합적 저항을 무력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그것의 실존 형태로서의 포스트 민주주의 역시 갑을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신자유주의 시대 자유 민주주의의 퇴락에 관해서는 Wendy Brown, “Neoliberalism and the End of Liberal Democracy”, in Edgework: Critical Essays on Knowledge and Politic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Undoing the demos: Neoliberalism’s Stealth Revolution, Zone Books, 2014; 󰡔민주주의 살해하기󰡕, 배충효방진이 옮김, 내인생의책, 2017(이 책은 번역에 문제가 있다) 및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 민주주의: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이한 옮김, 미지북스, 2008; 셸던 월린,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 우석영 옮김, 후마니타스, 2013 등을 참조. 국내 학자의 논의로는, 이승원, 스펙터클로서의 촛불집회와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의 정치과제, 󰡔황해문화󰡕 106, 2020년 참조.] 그것은 사실 신자유주의적 과두제에 대한 정당화(이른바 TINA)이며,[Camila Vergara, “Populism: Plebeian Power against Oligarchy”, in Matilda Arvidsson, Leila Brännström & Panu Minkkinen eds., Constituent Power: Law, Popular Rule, and Politics,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20] 민주주의를 형식적인 절차적 제도들의 준수 여부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민족적 국민주의(ethnic nationalism)에 입각한 권위주의적 통치로 변형하기 위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Andreas Kalyvas, “Democracy and the Poor: Prolegomena to a Radical Theory of Democracy”, Constellations, vol. 26, no. 4, 2019.]


그렇다면 갑을 관계의 문제는 적어도 두 가지 쟁점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갑을 관계의 문제를, 일부 비도덕적이고 몰인정한 갑들의 특정한 갑질의 문제, 따라서 기존의 포스트 민주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적 과두제의 제도 및 관행 내에서도 얼마든지 실용적으로 시정 가능한 문제로 규정하려는 경향에 맞서 그것을 구조적이고 인간학적인 차원의 문제로 인식하는 쟁점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에 관한 기존의 지배적인 모델로 기능하는 자유주의적 모델이 어떤 의미에서 갑을 관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요소로 기능하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지닌 본래적인 의의[이것을 잠정적으로, 민주주의의 어원을 따라 데모스의 통치’(demos-kratia)라고 말해두자.]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적인 포스트 민주주의나 심지어 형식적 보편성(다시 말해 갑과 을의 형식적인 평등한 자유)에 기반을 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을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에 기반을 두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는 동시에 어떻게 을의 민주주의가 이러한 자유주의의 철학적제도적실천적인 한계를 넘어서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이 글에서는 을의 정치적 존재론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주로 존재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검토해보겠다. 우리의 결론은 아마도 아포리아에 더 가깝겠지만,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통해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에 내재해 있는 아포리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이러한 논의가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전혀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2. 정치적 존재론의 문제로서의 갑을 관계

 

2.1. 을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우선 을이라는 존재자에서 시작해보자. 과연 을이란 누구인가? 또는 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백해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중소기업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프랜차이즈 가맹점들, 대학원생들, 여성들, 성적 소수자들, 장애인들, 인종적민족적국민적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이들(조선족, 다문화 가정, 이주노동자, 난민 ...), 지방 사람들 ... 이들이 바로 을 아닌가? 경험적 수준에서 보면 과연 이들 모두 분명히 을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적 수준에서 규정된 을들은 다른 부문의 을들과 비교 불가능한 또는 환원 불가능한 차이에 따라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 비하면 분명 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함으로써 비로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자본에 대하여 종속적인 지위에 놓여 있다. 또한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그리고 하청 업체의 노동자들은 원청 기업에 해당하는 재벌 기업의 노동자들에 비해 분명 을의 지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을은 경제적 수준에서 갑에 대하여 종속적인 또는 열등한 지위에 놓인 이들로 규정된다. 또한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는 법적으로 본다면 독립적인 사업자로서 가맹점 본사와 사업적 거래관계를 맺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맹점 본사의 지휘와 통제를 받는 종속적 자영업자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이는 프랜차이즈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사업 양식의 표준화에 근거한 사업이므로 프랜차이즈에 가입한 가맹점주는 본사가 지정하는 표준화된 사업 양식을 충실히 따라야 하며 자신의 판단과 선호에 따라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랜차이즈는 종속적인 하청노동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박제성, 프랜차이즈에 관한 시론: 지배종속적 상사관계에서 지배종속적 노동관계까지, 󰡔노동법 연구󰡕 43, 2017.]


하지만 을은 또한 다른 측면에서도 규정될 수 있다. 예컨대 여성은 남성에 대하여 을의 지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가부장제 논리에 따라 결혼양육을 비롯한 가족 구조가 규정될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질서, 곧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이르기까지 가부장제의 논리가 관철되어 왔기 때문에,[이 분야에 관한 책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특히 고전적인 논의로는 캐럴 페이트먼,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이충훈유영근 옮김, 이후, 2001 및 조앤 W. 스콧,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 공임순이화진최영석 옮김, 앨피, 2017을 각각 참조.] 여성은 삶의 특정한 영역에서만 남성에 대해 을의 지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갑을 관계가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인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성적 정체성을 지닌 이들, 곧 흔히 퀴어나 성적 소수자라고 통칭되는 이들은 아마도 더욱 더 열등한 을의 처지(말하자면 이나 의 지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갑과 을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젠더 불평등의 문제로 규정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종적이거나 민족적인 측면에서도 갑을 관계를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측면의 갑을 관계는 결코 경제적 부문이나 젠더 부문의 갑을 관계에 비해 덜 심각한 것이 아니다. 특히 인종적 차별은 단지 사회정치적 또는 경제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차별 대상이 되는 유색 인종의 존재 전체를 왜곡하고 불구화하는, 존재론적이고 인간학적 차원에 속하는 문제다. 프란츠 파농은 이를 탁월하게 보여준 바 있다. “존재론은만약 우리가 존재론은 실존[의 문제]을 도외시한다는 점을 확실히 인정한다면우리로 하여금 흑인의 존재를 이해하게 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흑인은 더 이상 흑인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과 대면하여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Car le Noir n’a plus à être noir, mais à l’être en face du Blanc). 어떤 이들은 이 주장을 받아쳐서, 상황은 양면적이라고[곧 그것은 백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은 거짓이라고 답변하겠다. 흑인은 백인의 시선에 대하여 존재론적 저항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Franz Fanon, Peau noire, masques blancs (1952) in Franz Fanon, Oeuvres, La Découverte, 2011, p. 153;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이석호 옮김, 인간사랑, 1998, 140. 꺾쇠와 강조 표시는 필자가 추가한 것이며 번역은 원문을 바탕으로 수정했다. 참고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국역본은 모두 3종이 나와 있는데, 번역본 모두 파농의 깊이 있는 논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서구 사회에서 동양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특히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을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지칭하는 언어적 폭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이은정, 코로나와 아시아의 타자화, 󰡔황해문화󰡕 108, 2020년 가을호.]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인 및 중국 동포들은 짱깨다문화같은 혐오 명칭으로 불려왔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초기부터는 코로나로 불리고 있다. 대중들의 상상과 욕망 속에서 아시아인(=중국인)=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존재론적 등식이 작용하면서, 아시아인과 중국 교포의 존재론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염운옥, 배제의 정치학: 인종주의, 국민주의와 불안전의 ()생산, 󰡔황해문화󰡕 110, 2021년 봄호.]

 

2.2. 다면적으로 중첩되는 을의 존재론적 지위

 

이런 고찰은 더 많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을 터인데, 어쨌든 중요한 점은 경제적 관계에서 규정되는 을(노동자 내지 비정규직 또는 하청업체)과 젠더 관계에서 파악되는 을(여성 또는 성적 소수자), 그리고 인종적이거나 민족적인 측면에서 정의될 수 있는 을(흑인, 아시아인, 중국 교포 등) 사이에는 외관상 경험적구조적인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러 가지 경험적 관찰과 이론적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한 부문의 을과 다른 부문의 을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한다. 곧 사회경제적 부문에서 을의 지위에 또는 을 중의 을의 처지에 놓인 이들은 대개 젠더 관계에서 을의 지위에 있는 이들이고, 인종적이거나 민족적 관계에서도 역시 을의 지위에 있는 이들인 것이다. 예컨대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잘 보여준 바 있듯이, 미국 같은 다민족, 다인종 사회에서는 계급적 관계와 인종적민족적(ethnic) 관계 사이에는 구조적 연관성이 존재한다.[Immanuel Wallerstein, “The Myrdal Legacy: Racism and Underdevelopment as Dilemmas”, in Unthinking Social Science: The Limits of Nineteenth-Century Paradigms, Polity Press, 1991; 뮈르달의 유산: 인종차별주의와 저개발의 유산,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19세기 패러다임의 한계󰡕, 성백용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4,] 그 사회의 지배적인 인종 내지 민족은 대개 계급적 관계의 위쪽에 존재하는 반면, 피지배적인 인종 내지 민족은 계급적 관계의 아래쪽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종별, 민족별로 대개 교육의 수준도 상이하고 하는 일도 다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별과 위계화의 구조가 깨어질 가능성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동시에 정치적 참여 기회의 박탈과 역량 형성의 조건에서의 배제를 수반하며, 이러한 박탈과 배제는 그들의 정체성의 구조적 요소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부문의 갑을 관계가 다른 부문의 갑을 관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한 중첩되어, 한 부문에서 을(또는 을의 을)의 지위에 놓여 있는 이들은 동시에 다른 분야에서도 을(또는 을의 을)의 지위에 놓이도록 구조적으로 강제된다는 사실은 다른 부문의 고찰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확인 가능하다. 방금 원용했던 월러스틴의 분석에서는 계급적 서열과 인종 및 민족적 서열의 연관성이 강조되어 있지만, 젠더적 서열의 문제는 거론되지 않고 있다. 반면 페미니즘 연구자들의 여러 저작에서는 젠더적 위계가 계급적 위계 및 인종적 위계와 중첩될 뿐만 아니라, 다른 부문의 위계들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특히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 및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 황성원 옮김, 갈무리, 2018(2) 참조.] 특히 이 연구들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경제학 비판 및 계급 분석에서 이른바 생산적 노동에 대해 배타적으로 관심을 집중해온 것이 대개 여성들이 떠맡아온(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젠더적 위계를 함축하는) 가사 노동 및 돌봄 노동’(care work)이라고 불리는 재생산노동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국내의 연구 중에서는 윤자영, 사회재생산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여성주의 정치경제학 이론적 검토, 󰡔마르크스주의 연구󰡕 93, 2012 참조.]


그렇다면 갑을 관계에 대한 비판은, 각 부문 내에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갑을 관계에 대한 분석과 고발로 한정될 수 없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각 부문에 존재하는 갑을 관계들이 어떻게 서로 중첩되고 서로 연계되고 또한 서로를 강화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비판해야 하며, 이러한 중첩된 갑을 관계 속에서 을의 존재론적 지위 또는 정치적 존재론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갑을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갑과 을의 존재론적 지위는 항상 이미 정치적 지위이며, 따라서 을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분석은 정치적 존재론의 분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이러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존재론’(political ontology)에 대한 분석으로는 무엇보다도 Oliver Marchart, Thinking Antagonism: Political Ontology after Laclau,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8 참조.]


3. 을의 세 가지 존재론적 규정


3.1. 과두제의 지배 아래 있는 피통치자 일반

 

이러한 정치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을은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가? 을의 정치적 존재론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할 때 을은 상이한 몇 가지 차원에서 개념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첫째, 을이라는 개념은 과두제의 지배 아래 있는 피통치자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Camila Vergara, “Populism: Plebeian Power against Oligarchy”, op. cit. Partha Chaterjee, The Politics of the Governed: Considerations on Political Society in Most of the World,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4 참조.] 여기에서 내가 과두제라고 부른 것은 당연히 신자유주의적 과두제를 의미한다. 토마 피케티나 데이비드 하비, 제라르 뒤메닐도미니크 레비나 볼프강 슈트렉 같은 정치경제학(비판) 연구자들, 그리고 콜린 크라우치나 웬디 브라운 또는 알랭 쉬피오 같은 사회학자정치이론가, 법학자들은 각자의 분석에서 주목하고 있는 측면들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가 과두제 지배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최병두 옮김, 한울, 2007;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 민주주의󰡕, 앞의 책;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장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 2014; 제라르 뒤메닐도미니크 레비, 󰡔신자유주의의 위기󰡕, 김덕민 옮김, 후마니타스, 2014; 볼프강 슈트렉, 󰡔시간 벌기: 민주적 자본주의의 유예된 위기󰡕, 김희상 옮김, 돌베개, 2015; Wendy Brown, Undoing the demos: Neoliberalism’s Stealth Revolution, op. cit.; 󰡔민주주의 살해하기󰡕, 앞의 책; 알랭 쉬피오, 󰡔필라델피아 정신: 시장 전체주의를 넘어 사회적 정의로󰡕, 박제성 옮김, 한국노동연구원, 2012; 알랭 쉬피오,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 체제, 󰡔노동법연구󰡕 40, 2016.] 그것은 자산 불평등이 심화된 세습 자본주의(피케티)나 금융 과두제의 지배(뒤메닐레비), 또는 재정건전화 국가라는 형태를 띤 자본주의 시장경제 독재”(슈트렉)로 표현될 수 있고, “정치가 한 줌도 안 되는 기업가들의 관심사에만 주로 반응함으로써 ... 가난한 사람들은 ... 민주주의 이전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차지해야 했던 위치, 즉 정치 참여가 배제된 위치로 자발적으로 돌아가는”(콜린 크라우치) 것으로 묘사되거나 삼십 년에 걸쳐 인간 그 자체를 비롯해 인간의 모든 영역과 활동을 특정 경제적 이상에 맞춰 변형시킨 통치 합리성으로 널리 그리고 깊숙이 퍼지며 발전한 이성 체계”(브라운), 또는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팽팽하게 긴장시켜야 하는 죽음의 경주를 닮은삶의 양식을 강제하는 시장 전체주의”(쉬피오)로 규정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모든 표현과 묘사, 규정은 결국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사실은 광범위한 인민 대중에 대한 지배로서의 과두제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으로 귀착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을이란,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의 피통치자, 피지배자, 피억압자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개념화해볼 수 있다. 이처럼 이해된 을이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부당한 억압과 폭력, 차별과 배제, 모욕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모두일 것이며, 이들은 아마도 우리 사회의 대다수의 구성원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을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des sans part)이라고 부른 이들과 같은 이들이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

 

3.2. 보편의 잔여로서의 을: 일회용 인간

 

하지만 이러한 외연적 규정만으로는 갑을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을의 정치적 존재론 상의 지위에 대하여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 예컨대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의 피통치자, 피지배자, 피억압자라는 규정만으로는,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던, 각각의 부문 내에서의 갑을 관계와 을의 지위가 다른 부문에서의 갑을 관계 및 을의 지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제대로 해명하기 어렵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을에 대한 두 번째 존재론적 규정을 제시해본다면, 을은 보편의 잔여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이는 에티엔 발리바르가 내적 배제라고 부른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좀 더 일반화하고 심화하는 규정이다. “내적 배제의 형식적 특징은, 배제된 이가 진정으로 통합될 수도 없고 실질적으로 제거될 수도 없다는 점, 심지어 단도직입적으로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릴 수도 없다는 점이다.[E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p. 221.] 이러한 내적 배제 개념은 우리가 을이라고 규정하는 이들의 존재론적 특성을 잘 표현해준다. 을은 공동체 바깥으로 배제되거나 공동체에서 제거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이들이 없다면 공동체는 재생산되거나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을은, 특히 을의 을은 공동체 내부에 존재해 있지만, 그 공동체의 정당한 성원으로서의 자격 및 지위를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운 이들이다. 역사적인 사례에서 본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은 고대 도시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시민의 지위에 속할 수 없었던 여성들이나 아이들, 노예들이었다. 또한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이단자들이나 종교적 소수자들 역시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할 수 없었던 19세기의 노동자들(말 그대로 프롤레타리아들’)이나 20세기 전반기까지의 여성들 및 흑인들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이었다. 또한 21세기 오늘날의 경우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은, 이주노동자들, 성적 소수자들, 난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특수한 부문에 속한 이들만이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인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귀족들에 비해 열등한 지위에 놓여 있었던 데모스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로마 사회라면, 로마 사회의 합법적인 시민을 뜻하는 포풀루스(populus)의 일부이지만, 열등하고 비천한 일부로서의 플레브스(plebs)도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에 해당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경우에는, 김혜진이 적절하게 표현한 바와 같이 ‘2등 국민으로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김혜진, 󰡔비정규사회󰡕, 후마니타스, 2015.] 곧 을(또는 을의 을)의 지위에 놓이도록 구조적으로 강제되는 사람들, 2등 시민, 2등 국민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이러한 내적인 배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적 배제는 단순히 빈곤함이나 특정한 자격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적정한 수준으로부터 멀리 밀려나 있는 상태[신명호, 󰡔빈곤을 보는 눈󰡕, 개마고원, 2013, 77.]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남들이 다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연애, 결혼, 육아, 휴가, 여행 등), ‘남들이 다 누리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노동권, 사회권, 심지어 인간의 권리까지도), ‘남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갖지 못하는 이들(주거, 소득, 연금 등)이다. 또한 동시에 그들은 이러한 배제 내지 잔여로서의 자신들의 지위를 당연한 것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불평등한 위치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권리가 없거나 극히 적으며, 그러한 항의를 통해 그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은 경우 이들은 누군가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희생되고 주변화되어야 하는 사람이며, 누군가의 권리 쟁취를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이들이다.


심지어 이들은 정상적인자본주의적 착취가 가능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최근의 여러 작업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의 착취”(exploitation)가 가능하기 위해 미리 전제되어야 하는 또 다른 수준의 착취, 말하자면 착취의 착취에 해당하는 개념을 수탈”(expropriation)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한 바 있다.[Nancy Fraser, “Behind Marx’s Hidden Abode: For an Expanded Conception of Capitalism”, New Left Review, no. 181, 2015; “Roepke Lecture in Economic Geography: From Exploitation to Expropriation”, Economic Geography, vol. 94, no. 1, 2018; Nancy Fraser & Rahel Jaeggi, Capitalism: A Conversation in Critical Theory, Polity, 2018을 각각 참조.] 이것은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에게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자는 생명체로서 탄생해야 하고 양육되고 교육되어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 성장해야 하며, 또한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삶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노동을 맡아서 수행해주는 누군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후자의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따라서 생산적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축적의 회로 바깥에 존재한다. 또한 중심부 자본주의 노동자들 및 그의 가족들이 생필품을 싼 값에 구입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부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회로 안팎에서 저임금과 초과노동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는 다른 존재들이 항상 이미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프레이저가 말하는 착취와 구별되는 수탈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론적 위상을 왜 보편의 잔여라고 표현하는가? 우선 내가 보편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를 조금 더 정확히 밝혀두자. 그것은 근대 민주주의가 자신의 원리로 전제하고 있는 보편을 의미한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의미의 민주주의적 보편의 특성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 중 하나는 에티엔 발리바르다. 그는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아 발표한 평등자유 명제라는 논문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평등자유’(égaliberté)라고 정의한 바 있다.[E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발리바르가 흔히 사용되는 평등한 자유’(égal liberté, 영어로는 equal liberty)라는 개념 대신 평등과 자유를 합친 일종의 혼성어로서의 평등자유를 근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로 제시한 이유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를 이루는 평등과 자유라는 두 개의 개념이, 사람들의 통념과 다르게 서로 분리할 수 없게 결부되어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발리바르의 논점을 간략하게 설명해본다면, 그는 근대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텍스트인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하 권리선언으로 약칭하겠다)의 논리적 핵심을 두 가지 명제, 인간 = 시민 명제와 평등 = 자유 명제에서 찾는다. 첫 번째 명제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가 어떤 자연적인 토대(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든 자연권이든 간에)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는 각각의 시민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부여하고 또 보증하는 권리라는 점을 뜻한다. 이 때문에 근대 민주주의는 고대 민주주의와 달리 평등을 자유의 한계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곧 고대 민주주의에서 평등의 선행적 조건은 자유 시민(자유로운 성인 남성)이라는 사실이었고, 따라서 여성이나 아이 또는 노예는 평등한 시민의 자격에서 배제되었다면, 근대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자유를 긍정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을, 적어도 그 원리에서는 시민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듯, 인권은 그 자체가 정치적 권리이며, “정치에 대한 인간의 권리”[Ibid., pp. 66-67]를 함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명제는, 자유와 평등을 각각 상이한 규범적 가치, 따라서 서로 다른 것 없이 독자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그리고 자주 서로 대립하는 개념적 실체들로 간주해온 오래된 철학적 주장들과 달리, 이 두 가지 개념 각자가 자신의 성립 조건으로서 다른 개념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곧 자유 없이는 평등도 존재할 수 없고, 평등 없이는 자유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하는 조건들의 사례는 없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Ibid., p. 71]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평등 = 자유라는 명제다. 예컨대 자유가 평등이 아니라면, 곧 자유가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성립하는 자유라면, 그때 자유는 우월성이나 특권의 표현(강자의 자유, 귀족의 자유, 갑질의 자유 등)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신보다 우월한 어떤 힘이나 세력에 복종할 수 있는 자유, 따라서 실제로는 전혀 자유라고 할 수 없는 자유(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생산수단으로부터 이중으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자유가 실제로는 전혀 자유가 아닌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평등과 결합되어야 하며, 역으로 평등은 모든 예속과 지배에 대한 근본적 부정의 일반 형식으로, 자유 그 자체의 자유화/해방(libération)으로 사고되어야 한다.”[Ibid., p. 72] 따라서 발리바르의 평등 = 자유 명제가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인간 = 시민의 동일성의 의의는 정치적 권리에 대한 정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긍정”[Ibid.]에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민주주의는 평등자유 명제, 곧 인간 = 시민 명제와 평등 = 자유 명제의 보편성 위에 설립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보편의 잔여가 을의 두 번째 존재론적 규정이 될 수 있는 것은, (및 을의 을)이라는 존재자가 이러한 의미의 평등자유 명제의 보편성을 잠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잠식은 결여의 형태를 띤 잠식이 아니라 오히려 잉여의 형태, 무언가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 더 이상 필요 없는 잔여의 형태를 띤 잠식이다.[영어로 표현한다면, superfluousnesssurplusage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성원임에도, 그 공동체에서 내적으로 배제되는 이들, 이들은 공동체 내에서 쓸모없고 무가치한 이들, 마치 일회용 휴지처럼 그때그때 쓰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내버려도 되는 이들, 언제든지, 얼마든지 다른 이들이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이들, 따라서 일회용 인간(disposable people, homme jetable)과도 같은 지위로 규정되는 이들, 이것이 을의 두 번째 존재론적 규정을 내가 보편의 잔여라고 부르는 이유다.


조금 더 부연해보자. 평등자유 명제를 핵심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성은 부정적 보편성, 절대적 비규정성[Étienne Balibar, Op. cit., p. 72]을 특징으로 하는 보편성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비규정적 보편성으로 인해 평등자유 명제는 근대성 내내,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혁명적인 함의를 보존하고 있다. 예컨대 평등자유 명제는 19세기 노동자들의 권리투쟁에서만이 아니라 20세기 여성해방투쟁과 식민지해방투쟁, 흑인들의 인권운동, 그리고 21세기의 이주노동자 권리투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 투쟁의 상징적 지주로 작용해왔다. 만약 평등자유 명제가 오직 노동자들의 해방투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곧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부르주아들과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만 효용이 있는 것이었다면, 평등자유 명제의 중요성은 훨씬 감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평등자유명제󰡕 이외에도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나 󰡔정치체에 대한 권리󰡕 같은 저작에서 잘 보여주었듯이,[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세계화와 정치의 재발명󰡕,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 참조.] 그리고 랑시에르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불화: 정치와 철학󰡕에서 이른바 평등의 삼단논법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훌륭하게 해명한 바 있듯이,[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3 󰡔불화: 정치와 철학󰡕, 앞의 책 참조.] 평등자유 명제 또는 (랑시에르의 경우에는) 평등 명제는 노동자들의 해방투쟁만이 아니라 여성해방투쟁, 식민지해방투쟁, 이주자들의 권리투쟁과 같은 근대의 모든 해방투쟁에서 피억압자, 피지배자, 따라서 을들의 투쟁을 위한 필수적인 준거로 기능해왔으며, 이것이 바로 그 명제를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 명제로 만든 요인이다.


그런데 평등자유 명제 또는 평등 명제는 한편으로 보면 갑의 지배에 맞선 을들의 민주주의 투쟁을 위한 훌륭한 토대가 되어 주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자신의 불가피한 한계를 드러냈다. 그 이유는 을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평등자유 명제의 비규정적 보편성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평등자유 명제 또는 평등 명제의 보편성은, 그것이 비규정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또 다른 차이와 구별, 따라서 배제를 산출한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를 인권의 역설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1973;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방금 살펴본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르면 인권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채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 자신을 포함한 이민자들, 이주자들, 난민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혁명에서 제창된 인권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며(왜냐하면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는 인권이라기보다 영국인의 권리라고 주장했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곧 인권은 시민의 권리 또는 국민의 권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고 그것을 근거 짓기는커녕 오히려 특정한 나라의 국민으로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실제로 인권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내전이나 기아 등을 피해 자기 나라를 떠난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쉽게 입국할 수 없을뿐더러, 어찌어찌해서 입국한다고 해도 그 나라 국민들과 평등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그들에 비해 훨씬 열악하고 불평등한, 그리고 부자유스러운 처지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주자 내지 이민자 또는 난민들은 바로 보편의 잔여로서 존재한다.


이것이 철학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뜻하는 바는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는 바로 그 원리 자체로 인해 이전의 정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근본적인 배제, 곧 잔여 내지 잉여로서의 을들 및 을의 을들을 산출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아렌트가 말하듯, 어떤 나라의 국민에 합법적으로 소속될 경우에만 시민으로서의 권리,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고 실제로 향유할 수 있다면, 역으로 그것은 누군가가 어떤 나라의 합법적인 국민이 아니라면, 그는 단지 시민으로서의 권리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 자체를 부정 당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곧 누군가가 어떤 정치공동체의 성원에서 배제되는 순간, 그는 사실상 인간 공동체 전체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배제의 형태가 민주주의적 보편의 원리 자체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지만, 이는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목격하고 경험하게 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보편의 잔여로서 을들의 지위를 표현해주는 충격적인 개념이 일회용 인간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원래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학자들이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라틴 아메리카 광산 노동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주변부 국가들 도처에서, 그리고 이른바 선진국내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좀 더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일회용 인간이라는 개념 이외에도 일회용 노동자’, ‘일회용 청년같은 용어들도 쓰이고 있다. 케빈 베일스, 󰡔일회용 사람들: 글로벌 경제 시대의 새로운 노예제󰡕(1999), 이소, 2003; Fred Magdoff & Harry Magdoff, “Disposable Workers: Today's Reserve Army of Labor”, Monthly Review, vol. 55, no. 11, April 2004; 헨리 지루, 󰡔일회용 청년: 누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드는가󰡕, 심성보 옮김, 킹콩북, 2015.] 현대 사회의 노예제도에 관한 전문가인 케빈 베일스는 일회용 인간은 현대적 노예 제도의 표현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잠재적 노예의 절대적 공급 과잉 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수요 공급 법칙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 노예와 노예 소유자의 관계는 그 본질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일회용처럼 되면서, 노예로부터 얻을 수 있는 수익이 극적으로 증가했고, 한 사람이 노예로서 사는 기간이 줄어들었으며, 법적 소유권이라는 문제는 중요치 않게 되었다. 노예 구입에 많은 비용이 필요했을 때, 그 투자는 명시적인 법적 소유권 문서를 통해 안전성을 보장받아야 했다. 과거의 노예는 훔칠 만한 그리고 탈출하면 추적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현대의 노예는 아주 값싸기 때문에 '법적' 소유권을 애써 보장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 노예는 일회용 인간이다.[케빈 베일스, 󰡔일회용 사람들: 글로벌 경제 시대의 새로운 노예제󰡕, 30.]

 

그리고 이러한 일회용 인간은 우리나라에서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2018911일 방영된 문화방송(MBC)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피디수첩에서는 한국전력의 일회용 인간들이라는 제목 아래, 공기업 한국전력에서 배전 업무를 담당하는 하청업체 직원들의 위험한 상황을 보도한 적이 있으며,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는 “'일회용 인간'에게 강제 노동시키는 한국 언제까지?”라는 제목 아래 연속 기획으로 이주노동자들이 고용 허가제아래에서 경험하는 극단적인 착취와 폭력, 인권 침해의 현실들을 탐사 보도한 바 있다.[󰡔프레시안󰡕 2013628일 기사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2167#0DKU]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회용 인간이라는 개념이 단지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우리 시대, 곧 신자유주의적인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의 효과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자신의 처지가 일회용 인간과도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비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이주 노동자들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알랭 쉬피오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노동조직은 과거의 포드주의적 타협과 달리 테일러주의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오늘날의 노동 과정에서 테일러주의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대표적인 물류기업 쿠팡에서 시행한다고 하는 시간당 생산량’(UPH, unit per hour) 시스템은 테일러주의의 현대적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성과경영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성과경영 체제에서는 위에서 주어진 명령에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프로그램에 의해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들 개개인이 지닌 노동 능력을 자율적으로 최대한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더욱이 성과경영 체제에서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경영자를 포함한 모두가 제어된다.” 다만 성과에 비례하여 경영자 내지 관리자들은 보너스나 스톡옵션 등의 당근을 받는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더 많은 채찍이 가해진다는 점(고용의 불안, 고용 내의 불안)이 다를 뿐이다. 더욱이 이른바 ‘3차 산업혁명’(제레미 리프킨) 내지 ‘4차 산업혁명’(클라우스 슈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경제에서의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은 비정규노동을 넘어 훨씬 더 파편화되고 불안정한 노동들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디지털 전환과 이에 따르는 노동 형태의 변화에 대해서는 김영선,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상, 󰡔IDI도시연구󰡕 18, 2020; 김종진, 디지털 플랫폼노동 확산과 위험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 󰡔경제와 사회󰡕 125, 2020 참조.] 긱 경제(gig economy)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러한 경제에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가중된 경쟁 속에서 저임금과 고용 불안을 감수해야 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고용 형태에서 노동자들이 보장받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3.3. 유사초월론적인 것으로서의 을

 

그런데 만약 을들이 이처럼 보편의 잉여 내지 잔여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실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이 더 이상 보편으로서 성립하지도 기능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내적으로 배제된 존재자들로서의 을은 그들의 존재 자체가 보편의 가능성 및 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배제된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들 = 시민들의 보편적인 평등과 자유를 가리키는 평등자유 명제를 부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명제에 입각한 민주주의 공동체의 토대 자체를 내부에서부터 와해시키는 것이다. 이로부터 을의 세 번째 존재론적 규정을 도출할 수 있다. 그것은 보편의 잔여로서의 을은 보편이 보편으로 성립하기 위한 시금석 내지 관건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금석은 데리다가 말하는 의미에서 아포리아적인 것,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이다.[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참조.] 왜냐하면 보편적인 평등자유를 잠식하는 것,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다름 아닌 보편적인 평등자유 명제 그 자체에서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을은 보편적인 평등자유명제에 기반을 둔 근대 민주주의에 대하여, 데리다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유사초월론적인(quasi-transcendental) 조건으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칸트 또는 후설의 고전적인 초월론 철학과 구별되는 유사초월론에 대한 한 가지 정의는, 유사초월론은 가능성의 조건은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유사초월론: 데리다와 이성의 탈구축, 󰡔철학논집󰡕 53, 2018 참조.]


이점에 관해 조금 더 부연해보자. 보편의 가능성 및 현실성을 부정하는, 내적으로 배제된 존재자들에 직면하여 근대 민주주의(더 나아가 민주주의 일반)의 근본 질문은 항상 다음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내적으로 배제된 존재자인 을들을 민주주의 공동체 내부로 포함시킬 수 있을까? 또는 을들을 공동체의 온전한 성원으로 포함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공동체는 어떻게 개조되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이 질문은 랑시에르가(그리고 또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역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포스트 민주주의적인 퇴락의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를 재발명하기 위해 제기했던 질문이다. 랑시에르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집약하는 정치에 대한 10개의 테제가운데 다섯 번째 테제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개념화한 바 있다.

 

테제 5. 민주주의의 주체이며,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인 인민(peuple)은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나 인구 중 노동하는 계급도 아니다. 인민은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관하여 대체 보충적인 부분(partie supplémentaire)으로,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Jacques 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Gallimard, 2004, pp. 233~34;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216. 번역은 다소 수정.]

 

이 테제의 핵심은 대체 보충적인 부분이라는 어휘다. 이것은 데리다의 대체보충’(supplément)이라는 개념을 랑시에르가 정치철학적으로 응용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루소의 저작을 분석하면서 대체보충이라는 개념을 처음 고안해냈다.[Jacques Derrida, 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 참고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의 국역본은 두 종이 존재하지만, 모두 심각한 번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국역본만으로는 데리다의 논지를 이해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루소는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문자 기록(écriture)위험한 보충물”(dangereux supplément)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문자 기록은 음성적인 언어인 말을 보조하고 보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점차 말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자크 루소,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주경복고병만 옮김, 책세상, 2002.] 루소는 이처럼 문자 기록의 부정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쉬플레망, 곧 대체보충 개념을 사용했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기원이라는 것의 존재론적 부재와 문자 기록의 (역설적인) 근원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했다. 우리가 기원이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현존(Anwesen, présence) 그 자체는 사실은 무한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으로부터 사후에 파생된 것이며, 이러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은 결국 (문자) 기록의 경제(이는 곧 차연différance)의 경제이기도 하다)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이는 로고스 중심주의 및 음성 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서양의 현존의 형이상학을 탈구축하려고 했던 초기 데리다 작업의 핵심을 이룬다.


데리다의 대체 보충 개념을 랑시에르는 인민 개념과 관련하여 활용한다. 5번째 테제에서 랑시에르가 인민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때 핵심 논점은 세 가지다. 첫째,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주체를 인민으로 정의하는데, 단 이러한 인민은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우리나라의 용어법으로는 국민’)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의 주체 = 정치의 주체는 단순히 어떤 정치 공동체의 합법적인 성원들의 전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본다면,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라는 규정은 갑과 을 사이의 차이, 갑을 관계를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이는 갑을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의 주체의 본질,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본질을 정의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더욱이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인민은 인구 중 노동하는 계급과 같은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랑시에르가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관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역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부연해 본다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정치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이라는 개념은,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인민에 대한 정의를 충족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만으로는 을 전체를 온전히 개념화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만이 을이 아니라, 여성도 을이고, 성적 소수자도 을이며, 흑인도 유색 인종도, 난민도, 이주자도 역시 을인 것이다. 더 나아가 외연적으로만이 아니라 내포적으로도 노동자 계급은 을이라는 개념을 포괄하는 데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 내부에도 갑을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따라서 랑시에르는 인민을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라고 정의하는 대신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관하여 대체 보충적인 부분이라고 재정의한다. 이 정의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이라는 문구다.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인민은, 인구를 이루는 부분들이 공동체에서 몫을 나누어가질 자격에 대한, 그리고 이 자격에 따라 그들에게 돌아올 몫들에 대한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이다. 인민은 셈해지지 않은 이들에 대한 셈 또는 몫 없는 이들의 몫, 곧 말하는 이들의 평등이러한 평등이 없이는 불평등 자체도 사고 불가능하다을 기입하는 대체 보충적 존재다.”[Jacques 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pp. 234~3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243-번역은 수정. 강조 표시는 필자.] 여기에서는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이라는 문구가 중요하다. 우선 모든 실제의 셈이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 곧 각각의 개인과 집단, 계층과 계급들이 그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갖게 되는 몫에 대한 규정을 뜻한다. 이러한 몫은 좁은 의미의 경제적 이익이나 권리들만이 아니라 각각의 부분이 지니는 정체성과 성질 및 자격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이 인민이라는 주장은, 이러한 인민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계급이나 집단, 개인이 지닌 정체성과 무관한 것, 곧 그들이 지닌 속성이나 자격, 정체성에 덧붙여진 추가적인 속성 내지 자격으로 구성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실제의 셈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분배의 몫을 규정하는 데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정치 공동체인 한에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성원들이 항상 이미 지니고 있는 속성 내지 자격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11같은 표현이 여기에 해당한다. 재벌이든 비정규직 노동자든, 대통령이나 장관이든 아니면 주민자치센터의 말단 직원이든 민주주의 정치체에서는 모든 시민이 동등한 투표의 권리를 지닌다. 이러한 동등한 투표의 권리는, 랑시에르가 말하듯이,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곧 각각의 성원의 자격이나 속성 등과 무관하게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는 속성이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은, 재벌로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또는 대통령이나 장관으로서, 아니면 주민자치센터의 9급 직원으로서 갖는 이런저런 자격이나 정체성과 무관하게, 평등한 권리들을 지닌 개인들 및 집단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인민이 대체보충적인 부분인가? 이러한 인민이 대체하면서 보충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간략하게 말한다면, 이러한 의미의 인민이 대체하는 것은, 랑시에르가 아르케(arkhe)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르케는 시초’(기원), ‘원리’, 그리고 지배와 같은 다의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이었다. 랑시에르는 아르케라는 개념을, 앞에서 말했던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에 입각하여 인민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어떤 공동체 성원들의 속성 내지 자질과 그에 따른 분배의 몫을 규정하는 원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공동체 성원들의 속성이나 자질에서는 당연히 차이(예컨대 연령의 차이, 성별의 차이, 외모의 차이 등), 더 나아가 우열(예컨대 지식의 정도, 기능의 정도, 신체적 능력의 정도, 부유함의 정도 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르케를 기반으로 구성된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불평등과 위계를 포함하는,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 정당한 것으로 허용하는 공동체가 된다. 랑시에르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나 미국혁명 같은 근대적인 시민혁명을 통해 성립한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 전 6세기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룩한 민주주의 개혁을 민주주의에 그것의 장소를 부여하는 중대한 개혁”[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앞의 책, 242.]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개혁을 통해 아르케에 입각한 통치 체제, 곧 자연적 불평등에 기반을 둔, 몫 없는 이들(곧 을)에 대한 몫 있는 이들(곧 갑)의 지배를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통치 체제와 단절하고,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서의 민주주의 정치가 역사상 처음으로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적인 의미의 민주주의는 군주제나 귀족제와 같은 다른 정치 체제와 구별되는 하나의 정치 체제(regime)가 아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정치 그 자체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랑시에르 식의 용어법에 따르면 오직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 정의되는 민주주의 정치만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이며, 나머지 정치는 사실은 치안(police)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민이란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에 따라 규정되는 인민만이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이며, 나머지 인민들, 곧 민족적 특성에 따라 규정되거나 국민적 자격(국적(nationality) 내지 시민권(citizenship))에 입각하여 구별되는 인민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치안적인 집합체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의 민주주의 개념은 보편의 잉여 내지 잔여로서의 을을 민주주의 공동체 내부로 포함하기 위한, 역으로 말하자면 을에 입각하여 민주주의 공동체를 개념적으로 개조하려고 시도한 가장 급진적이고 탁월한 시도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랑시에르의 이러한 시도는, 내가 앞서 지적했던 한 가지 아포리아에 직면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랑시에르는 데리다가 사망한 뒤 그를 기념하기 위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에서 데리다와 자신의 정치철학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조금 길지만 그 중 중요한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경악스러운 원리를 의미한다. 지배하는 사람은, 왜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아무 이유가 없다는 사실 말고는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근거들 위에서 지배한다는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무정부적/무근거적(anarchical) 원리이며, 이는 권력과 데모스 사이의 이접적인 연결이다. 역설적인 것은, 민주주의의 이러한 무정부적/무근거적 원리가 정치 공동체 및 정치권력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한 유일한 근거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적 대체보충 또는 과잉이 의미하는 것이다. ... 데모스는 사회적 차이화들의 집합에 대한 대체보충이다. 데모스는 아무런 권한도 갖지 않은 이들, 계산에서 아무런 단위로 셈해지지 않은 이들로 이루어진 대체보충적인 몫이다. 나는 이것을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패배자들이 아니라 아무나, 누구든을 의미한다. 데모스의 권력은 아무나의 권력이다. 그것은 무한한 대체 가능성의 원리 또는 차이에 대한 비차이/무관심(indifference to difference), 공동체의 근거에 놓여 있는 일체의 비대칭 원리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데모스는 그것이 사회의 몫의 계산에 대해 이질적인 한에서 정치의 주체다. 그것은 타자(heteron)이지만 특수한 종류의 타자인데, 왜냐하면 그것의 타자성은 대체 가능성에 상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Jacques Rancière, “Should Democracy Come?”, in Pheng Cheah & Suzanne Guelac eds., Derrida and the Time of the Political, Duke University Press, 2009, pp. 276-77. 강조는 필자.]

 

여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이 대목에서 랑시에르는 자신의 민주주의론의 핵심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데모스의 권력, 인민의 권력을 아무나의 권력이라고 규정하는 부분이다. 사실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음(an-arkhe)으로, 단순히 무-정부적인 것을 넘어서, -원리적인 것, -근거인 것으로 정의되면, 그리고 데모스 내지 인민이 사회의 몫의 계산에 대해 이질적인것으로,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으로 정의되면, 데모스는 아무나, 누구든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에서는 아무나, 누구든 1표를 행사한다. 그가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아니면 말단 공무원이든, 또는 그가 재벌이든 노숙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또는 퀴어이든,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평등하게 1표만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주체는 개인적인 차이(성별, 인종, 고향, 직업, 나이 등)나 우열(지식의 정도, 기술적 능력의 정도, 부유함의 정도 등)과 무관하게, 그러한 속성이나 자격 또는 정체성에서 추상하여 규정된 주체, 아무나, 누구든이며, 인민은 이러한 아무나의 집합이다.


랑시에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아무나, 누구든을 무한한 대체 가능성의 원리 또는 차이에 대한 비차이/무관심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규정 덕분에 아무나의 권력으로서, 보편적 평등자유로서의 민주주의가 함축하는 또 다른 측면이 드러난다. 아무나가 무한한 대체 가능성을 뜻하고, 차이에 대한 비차이 또는 차이에 대한 무관심을 뜻한다면,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데모스 내지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무한하게 대체 가능한 존재자들이며, 그 개인들이 지닌 차이나 우열에 대해 무관심한 개인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무한한 대체 가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근대적인 것(modern thing), 근대적 사물이 또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상품이다. 데모스가 아무나, 누구든을 의미하는 것처럼, 상품 역시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아무 것이든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등가적이기만 하다면, 곧 평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두 개의 상품은 서로 대체 가능한 것이며, 그것들 사이의 차이(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사용가치’)가 문제되지 않는다. 실제로 상품은 매우 민주주의적이다. 그것은, 적어도 원리상으로 본다면 자신을 판매하는 이가 누구인지(여성인지 남성인지,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국적이 어떤 것인지), 누가 그것을 구매하는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누군가 그것에 상응하는, 그것과 대체 가능한 가치를 지불할 수 있다면, 상품은 기꺼이 다른 상품과 대체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논리는 바로 상품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상품의 논리가 관철되는 시장이야말로 가장 민주주의가 잘 전개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상품만큼 서로 대체 가능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상품만큼 아무나, 누구든 가리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상품 이외에 무한한 대체 가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또 다른 존재자, 또 다른 근대적인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일회용 인간들이다. 사실 일회용 휴지가 다른 일회용 휴지와 아무런 차이 없이, 차이에 대해 무관심하게 대체 가능하듯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무한하게 대체 가능한 인간, 그것이 바로 일회용 인간의 정의가 아닌가? 일회용 인간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다른 이들이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이들이며, 완벽하게 상품화된 인간이다. 그런데 랑시에르의 정의를 존중한다면, 바로 이러한 무한한 대체 가능성으로 인해, 그들은 또한, 아무리 이상하고 역설적이게 들린다고 해도, 완벽하게 민주주의적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민주주의적인 데모스의 아무나와 상품의 아무나, 그리고 일회용 인간의 아무나를 동일시할 수 있는가? 전자는 무엇보다 인격체이고, 상품은 사물이며, 일회용 인간은 존엄한 인격체여야 마땅한 인간을 사물로, 그것도 하찮은 사물로 취급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 세 가지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자연스러운 의문이고 문제제기이지만, 랑시에르가 데모스를 아무나, 누구든으로 정의하는 한, 민주주의를 데모스의 권력으로, 따라서 무한한 대체 가능성의 원리로 정의하는 한, 세 가지가 동일시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논리적 귀결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의에는 인격체와 사물의 구별, 전자는 후자와 구별하여 존엄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는 규정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오늘날 자신을 더 값비싼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몸값을 더 높이기 위해, 따라서 자신을 상품화, 사물화하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존엄한 인격을 지닌 데모스들 아닌가?


더 나아가 이것은 랑시에르가 민주주의를 너무 과도하게 정의한 데서 생겨나는 문제점일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사실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 그 자체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것의 귀결이다. 우리가 앞서 발리바르의 평등자유 명제를 다루면서 언급했던 근대 민주주의의 성전인 인권선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버크는 인권선언에 나타난 인권의 담지자인 추상적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국민과 그가 지닌 권리만이 실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큰 혼란을 양산해온 허세뿐인 인권이 국민의 권리일 리 없다. 국민이 되는 것과 이런 권리를 갖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존재를 가정하고, 후자는 시민 사회 상태의 부재를 상정한다.”[Edmund Burke, Further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edited by Daniel Ritchie, Liberty Fund, 1992, pp. 163~64; 유벌 레빈,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보수와 진보의 탄생󰡕, 조미현 옮김, 에코리브르, 2016, 90쪽에서 재인용.] 마르크스 역시 다른 측면에서 인권선언의 인간 및 인권의 추상성을 비판한다. 인권선언이 말하는 모든 사람의 평등한 자유는 법적정치적 영역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경제 영역에 존재하는 개인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 영역에서 사람들은 소유자와 비소유자, 다시 말해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살아가는 노동자로 분할되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는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할 뿐, 인권선언이 말하는 평등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오히려 만약 양자 사이에 평등한 자유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계급적 현실을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혁명 이후 인권선언200년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형태의 해방운동 및 을들의 투쟁을 위한 강력한 상징적 토대로 작용했다면, 이는 정확히 인권선언이 말하는 인간이 이런저런 구체적 개인들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권선언이 사람은 국적과 관계없이, 재산 유무에 관계없이, 피부색에 관계없이, 종교에 관계없이, 성별에 관계없이, 또 연령에 관계없이, 사람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로 간주되며 또 그렇게 간주되고 존중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인권선언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적인 주체, 민주주의적인 인간은 사실 그 기원에서부터, ~ 없고 ~ 없고 ~ 없는 인간, 곧 랑시에르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인간, “무한한 대체 가능성의 원리 또는 차이에 대한 비차이/무관심으로 특징지어지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론을 대신하여

 

이렇게 해서 우리는 머리말에서 말했던 것처럼, 을의 정치적 존재론을 탐색한 끝에 하나의 아포리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을의 존재론적인 특성을 과두제의 지배 아래 있는 피통치자 일반으로 규정하는 것은 외연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겠지만, 을의 내포적인 특성을 해명하는 데는 미흡하다. 그리하여 을은 다시 보편의 잔여 내지 잉여로서 정의되었는데, 보편적인 평등자유 명제의 토대를 잠식하는 이러한 정의, 일회용 인간으로서의 을이라는 정의는 실로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서의 갑을 관계, 을의 존재론적 문제성을 드러내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잔여 내지 잉여로서의 을들을 민주주의적 공동체 안으로 포함시킬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개조되어야 할까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의 포스트 민주주의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대신 오히려 일회용 인간으로서의 을들의 생산을 불가피한 것으로 가정하면서 고작해야 그 잔혹성을 완화하거나 아니면 그 고통을 을들 사이에 불평등하게 배분함으로써(말하자면 을과 병, 병과 정 등을 차별화함으로써) 민주주의적 공공성이 감당해야 할 정치적 책임을 을들이 끝없는 생존투쟁을 통해 스스로 획득해야 할 개개인의 기업가적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는 만큼, 그 질문의 긴급함과 중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질문이 확정적인 답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인 하나의 아포리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아포리아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비로소 생겨나게 된 아포리아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논의가 얼마간 일리가 있는 것이라면, 근대 민주주의(고대 민주주의의 경우는 더욱 더)의 원리 자체에 내재해 있는 아포리아다. 이러한 아포리아를 확인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무언가 긍정적인 또는 생산적인 효과를 산출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을 텐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논점을 덧붙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다. 을의 정치적 존재론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을은 갑에 대하여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고 있지만, 동시에 병이나 정에 대해서는 지배적인 위치 내지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을은 종속자이면서 지배자이고, 열등한 자이면서 우월한 자이다. 을이 갑에 의해 착취와 억압 또는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을은 또한 병이나 정 등에 대하여 또 하나의 갑으로서 군림할 수 있으며, 때로는 자신이 갑에게 당하는 갑질보다 더한 갑질을 병이나 정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을이든 병이든 정이든 또는 그 아래의 다른 개인들이나 집단들이든 간에, 이들 모두는 갑에 대하여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통의 종속성을 넘어, 때로는 그러한 공통성 이상으로 을들 사이에는 착취와 억압, 혐오와 배제의 관계가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갑과 을 사이의 갈등 내지 적대를 넘어, 을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갈등과 적대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그것은 원래 그런 것, 인간 사회에 내재하는 모종의 불가피한 속성일까?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다보면 원래 위계가 생길 수밖에 없고, 누구는 우월한 위치에, 누구는 열등한 위치에, 누구는 지배하고 누구는 복종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성립하는 것일까? 에드먼드 버크를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반면 랑시에르 같은 급진 민주주의자라면, 그것은 정치와 치안이 더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은 결과이며,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서, 아무나의 정치로서 민주주의가 충분히 실천되지 못한 결과라고 답변할 것이다. 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좌파 연구자들이라면, 그것은 계급적인 지배의 효과이거나 적어도 신자유주의적인 원리가 사회 전체로 침투한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버크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갑과 을 사이의 지배와 복종의 관계 및 을들 사이의 갈등과 적대의 관계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매우 뿌리가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랑시에르와 같은 탁월한 급진 민주주의자가 민주주의의 원리를 동어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것 이상으로 사유하지 못할 만큼 민주주의의 맹점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갑을 관계의 문제가, 을과 을 사이의 갈등과 적대가 신자유주의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또는 가부장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아니면 또 다른 이런저런 구조적인 요인의 결과라고 제시하는 것은 유용하고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문제의 존재론적 깊이에는 미달하는 것이다.


정치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평등자유의 보편성 내에서, 민주주의적인 아무나와 누구든의 보편성 내에서 차이와 독특성(singularity)을 사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와 독특성을 사고하고 제도화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한에서, 그것이 남긴 공백은 다른 종류의 차이와 우열로 메워질 것이다. 아무나와 누구든 사이의 차이, 아무나와 누구든이 지니는 독특성이, 아주 드문 경우들(대개 혁명의, 봉기의, 기적과 같은 연대의 순간들에서 나타나는)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경험하기 어렵고 사고하고 제도화하기는 더욱 더 어려운 것인 만큼, 그 공백은 그만큼 깊고 넓다. 하지만 포스트 민주주의에 이르러 이제 민주주의의 원리 자체가 잠식당할 위기에 놓인 만큼, 따라서 갑을 관계가 사회 전체로 더욱 확산되고 있는 만큼, 이러한 공백들을 사유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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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1-11-22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세요?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갑질로 변질된 것에서 찾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듯하면서도 눈길을 확 끌어서 다 읽었습니다. 명문이십니다. ^^ 읽고 나니,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여러 생각들이 드는데요. 결론에서는 갑질의 보편성-편재성에 대한 근거로 버크의 추론의 그럴 듯함과 랑시에르의 동어반복에 대한 아쉬움이 대비가 되는 듯합니다. 절대적 갑에 대한 요구나 투쟁뿐만 아니라, 을병정 사이에서도 갑을관계의 분자적 증식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을의 몫을 셈에 넣도록 하는 것도 모든 관계의 마디들에서도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약자에게 갑질하지 말자˝의 윤리적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 곧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대립이건 또는 적대의 다원성이 데모스의 권력으로 전화된 것이건 어떤 비대칭적인 양 편 간의 싸움으로 - 전화시키는 것이 그 비어있음을 채워야 하는 사유 또는 실천인가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하신 것 같은데 제가 너무 단순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성을 갖고 여쭤봅니다. ^^

balmas 2021-11-21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첫번째 독자시네요.^^ 좋은 논평과 질문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제기하고 싶었던 문제는, 결론에서도 말했다시피 ˝독특성˝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민주주의가 평등 원리를 기반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결국 ˝무한한 대체 가능성의 원리˝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 경우 그것을 잘 구현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상품화의 원리인 것으로 보인다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상품화의 원리의 귀결은 ˝일회용 인간의 양산˝인데, 일회용 인간들은 역설적이게도 매우 평등한 존재자들이죠. 그렇다면 평등 원리는 다음과 같은 아포리아적인 등식을 낳는 게 아니냐 하는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습니다. 아무나의 정치 = 보편적 상품화의 경제 = 일회용 인간들 = 을들의 구조적 양산. 따라서 존재론의 수준에서 보면, 이것은 민주주의론, 특히 급진 민주주의론에서 ˝차이˝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독특성˝을 사고하지 못하는 것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것과 연동하는 흐름이 아니냐 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제기하는 질문이었던 셈입니다.

저는 갑을 관계의 문제, 또는 을의 문제가 <잔여>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 글에서 주장한 것처럼 (1) ˝잉여˝ 내지 ˝쓸모없는 이들˝로서 을의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고 (2) 제가 다른 글들, 특히 [착취, 배제, 리프리젠테이션]에서 말했던 것처럼, 갑을 관계의 문제가 마르크스주의 및 해방의 정치론에서 사고 불가능한 문제, ˝잔여˝의 문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존재론의 수준에서 이러한 ˝잔여˝의 문제는 ˝독특성˝의 문제를 사고하지 못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기하신 ˝윤리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의 관계는, 사실 이 글에서 다루는 것과는 조금 다른 수준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지금 제 생각으로는 갑을 관계의 ˝윤리적 문제˝는 <관계적 자율성>, <비지배>, <독특성으로서의 자유>라는 규범적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고, 갑을 관계의 ˝정치적 문제˝는 <국가>, <공통성>, <리프리젠테이션>의 쟁점들과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따라서 제기하신 질문들에 잘 답변하려면 조금 더 작업이 진척되어야 할 듯합니다. 아무튼 흥미로운 질문 감사합니다.

에로이카 2021-11-22 01:50   좋아요 0 | URL
발마스님, 정작 말씀하시려던 중요한 문제는 제가 놓쳤네요.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게 좀 어렵긴 합니다만, 발마스님 덕분에 랑시에르가 좀 가깝게 느껴집니다. 물론 직접 읽을 엄두는 못 냅니다만, 이렇게라도 눈동냥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심신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

balmas 2021-11-22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사실 제가 아직 제기하신 질문에 답변할 만한 준비가 안 돼 있는 거죠. 질문은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안녕하세요 disjunction 님, 

댓글에서 이런 질문을 주셨죠?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좋은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예전에 읽고 쉽게 지나쳤던 부분이 있었는데, 어쩌다 관련 논의를 하다보니 제가 이해를 못 한 부분이 있어서 질문을 드리게 됐습니다. 과소결정에 대한 부분인데요, 혼자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국내의 관련 자료들이 오래돼서 선생님 글 이외에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질문을 드립니다.

 

선생님이 인용하신 알튀세르의 글에는 과소결정이 혁명이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 내지 조건이며, 더욱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자체 내에서 혁명의 진전, 공산주의의 실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 내지 조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을 볼 때, 모순의 과소결정이 혁명의 불가능성만을 의미하는 소극적 개념인지,아니면 과소결정이 혁명의 특정한 방향성을 최소로 지시한다고 보아야 할지 궁금해집니다.

 

모순에 대해 모든 구성적 요소들의 모순의 다양성과 복잡성, 혁명 이후의 회귀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 그 모순의 과잉결정이라면이 과잉결정과 접두어를 공유하는 과소결정은 그 모순의 최소치일테고그래서 알튀세르 자신이 문턱이라고 표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알튀세르는 혁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결정 내지 조건이라고 말하지는 않고 있어서 혼란스럽네요.선생님이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는 공산주의의 경향 내지 잠재력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다른 것들의 쟁점을 과소결정하는 것이라 하셨을 때에는, 과소결정을 혁명을 불가능/가능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결정 내지 조건의 양가성으로 보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인지요?

 

추가로, 저는 이 대목을 이란 혁명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았는데 어떠한 이해가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합당한지 궁금합니다. 이란 혁명 역시 모순의 과잉결정 속에서 발생했고, 또 과잉결정된 요소로 인해 퇴행적 이데올로기들이 강화되고 작동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과소결정에 주목한다면, 이란 혁명이 공산주의 혁명이 아니었던 까닭은 1) 종교적 모순의 과소결정에 의해 경제 모순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2) 경제 모순의 과소결정의 문턱에 의해 경제 모순이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3) 1,2에서 시도하는 구분 자체가 과잉-그리고 과소결정을 이해하는데 적절하지 않고 과잉-그리고 과소결정 개념에 대한 이해가 어긋나있다. 셋 중 어떻게 이해하는 쪽이 옳을까요?

 

짧게나마 답변해주시면 정말 감사 할 것 같습니다 :)

 



간략하게나마, 제 의도를 더 정확히 해명할 겸, 몇 자 답변을 해보겠습니다.

 

질문의 핵심은 중 어떤 것이 과소결정개념의 본질적인 의미인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제 생각에는 과소결정처럼 이해하는 게 적절합니다. 처럼 혁명의 특정한 방향성을 최소로 지시하는 것은 과소결정개념이 아니라, “모순이라는 개념이 감당해야 할 몫이겠죠. 가령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즉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의 방향성을 지시하는 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겠죠. 반면 과소결정은 이러한 모순이 폭발하는 것, 즉 이행이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의 부재 내지 결여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의 경우는 표현이 좀 혼란스럽네요. “모순에 대해 모든 구성적 요소들의 모순의 다양성과 복잡성, 혁명 이후의 회귀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 그 모순의 과잉결정이라면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과잉결정 개념은 모순을 구성하는 요소들, 그리고 그 모순의 존재조건들의 응축(condensation)과 전위(displacement)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에서 접두어의 공유에 대해 말하셨는데, 이러한 공유가 의미하는 것은, 모순은 스스로 폭발하여 이행을 실현하지 않고, 오히려 모순이 폭발하여 이행을 이루는 것은 그 구성 요소들 및 조건들이 응축하고 전위할 수 있느냐 아니면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점이죠.

 

(6-1) 알튀세르는 초기와 달리 후기에 가면, 모순의 과잉결정과 모순의 과소결정을 서로 상이한 의미를 갖는 개념으로 구별한다. 1975년에 발표한 아미엥에서의 주장이 이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6-2) 더 나아가 1975년 텍스트에서 알튀세르가 모순의 과잉- 그리고 과소-결정(sa sur- et sa sous-détermination)”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개념적으로 상당히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은 모든 결정은 항상 과잉과 과소를 함께 수반함을 뜻하며, 이런 경우에만 목적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의 우연성을 일시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운동의 상수로 개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6-3) 그런데 이렇게 우연성의 우연”(발리바르)의 개념적 계기를 받아들이게 되면, 더 이상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또는 계급적 모순은 역사적 운동을 규정하는 유일하거나 지배적인 모순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다원적인 모순들 가운데 하나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6-4) 그런데 이 경우 사고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다원적인 모순들 또는 적대들 사이의 관계가 상호 보완적이거나 친화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절합”(articulation)을 말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계급 모순을 중심으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모순들에 대해서는 그 모순의 폭발을 과소결정하는 것일 수 있다.


(6-5) 이것이 알튀세르의 과소결정 개념, 그리고 우발성의 유물론이라는 개념이 지닌 철학적 흥미로움이면서 난해한 점이다.

 

이란혁명에 관한 부분은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좀 어렵네요. 다만 1)의 경우는 종교적 모순의 과소결정에 의해 경제 모순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기보다는 종교적 모순의 과잉결정에 의해 경제 모순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맞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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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junction 2021-11-07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과소결정과 과잉결정에 대해서 다소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제가 처음에 정리한대로 생각하는게 역시 맞았던거 같네요. 과소결정의 역할에 대해 논의하다보니 과잉결정에서의 응축과 전위를 간과하면서 더 논의가 꼬였는데, 선생님 답변 덕분에 다시 길을 제대로 잡은거 같습니다.
이란혁명 관련 부분은 1) “종교적 모순의 과잉결정에 의해 경제 모순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고 썼어야 하는데 실수로 여기에서도 과소결정이라고 표현을 해버렸네요;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운 질문이었는데 답변에서 잘 정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balmas 2021-11-08 13:48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공부에 큰 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비평이론학회에서 간행하는 [비평과 이론] 26권 2호에 게재될 논문 한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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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문제로서의 포스트코로나: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증상적 독해

 [이 논문은 202151일 한국비평이론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202194일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초청 발표회에서 두 번째 발표된 바 있다. 두 번의 발표회에서 유익한 조언과 토론을 해준 참석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두 번째 발표회에서 지정토론을 맡아서 날카로운 비평과 조언을 해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의 조지훈 선생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논문의 최종본을 읽고 좋은 비평을 해준 김은주 선생께도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머리말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오늘 이렇게 귀중한 발표의 기회를 제공해주신 한국비평이론학회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특히 키노트 스피커라는 과분한 영예를 베풀어주신 데 대해 특별히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키노트 스피커라는 타이틀은 개인적으로는 큰 영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비평과 이론 분야에서 훌륭한 연구와 업적을 쌓아온 한국비평이론학회의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과연 내가 그분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한 어떤 말 또는 어떤 화두 내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까? 더욱이 코로나 팬데믹과 같이,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전지구적인 재난, 따라서 모든 인류가 직면해 있는 심각한 위기를 주제로 삼는 이러한 토론 자리에서 내게 부여된 타이틀에 걸맞은 발언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지난 몇 달 간 계속 나를 괴롭혀왔다.


더욱이 내가 느끼는 중압감은 단지 키노트 스피커라는 타이틀이나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회의 주제의 엄중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조금 더 직업적인 측면에서(막스 베버가 Beruf라고 불렀던 의미에서) 보자면, 오늘날 철학의 성격에 대한 의문에서 기인한다. 아마도 한국비평이론학회에서 처음 나에게 발표를 제안했을 때 일차적으로 나를 비평이론학회의 동료로서, 그 구성원으로 여기고 발표를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내가, 용어의 다소 전문적인 의미에서 비평이나 이론’(영어로 한다면 critical theory 내지 theory)의 주요 요소 중 하나를 이루는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의 몇몇 저작을 번역해왔고 또 그들의 철학에 관해 이런저런 글을 써오기는 했지만, 나는 스스로 한번도 비평가이론가라고 생각한 적은 없으며, 얼마간 전통적인 의미에서 철학자라고 또는 철학도라고 늘 생각해왔다. 아마도 여러분 역시 이런 측면에서 오늘 모임에 학회 외부의, 이론 내지 비평 외부의 연구자로서 나를 초청했을 것이고, 나는 얼마간 외부인으로서, 이방인으로서 이러한 초청과 환대에 감사한 마음으로 응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점을 발표의 서두에 밝혀두는 것은 무언가 철학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 이제 더는 철학이 만학(萬學)의 여왕이라고 허세를 부릴 수는 없지만 여전히 모든 학문의 토대 같은 것일 수는 있다고 여기는 그런 자부심의 발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중의적인 의미에서) 철학의 빈곤에 관한 서글픈 자각의 표현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철학은 지극히 빈곤하기 짝이 없다는 점을 굳이 힘주어 말해야 할까? 조금 신랄하게 말하자면, 철학은 이제 좀비와 같은 어떤 것이 되었다는 점을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진태원) 적어도 한국에서 철학은 그것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리고 어쩌면 철학자들 자신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실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그런 것이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한국 사회의 누구도 어떤 문제에 관한 철학자들의 견해가 무엇인지, 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누군가 내게 한국에서 철학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별로 답변할 말이 없다. 그 와중에 한국의 철학자들은,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것이든 또는 세월호 참사나 촛불집회 같은 것이든 아니면 코로나 팬데믹이나 기후위기 같은 것이든 간에, 그것이 자신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철학은 좀 더 본원적이고 좀 더 시대초월적인 어떤 것을 다루는 것이라고 위안하면서,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초연함의 가장(假將)으로 애써 감춰왔던 것이 아닐까?


내가 이 글에서 참조하려고 하는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언젠가 철학은 대상 없는 학문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사실 과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의 대상은 무엇인가, 과학으로서 정신분석의 대상은 어떤 것인가, 양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서 알튀세르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였다. 여기에 더하여 대상 없는 학문으로서 철학은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 그리고 정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 역시 알튀세르가 생애의 말년까지, 광기가 그의 정신을 휘감는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필생의 화두였다.


그런데 대상 없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또 다른 울림을 지니는 것 같다. 확실히 철학은 대상 없는 학문이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또는 경제학이나 언어학 같은 학문들이 자신들의 분명한 대상을 지닌다면, 철학은 자신에게 고유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 존재나 정신, 인식이나 논리 또는 가치 같이 한때 철학만이 다룰 수 있는 대상 내지 주제라고 여겼던 것들은 이미 더는 철학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전문 분과학문들의 고유한 대상이 되었고, 되어가고 있다.


철학에게는 여전히 비판이 남아 있지 않느냐 하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비판 내지 비평 역시 이미 철학의 관할권을 넘어선 지는 오래되었다. 칸트가 3비판서를 쓴지 얼마 되지 않아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의 이름으로 비판에 대해 새로운 의미와 기능을 부여하면서 철학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초월론적 비판에 대한 독점권을 상실한 바 있다.[알프레드 존-레텔(Alfred Sohn-Rethel)에 따르면, 󰡔자본󰡕은 말하자면 유물론적인 󰡔순수이성비판󰡕, 곧 유물론적인 초월론 철학이다(Geistige und körperliche Arbeit).]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공동으로 저술한 󰡔독일 이데올로기󰡕(1846)에서 철학의 지양을 선언한 이래 한 번도 철학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그에게 철학은 독일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든가 아니면 기껏해야 방법론적인 해명을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한 이론적 도구에 불과했다.[물론 이것이 마르크스가 스스로 생각했던 만큼 철학에서 실제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제도화되고 교의화된 철학에서 벗어나,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형태로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수행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뢰비르노뒤메닐).] 이런 와중에 오늘날 철학을 자신의 한 가지 요소로 품고 있는(!) ‘비평내지 이론의 출현은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대상 없는 학문으로서 철학에게 남은 길은, 내가 보기에는, 분과학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고수하기보다 오히려 철학적인 것을 추구하는 길이 아닐까 한다. 한국의 철학에게는 아마도 더욱더 그럴 것이다(우리 학과, 우리 학회, 우리 학교 출신 같은, 부족주의 내지 오히려 씨족주의에 포획되지 않은 한국의 철학같은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면 말이다). 오늘날 철학에게 중요한 것은 분과학문의 제도적 테두리가 아니고 철학의 관행적 대상이 아니며, 습관적 실천으로서의 철학’, 너무 익숙해져서 우리가 철학의 본질이라고 착각하곤 하는, 명사로서의 철학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특히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시대, 다중적 위기의 시대에 철학이 견지해야 하는 것은, 아마도 유명론적인 것으로서, 형용사이자 동사로서의 철학적인 것이 아닐까? 신자유주의, 세월호, 인류세, 코로나 팬데믹은 바로 그 철학적인 것의 대표적인 이름일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에 관한 이 글 역시 철학적인 것에 관한 한 가지 탐구의 시도일 텐데,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비평 또는 이론이 스스로 범례적인 방식으로 철학적인 것을 탐구해온 만큼, 그것은 또한 한 가지 비평의 시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철학적인 것을 탐구하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아마도 비판 내지 비평일 것이며, 따라서 철학도라면 마땅히 오늘날 어떻게 스스로 비판가, 비평가가 될 수 있을지 먼저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거짓 문제

 

보다시피 이 글의 제목은 거짓 문제로서의 포스트코로나이며, 부제는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증상적 독해. 아마 여러분의 관심을 끄는 첫 번째 문구는 거짓 문제라는 단어일 것이다. 거짓 문제로서의 포스트코로나. 이것은 사실 매우 강한 문구이며, 따라서 그만큼 자연스럽게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점에서 포스트코로나가 거짓 문제인 것일까? 포스트코로나가 거짓 문제라는 규정을 받을 만큼 그렇게 문제적인 문구인가? 또한 많은 이들에게는 증상적 독해 역시 상당히 생소한 문구일 것이다. 비평가나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문헌학자, 곧 말을 사랑하며, 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선 약간의 시간을 들여 거짓 문제로서의 포스트코로나에 대해, “증상적 독해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포스트코로나라는 문구는 시대정신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코로나19 팬데믹과 거의 동시대적으로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유행어로 군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0219월의 시점에서 보면 위드코로나’(with corona)가 포스트코로나를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하에서 전개되는 이 글의 논의가 설득력이 있다면, 그것은 외양일 뿐이다). 포스트코로나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 문구 앞에서는 일체의 차이와 대립이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자본가와 노동자를 막론하고,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또한 남성과 여성, ‘정상인비정상인’, 국민과 비국민의 구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스트코로나를 염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포스트코로나는 이미, 적어도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한 시점과 거의 같은 시기부터 사람들이 팬데믹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사고하는 틀로 기능해온 것으로 보인다. 경제 분야든 신학 분야든, 교육이든 의료든, 기술과학이든 사회비평이든, 국내 정치든 국제관계든, 자기계발이든 개인적 에세이든 간에, 거의 모든 분야에서 포스트코로나가 화두가 되고 있다. 인터넷 서점에 나와 있는 코로나 팬데믹 관련 책들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포스트코로나 한국 교회의 미래󰡕(2020.4), 󰡔포스트코로나 사회: 팬데믹의 경험과 달라진 사회󰡕(2020.5), 󰡔포스트코로나 재테크 긴급 진단󰡕(2020.5), 󰡔뉴노멀로 다가온 포스트코로나 세상󰡕(2020.7), 󰡔대전환기 프레임 혁명: 포스트코로나, 사람 중심 경제로의 전환󰡕(2020.7), 󰡔클라우드: 포스트코로나 비대면사회의 기술혁명󰡕(2020.7), 󰡔포스트코로나: 미중 팬데믹 전쟁󰡕(2020.7), 󰡔소환된 미래 교육: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학교를 바라보다󰡕(2020.8), 󰡔나는 나를 위로한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셀프 위로법󰡕(2020.8), 󰡔긱 레볼루션: 포스트코로나 시대 가장 뜨거운 경제 이슈󰡕(2020.8),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생활예술󰡕(2020.8), 󰡔슬기로운 방구석 플랜B: 포스트코로나와 4차산업혁명 시대 쿨하게 살아남는 법󰡕(2020.10), 󰡔코로나 시대 한국의 미래: 여시재 포스트-COVID 19 연구팀󰡕(2020.11) ... 코로나 팬데믹은 아직 한창 비극적으로 진행 중인데도(인도에서는 20214월 말 매일 하루 30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고 3천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갔다. 또한 2021920일 기준 미국의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스페인 독감 당시 사망자 수를 넘어섰다 ...), 포스트코로나는 이미 진부해져가고 있다. 기묘한 시대착오, 비동시적인 동시성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팬데믹 초기 코로나19 종식이 아직 요원해 보이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막론하고, 포스트코로나를 화두로 내세워왔다는 사실은 상당히 증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공통의 염원, 동일한 화두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불시에 닥친 전 세계적 감염병이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희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상의 회복에 대한 희망일 수도 있고, 실업의 고통이나 생활난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일 수도 있다. 더욱이 여기에는 팬데믹의 충격이 외부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금방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 전망도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팬데믹을 계기로 전환된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려는 노력과 함께 코로나 팬데믹이 10년만에 한번 돌아오는 엄청난 재테크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욕망(또는 그러한 욕망의 부추김)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막대한 정치적 이득을 본 세력과 이를 어떻게든 약화시켜서 내년 대선에 대비하려는 세력들의 정치적 동상이몽도 또한 반영되어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는 비평가로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사람들, 세력들, 운동들이 내세우는 이러한 (만장?)일치된 문구를 의심해보고, 그것을 오히려 다른 수준에서 작용하는 어떤 것의 증상으로서, 더 정확히 말하면 증상에 대한 증상으로서 해석해보려고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글을 퇴고하는 과정에서 코로나 팬데믹을 증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다른 연구자의 글을 발견했다(Oksala). 명시적으로는 증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유사하게 사유하는 더 많은 연구자들이 존재할 것이다.]

 

증상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문구를 거짓 문제로까지 규정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에서 증상 개념에 대한 좀 더 정확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증상이라는 개념은 몇 가지 상이한 수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보면 증상은 원인과 결과의 불일치를 가리킨다. 머리가 아프다는 증상이 뇌의 이상을 반드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팔이 저린 증상이 팔의 이상이 아니라 목 디스크를 나타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증상은, 원인과 결과의 (상대적) 일치를 나타내는 징후(sign)와 구별되는 것이며, 그 자체 내에 불확실성 및 더 나아가 기만 내지 가장(假將)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둘째, 상상적 실재로서의 증상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존재한다. 이때의 증상은 단순히 모종의 원인을 가리키는 불확실하고 다소간 기만적인 현상, 따라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재성을 지니지 않으며, 자신의 의미론적 효력을 원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을 뜻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미로 이해된 증상은 자신의 고유한 실재성(다른 말로 하면 그 자신이 독자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니는데, 단 이것은 상상적 실재성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상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간 정신분석적인 의미로, 또한 스피노자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정신분석적 증상론으로는 지젝 참조). 내가 염두에 둔 상상적 실재성을 잘 보여주는 󰡔윤리학󰡕의 몇몇 대목이 있다. 가령 이런 대목을 보자.

 

거짓 관념이 갖고 있는 어떤 실정적인 것(positivum)도 참인 한에서의 참된 것의 현존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스피노자, 󰡔윤리학󰡕 4부 정리 1)

 

󰡔윤리학󰡕 2부에서 스피노자가 줄곧 강조한 것은 거짓 관념이 인식의 결여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정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거짓 관념은 잘려나가고(mutilatae) 혼란스러운 관념이 함축하는 인식의 결여(cognitionis privatione)”(2부 정리 35)이며, “참된 관념과 거짓 관념의 관계는 존재와 비존재의 관계와 마찬가지”(2부 정리 43의 주석). 그 사이에 자신의 주장을 망각한 것일까? 스피노자는 4부의 첫 번째 정리에서는 거짓 관념이 실정적인 것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그것은 참인 한에서의 참된 것의 현존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이 정리는 󰡔윤리학󰡕 4부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 거의 공리와 같은 작용을 한다.


왜 스피노자는 2부의 인식론에서 실정성을 부정했던 거짓 관념에 대하여 4부에서는 고유한 실정성, 곧 실재성을 긍정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점에서 이것은 참인 한에서의 참된 것의 현존에 의해서도 제거되지 않는 집요한 실재성을 지니는 것일까? 요점만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관념에는 표상적 측면과 변용적 측면(스피노자가 affectio(영어로 하면 affection)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내지 정서적 측면(affectus(영어로 하면 affect) 개념이 나타내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표상적 측면에서 보면 거짓 관념은 인식의 결여이고 비실정적인 것이지만, 변용적이거나 정서적인 측면에서 보면 거짓 관념 역시 자신의 고유한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 상상적 실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범례로 활용되는 태양의 사례(2부 정리 35의 주석, 4부 정리 1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거듭, 우리가 지구와 태양의 실제 거리를 안다고 해도 우리는 계속해서 태양을 우리에게서 200피트 정도 떨어져 있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태양이 가깝게 있다고 상상한다면, 이는 우리가 그 진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은 태양이 우리의 신체를 변용하는 한에서(quatenus corpus ab eodem[sol-인용자 추가] afficitur) 태양의 크기를 인식하기 때문”(4부 정리 1의 주석)이다. 곧 관념이 지닌 변용적 측면은 사실은 관념의 표상적 측면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기능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용의 힘은 그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정신이 변용과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곧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경우 정신은 증상으로서의 변용이 가리키는 실재를 파악하는 대신 증상으로서의 변용을 실재 그 자체로 착각한다. “우리가 외부 물체들에 대해 갖는 관념들은 외부 물체들의 본성보다는 우리 신체의 상태(constitutionem)를 더 많이 가리킨다(indicant)는 점이 따라 나온다.”(2부 정리 16의 따름정리 2) 그리고 이렇게 되면 변용으로서의 상상적 실재(“변용들의 질서와 연관” 2부 정리 18의 주석)는 실재의 한 수준 내지 한 층위가 아니라, 실재 그 자체로 재현되고 또한 그렇게 기능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되면, 정신 또는 주체는 변용의 힘,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정서의 힘에 다소간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수동/정념(passio) 또는 정서의 힘은 이 정서가 인간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을 정도로 인간의 다른 활동/능동(actio) 또는 역량을 압도할 수 있다.”(4부 정리 6)

 

대표적인 경우가 중독일 텐데(알콜 중독이든, 마약 중독이든 아니면 기타 다른 중독이든 간에, 중독은 외부 원인이 산출하는 변용에 대한 주체의 전적인 의존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운(, Fortuna)에 좌우되는 보통 사람들의 삶, 온갖 종류의 미신에 가장 심하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신학정치론󰡕 「서문)의 삶은 외부 원인 및 그것이 산출하는 변용들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수동적인 삶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보면, 사실 예속적인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수동성이 반드시 중독의 경우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나는 정서들을 제어하고 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을 예속(Servitudo)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정서들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권리 아래 있지(sui juris est) 못하고 운의 권리 아래 있으며, 그는 자주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행하도록 강제될 만큼 운의 힘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4서문) 스피노자 철학에서 esse sui juris의 의미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Steinberg 참조.]


요컨대 두 번째 의미의 증상은 어떤 원인 또는 실재를 불확실하게 가리키지만, 자신의 고유한 실재성을 지닌 상상적 실재다. 이것은 자신이 가리키는 객체적 실재의 증상이면서 동시에 주체에 대한 증상이기도 하다. 이 증상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 재현될수록, 더 나아가 어떤 원인()에 대한 증상을 실재 그 자체로 재현할수록, 주체는 이 증상에 대해 더욱 예속적이게 된다. 역으로 주체가 이 증상을 어떤 원인()에 대한 증상으로서 (스피노자의 개념을 빌리면) “적합하게”(adaequate) 인식할수록 주체는 증상에 대하여 더욱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거짓 관념이란, 증상을 어떤 원인의 증상이 아니라 실재 자체인 것으로 재현하고 자기 자신을 실재에 대한 객관적 재현으로 재현함으로써, 주체로 하여금 자신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증상이며, 이로써 주체를 이러한 증상에 더욱 종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증상이다.


이러한 거짓 관념이라는 증상이, 그것이 가리키는”(스피노자가 󰡔윤리학󰡕 2부 정리 16의 따름정리 2에서 사용한 용어의 의미에서) 실재 또는 원인의 내재적인 계기를 이룰 때, 증상의 세 번째 측면이 드러난다. 포스트코로나가 거짓 관념 또는 거짓 문제라면, 그것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문구가 가리키는 그 실재, 곧 코로나 팬데믹이 또 다른 실재 내지 원인()의 증상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모종의 원인들의 산물이며, 그 원인들을 가리키는증상이지 궁극적인 원인 내지 실재가 아니다. 따라서 거짓 문제로서의 포스트코로나는 증상의 증상이다. 하지만 포스트코로나라는 거짓 문제는, 코로나 팬데믹이 원인이 아니라 또 하나의 증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하며, 자신이 증상의 증상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더욱이 이러한 효과는 코로나 팬데믹이 증상으로서 가리키는 그 원인()의 기능적 필요성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 원인()의 내적 특성의 부산물이다.


그러므로 증상의 이러한 세 번째 측면은 증상들의 생산과 재생산이 예속적 주체의 재생산을 위한 한 계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 측면은 좀 더 정치적이면서 윤리적인 함의를 갖는다. 따라서 증상에 대한 다층적 개념화는 호명 개념을 중심으로 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함께 푸코의 예속화(assujettissement) 및 주체화(subjectivation) 이론을 코로나 팬데믹과 관련하여 새롭게 재해석해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 곧 코로나 팬데믹은 넓은 의미의 계급적 분할(자본주의적 착취만이 아니라 인종적국민적 차별과 위계화, 젠더 불평등과 혐오 등을 포함하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갑과 을의 위계적 분할이 세계를 구조화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포스트코로나라는 문구는 이러한 위계적 분할을 세상의 이치(way of the world), 세상의 정상적 조건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포스트코로나가 함축하는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바로 그러한 의미의 정상적 조건으로의 회귀를 예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증상적 독해

 

내가 부제에서 증상적 독해”(lecture symptomale)라고 부른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65년 출판된 집단 저작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의 서문인 「󰡔자본󰡕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에서 루이 알튀세르가 제시한 개념에서 유래한 것이다(Althusser). 증상적 독해 개념으로 그가 제기한 문제는 고전 정치경제학(스미스, 리카도)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는 이 문제를 독서의 두 가지 방식의 차이라는 또 다른 문제와 관련시킨다. 시각(vision)이라는 관념에 기반을 둔 첫 번째 독서는 고전 정치경제학과 마르크스의 차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척도로 삼아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에게서 어떤 통찰”(vue)간과/실수”(bévue)가 나타나는지 확인함으로써 설명하려는 독서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통찰하는 것을 스미스나 리카도는 간과했으며, 역으로 스미스나 리카도가 간과하고 실수를 저질렀던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천재적으로통찰했다는 것이다. 인식의 문제 및 읽기의 문제를 확인/재인지”(reconnaissance)의 문제로 환원하는 독서, 따라서 사실은 신의 현현(顯現)이라는 종교적 관념에 기반을 둔 이러한 독서에 대하여 알튀세르는 두 번째 독서 방식을 맞세운다.

그가 증상적 독해라고 부른 이 독서는 첫 번째 독서와 달리 통찰과 간과/실수를 동일한 수준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또는 한 쪽의 보지 못함과 다른 쪽의 봄을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이한 두 인식 주체의 시각 능력에서의 차이의 문제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동일한 대상, 동일한 텍스트가 드러내는 것이 사실은 감추는 것이며, 동일한 주체가 통찰하는 것이 사실은 간과/실수하는 것임을 보이는 독서다.


증상적 독해 개념에서 알튀세르가 예시하는 것은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고전 정치경제학의 노동가치 개념을 마르크스가 독해하는 방식이다. 고전 정치경제학은 노동가치를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생필품의 가치로 정의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하여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고전 정치경제학은 그때까지 자신이 탐구하는 외견상의 대상인 노동가치에 대하여 노동력 가치를 대체함으로써 지반을 변경했는데, 노동력이라는 이 힘은 노동자의 인격 속에서만 존재하며, 기계가 기계의 작동과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기능인 노동과 구별되는 것이다.”(Althusser 13) [이 인용문은 알튀세르가 인용하는 프랑스어판 󰡔자본󰡕에만 나온다(Le Capital, tome II, p. 209). 독일어판 󰡔자본󰡕의 해당 대목은 󰡔자본 I-2󰡕 739 참조.]

 

곧 마르크스에 따르면 고전 정치경제학이 노동의 가치라고 부른 것은 사실 노동력의 가치인데, 문제는 노동력의 가치를 계속해서 노동의 가치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문제의 지반을 변경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노동의 가치를 노동력의 가치로 대체하는 것은 잉여가치 개념의 생산을 나타내는 것이며,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전 정치경제학은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생산해낸 이 개념, 이 문제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는 단지 고전 정치경제학자들이 주의력이 부족했거나 마르크스와 같은 천재적인 통찰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전 정치경제학의 문제의 장알튀세르가 문제설정(problématique)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곧 라부아지에 이전의 플로지스톤 화학의 문제설정에서 산소가 비가시적일 수밖에 없었듯이, 고전 정치경제학의 문제설정에서는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증상적 독해라는 개념은 몇 가지 개념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첫째, 보기와 보지 못하기, 통찰과 간과는 인식 주체의 심리적 특성이나 인식 능력의 차이를 넘어선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주체의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하는 문제설정의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분명히 개인들 사이에 심리적인 습성의 차이, 인식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철학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개인이라도 원칙상 인식할 수 없는 사실이나 문제가 존재하며, 그것은 개별 주체의 심리적 특성이나 인식 능력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화의 구조, 곧 문제설정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이다.


둘째, 어떤 문제설정 내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동시에 무언가를 은폐하거나 배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식 주체는 무언가를 보고 이해하는 작용 그 자체로써 무언가를 은폐하거나 배제한다. 통찰과 간과, 이해와 몰이해, 가시화와 비가시화는 하나의 동일한 작용의 두 측면이다. 알튀세르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에 모종의 필연성 관계가 존재”(20)한다고 지적한다. 이 필연성 관계는 어떤 문제설정 내에서 비가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되기 위한 조건을 이룬다는 점을 가리킨다. 가시적인 것이 보이기 위해서는 비가시적인 것으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공간적 은유를 사용하자면, 단순히 가시적인 것의 바깥, 배제의 어두운 바깥이 아니라, 가시적인 것 자체에 내적인 배제의 내적인 어둠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인 것의 구조에 의해 정의된 것이기 때문이다.”(20-21. 강조는 원문)


셋째,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이런 것이다. 어떤 문제설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양면적 인식 작용, 인식하는 것이 동시에 몰인식하는 것이며, 가시화하는 것이 동시에 비가시화하는 것인 이러한 작용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알튀세르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유보하고 있다. 이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1965년 당시 알튀세르의 이론적 기획의 중핵을 이루는 또 다른 질문, 이론적 실천의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달려 있었는데, 그는 이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그가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직 그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필요했던 이데올로기 개념은 두 측면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론적 이데올로기론”, 곧 비과학과 과학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 필요한 이데올로기론에서 보면 핵심적인 것은,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거짓이거나 가상이 아닌 것의 인식론적 위상을 해명할 수 있는 개념이다. 가령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고전 정치경제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거짓이나 기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이지만 과학적이고, 과학적이지만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 어떤 것이다.[나중에 (얼마간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아) 생명과학의 역사와 관련하여 과학적 이데올로기개념을 제안한 것은 조르주 캉길렘이었다(Canguilhem).] 다른 한편 실천적 이데올로기론에서 필요한 것은 왜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 또는 주체의 형성과 재생산에서 필수적인 것인지,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계급 지배의 재생산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왜 동시에 주체가 이데올로기적 주체이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두 가지 과제 중에서 알튀세르는 호명 개념을 통해 후자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 (얼마간 불완전하게) 성공했지만, 첫 번째 과제에서는 단편적인 분석 이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과학에 대한 그의 생각이, 따라서 과학과 정치와 맺는 철학에 대한 그의 생각도 변화했기 때문이다(알튀세르 1993, 1995).


어쨌든 우리가 알튀세르의 증상적 독해 개념에서 포스트코로나와 관련하여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첫째, 만약 포스트코로나가 증상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무언가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춘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 이러한 드러내고 감추는 작용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제설정의 필연성에서 또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주제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그것이 증상을 이루는 어떤 실재 내지 원인에 내재하는 필연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증상으로서의 포스트코로나가 첫 번째 수준에서 무언가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또 다른 무언가를 감추는지 해명하려면, 이러한 증상의 작용이 사실은 원인의 어떤 필연성에서, 그 원인 자체가 또 다른 원인()의 증상이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봐야 한다. 셋째, 더 나아가 이러한 필연성은 자본주의 문명이라는 시스템의 재생산에서, 따라서 (예속적) 주체 생산의 메커니즘에서 비롯하는 필연성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증상들은 시스템의 (모순들의) 증상이면서 동시에 주체의 예속 내지 무능력의 증상일 터이다.

 

포스트코로나가 드러내면서 감추는 것

 

사실 포스트코로나는 여러 가지를 드러낸다. 또한 그러면서 무언가를 감춘다. 첫째, 그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충격일 것이라는 예상 및 희망을 드러낸다. 202192일 현재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는 219백만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450만명을 넘어섰다.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백신 접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20219월에도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가장 먼저 백신 접종률이 50%를 넘어섰던 이스라엘이나 초기 백신 접종 경쟁에서 선두에 있던 미국과 영국의 경우도 한때 1일 확진자 수가 크게 줄어들어 공공영역에서 마스크를 벗어도 좋다는 지침이 내려졌지만, 그 이후 다시 확산세가 증가하여 20202차 대유행에 버금가는 확진자 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감염력이 현저히 높고 백신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델타 변이의 전 세계적 유행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백신 접종만으로는 코로나19를 완전히 통제하기 어려우며, 효과적인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팬데믹이 지속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또는 적어도 상당 기간 풍토병의 형태로 지속되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네이처󰡕20213코로나19가 집단 면역이 불가능해 보이는 5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코로나19 집단 면역이 사실상 어려워 보이며, 코로나19는 계속 풍토병으로 남게 될 것 같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Nature).]


그럼에도 이 문구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이 문구에 담겨 있는 코로나19의 일시성과 우발성에 대한 예측이 사람들에게 널리 공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제 전문가들은 팬데믹이 경제 시스템 내부의 문제점으로 인해 생겨난 충격이 아니라 시스템 바깥의 외생적 요인에 의해 유발된 충격이라는 점에서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본다면 그 충격이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팬데믹이 백신이나 치료제로 완화되고 결국 종식된다면, 경제 시스템은 곧바로 이전의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고 낙관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IMF나 주요 국가의 중앙은행들은 미국 중국 및 주요 선진국들의 2021년 및 2022년 경기 전망을 매우 긍정적으로 예측하고 있다. 델타 변이의 유행으로 주춤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올해와 내년의 경기 전망을 밝게 예측하고 있다. 다만 IMF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경제 회복 속도에서 불균형이 심화될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IMF 2021년 세계경제전망 7월 수정 보고서).


또한 이것은 일상의 회복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 내지 욕망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봉쇄를 경험하고, 1년 넘게 지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손 씻기 같은 엄격한 위생 수칙 준수 속에서 자유로운 이동을 차단당한 많은 사람들은 하루빨리 코로나 19가 종식되어 이전의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해외여행, 쇼핑이나 실내운동을 비롯한 각종 여가생활을 자유롭게 누리고 싶은 그 욕망이 팬데믹이 일시적이고 우발적이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극심한 생활난을 겪는 이들 역시 팬데믹은 하루빨리 종식되어야 하고, 또한 종식될 수 있을 것으로 열망하기는 마찬가지다.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실업 상태에 놓인 이들이나 폐업 및 심각한 매출액 감소를 경험하는 자영업자들도 팬데믹이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충격으로 그치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코로나는 무엇보다 이들의 기대와 희망을 드러내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대와 희망은 늘 불확실성을 지니는 것이 아닐까? 사실 스피노자는 희망과 두려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왜냐하면 희망은 그것이 일어날지 어떨지 우리가 불확실하게 여기는 미래나 과거의 것에 대한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불안정한 기쁨(inconstans laetitia)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두려움은, 마찬가지로 불확실한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불안정한 슬픔(inconstans tristitia)이다.”(3부 정리 18 주석 2) 그리고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정의들로부터 두려움 없는 희망 없고 희망 없는 두려움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오”(3부록13번째 정의에 대한 해명”)는데, 왜냐하면 희망이나 두려움은 모두 불확실한 인식에 기반을 두는 까닭에, 양자 사이에 윤리적 차이가 있음에도, 하나가 다른 하나로 쉽게 전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하지만 포스트코로나는, 첫 번째 논점과 모순되게도 팬데믹을 모종의 서사의 중심으로 만들고 있으며, 그것을 위험의 도래와 고난의 극복에 관한 국민주의적(nationalistic) 영웅 서사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첫 번째 논점과 모순적일 수 있는 이유는, 앞의 논점에 따르면 코로나19는 사실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재난일 뿐 체계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위협이나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 데 반해, 이러한 국민주의적 영웅 서사는 코로나19미증유의 도전으로 대상화하기 때문이다. 특히 특정한 인물이나 정치 세력, 또는 국가를 팬데믹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일수록 팬데믹의 도전과 위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K-방역이 이러한 의미의 영웅 서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전형적 문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020년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서사가 대중들에게 폭넓은 공감과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반면 202011월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와 모더나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m-RNA 백신 개발에 성공한 이후 포스트코로나 서사의 중심은 백신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방역에 실패하고 엄청난 희생자를 내면서 정치적 궁지에 몰렸던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스라엘 등은 백신 개발 및 접종을 선도적으로 수행하면서 포스트코로나 서사의 또 다른 영웅으로 등장하고 있는 반면, 모범적인 방역 국가로서 손꼽혔던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 또는 일본 같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백신 접종에서 뒤처지면서 백신 접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민주의적 영웅 서사에서 백신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쓰면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2021년 여름을 경과하는 동안 방역을 느슨하게 풀었던 미국, 영국, 이스라엘에서 확진자 수가 급증하면서 다시 백신 회의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코로나와 관련하여 방역 서사와 백신 서사라는 두 개의 영웅 서사가 경쟁해 왔으며, 백신 개발과 접종, 집단 면역의 시도가 전개되면서 후자의 서사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이 됐든 두 개의 서사는 모두 코로나 팬데믹이 모종의 영웅의 노력 덕분에 통제 가능하며, 이를 통해 선의 승리 또는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라는 결말이 도출될 수 있다는 가정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따라서 포스트코로나는, 첫 번째 논점에서 논리적으로 따라 나오고 두 번째 논점에 의해 서사적으로 극화되는 방식으로, 팬데믹 이후의 세계를 이전의 정상적인 상태로의 복귀(‘일상의 회복’, ‘경제의 회복등으로 표현되는)팬데믹 이전보다 더 나은 세계로의 전환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그 이전의 세상보다 더 나아진 것으로 보이는 분야가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에 대응하는 보건의료 역량의 향상이다. 보건행정 당국이나 바이오산업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스 바이러스나 메르스 바이러스와 비교해보면 코로나19에 대한 우리나라 보건 당국의 대응 역량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2년여 동안 지속되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를 일정한 수준 이하로 지속적으로 관리하면서 경제 활동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국내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방역 역량은 이전보다 훨씬 더 증대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팬데믹 초기 심각한 정책 실패를 경험했던 유럽이나 미국의 방역 대응 역량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향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이오산업의 입장에서 보면 코로나 팬데믹은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례가 없는 전폭적인 정부 지원 덕분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채 1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했으며, 특히 m-RNA 방식 백신 상용화에 처음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m-RNA 백신 개발의 원리를 밝혀낸 카탈린 카리코가 유력한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이 백신 제조 방식이 얼마나 혁신적인 것인지 잘 말해준다(김빛내리, 김우재).


팬데믹 이전보다 더 나아진 또 하나의 분야는 이른바 ‘4차산업혁명을 선도하는 디지털 자본의 분야다(‘4차 산업혁명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송성수, 이문호를 각각 참조). 어쩌면 이번 팬데믹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분야가 바로 디지털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팬데믹 이전에는 특수한 분야에서만 활용되던 비대면 화상회의나 강의 등이 이제 일상화되었고, 아마존이나 구글 또는 마이크로소프트나 테슬라 같은 빅테크 기업들 및 네이버, 카카오 같은 플랫폼 기업들은 더욱 확고한 시장의 독점력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기술적 터전이 되고 있다. 쿠팡이나 마켓컬리 등으로 상징되는 온라인 물류 산업의 급속한 성장 역시 팬데믹의 수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기자동차, 2차전지 배터리, 비메모리 반도체 등은 팬데믹을 계기로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면서 이른바 새로운 성장 동력, 미래의 먹거리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디지털 자본주의는 팬데믹을 극복하는 데 기여한 동력 중 하나라는 후광을 입고 앞으로 더욱 승승장구하게 될 것이며, 이른바 뉴 노멀의 경제적 토대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넷째, 따라서 포스트코로나는 팬데믹 이전과 이후의 세상이 본질적으로 연속적일 것이며, 이러한 연속성이 전지구적인 인간의 삶의 정상성을 규정할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팬데믹을 계기로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에 어떠한 변화가 이루어졌든 간에 그것은 이제 뉴 노멀이라는 규범적 가치를 부여받게 되었으며, 그것이 지닌 규범적 강제력 덕분에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찾는 것은 어렵게 될 것이다. 첨단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 고용은 더욱 축소되거나 유연화되면서 이른바 긱 이코노미”(gig economy)가 일반화될 것이고, 비대면 네트워크의 확산은 일과 휴식, 직장과 가정의 경계를 훨씬 더 모호하게 할 것이고, 교육 분야에서의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포스트코로나가 감추면서 드러내는 것

 

다른 한편, 포스트코로나가 감추는 것은 사실은 그것이 드러내는 것의 이면이며, 포스트코로나는 자신이 드러내는 것을 통해 감추고 있다.


첫째, 그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체계에 대하여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충격이 아니라, 사실은 체계에 내재적인 모순들에 대한 증상이라는 것을 감추고 있다. 사실 코로나19는 주지하다시피 첫 번째 팬데믹인 것도 아니고, 인수공통감염병의 첫 번째 사례인 것도 아니며, 첫 번째 사스 바이러스도 아니다. 1918년 전 세계에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이나 그 이전에 몇 세기동안 인류를 괴롭혔던 페스트, 천연두 등의 존재는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대규모 집단 감염병이 인류 역사의 기원에서부터 내재해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윌리엄 맥닐은 전염병의 세계사에 관한 고전적인 저작에서 이를 이중 기생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한 바 있다(맥닐). 곧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인류와 공생해온 각종 세균바이러스들이 인간을 숙주삼아 기생해온 것이 미시기생이라면, 각종 노역이나 세금 등을 통해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기생해온 것은 거시기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기생의 구조는 지금까지 인류 문명의 공통적인 조건이었으며, 지금도 이러한 조건에는 변화가 없다. 오히려 롭 월러스를 비롯한 역학(疫學) 전문가들이 보여준 바 있듯이, 이러한 이중 기생의 구조는 20세기 말 신자유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더 악화되고 있으며, 생태계 자체의 파괴를 초래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스 코로나 바이러스의 지속적인 출현은, 인수공통감염병의 새로운 구조적 원천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중국 남부를 비롯한 남아시아 농촌에서 대규모 축산공업이 출현한 사실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월러스, 월러스 외, 포스터 외). 그것은 사스키아 사센이 축출”(expulsion)이라고 부르는(사센), 현대 자본주의의 고유한 착취 및 수탈 구조와 관련되어 있으며, 파샤드 아라기와 필립 맥마이클이 각자 나름대로 보여주었듯이(아라기, 맥마이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집단 이주를 야기한 21세기의 인클로저 운동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곧 대규모 토지 차익 거래를 노린 국제 금융 자본 및 농업 자본에 의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규모 농지가 취득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들은 빈민으로 내몰렸으며, 취득된 토지에서 (산업용 및 제약용 원료 생산을 위해서든, 고수익 작물 재배를 위해서든 또는 그 밖의 다른 목적을 위해서든 간에) 대규모 단일 경작을 위해 삼림과 생태적 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고, 지역 전체는 글로벌 가치 사슬의 새로운 거점으로 포섭되는 것이다. 이는 맥마이클이 거대한 역설이라고 부른 것, 곧 글로벌 남쪽 지역에서 개발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지역 주민들의 삶은 더욱 빈곤해지는 현상을 낳게 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생태적 환경의 파괴를 통해 전염병이 빠른 시간 내에 전 세계로 확산되고 순환할 수 있는 생태경제지리를 창출하게 된다(포스터 외). 하지만 포스트코로나(또는 위드코로나)라는 문구에는 이런 원인들에 대한 인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둘째, 포스트코로나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국민주의적 영웅 서사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사실 이번 팬데믹이 21세기의 첫 번째 팬데믹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럴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은 감춘다.


이점과 관련하여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2011년 영화 컨테이젼은 시사적이다. 이 영화에서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증이 전파되는 과정을 “2일째에서 시작한 뒤 “135일째에 이르러 백신의 대량 접종과 더불어 집단 면역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여준 뒤, 영화의 맨 마지막에 “1일째를 배치한 것은 서사적 측면에서, 그리고 증상에 대한 해석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사실 마지막에 배치된 “1일째는 중의적인 함의를 지닌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2일째에서 시작했던 영화의 서사, 따라서 진정한 기원의 공백 속에서 전개된 서사를 회고적으로 완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은 추리소설의 결말 부분과 유사한 방식으로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에게 왜 이 바이러스 감염증이 전파되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처음 발생했는지 설명해주고 납득시키는 기능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더버그는, 에임 앨더슨(AIMM Alderson)이라는 회사 마크가 찍힌 불도저가 (공장식 축산업을 위해 또는 약품 제조를 위해 필요한 천연 식물을 대량 재배하거나 다국적 농업회사의 대규모 단일 작물 경작을 위해) 삼림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밀림에 거주하던 박쥐들이 민가의 축사로 쫓겨나고, 바이러스박쥐의 배설물을 받아먹은 돼지들이 도축된 후 홍콩의 고급 요리점으로 납품되면서 요리사와 손님, 객실 종업원들을 통해 바이러스가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하는 시퀀스를 “1일째라는 스크립트와 함께 영화의 맨 마지막에 배치한다. 백신의 대량 보급과 함께 잦아들고 있는 이 팬데믹(영화에서는 26백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이 사실은 또 다른 팬데믹의 서막이라는 점, 현재의 자본주의적 축산업과 바이오산업의 작동 방식을 유지한 가운데 팬데믹의 진정한 종식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21세기 들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거듭 출현하고 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 아프리카돼지열병 같은 전염병이 연례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소더버그의 통찰이 정확한 것임을 입증해준다(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질병관리본부로부터 홍보비를 받았느냐고 비평했던 비평가들의 비아냥이 무색하게).


셋째, 방역 서사에서 백신 서사로의 이동과 함께 주목받고 있는, 바이오산업의 혁신적인 백신 개발 역량과 포스트코로나 시대 인류의 삶의 인프라를 형성하게 될 새로운 디지털 산업의 기술적 역량에 대하여 포스트코로나 서사는 팬데믹 이후의 인류의 삶이 더 나은 것이 되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품게 하지만, 바로 이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구조에 내재해 있는 죽음의 경제를 체계적으로 감추고 있다.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이자 제도적정책적 복합체는, 명칭 자체에서 다소 오도된 뉘앙스를 주기 쉽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라는 명칭은 이것이 과거의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새로운 판본이라는 뉘앙스를 부여하지만, 사실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와 몇 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인 차이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시장과 국가를 명료하게 구별하고,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경제에 대한 정치의 간섭을 방지하는 것을 추구했다면,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시장의 논리를 국가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인간 실존의 전체적 측면으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의 목표는 시장의 자유방임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장화, 상품화인 것이다. 국가가 시장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시장의 원리를 따라 경영의 효율성과 수익성을 추구해야 하며, 이 때문에 이전에는 시장의 바깥에 존재하던, 인간의 삶의 재생산 영역(돌봄 노동의 대상이 되는)과 관련된 인간의 활동 전체 역시 이제 상품화의 영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보건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조지프 더밋(Joseph Dumit)Drugs for Life라는 다의적인 제목을 지닌 저작 및 그와 관련된 일련의 저술에서 잉여건강”(surplus health)이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측면을 명료하게 보여준다(Dummit, Rajan “Introduction”). 더밋이 말하는 잉여건강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을 모델로 하여 구성된 개념이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이 자본가가 구매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이 생산과정에 투입되어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잉여가치들을 창조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잉여건강은 생존력(capacity to survive)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존력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고통을 겪는 능력과 의사의 처방과 의료 서비스의 도움을 받아 약을 투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생존력을 통해 상품으로서의 건강이 생산된다. 이 과정을 통해 질병은 더는 의사에 의해 진찰된 단일한 병리적 현상으로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생물지표’(biomarkers)(혈압, 콜레스테롤, 당 수치 ...)에 의해 측정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비가시적인 객관적 조건으로서 재규정된다. 따라서 이전까지 질병과 건강 사이에는 일종의 불연속성이 존재했다면, 이제 양자 사이에는 기본적인 연속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인간의 삶, 인간의 생명은 지속적으로 약물(그리고 건강보조식품)을 복용해야 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무엇을 위해? 생명 자본의 끝없는 축적을 위해!). 약물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모종의 질병의 위협 또는 질병으로의 전환을 방지하기 위해 단백질 보충제, 영양제 등을 비롯한 기타 약물을 지속적으로 복용하도록 권장된다. 말 그대로 Drugs for Life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바이오자본이 질병이라는 수요에 맞춰 약물 및 의료 서비스라는 공급을 제공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바이오자본이 생산하는 공급을 수요가 뒤따르게 된다.


이것만이 아니다. 인도 출신의 인류학자 카우시크 순데르 라잔은 글로벌 북쪽과 글로벌 남쪽 사이에 존재하는 바이오산업의 새로운 분업 구조를 보여준 바 있다(순데르 라잔, Sunder Rajan Pharmocracy). 글로벌 북쪽의 다국적 제약사들이 항암제와 백신 등 고부가가치 바이오산업에서 막대한 이익을 산출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은, 이러한 약물 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임상 실험이 안전하게, 체계적으로, 차질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규모 임상 실험은 대개 글로벌 남쪽의 인구 대국, 특히 인도와 같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임상 실험에 참여하는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수많은 빈민들의 존재가 인도 같은 나라를 전 세계 다국적 기업의 최적의 임상실험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편으로 세계 3위권의 의약품 제조업이 이루어지고 있고 전 세계 각종 백신 물량의 50% 가량을 담당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인도가 세계 최고의 코로나19 확진자 및 사망자 수를 기록했다는 것은 비극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넷째, 세계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 및 수사법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와 국민주의(nationalism)가 오늘날의 세계 정치 및 삶의 양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포스트코로나는 감추면서 드러내고 있다. 방역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백신 개발 및 접종 과정에서 노골화되고 있는 국민주의(백신 내셔널리즘), 40여 년 전부터 떠들썩하게 제기되었던 세계화에 관한 수사법이 무색하게 이제 국민주의가 자연적인 삶의 조건, 정치적 조건이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누구도 이러한 국민주의적 경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쟁자들에 맞서 더 많은 백신을 확보하도록 촉구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 강렬한 비난과 책임 추궁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포스트코로나는 인종주의가 특별한 사람들의 특수한 병리적 행동이나 타락한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를 구조화하는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틀이라는 것을 감추려 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이은정, Ziarek).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 운동으로 표현된 반인종주의 시위는, 그와 동시에 전개된 아시아인 혐오와 맞물리면서, 인종주의와 반인종주의에 내재해 있는 난맥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정치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이 증상으로서 드러내는 것은 아마도 이제는 전 지구적인 것이 된 자본주의 문명의 (다중적) 위기가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자본주의 문명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를 경제로 환원하거나 경제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포괄적인 의미에서 삶의 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함축한다(Fraser “Behind”, FraserJaeggi 또한 PanitchAlbo). 코로나 팬데믹에서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의 증상을 읽는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코로나 팬데믹 위기,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다른 위기들은,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단순히 사회역사적 존재자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비롯한 다중적 팬데믹은 생물학적이고 지질학적인 조건들이 더 이상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믿고 있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 문명에 대하여 외부적(external)이거나 외생적인(exogeneous) 조건들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역사적 존재자로 존재하기 위한 심층적 조건들이라는 점, 곧 내부적이고 내생적인 조건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 내지 자본세’(capitalocene) 같은 새로운 개념들이 이점을 일깨워준다. 둘째, 그런데 오늘날 절대적인 것으로 작용하는 자본주의 문명, 곧 절대적 자본주의(Balibar)는 인간들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들을 외면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사실들에 대한 인식을 어떤 의미에서는 차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절대적 자본주의에서 인간들은, 체계가 제공하는 삶의 방식과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거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 내에서 사람들은 이중구속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사실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의 뚜렷한 증상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의 심화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그것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들을, 자본의 논리에 내재적인 무한한 축적의 경향에 따라 잠식하거나 파괴하다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Fraser “Behind”, FraserJaeggi).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 또는 정상적인 잉여가치 착취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사회적 재생산노동(돌봄 노동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육체적정서적 노동)을 전제하지만, 복지자본주의 하에서 사회적 재생산노동은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에 의거하여 여성들이 수행해야 할 무급노동으로서 전가되었으며,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성인-근로자 모델(adult-worker model)에 입각하여 특히 여성들에게 시장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돌봄 노동을 수행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윤자영). 또한 자본주의가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자연 영역의 보존이 필요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자연 영역을 자신의 이윤 획득을 위해 무한정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수탈하면서 그것을 황폐화된 상태로 방치하거나 악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기후 위기, 돌봄 위기(인구 재생산 위기로 표현되는)가 학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경고되고 있고, 날마다 언론의 주요 기사거리가 되고 있음에도 이러한 위기에 대하여 체감할 수 있는 해법이나 대안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직면해 있는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 따라서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이런저런 직접적인 수단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특히 디지털 자본주의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집합적이고 독특한) 역량을 평범한 시민들, 즉 경제적 자원과 정치권력, 지적 자본에 대한 접근 권한이 제약되어 있거나 심지어 차단되어 있는 대다수의 을들로부터 수탈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검토해보자. 우리는 앞에서 이른바 ‘K-방역에서 나타나는 전염병 내지 보건 위기에 대한 대응 역량이 이전 시기보다 더 나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보인다는 단서를 붙인 것은, 여러 가지 객관적 지표들에 입각한다면 분명 방역 역량의 향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이때의 방역 역량이라는 것이 사실은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규율 역량(Foucault) 또는 생명 권력의 통치 역량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생물학적 집합으로서의 인구를 개별화하면서 전체화하는 역량,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예외상태에서도 경제의 수준을 정상적으로유지할 수 있는 주권의 역량 또는 치안의 역량이 아닌가? 또한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플랫폼 백신 기술이 과연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불평등과 차별을 산출하는 치안 장치가 되는 것인지는 불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바이오 기술은 그것이 생명 권력의 치안 장치의 일부가 되는 한에서만 제대로 기능하고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한에서 바이오 기술의 혁신은, 그것이 얼마나 혁신적이든 간에 궁극적으로 바이오 자본의 축적 메커니즘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의상 지정학적, 인종주의적, 국민주의적 불평등과 차별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효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마지막으로, 그런데 아마도 디지털 자본주의는, 이전 그 어느 때보다 평범한 시민 노동자들을 생산수단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킬뿐더러, 그들을 더욱 더 개별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더욱 더 관리하기 쉽게 전체화함으로써, 위기들에 대한 집합적이고 독특한 대응을 실천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러한 의문들을 제기하는 것조차 더욱 어렵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결론을 대신하여

 

이제 간단히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내가 제안하듯이 포스트코로나가 거짓 문제라면, 그것은 포스트코로나가 자신의 원인인 코로나 팬데믹이 또 다른 원인의 증상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코로나는 코로나 팬데믹을 우발적인 것으로, 일시적이며 체계에 대해 외생적인 것으로 제시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코로나 팬데믹을 어떤 원인()에 대한 증상이 아니라 독립적인 실재 내지 원인으로 파악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코로나 팬데믹이 독립적인 원인이나 실재로 제시될수록, 미증유의 재난에 관한 영웅서사로 재현될수록,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증상을 ()생산하는 그것의 원인()은 비가시적이고 인식 불가능한 것이 될 터이다. 그리고 이 경우 코로나 팬데믹은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재앙으로 간주될 것이며, 더 나아가 인종주의적 프레임으로 여과되면 차이나 바이러스라는 명칭(또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이 집요하게 고수한 바 있는 우한 폐렴이라는 또 다른 명칭)이 말해주듯 야만적인 아시아”(또는 중국)가 그것의 진정한 원인으로 (데리다가 말한 바 있듯이) 대체보충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라는 원인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원인과 연결 짓지 않고서는 문제의 해결은 고사하고 문제 자체를 인식할 수조차 없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의 한 요소를 이루면서 동시에 그 위기에 대한 인식을 어렵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글로벌 남쪽의 시민들에 대한 착취(exploitation)와 수탈(expropriation)(두 개의 ‘ex-’의 차이 및 연관성에 대해서는 Fraser “Roepke Lecture” 참조)이 글로벌 북쪽 시민들의 정상적인 삶을 위한 자연적인(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의미에서) 조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을들에 대한, 을 중의 을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자신들의 삶의 자연적인 조건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양식 자체가 팬데믹의 원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식하기 어려우며, 인식의 의지를 발휘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지극히 수동적인 삶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증상적 독해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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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arek, Ewa Plonowska, “Triple Pandemics: COVID-19, Anti-Black Violence, and Digital Capitalism”, Philosophy Today, vol. 64, issue 4, 2020.

김빛내리, mRNA는 어떻게 백신으로 개발되었고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기초과학연구원, 2021.1.27.

https://www.ibs.re.kr/cop/bbs/BBSMSTR_000000001003/selectBoardArticle.do?nttId=19602&pageIndex=1&searchCnd=&searchWrd=

김우재, 팬데믹의 고난과 과학자의 희망, 󰡔동아사이언스󰡕 2020.12.31.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42789

IMF 2021년 세계경제전망 7월 수정 보고서. https://blog.naver.com/kpfisnet/222481315292

“Five reasons why COVID herd immunity is probably impossible”, Nature no. 591, 18 March, 2021.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1-007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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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에서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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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위협을 규탄하는 공동성명


아래 서명한 우리 단체들은 홍콩당국과 친정부 언론이 홍콩 시민사회단체들을 점점 더  위협하는 것을 강력히 규탄한다. 우리는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시민 및 민주적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는 시민사회단체활동가에 대한 체포, 구금 및 기소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또한 친정부 언론이 근거 없는 보도로 홍콩의 시민사회단체를 비방하고 비난하는 일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2020년 6월 홍콩 국가보안법이 도입된 이후 세계는 홍콩의 시민사회공간이 축소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홍콩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고 개방적이며 자유로운 도시 중 하나로 만드는 데 기여한 많은 홍콩의 시민사회단체들도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러한 압력과 위협에 직면하여 많은 인권, 시민권, 노동권을 옹호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사실상 운영을 중단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그중에서 아시아 모니터 리소스 센터(AMRC)는 외세의 체제전복 지원자금을 홍콩으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한다는 친정부 신문의 거짓 고발 이후 홍콩사무실의 해산을 발표했다. AMRC는 1968년 설립후 아시아 전역의 노동권을 증진하고 증진하기 위해 아시아의 수많은 풀뿌리 노동 단체와 협력해 온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지역 노동 단체이다. 아시아의 모든 풀뿌리 노동 조직에게 홍콩 AMRC의 운영 종료는 큰 손실이 아닐수 없다.


홍콩 노동조합들도 공격을 받고있다. 9만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홍콩 최대의 전문직 노조인 홍콩전문교원노조(HKPTU)는 '많은 친정부 언론으로 부터 "차세대를 오염시키는" "사회의 암"이라는 비난을 받고 2021년 8월 해산됐다. 게다가 홍콩 최대의 독립 노동조합인 홍콩노총(HKCTU)도 이번 비방과 협박의 주요 표적이 됐다. 홍콩에서 노동자의 존엄과 시민의 정의를 위해 수년간 노력해온 HKCTU는 "2019년 송환법 반대 운동의 배후에 있는 검은 손"이자 "체제전복활동을 후원한 외세간첩"으로 묘사되었다. 우리는 이제 HKCTU가 몇 달 간의 협박 끝에 곧 해산될 것이라는 비통한 소식을 접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홍콩 노동자와 시민에게 큰 손실일 뿐만 아니라 일반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 운동을 건설하는 아시아의 우리 모두에게도 큰 피해가 아닐 수없다. 이 공동 성명을 통해 우리는 AMRC와 연대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더 확고한 노동자 연대를 향한 여정에 동참하고자한다. 우리는 또한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홍콩을 위한 투쟁을 위해 홍콩 노동운동과 연대하고자 한다. 특히,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일하며 어려운 도전에 직면해온 홍콩노총 HKCTU와 함께 하고자 한다. 우리는 한 홍콩의 노동조합활동가가 옳게 지적한데로 홍콩의 노동조합과 노동단체들이 사라질 수는 있을지언정 노동자들의 투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공동성명에 연명하기위한 링크

https://forms.gle/ihYUdPgWmU9QhUiu6


List of Endorsing Organisations: (20일 오후5시 현재)


1.  Asian Transnational Corporations (ATNC) Monitoring Network – Regional

2.  Asia Floor Wage Alliance (AFWA) - Regional

3.  Center for Alliance of Labor and Human Rights (CENTRAL) – Cambodia

4.  Center for Trade Union and Human Rights (CTUHR) – Philippines 

5.  Center For Workers Education (CWE) – India

6.  Committee for Asian Women (CAW), Regional

7.  Environics Trust – India 

8.  Federasi Persatuan Buruh Indonesia/Federation of Indonesian Workers’ Unity (FPBI) - Indonesia 

9.  Gabungan Serikat Buruh Indonesia/Centre of Indonesian Labour Struggle (GSBI) – Indonesia 

10.  Indonesia Legal Aid and Human Rights Association (PBHI) – Indonesia 

11.  Indonesian Migrant Workers Union, East Nusa Tenggara (SBMI NTT), Indonesia 

12.  Institute for Occupational Health and Safety Development (IOSHAD) – Philippines 

13.  Kesatuan Perjuangan Rakyat/Association of People Struggle (KPR) – Indonesia

14.  Kilusang Mayo Uno (KMU) – Philippines

15.  Konfederasi Persatuan Buruh Indonesia/Confederation for United Workers – Indonesia 

16.  Konfederasi Serikat Nasional/National Union Confederation  (KSN) - Indonesia

17.  Korean House for International Solidarity (KHIS) – South Korea

18.  Labor Education and Research Network (LEARN) - Philippines

19.  Labor Rights Defenders Network (LRDN) – Philippines 

20.  Labour Education Foundation (LEF) – Pakistan

21.  Labour Law Reform Coalition (LLRC) – Malaysia 

22.  Lembaga Informasi Perburuhan Sedane/Sedane Labour Resource Centre (LIPS) – Indonesia

23.  North South Initiative (NSI) – Malaysia 

24.  Pakistani Christian Refugee Fellowship (PCRF) – Malaysia 

25.  Persatuan Sahabat Wanita, Selangor (Friends of Women Organisation, Selangor) – Malaysia

26.  Printing and Media Workers Union (PPMI), Bekasi – Indonesia 

27.  Sajogyo Insitute – Indonesia 

28.  Sarawak Bank Employees Union – Malaysia 

29.  Serve the People Association, Taoyuan (SPA) – Taiwan

30.  Socialist Party of Malaysia (PSM) – Malaysia 

31.  Socialist Workers Thailand (SWT) – Thailand 

32.  Teoh Beng Hock Trust for Democracy – Malaysia 

33.  Textile Garments Workers Federation (TGWF) – Bangladesh

34.  Workers Assistance Center, Inc. (WAC) –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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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황해문화] 가을호에 실린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제 1년이 지났으니까 여기에 올려도 되겠죠? ㅎㅎ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에 관해 논의한 글입니다. 


이 글에 관해 토론하거나 논평하고 싶은 분들은 [황해문화]에 실린 판본을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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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

 [이 글은 프랑스에서 출간되는 마르크스주의 학술지 Actuel Marx 67(2020)에 실린 “Nécessaire, mais impossible: effets althussériens en Corée du Sud”의 한글판인데, 프랑스어판의 내용을 일부 축약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 2020723일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주최로 열린 이 글에 대한 토론회에서 토론을 맡아준 정정훈, 양창렬 선생께 감사드리고, 날카로운 질문들을 제기함으로써 원고를 더 충실히 가다듬을 수 있게 도와준 청중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는 크게 네 가지 계기 속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계기, 그러니까 알튀세르의 이론이 한국의 학계 및 공론장에 실제로 등장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80년대 한국 인문사회과학 최대의 논쟁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한국사회성격논쟁”(이하 논쟁으로 약칭)이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복권하고 한국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할 방법을 모색하던 이 논쟁에서 알튀세르는 이를테면 부재하는 중심으로 작용했다. 두 번째 계기는 이 논쟁에서 각각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적 입장을 충분히 체계화하기도 전에 밀어닥친 파국적인 외부 원인, 곧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에 맞서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를 구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논쟁의 한 당사자였던 “PD”(이것은 민중민주주의의 약자였다)의 일부 이론가들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위기론에 근거하여, 이제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전화(轉化, transformation)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했다. 이 시기는 실로 남한에서 알튀세르의 영향력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하지만 짧은 절정의 순간이 지나자마자 알튀세르는 포스트 담론’, 곧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같이 새로 외부에서 수입된 담론에 밀려 곧바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한국에서 포스트 담론의 효과에 대해서는 진태원, 포스트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그린비, 2019 참조.] 이것이 세 번째 계기였다. 1990년대 이후 2011년까지 지속되었던 이 시기 동안 그는 그들 중 한 명’, ‘기타 등등에 속하는 철학자였다. 하지만 2011년 출간된 󰡔알튀세르 효과󰡕 이후[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국내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나고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이 등장하고 있는 만큼, 아마도 우리가 알튀세르 효과의 네 번째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국면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여기에는 특히 새로 번역된 알튀세르 저작 및 최근 몇 년 사이에 잇달아 출간되고 있는 알튀세르 유고들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7;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배세진 옮김, 생각의나무, 2018;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9;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강의󰡕, 안준범 옮김, 현실문화, 2020; 󰡔루소 강의󰡕, 황재민 옮김, 그린비, 2020.] 이 글의 주요 목표는 이러한 네 가지 계기 속에서 발생한 한국에서의 알튀세르 효과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알튀세르 효과의 기원: 한국사회성격논쟁과 “PD”

 

우선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것은 논쟁과 관련되어 있는데, “논쟁이 일어났던 1980년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한국은 1945년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곧바로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38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소련군의 관할에 놓이고 남쪽은 미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 뒤 남한과 북한이 각각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잠정적인 분단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분단, 보통 분단체제라 불리는 것으로 변모되었다. 이 체제 아래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그 후손인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적인 통치 질서가 구축되었고, 남한에서는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장기독재가 이어졌다. 1979년 독재자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함으로써 남한에서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지만, 또 다른 군부 독재자였던 전두환이 이 기회를 강탈했다. 그는 19805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수 천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시민들의 학살을 통해 자신들의 확고한 통치 질서를 구축했다고 생각한 전두환과 군부 세력의 믿음과는 반대로 광주항쟁은 몇 가지 측면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광주항쟁의 성격 및 의의에 관한 연구로는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오월의봄, 2012; 김정한,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 소명출판, 2013을 각각 참조.] 우선 광주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은 급진적인 운동으로 변모했다. 이전까지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지식인, 기독교 지도자, 야당 정치인과 같은 명망가를 중심으로 한 온건한 반독재투쟁의 성격을 띠었지만, 광주항쟁 이후에는 군부독재만이 아니라 그것의 궁극적 원인으로 지목된 한국의 종속적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이 과정에서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반미가 운동의 중심 목표 중 하나로 제기되었다. 급진적인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미국 정부가 광주의 학살을 묵인했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미국의 지배가 한국의 분단과 독재의 지속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간주했다. 셋째, 민주화운동이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특히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사이의 조직적인 연계가 시도되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소규모의 노동운동이 산발적으로 전개되었고, 1971년에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 및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많은 지식인학생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남한에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전개된 것은 자본주의적인 경제 발전이 상당히 이루어지고 노동자들의 숫자가 획기적으로 증대한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지성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가장 큰 변화는 남한에서 오랫동안 탄압의 대상이 되어온 마르크스주의가 한국 사회운동 및 학생운동의 인식론적 기반으로 복권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이래 남한 사회에서 공산주의(및 심지어 사회민주주의까지도)는 가혹한 탄압의 대상이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와 교육, 출판 자체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하지만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연출할 필요성으로 인해 전두환 정권은 출판과 사상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했으며, 남한의 급진적인 지식인들과 출판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마르크스의 󰡔자본󰡕, 엥겔스의 󰡔반듀링론󰡕, 레닌의 󰡔국가와 혁명󰡕, 그람시의 󰡔옥중수고󰡕,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을 비롯하여 한국 사회를 연구하고 분석하기 위한 다양한 좌파 서적들을 출판했다. 전두환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느낀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 서적들을 열정적으로 탐독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개론서들 및 진보적인 저술가들이 쓴 자본주의 경제와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책들은 보통 사회과학 서적이라고 불렸으며, 출판되기만 하면 수천 부씩 판매가 되었다. 또한 수백명의 학생들이 수강을 할 정도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대학의 철학 강의는 사회철학 강의였는데, 여기에서는 대개 헤겔 변증법과 마르크스주의가 다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1980년대 중반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남한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학생운동, 문화운동 같은 다양한 사회운동의 활동가들 역시 관여했다. 따라서 이는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 또는 민중운동 사이의 연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논쟁의 근본 주제는 한국 사회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 사회의 변혁의 과제 및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것이었다.[이 논쟁의 주요 문헌들은 다음 책에 수록되어 있다. 박현채조희연 엮음, 󰡔한국사회구성체논쟁󰡕, 1~4, 죽산, 1995.]


이 논쟁에서는 다양한 정파에서 여러 가지 입장들이 제시되었지만, 크게 본다면 민족해방혁명론’(약칭 NL)민중민주주의혁명론’(약칭 PD) 사이의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북한의 주체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NL의 옹호자들은 한국 사회의 본질은 식민지반()봉건사회(colonial semi-feudal society) 또는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colonial semi-capitalist society)이며, 따라서 주요 모순은 미 제국주의와 남한 민중 사이의 민족모순이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계급 모순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남한에서의 혁명의 일차적 과제는 미 제국주의와 군사 파시즘에 맞서 남한의 각계 각층의 진보 세력이 단합해서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남한의 민족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면, 북한과의 통일을 거쳐 한반도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NL은 더 세력이 광범위했으며, 따라서 논쟁에서도 다수파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소수파의 위치에 있던 PD의 옹호자들은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했으며,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을 국내외의 독점자본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모순으로 간주했고 민족 모순은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PD는 한국 사회 변혁의 과제를 독점 자본에 맞선 민중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것으로 규정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한국에서 알튀세르가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바로 이러한 논쟁을 통해서였다. 알튀세르 수용을 주도했던 이들은 윤소영, 이병천 등(서관모는 199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알튀세르 수용에 참여했다)과 같이 PD의 논의를 이끌어가던 몇몇 이론가들(이들은 모두 30대의 젊은 대학 교수들이었다)이었는데, 이들은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 특히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에 기반하여 PD의 이론을 정교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알튀세르 효과의 첫 번째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알튀세르 없는 레닌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알튀세르 없는 레닌주의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알튀세르에 대한 PD 이론가들의 준거는 매우 막연하고 간접적인 것이었으며, 여러 모로 알튀세르 및 발리바르의 이론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논쟁 당시에 PD의 이론가들은 한편으로 남한이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NL에 맞서 그것이 국가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주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남한이 순수한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라고 주장한 다른 정파에 맞서 남한 내 독점 자본의 종속적 성격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들의 주요한 이론적 과제 중 하나는 남한 사회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하는 것이었으며, 그 중심 쟁점은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탈식민지 국가에서도 독점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의 독점 자본주의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당시 PD의 이론적 트레이드 마크였던 독점 강화, 종속 심화테제가 생겨났다. 남한에서의 독점 자본주의의 발전은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종속의 심화를 가져오며, 이것은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로서 제국주의 아래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법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텍스트에서 자신들이 직면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논거를 발견할 수 없었으며, 단지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에 기반을 둔 소비에트 경제학자들의 저작에서, 그리고 종속적 발전을 설명하고자 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경제학자들의 연구에서 주요 논거를 이끌어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론에 매혹되었으며, 그것을 자신들의 이론적 준거로 삼았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들이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복권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한편으로는 북한의 주체사상의 권위와 다른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적 교조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의 동일한 목표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북한의 주체사상은 사실은 민족주의적 스탈린주의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알튀세르는, 페리 앤더슨이 유명한 저서 󰡔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서구 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또는 이 표현이 비()공산권 국가의 마르크스주의를 지칭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서방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가가 아니라,[페리 앤더슨,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 류현 옮김, 이매진, 2003.] 스탈린주의에 대한 좌파적 비판을 수행하고자 했던 철학자였다. 사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스탈린주의와 단절하고자 했으며, 좌파 레닌주의의 관점에서 사회주의적 인간주의(청년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진정한 마르크스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했던)를 표방하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우익적 비판을 극복하고자 했다.[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중에서 특히 서문: 오늘날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참조.]


PD의 이론가들은 알튀세르의 이러한 지향의 구체적 함의를 해독하기 위한 열쇠를 발리바르의 저작, 특히 󰡔역사유물론 5연구󰡕󰡔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에서 찾았으며, 이 두 권의 책이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알튀세리언의 저작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Étienne Balibar, Cinq études du matérialisme historique, Maspero, 1974; Sur la dictature du prolétariat, Maspero, 1976. 이 두 권의 책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에티엔 발리바르, 󰡔역사유물론 연구󰡕, 이해민 옮김, 푸른산, 1089; 󰡔민주주의와 독재󰡕,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이 책들은 분명히 스탈린주의적 편향의 핵심은 사회주의 생산양식 이론에 있다는 점,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짧은) 이행기가 아니라 사회주의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 또한 공산주의는 스탈린주의에서 말하듯 () 인민의 국가가 아니라 정치의 새로운 실천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었지만, “논쟁자체에서 PD의 구체적인 이론적 입장을 정교화하는 데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PD 이론가들은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의 저작의 도움을 받아 소련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의 저작 속에서 스탈린주의와 구별되는 레닌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요소를 찾기 위해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들은 소련의 경제학자인 니콜라이 짜골로프가 감수한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번역했으며, 이 번역을 기반으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저작에서 직접 찾을 수 없었던 PD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이론적 기초를 세우고자 했다.[니콜라이 짜골로프, 󰡔정치경제학 교과서󰡕, 윤소영 편해설, 새길, 1990.] 이들에 따르면 짜골로프의 이 교과서야말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부합하는 과학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의 구체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정작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는 그 어디에서도 짜골로프의 교과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남긴 바 없다.


이런 견강부회야말로 당시 PD 이론가들의 이론적 관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에서 첫 번째 알튀세르 효과를 알튀세르 없는 레닌주의로 규정할 수 있는 이유는, PD 이론가들의 이론적 목표가 무엇보다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복권이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복권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정당성, 곧 그 과학성 및 실천적 효력을 전제하는 것인데, 당시 PD 이론가들 중 누구도(또는 논쟁에 관여했던 사람들 중 누구도) 이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당성을 현실에서 구현하고 있던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체제가 정치적 세력으로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유럽 연구자들 눈에는 충격적으로 비칠지 모르겠지만, PD 이론가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양립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가장 탁월한 이론적 표현이라고 간주했다. 사실 PD의 이론가들에게 이 두 사람이 중요했던 것은, 이론적 과학성과 혁명적 실천성을 상실한 다른 서방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야말로 진정으로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 곧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 연구󰡕의 첫 번째 번역본이, 원서 3장의 부록인 레닌, 공산주의, 그리고 이주5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역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이 빠진 불완전한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역자는 이 부분들이 당면한 현실적 투쟁을 사고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얼마 전에 출간된 새 번역본에는 첫 번째 번역본에서 빠졌던 부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 󰡔역사유물론 연구󰡕, 배세진 옮김, 현실문화, 2020.] 이러한 평가에는 참된 측면과 더불어 미망적인 측면도 존재할 텐데,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논의해보겠다.

 

알튀세르 효과의 절정: 백조의 노래

 

논쟁의 종결과 더불어 알튀세르 효과의 두 번째 계기가 도래하는데, 여기에서부터 알튀세르는 막후에서 나와 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물질적 준거 자체가 사라지자, 좌파 이론가들은 논쟁의 지반 자체가 무너져버리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PD 이론가들은 한편으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표현되는 시대의 전환을 논쟁의 내적 맥락 및 한국의 사회변혁운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외부 상황으로 규정함으로써, “논쟁이 완전히 와해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 동유럽 및 서유럽 좌파 정당 등에서 전개되고 있던 페레스트로이카 논쟁을 급진 개혁파(곧 친자본주의파)와 중도 개혁파(고르바초프로 대표되는), 그리고 보수파(사회주의 옹호파) 사이에서 전개되는 3각 논쟁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했다. 이는 페레스트로이카로 표현되는 사회주의 개혁운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개혁운동이 사회주의 자체의 몰락으로 귀결되는 것을 경계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한국의 변혁운동 및 논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도였다. 그들은 (친자본주의적인 급진 개혁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체적으로 고르바초프가 대표하는 중도파 노선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으며, 오히려 소련 및 동유럽 공산당의 관료 집단이 대표하는 보수파들의 사회주의 옹호론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돌이켜보면 특이하게도 PD 이론가들은 루돌프 바로(Rudolf Bahro)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의 내재적 개혁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이들은 친자본주의적 성향을 띤 급진 개혁파들과 달리, 이미 1970년대부터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찾으려는 의미 있는 노력을 기울여왔지만,[이를 대표하는 저작이 바로 루돌프 바로의 󰡔대안󰡕이었다. Rudolf Bahro, The Alternative in Eastern Europe, New Left Books, 1978.] 국내에서는 거의 아무런 논의 및 수용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는 당시의 PD 이론가들이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강박적으로 매달려 있었음을 방증해준다. 아마도 그들은 주체사상의 권위를 등에 업은 NL의 이론가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이 판명되면서 1992년 무렵이 되면 PD 이론가들은 세 가지 입장으로 분할된다. 첫 번째 입장은 기존의 PD 입장, 곧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및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견지하면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텍스트에 더욱 긴밀하게 밀착함으로써 한국 변혁운동 및 논쟁에 닥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윤소영, 서관모 및 다른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이전의 목표, 곧 한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복권 및 레닌과의 대화를 통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발전이라는 목표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더욱이 이러한 위기는 단순히 스탈린주의적 편향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내재적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 더 나아가 그러한 한계는 마르크스 자신의 모순들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제 그들은 새로운 목표를 채택하게 되었는데, 마르크스주의 전화가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를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으로 이해하고, 이를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근대성의 한계와 결부시키는 입장이 존재했다. 이들은 한국 사회성격 논쟁 당시에는 윤소영 등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옹호했지만,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경험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종언을 고했다는 입장으로 전회했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한 이가 또 다른 급진 경제학자였던 이병천이었는데, 그는 가명으로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 연구󰡕󰡔민주주의와 독재󰡕를 번역함으로써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사상을 한국사회성격논쟁과 접목하려는 초기 PD의 이론적 시도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1991년 그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적 선언 중 하나였던 맑스 역사관의 재검토라는 긴 논문을 통해 자신의 입장 전환을 공표했다.[이병천, 맑스 역사관의 재검토, 󰡔사회경제평론󰡕 4, 1991.] 이 논문에서 그는 PD의 초기 입장과 반대로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진정한 전통에서 일탈한 교조주의가 아니라 맑스 이론의 내적 모순과 한계를 확대증폭시켜온 역사”[이병천, 같은 글, 110.]의 일환이며, “맑스의 초월론적본질주의적 역사관, 합리주의적목적론적결정론적 역사철학”[이병천, 같은 글, 148.]의 논리적 귀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초월론적이고 목적론적결정론적 역사철학은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으로 인한 공산주의로의 필연적인 이행이라는 관념을 중핵으로 삼고 있다. “스탈린주의는 '2인터내셔널의 사후의 복수'가 아니라 맑스 역사철학의 확대, 심화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 그리하여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는 단지 스탈린주의의 종말만이 아니라 바로 이 역사철학에 지배된 맑스주의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이병천, 같은 글, 141.] 따라서 그는 이제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복권이나 순수한 혁명적 마르크스로의 복귀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론이 그 불가결한 한 가지 구성 부분을 이루기는 하지만, 또한 동시에 비마르크스주의적 진보 이론의 풍부한 유산을 흡수하는 더 일반적인 역사이론을 구성[이병천, 같은 글, 114.]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독자적 탈구축의 기획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후 그의 작업에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론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의가 점차 사라졌으며, 지난 30여 년 간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보다는 한국 경제의 개혁을 위한 경험적 연구에 몰두해왔다. 따라서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 기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청산의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를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 위기 또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의 표현으로 이해하면서도, 첫 번째 입장과 달리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철학에 근거하지도 않고 두 번째 입장과 달리 마르크스주의 자체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 입장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오히려 푸코와 들뢰즈 또는 네그리 같은 또 다른 철학적 자원에 의지하여 좀 더 좌익적인 또는 무정부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진경이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그와 그의 동료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 대한 집단적인 연구를 통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와 근대성의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일종의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하지만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나 샹탈 무페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를 구성하려고 시도했다. 오늘날 이진경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작업은 확실히 좌파적이며 탈근대적인 무정부주의의 특징을 견지해오고 있다.


이들 가운데 1990년대 초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첫 번째 집단이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1980년대 사회성격논쟁의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상당수의 인문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한국 사회 분석의 과학적 토대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공동의 합의가 존재했다. 특히 PD의 이론가들은 동유럽 사회주의가 해체되던 바로 그 시기에 국내에 밀어닥친 포스트 담론의 급류에서 마르크스주의 및 PD의 근거를 보존하기 위해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이론󰡕이라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학술지를 창간하고,[이 저널은 1992년에서 1996년까지 출간되었으며, 16호를 내고 종간되었다.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여러 글들을 묶은 편역서들을 출간했다. 󰡔이론󰡕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해체의 충격을 딛고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보존하고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20여 명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든 마르크스주의 학술지였다. 이들은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철학, 문학, 신문방송학, 지리학 등과 같은 다양한 분과의 학자들이었고 그 이론적 배경도 다양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편집위원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론을 지지했으며, 이 새로운 학술지를 열광적으로 수용한 젊은 독자들 중 많은 이들도 그들의 작업을 환영했다. 따라서 이 저널에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관한 논문들과 함께 발리바르의 여러 논문도 번역소개되었다.


또한 윤소영서관모를 중심으로 한 PD의 연구자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여러 글을 묶은 편역서들을 출판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글들은 주로 알튀세르가 197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발표한 팜플렛, 논문들 및 강연들, 대담 등이었으며, 1980년 알튀세르가 공적 무대에서 퇴장한 이후, 발리바르가 1980년대 발표한 대부분의 글들이었다.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맑스주의의 역사], [마키아벨리의 고독],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역사적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의 전화], [알튀세르와 라캉] 같은 10여 권의 저작들이 불과 3~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출간되었다.[에티엔 발리바르 외, 󰡔루이 알튀세르󰡕, 윤소영 외 옮김, 민맥, 1991; 루이 알튀세르,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이진경 옮김, 새길, 1992; 루이 알튀세르,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 에티엔 발리바르 외, 󰡔맑스주의의 역사󰡕, 윤소영 옮김, 민맥, 1992; 에티엔 발리바르 외,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옮김, 이론사, 1993; 에티엔 발리바르, 󰡔역사유물론의 전화󰡕, 서관모 엮음, 민맥, 1993; 루이 알튀세르 외, 󰡔역사적 맑스주의󰡕, 서관모 엮음, 새길, 1993; 에티엔 발리바르 외, 󰡔알튀세르와 라캉󰡕, 윤소영 옮김, 공감, 1995.] 이들 작업의 이론적 기초를 이룬 것은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1977),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1978), 로사나 로산다와의 대담(1978) 같은 70년대 후반 알튀세르의 텍스트들이었다. 이 텍스트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첫째,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도래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둘째, 더 나아가 이러한 위기는 우연적이거나 외재적인 요인에 의해 도래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및 마르크스 사상 자체의 내적 모순과 한계, 공백에서 생겨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내재적인 모순 및 그로부터 생겨나는 한계와 공백을 인정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진리성 및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모순이 존재하니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또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판정한다면, 그것은 너무 실증주의적인(또는 당시에 많이 쓰던 표현대로 하면 너무 형식논리학적인”) 관점일 것이다. 오히려 알튀세르의 고유성은, 마르크스 사상에 내재적인 모순과 한계 및 공백을 파악하는 것을 올바른(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면) 마르크스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근본 조건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곧 모순은 사회적 관계 자체의 객관적 특성을 이루는 것이다.[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런 측면에서 중요한 후기 텍스트는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뤼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 Maspero, 1976)에 부친 서문 종결된 역사, 종결될 수 없는 역사. Louis Althusser, “Histoire terminée, histoire interminable”, in Yves Sintomer ed.,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essais, PUF, 1998.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미완의 역사,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앞의 책. 또한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알튀세르와 라캉󰡕, 앞의 책도 참조.다소의 강조점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지만, 이것이 초기 저작에서부터 후기 저작, 그리고 유고집에 이르기까지 알튀세르 사상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근본적인 특성이다. 반면 알튀세르의 비판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대개의 지지자들까지도 알튀세르 사상의 이러한 핵심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는 PD 연구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알튀세르 수용의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는 보통 알튀세르의 가장 중요한 저작들로 간주되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자본을 읽자󰡕 같은 초기 저작들보다 1970년대 저술, 특히 1970년대 말의 텍스트들이 훨씬 더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사실 󰡔마르크스를 위하여󰡕󰡔자본을 읽자󰡕는 번역의 문제점 때문에 제대로 이해되거나 연구되기 어려웠다. 2017년 출간된 서관모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번역은 이러한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중요한 성과이며, 󰡔자본을 읽자󰡕는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번역본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 이유는 PD 이론가들의 주요한 관심사는 알튀세르 사상을 학문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한 마르크스주의를 구원하고 그것을 전화하는 것,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융합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같은 텍스트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근원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질문들을 제기한 선구적인 저술로 여겨졌다. 그들은 특히 마르크스주의에는 국가 이론과 조직 이론의 공백이 존재하며, 착취를 회계적 관점에서 개념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알튀세르의 논평에 관심을 기울였다.[착취에 대한 회계적 개념화의 문제는 특히 다음 저술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루이 알튀세르, 제라르 뒤메닐의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에 대한 서문, 󰡔역사적 맑스주의. 이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번역으로는 배세진 옮김, 제라르 뒤메닐의 저서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의 서문, 󰡔웹진 인무브󰡕. https://en-movement.net/198?category=718340.] 그들은 알튀세르 텍스트들이 매우 단편적이고 생략적이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심지어 그가 1980년 정신착란 상태에서 부인을 목졸라 살해했고 그 결과 공적 무대에서 배제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보기에 알튀세르가 1970년대 후반에 추구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라는 기획은 1980년대 이후 그의 제자인 발리바르에게 성공적으로 계승되었으며, 발리바르가 1980년대에 발표한 다양한 텍스트들은 겉으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를 구성하기 위한 일관되고 체계적인 작업(물론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리바르의 1970년대 작업과 1980년대 작업 사이에 존재하던 불연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연속성이 알튀세르 자신의 이론적 작업의 곤경 내지 아포리아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심지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알튀세르의 비극은 매우 가슴 아프고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이론적 기획이 그의 가장 중요한 제자인 발리바르(대부분의 PD 이론가들은 이렇게 생각했다)에게 훌륭하게 계승되고 발전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비극은 개인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PD 이론가들, 특히 윤소영과 서관모를 중심으로 한 이론가들에게는 1970년대 후반에 발표된 알튀세르의 몇몇 텍스트들과 1980년대 발리바르의 다양한 텍스트들(논문, 학회 발표문, 공동 저서에 수록된 글, 대담, 심지어 짧은 서평들까지)을 함께 묶어서 읽고 연구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두 사람의 텍스트는 사실은 하나의 일관된 기획의 연속적 표현이며,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내적 모순이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된 것이다. 그 결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90년대 초의 몇 년 동안 알튀세르와 발리바르(그리고 그와 관련된 다른 저자들)의 저술을 묶은 10여 권의 저작들이 출간되었으며, 이것이 알튀세르 효과의 두 번째 계기의 핵심을 이루었다.


1995년 출간된 윤소영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라는 PD 이론가들의 새로운 이론적 작업을 잠정적으로 결산하는 저작이었다.[윤소영,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알튀세르를 위하여󰡕, 문화과학사, 1995.] 알튀세르를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저작에서 윤소영은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라는 관점에서 알튀세르 사상을 재구성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198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작업을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의 결합에 기반을 둔 인권의 정치로 파악하는 것, 세 번째는 알튀세르와 가까운 사이였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쉬잔 드 브뤼노프(Suzanne de Brunhoff)의 신자유주의 비판의 함의를 분석하는 것, 마지막으로 벨기에 출신의 페미니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의 성적 차이의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를 위해 필수적인 페미니즘으로, 더욱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사상에 가장 잘 부합하는 페미니즘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 문제적인 저작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알튀세르 효과의 두 번째 계기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 책을 문제적인저작이라고 말한 것은 무엇보다도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사상에 관한 그의 재구성이 거의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서 시도된 것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사상에 대한 일관되고 체계적인 재구성이라고 할 수 없다(적어도 우리가 재구성이라는 것을 체계성과 더불어 비판과 선별을 함축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오히려 그것은 두 사람의 여러 저술들 및 관련된 다른 사상가들의 저술(예컨대 캉길렘, 라캉, -클로드 밀네, 데리다 등)에 대한 조악한 요약 및 심지어 인용 표시 없는 인용문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그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를 위해 필수적인 토대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변했을 뿐이다. 더욱이 그는 왜 이리가레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사상과 가장 일관성 있게 결합될 수 있는 페미니즘 사상가인지 결코 설명하지 못했다. 한국의 여러 독자들은 윤소영의 이 책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저작이라고 간주했지만, 그것은 그의 재구성 및 분석이 심오한 통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저술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다른 사상가들, 곧 캉길렘, 라캉, 데리다, 이리가레 등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결과, 당시 한국 독자들은 접하기 어려웠던 이 사상가들 및 그 연구자들의 원서의 본문을 자의적으로 (인용 표시 없는 채로) 인용하여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윤소영의 책은 여러 측면에서 짜깁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책의 외관상의 난해함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윤소영의 책은 당시의 정세에서 PD의 이론가들이 직면했던 정치적이론적심리적 상황을 상징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마침내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복권시키고 민중민주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순간에 마르크스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부숴버렸던 외상적인 사건에 맞닥뜨렸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처럼 전향을 선언할 수도 없었고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의 길을 따를 수도 없었던 이들은 알튀세르의 후기 저술 및 발리바르의 1970~80년대 작업에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건설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필사적으로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텍스트들은 너무 단편적이었고, 발리바르의 저술은 그들이 소화하기에는 너무 난해할뿐더러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가령 그들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연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며, 왜 이러한 연구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를 위해 본질적인 이론적 요소가 되는지도 납득하지 못했다.

 

알튀세르의 실추: 알튀세르 퇴장, 포스트 담론 입장

 

PD 이론가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알튀세르-발리바르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를 위한 작업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으며, 오히려 새로 등장한 포스트 담론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는 한국 사회에서 단절의 시기였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을 통해, 수십 년에 걸친 군사 독재에서 벗어나 한정된 형태로나마 민주화 이행이 시작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만이 아니라 급진 운동 세력들의 분할 및 위축을 가져왔다. 더욱이 같은 시기에 한국 사회에 소개되기 시작한 포스트 담론은 한국 학계 및 공론장에서 일종의 인식론적 단절을 산출했다. 사실 포스트 담론의 소개 및 확산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누구도 몰랐던 용어들과 관념들, 담론들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누구나 다 알고 있는(또는 아는 척해야 하는)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과 담론으로 군림했던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민중민주주의혁명’, ‘민중같은 용어들, 그리고 과잉결정(또는 중층결정’)이나 약한 고리, 이데올로기, 호명 같은 알튀세르의 개념들이 대학 및 사회운동의 공용어로 통용되었지만, 포스트 담론 이후에는 담론, 텍스트, 해체, 시뮬라크르, 판옵티콘, 리좀 같은 용어들이 이를 대체하여 새로운 유행어로 군림했다. 이에 따라 불과 몇 년 사이에 마르크스주의는 아주 먼 시대에 속한 낡은 유물처럼 간주되었고, 데리다, 푸코, 들뢰즈, 보드리야르와 같은 새로운 사상가들의 저작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번역되어 학계 및 문화계의 전면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 및 PD 이론가들이 포스트 담론에 적대감을 드러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포스트 담론은 1980년대의 급진적인 민주화 운동 및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종의 애도 작업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의심스럽고 이론적으로는 매우 비일관적인 애도 작업이었다.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웠던 이유는,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에도 군사 독재의 정치적 계승자들의 영향력은 막강하게 남아 있었고,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비롯한 불평등과 착취의 문제는 여전히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전쟁 이후 40여 년 동안 지속된 남북한 간의 적대적인 대립은 냉전의 해체 이후에도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여성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문제, 이주자의 문제 같은 새로운 사회적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 담론의 주창자들은 이제 무거운 정치의 시대는 지나갔고 가볍고 즐거운 문화예술이 시대정신이 되었노라고 선언했으며, 불평등, 착취, 분단, 통일, 차별과 배제 같은 문제들을 중요한 의제로 다루기를 거부했다. 이론적으로 비일관적이었던 이유는, 1990년대의 포스트 담론은 진정한 이론적 탐구 작업의 대상으로 간주되기보다는 문화적 유행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누구나 데리다, 들뢰즈, 리오타르, 보드리야르를 인용했지만, 그들의 사상을 면밀하게 분석하려는 작업은 극히 드물었으며, 1980년대 민중운동 및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를 따져보려는 작업은 더 드물었다. 그 결과 1980년대의 마르크스주의와 1990년대의 포스트 담론 사이에는 상호 불신과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진태원, 포스트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앞의 책 참조.]


이러한 새로운 경향 속에서 알튀세르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일반과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되었다. 알튀세르는 점차 잊혀갔으며, 인문사회과학 담론장에서 주도적인 위상을 상실해갔다. 어떤 의미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알튀세르 사상의 실추는 마르크스주의의 쇠퇴를 상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시기는 알튀세르 효과의 세 번째 계기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는 이 시기에 이르러 PD 이론가들의 알튀세르 전유와 독립적인 새로운 알튀세르 독해, 특히 이번에는 철학적 독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독서를 대표하는 책이 문성원의 [철학의 시추: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이었다.[문성원, 󰡔철학의 시추: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철학󰡕, 백의, 1999.] 이 연구에서 저자는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알튀세르의 철학을 검토했다. 철학에 대한 정의의 문제, 마르크스주의 과학과 그 대상,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 알튀세르의 역사관과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발성의 유물론이 그것이다. 그는 알튀세르의 철학을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의 무기로 활용하거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에서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엄밀한 구별에 기초하여 청년 마르크스와 노년 마르크스 사이에는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철학의 본질을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경계선을 긋는 것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저자는 주장하기를,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같은 텍스트가 보여주듯이,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알튀세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고, 결국 이를 부인하게 되었다. 곧 알튀세르는 초기 저작에서 잉여가치 개념이야말로 역사유물론을 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 단절하게 해주고, 그리하여 그것을 역사과학으로 구성한 핵심 개념으로 파악했지만, 1970년대 후반의 여러 텍스트에서는 마르크스 자신이 여전히 착취에 대한 회계적 개념화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자본󰡕과 같은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저술에서도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구별이 불명확하다면, 이러한 구별에 기초를 둔 알튀세르의 철학은 모순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마르크스의 모순에 관한 후기 알튀세르의 선언은 사실은 그 자신의 이론적 모순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문성원의 저작은 한국에서 알튀세르 연구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는 저자의 비판적 재구성이 별로 설득력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알튀세르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알튀세르가 초기에는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 실증주의적 구별을 고수한 반면, 후기에는 이러한 구별의 타당성에 회의적이게 되거나 그 구별을 폐기했다는 점에서 비일관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초기에도 저자가 가정하는 바와 같은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견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절단 개념은 지속적인 단절의 작업을 의미하며, 따라서 과학은 본질적으로 과학 내부에서의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와의 투쟁 작업 속에서 형성된다고 간주한다. 이데올로기는 과학 내부에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의 존재 조건으로서) 존재하며, 이러한 내부의 이데올로기와의 지속적인 투쟁이 역사과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고유성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역사과학을 구성했다는 것과 마르크스가 지속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알튀세르가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저자 자신은 곧바로 알튀세르를 포기하고 그 대신 데리다와 레비나스에게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2000년대에 알튀세르에 대한 또 다른 철학적 독해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라캉과 알튀세르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 논쟁은 1990년대 한국에 처음으로 라캉 정신분석을 소개했던 사람 중 하나였던 홍준기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는 라캉과 알튀세르의 관계를 주제로 한 독일 브레멘대학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하여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을 시작했다. 그의 테제는, 알튀세르가 라캉의 정신분석을 역사유물론의 영역에 적용하려고 했던 라캉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스승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알튀세르의 무능력으로 인해 이러한 적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홍준기,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 라깡과 알뛰쎄를 중심으로, 󰡔창작과 비평󰡕 222, 1994.] 그는 특히 라캉의 상징적 질서의 논리”(홍준기에 따르면 이는 프로이트의 위버데테르미니어룽(Überdeterminierung) 개념을 이론적으로 확장한 것이다)의 불완전한 적용의 한 사례로 알튀세르의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 개념(그는 프로이트의 위버데테르미니어룽과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을 중층결정이라고 번역한다)을 비판한다. 곧 과잉결정 개념이 위버데테르미니어룽 및 상징적 질서의 논리가 지닌 비환원주의적 측면(심급들의 탈중심적 체계로서의 정신작용)은 잘 포착하고 있는 반면, 알튀세르는 환원주의적 객관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 ‘구체적인개인들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홍준기, 같은 글, 356.]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 다른 라캉 연구자들 역시 또 다른 각도에서 알튀세르의 이론을 비판했다. 가령 영문학자인 양석원과 박찬부는 각각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교하면서 전자의 기초 위에서 후자의 한계를 비평한 바 있다.[양석원, 이데올로기의 주체와 무의식의 주체: 알튀세르와 라캉의 주체이론, 󰡔문학과 사회󰡕 51, 2000; 박찬부, 상상계, 이데올로기, 주체의 문제: 라캉과 알튀세르, 󰡔자크 라캉: 표상과 그 불만󰡕, 문학과 지성사, 2006.]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직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두 가지 영역에만 초점을 맞추고 실재계는 제외하는 알튀세르의 이론은 라캉 이론에 대한 불완전한 차용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에서는 오직 이데올로기적 주체만 가능할 뿐 무의식의 주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간에, 2000년대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슬라보예 지젝의 알튀세르 독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나는 몇몇 글에서 알튀세르와 라캉 또는 알튀세르와 지젝의 관계에 대해 토론한 바 있다.[진태원, 라깡과 알뛰쎄르: “또는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근대철학󰡕 31, 2008(󰡔스피노자의 귀환󰡕, 서동욱진태원 엮음, 민음사, 2017에 재수록) 참조. 또한 최원, 󰡔라깡 또는 알튀세르󰡕, 난장, 2015도 참조.] 간단히 요지만 말하자면, 첫째, 알튀세르에 대한 이러한 비판들은 그의 메타이론적 기획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알튀세르의 몇몇 유고들이 말해주듯이, 그는 1960년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동시에 라캉의 이론은 메타이론 또는 (알튀세르 자신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일반이론의 차원에서 보면 애매성내지 객관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간주했다.[이점에 대해서는 특히 Louis Althusser, “Trois notes sur la théorie des discours”, in Écrits sur la psychanalyse, Paris : Stock/IMEC, 1993 참조.] 알튀세르를 라캉의 제자로 간주하거나 적어도 알튀세르가 라캉의 정신분석의 이론을 빌려와서 그것을 역사유물론에 적용했다고 보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1964년에 발표한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알튀세르가 라캉을 찬양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1970년에 발표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거울구조라든가 상상계 같은 라캉 정신분석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프로이트와 라캉과 거의 같은 시기에 쓰인 유고들은 첫 번째 사실이 제한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 또는 적어도 그것의 이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쓰인 유고들에서 알튀세르는 (라캉의) 정신분석을 역사유물론의 일반이론의 기획 속에 포섭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기획에 입각하여 라캉 이론의 강점과 한계를 측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시 유고로 발표된 1975년의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이라는 글에서 알튀세르가 1964프로이트와 라캉에서 라캉을 찬양했던 것과 달리 라캉의 이론적 한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모종의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 󰡔알튀세르와 라캉󰡕, 앞의 책.] 그것은 오히려 초기부터 알튀세르가 라캉 이론에 대해 갖고 있던 비판적 관점이 후기 라캉의 작업에 대해 더욱 고조된 방식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둘째, 비판가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알튀세르의 상상계 개념은 라캉에서 차용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스피노자 철학에서 유래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1973년 출판된 󰡔자기비판의 요소들󰡕[Louis Althusser, Éléments d’auto-critique, in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essais, op. cit.]이나 󰡔정신분석과 인문과학󰡕 또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같은 유고들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 이론이 자신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이론적 모체라는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지만,[Louis Althusser, Psychanalyse et sciences humianes (deux conférences), LGF, 1996;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이매진, 2008.]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알튀세르의 논평이 지닌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또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스피노자 연구자이기도 한 파스칼 질로는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의 관계에 대해 훨씬 더 명료하고 균형잡힌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Pascale Gillot, Althusser et la psychanalyse, PUF, 2009; 󰡔알튀세르와 정신분석󰡕, 정지은 옮김, 그린비, 2019.]


셋째, 알튀세르 비평가 중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알튀세르에게 미친 영향을 진지하게 고려한 사람이 바로 슬라보예 지젝인데, 그는 다른 비평가들과 달리 오히려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받은 나머지 주체를 수동적 행위자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사실 19세기 초 독일 관념론에서 전개된 범신론 논쟁’(Pantheismusstreit) 이래(또는 그 논쟁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피에르 벨(Pierre Bayle)의 비판 이래)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낡은 비판을 새로운 용어법으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지젝의 스피노자 및 알튀세르에 해석에 대한 더 상세한 비판은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앞의 글을 참조.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스피노자 수용의 문제는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0 및 프레더릭 바이저, 󰡔이성의 운명: 칸트에서 피히테까지의 독일철학󰡕,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b, 2018 2장과 3장 참조.]

 

결론을 대신하여

 

이제 간략한 몇 마디 논평을 제시하면서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해보겠다. 우선 내가 이 글에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저작이 때로는 교조적이고 상상적인(심지어 망상적인) 방식으로 해석되고 왜곡되기도 했지만,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진리 효과를 산출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진리 효과와 미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한국에서 알튀세르 전유는, 감히 말하자면,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 대해 말했던 바를 상기시킨다. “만약 스피노자가 이 세상에 출현한 이단이 남긴 가장 위대한 교훈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면, 이단적 스피노자주의가 되는 것은 거의 정통 스피노자주의인 것이다![Louis Althusser, “Éléments d’autocritique”, in Solitude de Machiavel, p. 182.] 우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이단적 알튀세리언이 되는 것은 알튀세르 사상 자체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따라서 알튀세르 같은 철학자에 대해 적용운운 하는 것은, 알튀세르가 어떤 유형의 이론가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마키아벨리가 됐든 스피노자가 됐든, 아니면 바슐라르나 캉길렘 또는 프로이트나 라캉이 됐든, 아니면 레닌이나 마오, 심지어 마르크스 자신이 됐든 간에, 알튀세르는 자신이 활용하는 사상가들의 사상을 비틀고 때로는 뒤집어서 활용한다. 이처럼 이단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활용하면서도, 알튀세르는 그 사상들에 관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진리 효과를 산출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그 사상가들에 대한 충실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이는,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불가피한 것으로 비쳤을 때 PD의 알튀세리언들이 수동적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추종하지 않고,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1970년대 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선언했던 알튀세르의 저술에 의지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을 추구했으며, 나중에는 한국의 국민적 역사의 시간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전화할 수 있는 길을 필사적으로 모색하려고 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상적인 (어떤 사람들은 망상적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막대 구부리기덕분에 알튀세르는 상아탑 속에만 현존하는 서방 마르크스주의자들가운데 한 사람 또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데 그치지 않고, 1980년대 이후 한국 인문사회과학 및 사회운동 속에 깊이 지속되어온 정치적지적 효과의 부재하는 중심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것은 미망과 오류를 피하지 못했고, 때로는 진리 효과만이 아니라 교조적 효과도 산출했던 전유 방식이었다.


나는 1980년대의 논쟁과 뒤이어 전개된 페레스트로이카 논쟁을 통해, 또한 윤소영 교수를 비롯한 PD 지식인들이 수행했던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저작의 집단적 번역 작업을 통해 정치적으로지적으로 교육받았던 세대에 속한 사람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나 자신을 비롯한 젊은 세대의 알튀세리언들은 새로운 선택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이전의 PD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심지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의 알튀세르-발리바르라는 관념을 고수하면서 포스트 담론의 사상가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응해야 하는지 아니면 말하자면 이제 포스트 알튀세리언이 되어야 하는지의 선택 문제였다.[포스트 알튀세리언이 된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85년 라클라우와 무페가 고안해낸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개념은, 그 이후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 저자들이 이 개념에 부여했던 의미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좀 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런 넓은 의미로 이해하면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으로 간주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이론적정치적으로 필수적인 구성 요소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좌파적인 사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이 비어 있는 기표가 어떤 기의를 지닐 수 있는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이것은 포스트 알튀세르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후자를 택했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더 적은 알튀세르를 선택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제부터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옹호해야 하는 진정한 정치와 철학의 유일한 또는 가장 참된 대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더 많은 알튀세르를 선택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단지 마르크스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마키아벨리언이자 스피노자주의자이고, 프로이트주의자이자 에피쿠로스주의자이며, 발리바르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바디우와 랑시에르의 스승, 데리다와 푸코의 스승이자 동료이며, 또한 경제학자 쉬잔 드 브뤼노프와 화가 크레모니니의 친구 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 네 번째 알튀세르 효과는 포스트 알튀세르 효과였던 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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