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연세대에서 [푸코와 철학자들] 북콘서트가 있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행사였는데도 아주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성황을 이뤘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그 행사 머리말로 작성한 간단한 글을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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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오늘 이 자리에 서니 몇 가지 감정이 듭니다. 우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몇 년 동안 많은 애를 써준 김은주 선생님과 민음사 신새벽 차장님 덕분에 오늘 북토크 모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사석에서도 말했지만, 이 자리에서도 다시 한 번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엮은이의 한 사람으로서 좋은 원고를 보내주신 공동 필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이 책은 한국의 푸코 수용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책이라고 보이고, 특히 철학자 푸코에 관한 연구로는 앞으로 빠른 시간 내에 이 책을 뛰어넘을 만한 책을 내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이것은 모두 외국에서 출판된 푸코 연구에 견줘 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 높은 글을 만들어준 필자 선생님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금요일 저녁의 귀한 시간에 열리는 모임인데도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많은 독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독자들의 독서와 비평, 새로운 연구로만 완성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오신 독자 분들은 이 책의 공동 저자로서의 자격과 책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그 다음으로 당혹스러운 감정이 듭니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은 대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인데, 제가 그 역할을 맡게 되니 새삼 나이를 몇 살은 더 먹은 기분입니다. 저 아직 젊습니다. ㅠㅠ


마지막으로 푸코 전공자인 허경 선생님과 도승연 선생님,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심세광 선생님께 미안하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특별히 전하고 싶습니다. 어찌 하다 보니 푸코 전공자도 아닌 김은주 선생과 제가 이 책의 엮은이가 돼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 연구의 능력으로 보나 전문성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허경 선생님과 도승연 선생님 또는 심세광 선생님께 이 책의 공로가 돌아가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흔쾌히 좋은 원고를 써주시고 이 자리에까지 함께 해주신 두 분 선생님께, 그리고 미처 참석하지 못한 심세광 선생님께 특별히 엮은이로서 사의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푸코와 철학의 관계에 관해 엮은이로서의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면서 오늘 소개의 말로 대신할까 합니다.


제가 방금 푸코와 철학의 관계라고 무심하게 말했지만, 사실 푸코와 철학의 관계는 마냥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는 아닙니다. 오히려 긴장과 갈등, 역설과 아포리아를 품고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몇 가지 측면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1) 프랑스 철학


먼저 우리가 푸코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하는 프랑스 철학또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푸코는 데리다, 들뢰즈 등과 더불어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를 통틀어 보더라도 몇 손가락에 꼽을 만한 철학자로서의 위상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요컨대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 등과 같은 반열에 놓이는 것이죠.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출판사 중 하나인 갈리마르(Gallimard)에서는 플레이야드”(Pléiade) 총서가 출간되는데, 저명한 사상가나 작가의 전집을, 사전 종이 같은 얇은 종이를 사용하여 한 권 내지 몇 권 안에 집약해서 펴내는 총서죠. 그런데 20세기 후반 철학자들 가운데는 푸코 전집(푸코가 생전에 출판한 저작들 전집)이 유일하게 이 총서로 간행되었습니다. 이는 철학자로서 푸코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미 사용했듯이, 우리가 흔히 프랑스철학 또는 독일철학 아니면 영미철학 등에 관해 말하지만, 여기에는 얼마간 역설이나 모순이 함축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보편성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프랑스철학이나 독일철학, 영미철학 같은 표현들은 철학이 프랑스나 독일, 영국이나 미국 같은 네이션 스테이트, 곧 국민국가의 문화적 틀에 제약받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프랑스철학 또는 현대 프랑스철학의 대표자 푸코와 같은 표현을 우리가 사용할 때, 우리는 프랑스철학자로서의 푸코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프랑스 철학자로서의 푸코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일까요? 요컨대 푸코는 프랑스적인 것 때문에 위대한 철학자가 된 것일까요, 아니면 프랑스적인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얼마간 작위적일 수도 있는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이 책에 수록된 글들에서 잘 드러나듯 푸코는 프랑스 철학자들(데카르트, 캉길렘, 알튀세르, 데리다 등)에게 영향을 받고 그들과 대결하면서 동시에 그 바깥의 철학자들, 요컨대 칸트, 니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받고 또한 그들과 대결했다는 사실, 그리고 말년에는 고대 그리스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푸코의 철학을 프랑스철학으로, ‘현대 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한정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우리가 프랑스철학이나 독일철학 등으로 부르는 것은 결코 순수하게 프랑스적인 것이나 독일적인 것(프랑스의 정신, 독일의 정신 같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이미 타자들과의 교류, 그것들의 수용 및 변용, 재창조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푸코의 철학이 위대한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푸코가 국민적인 것의 경계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근현대 철학의 제도적인프라적상징적 조건이라는 문제, 철학이 지금까지 스스로 문제화하지 않았던 그 문제를 수행적으로 다루는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2) 정전이 된 철학자 푸코


그 다음, 요즘 인문학 분야에서는 철학이나 사상 또는 문학의 고전적인 작품 그리고 그 저자를 가리켜 정전”(can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같은 것,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칸트나 헤겔의 철학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겠죠. 그리고 푸코는 앞서 말했듯이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서양철학의 정전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푸코 철학은 이점에서 다시 역설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이 책의 서론에서 김은주 선생이 잘 지적하듯이 푸코는 이전의 서양철학에서 철학의 주제로 간주되지 않았던 대상들을 다룸으로써 정전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광기나 감옥, (호모) 섹슈얼리티 같은 것이 대표적이겠죠. 이것들은 푸코 이전에는 누구도 철학적인 주제가 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데, 푸코는 이 대상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근현대 사회의 심층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종래의 철학 및 그 합리성의 한계도 드러냈죠. 더욱이 푸코는 그러한 한계를 드러낼 때 기존의 철학적 방법과 다른 방법, 예컨대 고고학이나 계보학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대상이나 주제, 그리고 방법은 푸코 당시에는 아주 낯설고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푸코가 정전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주제이자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푸코는 이 책에서 알 수 있듯이 고전의 반열에 이미 올라 있는 다른 철학자들과의 비교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푸코를 정전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사실 푸코적인 것을 얼마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더 첨예하게 말하자면, “고전 철학자 푸코, 정상화되고 길들여진 푸코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알튀세르가 유고로 출간된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에서 말한 바 있듯이, 서양 철학의 근본 특성은 바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모든 것, 단지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 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근거를 부여하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이죠. 적어도 그것이 지배적인 철학의 특징이었습니다. 반면 역시 알튀세르에 따르면, 기성의 지배적인 철학에 맞서는 진정한 유물론 철학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철학의 충만한 공간 안에 공백을 만드는 것, 철학의 총체성의 바깥을 찾아내는 것을 추구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푸코는 아마도 탁월한 유물론 철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푸코를 정전으로 만듦으로써, 그를 다시 한 번 철학의 지배권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 아닐까요? 푸코와 같은 도발적인 철학자, 철학의 바깥에 대한 탐구를 통해 바깥의 철학을 추구했던 철학자에게 이것은 불가피한 역설일까요?

 

3) 푸코에 관한 연구에서 푸코적인 연구로


이것은 마지막 세 번째 질문과 연결됩니다. 10여 년 전에 제 한국의 푸코 연구에 관한 주제서평을 쓰면서 글의 제목으로 삼았던 문구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저는 푸코를 연구하는 이들이 푸코에 관한 연구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푸코적인 연구를 수행한 것이 위와 같은 역설에서 벗어나는 가장 생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이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또는 푸코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푸코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아마도 오늘날 푸코가 살아 있다면 추구했을 법한 주제들을 탐구하는 방법일 겁니다. 예컨대 오늘날 푸코라면 인공지능의 문제라든가 인류세의 문제, 또는 신냉전과 신권위주의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플랫폼 자본주의에 대해 무어라고 생각했을까요? 만약 그라면, 이 문제들을 어떤 관점에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접근했을까요?


또는 푸코가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했던 대상이나 주제를 탐구하는 방법도 있겠죠. 당장 떠오르는 주제는 생명권력같은 것이 있네요.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같은 강의록이나 󰡔성의 역사 1󰡕 마지막 장에서 이 주제를 잠깐 다뤘지만, 그 자체로 주제화하지는 않았죠. 또는 대항품행 같은 주제들은 어떨까요? 그것도 역시 다양한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탐구해볼 만한 문제가 될 겁니다.


아니면 푸코의 모순이나 비일관성 또는 한계를 밝히는 작업, 더 나아가 푸코를 다르게 사유하는 작업도 위의 방식 못지않게 훌륭한 푸코적인 연구가 될 것입니다. 푸코는 아시다시피 평생 다르게 존재하는 것, 다르게 사유하는 것을 추구해왔던 사람이었던 만큼, 푸코를 다르게 읽고 사유하는 것은 아주 탁월한 푸코적인 연구로 불릴 만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푸코와 철학자들󰡕은 푸코적인 연구의 의미 있는 사례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자평해봅니다. 푸코의 철학에 대해, 푸코가 다른 철학자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 국내의 연구든 해외의 연구든 간에, 지금까지의 연구들과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려는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이 책의 공동 필자들만이 아니라 독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또 다른 푸코적인 연구의 길에 나서야 할 겁니다. 그 길에서 이 책이 믿을 만한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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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코뮤날레 2023 일정표가 나와서 올려둡니다. 


전체 일정이 상세하게 나와 있어서 참조하기 좋네요.^^ 



<2023년 제11회 맑스코뮤날레: 위기와 비판> 전체 일정 안내 - Google Docs





그리고 참가신청서도 확인해보세요~



맑스코뮤날레 2023 참가 신청 (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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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맑스 코뮤날레 포스터입니다. 


5월 25일 ~ 28일까지 마포, 신촌 지역 학술단체 세미나실에서 분산 개최됩니다. 


디자인이 독특하긴 한데, 가독성은 거의 무시한 듯. 


일부러 찾아오기 어렵게 하려고 이런 건 아닐 텐데, 


이렇게 꼭 디자인을 했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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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 2023-05-19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가독성에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대회 전체 일정에 관해 보다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구글문서를 별도로 만들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 편성, 시간표, 장소 안내 등에 관해선 아래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docs.google.com/document/d/1U2jndiyKmGpr04e3cmzQYErZlM6YLVKNGZs1siJfU5w/edit?usp=sharing
 



5월 13일 부산 부경대에서 개최되는 새한영어영문학회에서 초청을 받아서 발표를 하나 하게 됐습니다. 


제 발표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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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과 바이러스 사이에서 관계론적 생태론을 위하여

 


 

나는 이 발표에서 철학적인 것의 한 사례 내지 요소로서 인류세의 문제를 사고해보고 싶다. 여기서 철학적인 것은 제도적인 철학 내의 관례적 주제 및 관행적 실천을 넘어서는 철학적인 주제와 실천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철학적인 것은 철학의 바깥에 있다고 간주되는 어떤 대상에서 출발하여 그 대상은 사실 철학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철학의 한계를 가리키는 증상이라는 점을 보임으로써, 철학적 사고와 제도, 관행의 한계를 변화시키려는 수행적 실천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빨갱이, 5.18, 신자유주의, 세월호, 갑을 관계, 장애 등과 더불어 인류세는 탁월한 철학적인 것의 한 사례이자, 다른 사례들을 과잉결정하는 범례적 지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범례성은 우리가 물려받은 철학적 범주들(또는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비평의 범주들)의 개조 없이 인류세를 철학적인 것으로서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실체와 사물,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명,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무생명, 이론과 실천 같은 범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발표에서 나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몇 가지 요소들을 이끌어 와서 철학적인 것으로서의 인류세를 사고해보려고 한다. 이것은 스피노자 철학이 인류세를 사고하는 데 가장 적합한 철학이라거나 심지어 인류세에 관한 고찰은 스피노자 철학을 비롯한 철학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허세를 부리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볼 때 인류세에 관한 철학적 또는 비평적 탐구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유용성은 안토니오 네그리가 적절하게 명명한 바와 같이 스피노자 철학이 서양 근대 사상에서 야생의 별종’(anomalia selvaggia)으로서의 지위를 지닌다는 데서 기인한다. 곧 스피노자 철학은 서양 근대철학의 주류적인 전통에서 볼 때 특이한 별종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며, 더욱이 근대철학의 합리성의 틀로 포섭하거나 억압하기 어려운 야생의 역량을 품고 있다. 인류세가 어느 지점까지는 근대 문명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그 문명적 합리성의 틀로는 제대로 사유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스피노자 철학은 근대 문명 내에서 그 한계를 벗어나거나 적어도 넓히기 위한 대안을 제시해준다.


인류세가 우리가 정의하는 의미에서 철학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인류세가 인류에게, 그리고 철학 및 비평에게 역설적인 사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류세는, 인류의 인공적 행위성이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지구 자체를 변동시킬 수 있는 위력의 소산인 한에서,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 및 자연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에 입각한 근대 철학과 문명의 극한을 나타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류세는 이러한 변동으로 인해 초래되는 지구의 폭력적인 힘과 인류의 가능한 종말을 가리키는 한에서, 인류의 왜소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역설에 직면하여 세 가지 가능한 대안이 제시될 수 있다. 첫째는, 인류세를 인류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자연의 지배자로서 인류의 역량을 입증해야 할 미증유의 도전 과제로 이해하는 일이다. 에코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이러한 대안은 지구공학(geoengineering)이나 기후공학(climate engineering)의 방식으로 인류세의 도전에 응전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근대문명을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려고 하는, 생태학적 대안의 길이다. 전자와 달리 이러한 길은 인류세를 인간 및 근대문명의 오만함에 대한 징벌로 이해하고자 하며, 인간의 배타적 주체성과 행위성에 입각한 근대문명과 다른 비근대적이고 비서양적인 존재론을 모색함으로써 인류세가 산출하는 재앙적인 결과를 완화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추구한다. 첫 번째 대안이 인류세를 근대 문명의 표현이자 그 확장의 계기로 간주한다면, 두 번째 대안은 인류세를 근대 문명의 실패의 표현이자 단절의 계기로 이해한다.


내가 오늘 발표에서 사고해보려는 세 번째 대안은, 인류세를 단절의 계기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 대안과 공명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의 행위성을 약화하기보다는 그 행위성을 새로운 철학적 바탕 위에서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구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의 행위성에 따른 윤리적 책임을 찾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 대안과 길을 달리 한다. 나는 특히 스피노자 철학의 세 가지 요소에 주목하고자 한다.


첫째, 전통적인 실체의 철학과 달리 모든 사물 내지 실재를 양태로 이해하는 스피노자의 양태의 존재론은, 실체와 사물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 곧 관계론적인 통찰을 제시해준다.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양태들은 관계 속에서 성립하고 관계 속에서 실존할 수밖에 없으며, 변용되고 변용하는 양태들 간의 상호작용으로서의 변용의 관계는 양태들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이룬다.


둘째, 다른 양태들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인 인간은, 관계들을 통해 성립하고 관계들 속에서 실존한다. 곧 인간은, 데카르트와 홉스에서 현대철학에 이르는 서양철학이 궁극적으로 가정하는 바와 달리, 관계에 앞서 이미 자율성을 지닌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타자들과의 자율적인 개인으로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다. (변용의) 관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본질적인 존재론적 조건이다. 이는 비단 사회적 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에서 행성에 이르는 ()생명의 그물망은 인간과 상이하고 인간에 선행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내부를 구성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셋째, 따라서 인간은 오직 비인간적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으로서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다는 인간학적 역설은 인류에게 미증유의 윤리적 책임을 부과한다. 이러한 윤리적 책임을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에 입각하여 사고해볼 수 있다.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코나투스는, 인간이나 생명체만이 아니라 모든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이룬다. 흥미롭게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에서 두 가지 윤리적 실천의 방향을 이끌어낸다. 하나는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존재자들과 우정의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 곧 다른 존재자들이 각자 그 자신의 존재를 잘 보존하는 것을 주체 자신의 이성적 보존의 조건으로 삼는 방향이다. 이 양자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능동성, 곧 강인함(fortitudo)의 두 측면을 이룬다. 이러한 코나투스의 윤리학이 인류세 시대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사고하기 위한 한 가지 길을 제시해준다는 것이 오늘 나의 발표의 궁극적인 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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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진작 보고드렸어야 하는데, 이렇게 늦게야 보고드리게 된 것을 먼저 사과드립니다. 


지난 3월 6일에 공지한 바와 같이 (https://blog.aladin.co.kr/balmas/14406245) 전장연 권리 투쟁에 연대하는


서울 마포-신촌 지역 학술단체 모임에서는 전장연 투쟁에 연대하기 위한 지지 서명 및 모금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원래는 3월 22일에 전국 규모의 일간지에 광고 게재를 위한 모금 활동이었는데, 


모금액이 애초 계획했던 금액보다 부족해서 일간지 게재를 하지 못하고 


대신 진보적 장애인언론인 <비마이너>에 연대 및 지지 성명서와 서명인 명단을 게재했습니다. 


그리고 비마이너에 후원금을 전달했습니다. 



서명하고 연대해주신 분들께는 이메일을 통해 지금까지의 상황 및 후원 내역을 안내해드렸습니다. 



서명에 참여해주시고 후원해주신 모든 분께,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격려하고 지지해주신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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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진보적 연구자 208명, 전장연 지하철 행동 지지 선언문 발표 < 사회 < 기사본문 - 비마이너 (beminor.com)



마포·신촌 학술단체들, 왜 장애인 권리예산 연대 나섰나 (한겨레 신문)

https://m.hani.co.kr/arti/culture/religion/1088338.html?_fr=fb#ace04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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