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는데요, 


저도 두 개의 학술대회에 각각 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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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여름 프랑스철학회 정기 학술대회 


전쟁과 철학







"평화도시 인천"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재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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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23-09-1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토요일 학회에서 나중에 아감벤에 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했던 분이군요.^^
 















[황해문화]가 120호를 출간하면서 창간 30주년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지난 번에 공지한 바와 같이 3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7월 8일에 개최된 바 있고, 


(https://blog.aladin.co.kr/balmas/category/1980?CommunityType=MyPaper&page=2&cnt=544)


이번 호는 심포지엄 발표문과 토론을 중심으로 특집호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번 120호 권두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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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재난의 시대에 정의로운 전환을 모색하며

 

1

 

[황해문화] 120호를 세상에 내놓는다한편으로는 담담하게다른 한편으로는 비상한 마음가짐으로.


담담한 마음인 것은, 50, 100, 120호가 되었든, 49, 101, 119호가 되었든 [황해문화]를 내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가 특별히 다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 시각지역적 실천이라는 창간 이래의 초심에 입각하여 우리 사회와 아시아더 나아가 지구 전체에 걸친 핵심적인 이론적정치적문화적 쟁점들을 제기하고그에 관한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매호마다 [황해문화]가 일관되게 견지해온 태도라고 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120호를 내면서 [황해문화]비상한 각오를 다지지 않고서는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내재적으로 본다면 [황해문화]는 지난 20여 년 동안 편집위원회를 이끌어 왔던 김명인 편집주간을 비롯하여 김진방백원담 편집위원이 물러나고 새로운 편집위원회를 꾸려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1993년 인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 계간지로 출발했던 [황해문화]는 세 사람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던 기간 동안 명실상부 한국의 비판적 공론장을 대표하는 잡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평범한 시민들과 약소자들곧 우리 사회 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돌이켜본다면 [황해문화]가 첫 발을 내디뎠던 1993년은 전 지구적으로그리고 국내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당시는 100년 넘게 세계를 분할해온 주요 세력 중 하나였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였다또한 당시는 민주화 이행의 기쁨이 민주화 운동 내부의 분열과 패퇴수구 보수 세력의 연이은 집권에 따른 좌절감으로 퇴색하던 시기였다이런 가운데 탈냉전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세계 문명의 창도는 인천을 비롯한 각 지역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은 지난 30여 년 동안 [황해문화]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전진해올 수 있었던 길잡이였다.


그런가 하면 2006년 50호를 발간하면서 [황해문화]는 이제 성장도 정리도 끝난 포스트 모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세간의 시대인식에 거슬러우리에게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근원적 난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음을 명시한 바 있다그것은 시대적인 혼돈의 와중에 섣부른 판단과 명령을 내리기보다 그 혼돈의 상황을 직시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불행과 고통과 갈등과 비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무라는 [황해문화]의 자세였다.


몇 년 전 100호 출간을 기념하여 열린 심포지엄에서 [황해문화]는 통일과 평화 사이에서 황해의 위상에 대해 질문한 바 있다이 질문은 지난 70여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질곡에 빠뜨려온 분단과 전쟁의 엄중함을 기억하면서도 섣부른 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대를 경계하기 위함이었으며진정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해서는 그 주체와 장소방법에 관해 좀 더 깊이 숙고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그것은 황해라고 하는 주체’, 곧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난 근현대를 살아온 주변부의 작은 지역의 시민들이황해라고 하는 장소’, 곧 분단과 냉전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섬과 섬항구와 항구지역과 지역을 잇는그리하여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교류하고 어울리는 곳에서황해라고 하는 방법’, 곧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자율적인 변방성폐쇄적이지 않은 개방성선형적이지 않은 횡단성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통일-평화의 기획을 모색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선언이었다.

 

2

 

이제 [황해문화]는 이전의 편집위원회가 일궈놓은 성과의 무게를 실감하면서비상한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편집위원회와 함께 새로운 길을 나서게 되었다새로 합류한 장정아하남석 두 편집위원 및 앞으로 참여하게 될 다른 편집위원들과 함께 [황해문화]는 지도가 없는 미지의 정글을 탐사하는 심정으로 길을 나선다실로 전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자는 창간사의 다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우리는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새삼 절실히 깨닫게 된다그것은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위기라는 말로는 제대로 형용하기 어려운절박하고 다중적인 재난의 먹구름이 현재와 미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이것이 우리가 120호를 내면서 비상한 각오를 다지게 된 두 번째 이유다). 지난 7월 8일 개최된 [황해문화]120호 기념 심포지엄은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한 발판을 놓는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이번 120호 특집의 근간을 이루는 심포지엄은 다중재난과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두 개의 핵심어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작년부터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복합위기라는 말이 자주 거론된 바 있다. 2022년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와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었고이를 잡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급격하게 금리 인상을 함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도 연쇄적인 금리인상 대열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결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의 가능성이 높아졌으며여기에 더해 환율 인상금융 불안정부동산 가격 하락가계부채 문제 등과 같은 다면적인 위험 요인들이 누적되고 있다는 것이 이른바 복합위기론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복합위기로 표현되는 이 문제들이 한국 경제와 사회에 적지 않은 부담과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치안’(police)의 관점에서 이해된 위기일 뿐이다치안에게는 기존 지배 질서의 안정적인 재생산과 지배 계급의 이익 보장이 최고의 목표이기 때문에이를 위협하는 요인들은 모두 무차별적으로 위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치안에게는 인플레이션이나 금융 불안정도 위기이지만 민주화 시위도 위기이고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도 위기다지배 계급과 정권은 기존의 질서를 정상적인’ 것으로 규범화하고이 질서를 훼손하거나 동요시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탄압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치안이 위기라고 부르는 것들이 많은 경우 진정한 위기들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실제로 언론과 정치권에서 복합위기라고 부르는 것에는 인류세(anthropocene) 내지 자본세(capitalocene)라는 명칭으로 표현되는 생태적 재난이나 3년여의 시간 동안 진행되어 온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보건 재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서로 맞물려 있는 이러한 생태적보건적 재난은 인류 문명의 토대 자체를 잠식하는 문명적 위기이며 민중의 삶에 심각한 피해를 낳을 수밖에 없지만복합위기론에서 이 문제는 방치되거나 배제되고 있다코로나 팬데믹은 이미 지나간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으며기후위기는 기만적인 탄소중립 녹색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자본 축적의 구실로 전락하고 있다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래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세월호 참사 및 이태원 참사로 대표되는 사회적 재난들과 더불어비정규직 노동자들여성과 성적 소수자들장애인들이주자탈북민난민 등과 같은 사회적 약소자들이 직장에서일상에서 직면해 있는 불안전 재난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오히려 여성가족부 해체나 노동조합 회계 감사’ 또는 관제 애도’ 같은 에피소드에서 보듯 현 정권은 약소자들을 탄압하거나 배제하는 데 골몰하고 있을 뿐이다그 사이에 하루가 멀다 하고 일터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는 전 세계적인 지정학적 변동과 그것이 특히 동아시아의 정세에 미칠 파장 역시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고 있다대개 신냉전으로 명명되고 있는 이러한 재편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질서의 전환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 사이의 대결구도로 가시화되고 있는데현 정권이 시대착오적인 냉전 반공주의에 불과한 가치 동맹의 기치 아래 전개하고 있는 외교안보 정책은 이러한 대결을 조장강화하고 있어서 군사적 긴장만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을 심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전망은 점차 멀어지고 적대적인 대결 구도가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고 이는 다시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의 경로가 고착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러한 재난들의 중심에는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듯 식인 자본주의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오늘날의 식인 자본주의는 착취에 기반을 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할 뿐만 아니라 제국적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는글로벌 남반구와 북반구 사이의 인종적 수탈 및 구조적 불평등의 간극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이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산출함으로써 문명의 기초를 잠식하고인공지능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입각하여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이용함으로써 오히려 대중들의 사고와 감정행동에 대한 정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에서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위기는 치안이 명명하는 복합위기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고 배제하는 다중적 재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문제는 이러한 재난들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들이 아니라는 점이다그것들을 서로 연결된 다중적 재난들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겪어야 하는 민중들곧 을()들의 관점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사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그것은 지배 세력이 복합위기나 탄소중립 녹색성장과 같은 기만적인 프레임을 통해 다중재난의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그것을 오히려 새로운 이윤 획득의 기회로 삼고자 하기 때문에필연적으로 대안적 프레임의 개발을 비롯한 인식론적 투쟁이 수반되어야 하는 과제다.


우리가 다중재난과 더불어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또 다른 핵심어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정의로운 전환은다중재난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것에 맞서고 있는 민중의 관점에서 이러한 재난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진보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다중적이고 다면적인 노력의 방향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우리는 먼저 돌봄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돌봄은 흔히 생각하듯이 어린아이나 노인 또는 환자나 장애인에게만 필요한 서비스 활동이 아니라우리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활동이며 더 나아가 자연 생태계의 약탈적인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활동이다우리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또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한다그것이 생태적사회적 연관망 속에 존재하는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이다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고 돌봄을 받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다.


자연과 인간주체와 객체생명과 비생명공공성과 사유성국민 대 비국민남성과 여성정상인 대 비정상인 등과 같이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범주들에 의거하여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을 전환하기 위해 돌봄 개념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생태적보건적 재난과 불안전 재난, ‘신냉전의 전개디지털 자본주의의 심화는 사회의 공동 이익 및 인류의 공동 생존을 추구해야 할 집합적인 정치적 주체를 해체하여 그들을 서로 상이한 이익 추구를 위해 끝없이 경쟁하는 신자유주의적인 행위자들로 변모시키고 있다더욱이 트럼프 시기의 미국에서러시아와 동유럽중남미에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부상하고 있는 신권위주의 통치는 강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을들 간의 적대적 갈등을 조장하는 포퓰리즘 정치를 활용하여 약소자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고 외면함으로써 민주주의 공동체의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우리는오늘날 을들 간의민중 간의 새로운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우리가 모든 문제는 결국 자본주의로 귀착된다는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이러한 질문들을 자본주의에 관한 질문과 연결하지 않을 수 없다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된 이후 자본주의는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적 사회경제 체제로 존립해 왔고 정당화되어 왔다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재난이 직간접적으로 자본주의의 비이성적인 광기와 연결되어 있다면정의로운 전환의 시도는 자본주의 이후라는 문제자본주의를 넘어서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이전의 사회주의의 시도가 실패로 귀결된 이후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들을 어떻게 사고하고 실천해볼 수 있을까어떻게 지금까지 제시되었던 자본주의의 대안들에 대한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할 수 있을까자본주의보다 더 나은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계 문명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3

 

120호 심포지엄에서는 퇴임하는 편집위원들을 대신하여 백원담 선생이 기조강연을 한 뒤, 6명의 발표자와 4명의 토론자가 참여하여 이 질문들에 관한 흥미롭고 유익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1부에서는 홍덕화 선생이 기후위기에 관해백승욱 선생이 전쟁과 폭력에 관해김관욱 선생은 디지털 자본주의와 노동에 관해 발표했고김현우 선생과 한상원 선생이 세 발표에 대한 토론을 맡았다. 2부에서는 김정희원 선생이 돌봄정치에 대해장석준 선생이 자본주의 너머에 대해김선철 선생이 기후정의운동에 대해 발표했고이승윤 선생과 이승원 선생이 이 발표들에 대해 토론해주었다아울러 심포지엄 마지막 순서로 발표자와 토론자가 한 자리에서 모여 1부와 2부에서 발표되고 논의되었던 주제들에 관해 다시 한 번 난상토론의 시간을 가진 바 있다백원담 선생의 기조강연과 6개의 발표가 이 특집호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12부의 토론 및 종합토론 내용을 정리하여 별도의 꼭지로 구성했기 때문에독자들은 심포지엄 당시의 생생한 토론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백원담 선생의 기조강연 및 6개 발표의 구체적 내용과 그에 관한 토론은 박자영 선생이 심포지엄 지상중계에서 면밀하고 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에여기에서는 그 내용을 굳이 다시 한 번 요약하지 않겠다다만 각각의 발표 및 토론을 들으면서 내가 느꼈던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황해문화]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화두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오늘날 [황해문화]를 비롯한 한국의 비판적 인문사회과학 매체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모순들에 관한 논의는 물론이거니와 그것보다 좀 더 토대적인 수준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과 같은 사건은 분명 계급적인종적젠더적인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되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기초와 특성을 지닌 사건들이다그것은 한편으로 행성으로서 지구 시스템의 물리화학적 특성 및 그 효과에 대한 고찰을 요청하며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물학적이면서 기술적인 본성에 대한 좀 더 면밀하고 심층적인 토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연과학의 고유한 탐구대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인류세라는 개념이 보여주듯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에 미친 인류의 행위성(agency)의 충격이 다시 인류 문명의 토대 자체에 파국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 사건들에 대한 고찰을 자연과학자들에게만 미뤄두는 것은인문사회과학자들로서만이 아니라 시민으로서도 직무유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더욱이 빅테크 기업들과 거대 제약(big Pharma) 기업들을 비롯한 초국적 자본과 지배 세력이 미증유의 다중재난을 새로운 자본 축적과 세력 강화의 계기로 삼고 있으며이는 역으로 재난을 한층 더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유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이 문제에 대한 비판적 숙고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하고 있다하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한 토론은 소수의 전문 분야 연구자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의 비판적 공론장의 중심 의제로 제기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보면 [황해문화]를 비롯한 한국의 비판적 매체들은 지난 30여 년 동안 근대 완성과 근대 극복이라는이른바 이중 과제론에 긴박되어온 감이 없지 않다탈냉전과 민주화의 동시적인 전개라는 비상한 역사적 정세에서 이중 과제론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우리는 오늘날 그것이 지닌 인식론적역사적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이중 과제론은 한편으로는 근대라고 하는 보편적이고 단일한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각각 민족 통일과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또 다른 이원적 본질로 환원하고 있다여기에는 근대를 이해하는 본질주의적 관점에 더하여 민족주의적인 가정이 뿌리 깊게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그것은 이미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세를 사고하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한 인식론적 틀로서도 역부족이었을 뿐더러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더 이상 준거하기 어려운 낡은 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다중재난의 엄혹한 현실에 관해 우리가 무언가 확고한 개념적 기반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아니 오히려 오늘날의 상황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모종의 확고한 토대나 기반에 집착하는 태도를 버리고좀 더 급진적으로 탈구축적인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사회경제적이거나 문화적인 인프라만이 아니라우리가 항상 이미 거기에 불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따라서 우리의 삶과 사고의 근본적 조건이면서도 우리에게는 비사고(非思考)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지구 시스템이라는 물리화학적지질학적 인프라의 변동 내지 와해가 목전에 다가온 상황에서아울러 오랫동안 인간의 배타적 특성을 나타낸다고 믿었던 인지 능력을 넘어서는 범용 인공지능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실현과 활용이 가능해진 상황에서실체와 사물주체와 객체자연과 문명인간과 비인간생명과 무생명 같은 전통적인 사유 범주들에 무비판적으로 의탁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며더욱 더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황해문화]는 몇 년 전부터 ‘21세기 인간의 조건이라는 연속 기획을 통해 불안전한 세계안전에 대한 욕망”(110),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112), “기후위기 시대정의로운 전환은 가능한가”(114), “전쟁폭력평화”(117같은 주제들을 다룬 적이 있지만우리가 당면한 다중재난이라는 문제에 충실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분석과 고찰이 수행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더 나아가 앞으로 [황해문화]에서는 다중재난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거기에 창발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을들의 생동적인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이 좀 더 구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예컨대 97호와 101호 등에서 페미니즘과 젠더에 관한 특집을 구성한 바 있지만미투운동 이후 활발히 전개된 대중적 페미니즘을 억압하고 되돌리려는 거대한 반()페미니즘의 흐름 속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의 상황을 고려하면앞으로 [황해문화]의 페미니즘적인 지향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야 하리라고 본다.


아울러 부끄러운 사실이지만지금까지 [황해문화]에서는 장애인 차별의 현실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운동의 중요성에 관해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선도적인 투쟁 아래 장애인운동과 비판 장애학 연구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운동 및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부문으로 성장하면서 장애인들의 인권과 복지 향상에 기여하고 장애 개념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인식론적사회적 구별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데 크게 공헌해왔다이러한 작업은 단지 장애인들에 대해서만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인간의 관계론적 본성과 사회의 토대를 형성하는 돌봄 연관망의 존재를 일깨움으로써 민주주의 공동체의 존재론적인간학적 기초가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업이다앞으로 장애인운동에 관한 인식과 토론은 다중재난을 정의롭게 전환하기 위한 기획에서도 중심적인 위상을 부여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지방지역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본래 [황해문화]는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 문화 계간지로 출발했으며오늘의 시점에서도 인천은 [황해문화]의 뿌리이자 원천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다그만큼 지역과 지방의 문제는 [황해문화]에게는 늘 중심적인 의제로 존재해왔다그런데 인천도 사정이 다르지 않겠지만오늘날 한국에서 서울 내지 수도권과 지방의 관계는 더 이상 격차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오히려 서울에 의한 전 지방의 식민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다중적인 모순이 착종된 관계로 변모하고 있다우리나라의 정치경제문화적 인프라와 권력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 집중된 상황에서 지방은 자율적인 생존의 능력을 상실한 채수도권의 끊임없는 확장과 축적 운동의 착취와 수탈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실로 오늘날 지방은 고령화와 소멸의 위협 속에서 각종 군사 시설과 핵 폐기물을 비롯한 수도권의 폐기물 투기 지역이 되고 있으며이주노동자 및 여성과 성적 소수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소자들의 인권과 생존권이 서울 및 수도권에 비해 훨씬 더 취약한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더욱이 생존을 위한 지역 주민들의 요청은 지역 토호 세력과 권력자본의 결탁 아래 무분별한 난개발의 범람으로 왜곡변질되고 있는 상황이다얼마 전 국제적인 망신의 대상이 된 새만금 잼버리 대회의 기원에 이런 모순이 자리 잡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렇다면 당연히 지방이야말로 오늘날 다중재난이 더욱 가혹하고 집약적으로 누적되는 장소이며앞으로도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다중재난의 이 구체적인 장소들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외면한 채 우리가 정의로운 전환을 실제로 모색할 수 있을까?


또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라는 문제더 분명히 말하자면 동물 타자의 문제에 앞으로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도 [황해문화]가 역점을 두어야 할 과제 중 하나다페미니즘과 젠더의 문제가 됐든 장애인 문제가 됐든 아니면 지방의 문제가 됐든 간에이 문제들은 모두 인간을 중심으로 한 문제다이러한 인간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문제는 예리하게 발휘되는 비판적인 지식인전문가들의 지성이 비인간 타자에 관한 문제에는 둔감한 경우가 적지 않다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재난의 현실 및 그 원인에는 비인간 타자들에 대한 착취와 수탈지배라는 문제가 놓여 있으며엄청난 생물종들이 파괴되고 육식 산업은 번창하는 와중에 반려동물 산업 역시 성장하는 모순적인 현실이야말로 비인간 타자와의 관계라는 문제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셋째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토론이 소수의 전문가 지식인들만의 논의로 국한되지 않고 대중적인 힘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앞으로 [황해문화]가 더욱 더 대중의 시선에서그것도 을들의 시선에서 문제를 전달하고 논의하는 장이 되어야 하리라는 또 다른 요구를 간과할 수 없다이러한 두 가지 과제가 얼마간 길항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지만그것은 [황해문화]와 같은 잡지라면 마땅히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막강한 권력과 조직력매체력과 자금력을 갖춘 지배 세력에 비해 여러 모로 자원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이러한 과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앞으로 다양한 방식과 접근법을 통해 대중들과 더 자주 대면하면서 대중들의 창의적인 비평과 발상의 목소리를 더 많이 실으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과제는 동시에 [황해문화]가 앞으로 견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매체성의 방향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지금까지 [황해문화]가 매체로서 이룩한 성과는 분명 주목할 만하고 보람을 느낄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우리가 직면한 시대적인 과제는 매체의 내용과 더불어 매체의 물질적 성격 자체에 대해서도 재점검해볼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종이 잡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디지털 매체로서의 성격을 확장하고 강화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4

 

[황해문화] 30주년을 축하하고 격려하기 위해또한 자만과 나태를 경계하기 위해 여러 분이 귀중한 메시지를 전달해주었다중국 칭화대의 왕후이 교수와 타이완 쟈오룽대학의 천광싱 교수는 [황해문화]가 지속적으로 한국과 동아시아의 비판적 공론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희망을 보내주었다. [창작과 비평]의 이남주 주간과 [문화과학]의 이동연 전 주간은 한국의 비판적 공론장을 형성하는 동지적인 관점에서 뜻깊은 격려와 따끔한 조언을 전해주고 있다이남주 선생은 30년이라는 시간적 단위의 결절적인 성격을 확인하면서 [황해문화]가 지난 30년의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갖되앞으로의 30년을 기약하면서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동아시아의 협력과 상생공영을 위협하는 최근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사유를 촉발할 수 있는 담론을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적 사유 단위이자 실천 단위가 될 수 있도록” 매진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또한 이동연 선생은 계간지로서 [황해문화]를 [창작과 비평]과 [문화과학]의 중간에 위치시키면서 장소사람사건이라는 세 가지 지표에 따라 그 특성을 해명하고 있다선생은 그러면서 [황해문화]가 이러한 독특성을 계속 견지하면서도 지금까지의 거시적 분석 중심에서 벗어나 소수자적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 분석사회적 사건에 대한 미시적인 분석을 보완하고 아울러 인천 또는 서해안한반도가 앞으로 정치기술생태문화의 교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생태-기술-문화의 미래 토픽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황해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에서 우러나는 두 분의 진심 어린 조언들을 유념하고 구체화할 것을 약속드린다.


[황해문화]의 독자인 이희영 선생의 메시지도 특별히 언급해두고 싶다선생은 [황해문화]가 그동안 이룬 성과를 상찬하면서 특히 독자들에게 세상을 읽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는 점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그러면서도 [황해문화]가 앞으로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그것은 한편으로 젊은 세대를 비롯한 평범한 시민들이 좀 더 접근하기 쉬운 매체가 되어 달라는 요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심은 있으나 당사자성이 부재한 민중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충고이기도 하다그것은 [황해문화]가 어떻게 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매체적으로물질적으로 민중의 당사자성을 체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아주 서늘한 요청이다.

 

5

 

이번 호는 특집호인 관계로 비평과 문화비평” 꼭지는 쉬어간다애독자들의 양해를 부탁드린다다만 문학과 서평에서는 여전히 좋은 글들이 독자들의 높은 안목을 만족시켜 줄 것이다구로와 청계천을 배경으로 80년대 노동운동의 기억을 오늘의 시점과 교차하여 풀어나가는 김남일 작가의 소설과 문명과 역사정치철학문학을 넘나드는 김정환 시인의 시와 더불어 이세기 시인과 연여름 시인의 시는 문학을 사랑하는 [황해문화] 독자들에게 청량한 읽을거리를 제공해줄 것이다아울러 이번 호 황해문화 창작공모제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작품이 응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작품 수준이 뛰어났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제서평과 서평에서는 여느 호와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저작들에 대한 유익한 논의다우동현 선생은 얼마 전 국내외에서 큰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문제를 배경으로 핵 폐기물 투기의 역사를 조망한 세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선생은 1944년 처음 시작된 핵 폐기물 투기는 일관되게 핵 재난 속에서 이익만을 추출하고 그 비용은 사회와 자연에 전가해온 권력과 자본과학의 결탁의 역사였음을 지적하고 있다다중재난을 주제로 한 이번 특집호의 기획의도와 잘 부합하는 서평이 아닐 수 없다또한 박영균 선생은 신유물론에 관한 박준영 선생의 저작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사회적 관계의 유물론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조언하고 있으며구정은 선생은 구기은 선생을 비롯한 11명의 신진 중동학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지은 노작의 중요성을 꼼꼼하게 설명하면서 이슬람과 민주주의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만한 저작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하고 있다주윤정 선생은 나날이 확정되어가는 한국 인권운동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정리한 정정훈 선생의 저서 [인권의 전선들] 서평에서 한국 인권운동에 대한 풍부한 시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보다 다양한 인권의 전선들을 형성하기 위해 우리 역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권리운동의 역사도 함께 살펴봐줄 것을 당부한다그런가 하면 김도민 선생은 백지운 선생의 항미원조에 관한 저작을 공공역사의 관점에서 세심하고 균형 있게 평가하고 있다좋은 서평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텍스트라는 점을 실감하게 해주는 서평들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작고한 한국 민족사학의 거장인 강만길 선생에 관한 추모글을 제자인 정병욱 선생이 보내왔다선생은 강만길 사학의 업적을 분단시대라는 개념을 창안한 것과 민중의 생활사 연구를 개척한 것으로 꼽으면서스승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에 강만길 사학의 핵심이 놓여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호에서 독자들이 놓쳐서는 안 될 김명인 선생의 글에 관해 몇 마디 언급해두고자 한다전향한 남조선노동당원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얼마간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최근에 발굴된 김수영 시인의 1949년 일간신문 게재 탈당성명서에서 출발하여 김수영의 생애와 문학 전반을 재고찰하려는 주목할 만한 비평의 시도다김수영의 탈당성명서는 제대로 발견하기도판독하기도 어려운 신문 광고란의 불과 몇 줄짜리 조각글에 불과하지만선생은 이것을 기반으로 김수영 문학 저변에 깔려 있는 사회주의의 이상에 대한 열망을 재구성하면서 더 나아가 김수영의 문학을 비롯한 한국 근현대문학은 검열과 강제전향의 굴레 아래에서 문학의 본령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의 장이었음을 밝혀내고 있다앞으로 선생의 이 글에 대해서는 김수영 문학의 재평가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문학의 성격에 관한 재고찰이라는 측면에서도 많은 토론이 뒤따라야 마땅하리라 생각한다투병의 와중에 이런 문제작을 발표한 선생의 지성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부디 빠른 시일 내에 완치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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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과학] 가을호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지난 4월 4월 15일 이 글은 2023415일 장애인 권리예산 투쟁에 연대하는 마포-신촌 학술단체 모임 학술 토론회에서 발표한 강연문을 다소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이 글은 강연의 생생한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 경어체 표현을 그대로 살렸는데요, 사실 이런 글쓰기는 [문화과학]의 편집 원칙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원고를 받아준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의 후의에 깊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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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으로서의 장애, 관계로서의 돌봄

 

 

머리말

 

우선 발표에 앞서서 오늘 이 자리를 가능하게 해준 두 분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해 앞장서 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으로 약칭)의 헌신적 투쟁 덕분에 저는 조금이나마 우리나라 장애인 차별의 문제에 대해, 그들의 고통에 대해, 그들의 열망과 투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 차별과 억압에서 드러나는 국가권력의 폭압성에 대해,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뿌리 깊음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따라서 그것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 우리 시대 민주주의적 실천의 본질을 이룬다는 데 대해 얼마간이나마 깨닫게 된 것 역시 전장연의 투쟁 덕분입니다. 따라서 전장연의 투쟁을 이끌어온 박경석 공동대표님께 이러한 각성의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김도현 선생님께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도현 선생님은 저와 같이 장애인 운동 바깥에 있고 또한 장애학 운동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는 장애인 운동과 장애학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비판적 장애학이 단지 당사자들로서의 장애인들만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의 광범위한 관심사가 되고,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 사이의 연대와 횡단의 정치를 모색하는 데 준거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많은 부분 김도현 선생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이 제도권 학계 바깥에서, 장애인 운동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이런 성과를 일궈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제도권 내의 장애학만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제도권 인문사회과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증상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몇 마디 해보려는 것이 두 분을 비롯한 전장연 활동가들 및 비판적 장애학 연구자들의 가르침에 얼마나 부응하는 것일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제가 과연 오늘 학술대회의 기조강연자로서 적절한지, 그럴 만한 자격과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에 관해 아마 많은 분들이 의아해하실 듯합니다. 저 역시도 과연 제가 저에게 부과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저 자신이 별로 미덥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오늘 여러분에게 몇 마디 전해보고자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제가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마포-신촌 학술단체 모임의 동료들에게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투쟁에 관해 무언가 지지와 연대를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첫 번째 발언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 제안을 여러 동료들이 흔쾌히 받아주었고, 뜻을 함께 하는 연구자들이 속속 참여하게 되어 '장애인 권리예산투쟁에 함께 하는 마포-신촌 지역 학술단체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저희는 먼저 일간지에 전장연의 지하철탑승투쟁 및 권리예산투쟁에 대한 저희의 지지와 연대의 뜻이 담긴 공동 선언문을 게재하기로 하고 모금 및 지지 서명 활동을 전개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학술대회를 기획하고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제가 첫 번째로 발표를 하게 된 것은, 그것이 이 모임의 최초 제안자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책무를 제가 어느 정도나 수행한 것이 될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보편을 정의하는 역량으로서의 해방

 

보시는 바와 같이 오늘 학술대회의 전체 주제는 역량(capability)으로서의 장애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 발표의 핵심 주제 중 하나 역시 역량입니다. 제가 발표문의 제목을 생각하면서, 아니 그 전에 마포-신촌 지역 학술단체 모임의 공동 성명서 초안을 만들면서 역량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존 맥나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 김도현 선생의 {장애학의 도전}을 읽은 이들이라면, 본문 맨 앞에 제사(題詞)로 인용되어 있는 이 문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09.] 2017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캐치프레이즈였던 이 문구는 어떤 의미에서 장애가 역량인지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역량이란,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뜻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불화: 정치와 철학}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 정의하면서, “몫 없는 이들의 몫의 설립에 의해 지배의 자연적 질서가 중단될 때 정치가 존재한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 39.]고 말하면서 염두에 둔 것도 이러한 통찰과 다르지 않습니다.


맥나이트의 정의는 우리에게 몇 가지 점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제시해줍니다. 우선 철학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더욱이 보편성의 사회적 구성은 조화롭게, 아무런 갈등이나 다툼도 없이 누구나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중립적인 기준이나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등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편성은 그것의 성립 조건으로서 적대와 폭력을 함축합니다. 새롭고 진정한 보편성이란, 아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문제가 드러날 때, 지금까지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 문제로 출현할 때 시작됩니다. 곧 지금까지 누군가에 의해 문젯거리로 여겨졌던 이들, 다른 이들과 평등한 이들로 간주되지 않고 무언가 부족하거나 비정상적인 이들로 여겨지고,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거나 배제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이, 이런 취급은 부당하다고, 나 또는 우리는 비정상적인 것도 열등한 것도 아니며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설 때 진정한 보편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성은 본질상 적대를 함축합니다. 기성의 보편성의 허구성과 지배적 본성을 드러내면서 상징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적대적 행위가 보편성의 한 가지 척도를 이룹니다.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이점에 관해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진정한 인간, 진정한 시민이란 오직 귀족들뿐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재산(여기에는 노예들이 포함됩니다)을 지니고 있었고, 일을 하는 대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과 기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평민들은 형식적인 자유를 지니고 있긴 했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고, 정치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과 여유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시민으로도, 진정한 인간으로도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자유는 불평등했으며, 귀족들만이 실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자유는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향유되었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평민들이 여기에 맞서 자유는 불평등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평등의 징표를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나섰을 때, 자유로운 이들은 평등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역으로 평등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자유는 현실적으로 향유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비로소 자유는 평등의 다른 표현이 될 수 있었으며,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위한 정치로서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새롭게 수립한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곧 자기 자신과 자식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무산자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자신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인간이고 평등한 시민이라고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다시 한 번 민주주의가 새롭게 구현되고 확장되었습니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평등의 3단논법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간단하다. 1830년에 막 공포된 헌장 전문에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적혀 있다. 이 평등이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된다.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즉각적인 경험에서 이끌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1833년에 파리의 재단사들은 양복점 주인들이 급료, 노동 시간, 일부 노동 조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시작했다. 따라서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그렇지만 양복점 주인 슈바르츠 씨는 우리의 근거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그에게 급료를 재검토해야 할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근거들을 그는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검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평등한 자들로 대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그는 헌장에 기입된 평등에 위배된다.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4, 89.]

 

해방의 삼단논법이 구성되려면 먼저 대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삼단논법에서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 곧 보편적인 평등 전제가 헌법에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본질적인 중요성을 얻게 됩니다(그리고 이러한 기입 자체가 투쟁의 성과입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 헌법에서 내세우는 평등의 원리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적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고발한 바 있지만, 랑시에르가 볼 때 이는 19세기의 노동자들이 실제로 생각하고 실천했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당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국가가 스스로 내세운 보편적 평등의 원리를 대전제로 삼아 그것을 위반하는 부르주아 주인의 행태(소전제)를 비판하면서, 결론적으로 자신들을 보편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실제로 평등하게 대우하라고, 사장과 동일한 인간이자 동일한 시민으로서 존엄하게 대우하라고 요구하면서 투쟁한 것입니다. 이것도 다시 한 번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새롭게 제시하는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1849년에는 잔 드루앙(Jeanne Deroin) 같은 여성이 남성들에 대해,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쇄신한 바 있습니다.[잔 드루앙에 대해서는 또한 조앤 스콧,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 공임순이화진, 최영석 옮김, 앨피, 2017 3장 참조.] 이것은 식민지 해방투쟁을 전개했던 이들에게도, 흑인 및 유색인종의 인권과 시민권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에게도, 그리고 오늘날 미등록 이주자 및 난민의 권리,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종속적이고 열등한, 심지어 비정상적인 존재자라는 낙인이 찍힌 가운데 차별과 억압, 배제를 감내하기보다는 그러한 낙인찍기와 차별에 맞서 투쟁하고, 이러한 투쟁을 통해 자신들에게 부과된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인간과 시민의 지위를 철폐할 수 있을 때, 해방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해방의 사건만이 보편성을 새로 정의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닙니다.

 

인간과 시민을 새롭게 정의하는 역량으로서의 장애

 

전장연을 중심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의 장애인들이 전개해온 투쟁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해방의 사건이었고, 그들 덕분에 한국 사회와 많은 비장애인들은 인간과 시민에 대한 진정으로 보편적이고 진보적인 정의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장연의 투쟁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줍니다. 그들은 우선 비장애인들에게 장애라는 범주를 다시 사고해보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장애인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 존재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들은 우선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손상을 지닌 존재자이며, 이로 인해 다른 정상인들과 구별되는 비정상적인상태에 있는 존재자, ‘정상인들이 보통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일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자, 따라서 역량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자이고(disability), 결국 다른 정상인들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 핸디캡을 지니게 되는 존재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만 오랫동안 통용된 것이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세계보건기구가 1980년에 제시한 바 있는 장애에 관한 국제적인 정의(ICIDH)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의료적 장애모델에 입각해 있는 이러한 장애인 범주에 맞서, 전장연은 문제를 다르게 사고하자고,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요컨대 장애인들의 능력 부족의 원인으로 제시되고, 따라서 차별적인 대우와 배제의 논거로 기능하는 정신적신체적 손상이라는 것이 차별과 배제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손상은 오직 일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차별과 배제를 산출하고, 이로써 장애인을 무언가 열등하고 비정상적인 존재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장애를 장애로 만드는 것은 바로 사회적 관계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런저런 이들이 겪고 있는 신체적 장애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신체적 장애를 지닌 이들이 그 장애의 조건과 관계없이 충분히 편리하고 만족스럽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 인프라(엘리베이터, 저상버스 및 도보 편의 시설 등)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으로 인해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겪는 이들이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없다면, 그것 역시 그들의 손상 자체가 원인이라기보다는, 그런 손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충분히 만족스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통 인프라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만인의 평등한 자유라는 보편적 원리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하는 사고방식이고 실천일 것입니다.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을 지닌 이들은, 그런 손상을 지니지 않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곧 그들과 동등하게 인간과 시민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이 실질적으로 향유될 수 있도록 관련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 및 지자체, 공무원들의 행정적인 돌봄의 의무일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시민들이 공유해야 할 정치적 의무일 것입니다. 다른 동료 인간과 시민(더욱이 매우 많은 수의)이 심각한 부자유와 불평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나 또는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기만일 뿐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민주주의적인 시민으로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적인 존재자로서, 지배자 내지 권력자로서 사고하는 것이며, 그것 자체가 갑질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과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구별 자체가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만약 이런저런 정신적신체적 손상을 지닌 이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른다면, 과연 우리들 가운데 장애인이라는 범주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컨대 저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안경이 없다면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상적인 도보가 어려울 만큼 시력이 심각하게 좋지 않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은 목 디스크에 걸리는 바람에 제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는 일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약한 정도의 신체적 손상일뿐더러 영구적이거나 장기적인 손상이 아니라 일시적인 손상일 뿐이기 때문에, 장애와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좋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시각을 넓혀서 사람의 일생을 생각해봅시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 상당한 기간 동안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가게 됩니다. 엄마나 아빠, 또는 주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눕지도 앉아 있지도 못하고, 영양분을 공급받거나 대소변을 해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시기를 지난다고 해도 우리가 마냥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고, 공부하는 것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가 스스로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인도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나 아니면 인기 티브이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혼자서 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서는(하지만 그들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삶이며, 많은 이들의 돌봄 속에서만 인간은 인간답게, 그리고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 끼 밥을 차려주는 이들, 청소와 빨래 같은 가사일을 해주는 이들, 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환경 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한 사람의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식생활이 개선되고 의료 서비스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평균 수명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장수를 누린다는 것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재앙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적어도 새로운 문젯거리의 출현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체와 정신이 쇠약해지면서 여러 가지 질병을 겪게 되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더욱 많은 의료 서비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특별한 정신적, 신체적 손상을 겪지 않았던 이들도 노년이 되면 불가피하게 다양한 형태의 손상을 겪게 됩니다. 말하자면 노년기에 접어들게 되면 누구나 이른바 장애인들이 되는 셈입니다. 평균수명이 80세를 훌쩍 넘기고 주변에서 90세가 넘은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시대는 어쩌면 (대표적으로 치매나 암, 각종 뇌질환 및 신경 질환 같은) 장애 문제의 보편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일생의 더 많은 부분을 정신적, 신체적 손상 및 장애와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노년학”(gerontology)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제 연구는 장애학과 많은 부분에서 중첩되는 쟁점들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범주는 사실은 우리 일생의 특정한 시기, 곧 청년기와 장년기 같은 시기를 추상해서 만들어낸 추상적 범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욱이 우리가 청년기와 장년기에도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과 장애를 자주 경험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과연 나는 온전한 비장애인이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특정한 정신적, 신체적 손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만을 장애인들로 분류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이들을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심지어 배제하는 것은 더욱 더 정당성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을 비정상적인 존재자로 분류하고 차별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정상성을 특권화하는 비장애인이라는 범주 역시 정당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장애의 문제는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인간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특성이 되었습니다.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에게 이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양태로서의 인간: 스피노자의 교훈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관해 다시 한 번 성찰해보게 됩니다. 이처럼 장애라는 것이 특정한 부류의 개인들 및 집단에게만 고유한 특성이나 현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및 동물, 더 나아가 생명체 일반)이 보편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특성임에도, 우리는 왜 장애라는 것을 특수한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고유한 문제로 여기게 되었고, 왜 장애학이라는 학문을 장애인들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이들에 관한 특수한 학문이라고 간주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철학도로서 생각해본다면, 서양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전승되어온 인간의 본질에 대한 특정한 개념화가 주요한 이유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체’(subject)라고 하는 것을 토대로 삼고 있는 서양 근현대철학, 그리고 이 철학들에서 제시되는 표준적인 인간에 대한 관점이 장애를 특수한 문제로 간주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 학자들은 서양 근현대철학에서 제시되어온 표준적인 인간, 곧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주체의 모델이 사실은 여성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남성 중심적인 모델이라고 고발해왔습니다. ‘인간을 가리키는 영어의 맨(man)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남자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서양 근현대철학, 더 나아가 서양 근현대문명에서는 인간 = 남자로 간주되어 왔고,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자로 치부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여성은 공적인 활동에서 배제된 채 가사일을 전담하면서 아버지, 남편, 자식을 위해 봉사하는 종속적인 존재자의 지위를 할당받아오게 되었고요.


그런데 서양 근현대철학은 여성만을 차별하거나 배제해온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이 철학들에서 제시되는 표준적인 인간으로서의 주체는 당연히 비장애인주체이고, 비장애인으로서의 주체는 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의 도움 내지 돌봄 없이 사고하고 활동할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주체라는 개념의 핵심적인 속성이 자율성으로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체는 스스로 사고하고 활동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이러한 근대적 주체 개념에 대하여 미국의 철학자이나 퀴어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는 정당하게도 그것이 판타지’(phantasy)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0] 이것이 판타지 또는 망상인 이유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노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돌봄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고 존속될 수 있는 삶인데 반해, 근대적 주체 개념은 돌봄 연관망이 자립적 개인 내지 자율적주체의 가능 조건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돌봄 활동이라는 것은 특정한 존재자에게만 필요한 특수한 활동이 아닙니다.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주체는, 오직 타자들의 돌봄 속에서만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자로서 살아가고 사고하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돌봄은 자율성 및 자립성의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그것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경험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제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어느 계간지의 편집회의에서 특집 주제로 돌봄의 문제를 다뤄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안에 대해 어떤 편집위원은 아니, 노인이나 장애인 같은 사람들을 돌보는 활동이 어떻게 특집 주제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지엽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버틀러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전형적인 서양 근대 철학의 판타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더욱이 매우 남성 중심적인 시각일뿐더러,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주류경제학적인 시각입니다(반드시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이런 시각에서 보면 돌봄은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지엽적인 활동일뿐더러, 돌봄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적절한 서비스 비용을 치러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정상적인 주체로서의 대다수 비장애인들 시민에게 돌봄은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아닐뿐더러, 만약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각자 필요한 만큼, 그리고 능력만큼(요컨대 돈이 있는 대로)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앞에서 말했던 것이 얼마간 타당성이 있다면, 이런 시각은 의료적 장애 모델에 입각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주체에 관한 전통주의적 시각, 곧 남성 중심적이고 주체 중심적인 판타지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일 뿐입니다.


서양근현대철학이 이처럼 자율적인 존재자로서 주체 내지 개인에 관한 판타지를 포함하고 있다면, 스피노자는 이러한 철학사의 흐름에서 상당히 예외적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존재자를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양태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피노자 철학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달리 실체(substance)의 철학이 아니라 양태(mode)의 철학, 양태의 존재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까지, 그리고 데카르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 전통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실체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때 실체라는 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따르면, 주어의 지위를 갖는 존재자들, 곧 자립적인 존재자들을 가리킵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존재자들을 바탕이 되는 것또는 기체”(基體, hypokeimenon; substratum)바탕이 되는 것 안에 있는 것들”, 곧 속성을 구별한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보면 주어와 술어의 구별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들], {범주들명제에 관하여}, 김진성 옮김, 그린비, 2023, 2.] 또는 {형이상학} 7권의 설명에 따르면 실체는 첫 번째로 있는 것”(proton on)을 의미합니다. 실체는 있음의 측면에서도 첫 번째이고 논리적 측면에서도 일차적이며 앎의 측면에서도 우선한다는 것이죠.[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조대호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1028a 14 이하.] 또한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체는 실존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르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원석영 옮김, 아카넷, 2002, 151.]을 의미합니다. 신이 당연히 실체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정신과 물체 역시 신을 제외하면 실존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실체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하죠. 무한 실체인 신만이 엄밀한 의미의 실체라고 할 수 있으나, 유한한 존재자인 정신과 물체 역시 일종의 실체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칸트 이후의 서양 근현대 철학에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식과 실천의 중심을 주체라는 명칭으로 불러왔습니다. 이때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개인 주체(따라서 실체로서의 사물들과도 구별되는 것)이며, 집합적인 의미의 주체는 이것을 모델로 하는 것입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이런저런 사물들을 실체가 아니라 양태라고 정의합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양태의 라틴어 원어는 모두스(modus)인데, 이것은 원래 척도라는 뜻 이외에도 방식이나 태도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래 모두스라는 용어는 어떤 실재나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그 사물의 모양이나 존재방식, 행위방식 등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있는 책상이나 의자, 건물, 나무, 그리고 지구 전체도 양태이며, 더 나아가 관념과 정신 역시 하나의 양태입니다. 그러면서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의 3에서 실체를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하에서 󰡔윤리학󰡕의 인용은 모두 필자 자신의 번역이다.]이라고 정의하고, 정의 5에서는 양태를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실체와 양태에 대한 두 개의 정의의 내용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실체가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양태는 기본적으로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에게는 오직 신 또는 우주 전체만이 실체이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헤겔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용납하기 어려웠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스피노자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하면, 인간은 주체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인간에게는 윤리적 실천의 여지도 자유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아직 주체가 되지 못한 실체의 철학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철학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 철학에 미달하는 철학이라는 셈입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스피노자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 없이는 성립할 수도 없고 존속할 수도 없는 존재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양태의 존재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을 오직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고 실존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관계론적인 시각을 나타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singular thing)에 관한 스피노자의 정의입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의 7에서 독특한 실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나는 독특한 실재를,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이 정의는 우선 단수와 복수의 역설적인 결합을 표현해줍니다. 라틴어 싱귤라리스(singularis)는 일상적인 어법에서는 단수의, 단 하나의, 개개의 같은 뜻을 지니며, 명사로는 과부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독특한 실재 내지 단수의 실재 또는 더 일반적으로 개체는, 일상적인 어법과 모순되게도 복수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독특한 실재, 레스 싱귤라리스가 단일하고 개별적인 것인 것, 단 하나의 것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은 다수의 개체들이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결과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가 싱귤리에 플뤼리엘(singulier pluriel)이라는 프랑스어 표현을 통해 복수적 단수독특한 복수라는 뜻을 동시에 전하려고 했던 것과 유사합니다(Jean-Luc Nancy, Être singulier pluriel, Galilée, 1996; [공산주의, 단어], 슬라보예 지젝코스타스 두지나스 엮음, {공산주의라는 이념}, 김상운 외 옮김, 그린비, 2021.). 따라서 개체의 개체성, 독특한 실재의 독특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복수의 개체들 사이의 인과관계의 결과입니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이 개체들이 공동의 결과를 산출하는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할 때입니다. 그것들은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독특한 실재가 바로 스피노자가 양태, 특히 유한 양태라고 부른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양태 또는 독특한 실재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존하고 존속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변용”(affection)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연속입니다. 생명체로서의 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공기에 의해 변용되어야 하고 마실 수 있는 물에 의해 변용되어야 하며, 일정한 영양분에 의해 변용되어야 합니다. 역으로 나는 다른 사물들이나 사람들을 변용함으로써 존속하고 실존합니다. 나 또는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 속에서, 나 또는 우리의 적들과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 속에서 우리는 실존하고 존속하고 때로는 손상을 입거나 소멸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용의 관계가 우리의 실존과 삶의 보편적인 조건을 이룹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변용의 관계만을 경험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좋은 변용들만이 아니라 나쁜 변용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때로는 신체나 정신의 일부가 파괴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도 있고 죽음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용의 관계는 양가적인 관계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우리의 역량을 획득하고 증대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이룹니다. 우리는 타자들과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의 역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변용 관계 덕분입니다. 반면 변용 관계는 우리가 손상을 입고 때로는 파괴될 수 있는 원천을 이루기도 합니다. 변용 관계는 기본적으로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vulnerability)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동시에 우리가 역량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인 한에서, 장애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것은 지금까지 장애인이라고 불린 이들만이 아니라, 아마도 비장애인이라고 잘못 선험적으로 분류된 이들까지도 모두 배워야 하는 공통의 과제, 인간의 또는 생명체 일반의 공통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제를 우리 공통의 과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장애의 문제를 장애인비장애인모두의 보편적 문제로 사고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장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며, 실제로 우리 모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항상 이미 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 투쟁의 규범적 의미: 보편적 삶의 조건으로서 돌봄

 

여기에서 보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돌봄이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돌봄에 관해 간단히 한 마디만 더 언급하고 제 논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했던 것이 일리가 있다면, 장애인들에게만 돌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부모의 끊임없는 손길이 필요한 어린 시절이나 보호자의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한 노년의 시기에만 돌봄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 또한 스스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합니다. 관계론적인 존재론은 돌봄의 윤리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는 최근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활동보조인이 생긴 뒤로는 내 삶이 180도 바뀌었다”[이규식,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나의 이동권 이야기}, 후마니타스, 2023]고 말한 바 있습니다. 활동 보조인의 돌봄을 받기 전까지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지금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인지가 우선이었던 데 반해, 활동보조인의 지속적인 돌봄을 받게 된 이후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양하게 시도해 보거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애인만의 이야기일까요? 스스로 비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 각자 역시 어떤 활동 보조인의 돌봄 없이는 시민으로서, 자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다만 스스로 비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러한 돌봄을 당연한 것으로, 자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기고, 그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에게 돌봄 활동이라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조건이라는 것, 우리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 사회가, 특히 정부와 서울시가 이러한 보편적 돌봄의 중요성을 외면하고 그것에 대한 공적인 책무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 역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부와 서울시는, 그리고 보수 언론은 전장연의 시위를 선량한 시민들을 볼모로 삼는 이기적인 소수 집단의 불법적인 시위로 몰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처럼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사회적 소수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거나 외면하면서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의 전형적인 특성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에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경쟁과 자기 향상의 틀 안에서만 추구하는 기업가적 개인을 인간의 전형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식에 기반을 둔 사회 조직과 공적 행위는 협력보다는 경쟁을 우선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효율성과 수익성이라는 이름 아래 그렇게 하죠). 또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요구, 곧 을들의 요구는 패배자들이나 무임승차자들의 부당한 불평불만으로 치부되고, 때로는 보편적인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법적인 치안 교란 행위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사람들, 특히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약소자들, 소수자들은 이중구속적인 규범적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것은 과소 주체화된 이들이 과잉 주체로 실존하고 행위하기를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시대의 근본 특징 중 하나는, 서양 근대에 철학적 개인 및 정치적 개인을 개인으로서 형성하는 데 본질적이었던 사회적 관계,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제도들의 쇠퇴 및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더 이상 전성기의 복지국가 체제에서처럼 국가가 사람들의 삶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보장해줄 것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의 강력한 지지 아래 자신들의 권리 증대와 이익 증진이 이루어질 것으로 희망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반면 우리 시대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성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주었던 이러한 제도들의 부재 속에서 더욱 더 자립적인 개인들로 실존하기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시대의 근본 특징 중 하나는 (자율적) 주체화의 조건이 부재하거나 약화된 상황에서 더욱 더 (자율적) 주체들로 존재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공포에 질린 개인들의 각자도생의 시대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전장연의 투쟁은, 더더욱 우리 사회 일부 개인들이나 특정 집단의 권익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맞선 보편적인 투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잠재적 장애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과 시민의 보편적인 돌봄의 권리에 입각하여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적으로 개조할 것이냐 아니면 신자유주의적인 권위주의 통치에 밀려 세습적인 불평등의 질서를 강화하는,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가운데, 각자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질서를 용인할 것이냐를 쟁점으로 갖는 투쟁입니다. 광범위한 생태계 파괴와 보건 재난, 사회적 안전 재난 같은 다중적 재난으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에 이 투쟁은 우리 평범한 시민들에게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싸움에 연대함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고 확장하는 길 이외에 다른 권력, 다른 역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투쟁이 다중 재난에 직면하여 또 다른 해방의 사건으로 기억될 수 있는가 여부는 우리가 이러한 공통의 역량을 구성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점을 가르쳐준 데 대해서도 전장연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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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8월 24일~25일 양일간 부산대학교에서 열리는 한국교육사상학회 2023년 하계학술대회에 


초청을 받아 2개의 발표를 하기로 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일정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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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인문학연구소에서 내는 학술지 [코기토] 100호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역설적 유물론"(paradoxical materialism)으로 재규정함으로써 


신유물론과 스피노자 철학의 차이를 밝혀보려고 했습니다. 


이 논문을 인용하거나 이 논문에 관해 토론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출판된 판본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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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신유물론, 스피노자

[이 논문은 202369일 부산대학교에서 개최된 󰡔코기토󰡕 100호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학술대회에서 날카롭고 유익한 논평으로 논문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정대훈 교수에게 심심한 우정과 감사의 뜻을 전한다.]

 

 

 

국문초록

이 논문은 인류세와 관련하여 신유물론과 스피노자 철학을 비판적으로 비교검토해보려고 한다. 최근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인류세와 그것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을 적절하게 개념화하는 것이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인류세라는 것이 지구 시스템에 미친 인간의 행위성으로 인해 발생한 지구 시스템의 변화 (즉 기후위기와 종 다양성 파괴, 해양 생태계의 훼손 같은 현상들)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지칭하는 명칭이라면, 그것은 과학적 명칭임과 동시에 규범적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인류세는 "논란을 본질로 하는 개념"(W. B. 갈리)일 수밖에 없으며, 상이한 이론적, 윤리적 입장을 산출하게 된다. 신유물론은 인류세의 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물질의 행위성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지구 시스템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유물론은 그 이론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난점과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역설적 유물론으로 이해된 스피노자 철학이 이러한 난점과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적절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는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을 다섯 가지 테제로 제시하면서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주제어

능동-수동, 제인 베넷,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신유물론, 역설적 유물론, 인류세, 행위성

 

 

I. 머리말

 

2000년 미국의 생물학자인 유진 스토머(Eugene F. Stoermer)와 네덜란드의 화학자인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의 한 페이지짜리 기고문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면서,[Paul J. Crutzen & Eugene F. Stoermer, “Have we entered the "Anthropocene?”,  IGBP Newsletter 41 (Royal Swedish Academy of Sciences, 2000). http://www.igbp.net/news/opinion/opinion/haveweenteredtheanthropocene.5.d8b4c3c12bf3be638a8000578.html (2023.6.15. 접속)] 지구 시스템과학이나 지질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분야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과 예술 분야, 그리고 대중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급격하게 확산되기 시작한 인류세 개념은 월터 브라이스 갈리(Walter Bryce Gallie)논란을 본질로 하는 개념”(essentially contested concepts)이라고 부른 것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W. B. Gaille, “Essentially Contested Concepts”(1956), in Philosophy and the Historical Understanding, Schocken, 1964.] 인류세라는 것이 지구 시스템에 미친 인간의 행위성으로 인해 기후위기와 종 다양성 파괴, 해양 생태계의 훼손 같은 현상들로 표출되는 지구 시스템의 변동이 일어나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지칭하는 명칭이라면, 그것은 과학적 분석 및 서술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상이한 윤리적정치적 입장을 산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세에 관한 상이한 이론적규범적 입장들이 제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이점에 관해서는 클라이브 해밀턴, 정서진 옮김, 󰡔인류세󰡕 (이상북스, 2018) 참조.] 도나 해러웨이나 제이슨 W. 무어의 저작이 보여주듯이 인류세라는 명칭 자체가 본질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 하기󰡕 (마농지, 2021); 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망 속 자본주의󰡕 (갈무리, 2020).]


철학 및 인문학에게 인류세가 함축하는 것은 실체와 사물,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명,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무생명, 이론과 실천 같이 인문사회과학 및 과학 일반의 주요 범주들로 사용되어 오던 것들이 이제 더 이상 자명한 사유와 실천의 토대로 간주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인류세는 한편으로 인간의 행위성이 지구 시스템 자체에 영향을 미칠 만큼 위력적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체들의 존립 기반 자체가 붕괴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역설적 사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곧 인류세는 하이데거가 말하듯 지구 전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배를 위해 인류의 모든 능력을 최고도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전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인으로 하여금 더 새롭고 가장 새롭게 발진하도록 촉발하고 그의 안전한 전진과 목표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지침을 정립하도록 촉구하는 은밀한 목표”[마르틴 하이데거, 박찬국 옮김, 󰡔니체󰡕 2(도서출판 길, 2012), 132.]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 따라서 인간의 주체성의 한 정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역으로 인류세는 인간의 주체성 내지 행위성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근본적인 존재 조건(시스템으로서의 지구)에 타율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며, 그 행위성의 정점이 곧 그것의 파괴의 지점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따라서 철학이나 인문학에게 제기되는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인류세의 역설을 초래하게 된 우리 사유의 기본적인 바탕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더불어 이러한 재난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개념적 자원들을 모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신유물론은 인류세의 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물질의 행위성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지구 시스템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신유물론은 그 이론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난점과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에서 나는 신유물론의 주요 논객 중 한 명인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 사물들의 정치생태학󰡕을 중심으로, 신유물론의 이론적 쇄신이 어떤 것인지, 하지만 동시에 그 쇄신에 수반되는 난점이나 모호함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Jane Bennet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ke University Press, 2010;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문성재 옮김 (현실문화, 2020). 이 논문에서는 국역본의 번역을 수정해서 활용하겠다.] 내가 베넷의 저작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신유물론을 이론화하면서 여러 사상가들을 원용하지만, 특히 스피노자 철학을 이론적 준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스피노자는 베넷만이 아니라 다른 신유물론 이론가들, 더 나아가 포스트휴머니즘이나 이른바 '정동이론'(affect theory)의 이론가들에 의해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활용이 적지 않은 난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특별히 스피노자 철학을 역설적 유물론(paradoxical materialism)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베넷을 비롯한 신유물론 이론가들과의 차이점을 드러내고 싶다. 이 논문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핵심 논점은, 스피노자의 유물론이 지닌 역설적 성격을 신유물론 이론가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인류세 문제를 사고하는 데서 스피노자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먼저 베넷의 신유물론의 논지를 살펴본 뒤, 내가 이해하는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을 다섯 가지 테제로 제시하면서 신유물론과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다.

 

II. 신유물론의 이론적 쇄신

 

1. 신유물론의 공통적인 요소

 

신유물론은 단수로 통용되지만 사실은 복수로 표기되어야 합당한 명칭이 아닐까 싶은데, 신유물론자들로 통용되는 이들의 구체적인 이론적 지향이 상당히 차이를 지닐뿐더러, 정치적 입장도 일관되거나 균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Coole & Frost, “Introducing the New Materialisms”, eds., New Materialisms: Ontology, Agency, and Politics, Duke University Press, 2010; 김환석, 사회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신유물론, 󰡔지식의 지평󰡕 25 (2018); 이준석김연철, 사회이론의 물질적 전회: 신유물론, 그리고 행위자네트워크이론과 객체지향존재론, 󰡔사회와 이론󰡕 53 (2019); Christopher N. Gamble, Joshua S. Hanan, & Thomas Nail, “What Is New Materialism”, Angelaki 24.6 (2019); 릭 돌피언이리스 반 데어 튠, 박준영 옮김, 󰡔신유물론: 인터뷰와 지도제작󰡕 (교유서가, 2021); 문규민, 신유물론 입문: 새로운 물질성과 횡단성(두번째 테제, 2022); 릭 돌피언, 우석영 옮김, 󰡔지구와 물질의 철학󰡕 (신현재, 2023). 뒤의 두 권의 책은 여러 측면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신유물론이라는 단수적인 명칭이 유명론적인 비판에 딱 들어맞는 헛된 소리(flatus vocis)일 뿐이라고 일축하기는 어려운 이유는, 신유물론으로 표상되는 이론들 내지 담론들에는 몇 가지의 공통적인 지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담론 내적인(또는 언표(énoncé) 차원의) 공통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들이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고발한다는 점이다. 마치 반 세기 전에 알튀세르가 이론적 반인간주의(anti-humanisme théorique)를 표방하면서 인간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 중 하나로 고발했듯이, 또한 데리다가 로고스 중심주의 내지 음성 중심주의를 서양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적시했듯이, 또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이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서양 중심주의내지 유럽 중심주의를 탄핵했듯이, 그리고 그 이후에 여러 이론가들이 각자 나름대로의 “~중심주의를 다양하게 만들어냈듯이, 이번에는 신유물론자로 분류되는 이론가들은 공통적으로 인간 중심주의라는 표적을 제시하고 있다. 이때의 인간 중심주의는 무엇보다도 인간 대 비인간의 존재론적 분할 위에서 인간들에게만 행위 능력 내지 행위성(agency)을 부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 신유물론은 비인간적 사물들, 특히 비유기적인 물질적 사물들에게도 고유한 행위 능력 내지 행위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존재론에 관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할 텐데, 실제로 신유물론 및 그와 결부되는 다양한 담론들(행위자네트워크이론(ANT),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존재론(OOO), 포스트휴머니즘 등)은 존재론의 영역에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존재론은, 적어도 신유물론의 일부에서는, 관계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비인간적인 사물들, 특히 물질적인 사물들에게 고유한 행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조건은, 사물들을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인(또는 타자들과의 관계를 외생적인 조건으로만 삼고 있는) 실체들로 이해하지 않는 일이다. 사물들은 관계들의 네트워크 내지 배치(assemblage)로 이해될 때 인간 중심주의의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행위성을 회복할 수 있다.


신유물론의 또 다른 핵심 주장은 관계론적 존재론의 시각에서 비인간 존재자들에게 고유한 행위성을 긍정할 때 새로운 규범적 통찰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신유물론이 비판적인 담론이라면,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사변적 담론에만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의 규범적 토대를 무너뜨리고 좀 더 생태학적이고 좀 더 해방적인 규범적 통찰까지 제시해주어야 한다. 인간 중심주의는 사변적 담론이기 이전에, 인간을 목적이자 척도로 삼아 (인간 및) 비인간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이론적실천적 집합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2. 제인 베넷의 스피노자주의적 신유물론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은 신유물론의 고유한 이론적 특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저작 중 하나로서 손색이 없다. 이 책이 불과 10여 년 사이에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인 베넷은 생기적 물질성”(vital materiality)을 기반으로 비인간에 대하여 행위성을 부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는 생명/물질의 이원론”[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27.]을 특징으로 하는 고전적인 생기론과 달리 생기(vitality)의 개념을 인간의 의지와 설계를 흩뜨리거나 차단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궤적, 성향 또는 경향을 지닌 유사 행위자(quasi agents)나 힘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들먹을 수 있는 것, 상품, 폭풍, 금속의 역량(capacity)”[같은 책, 9]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되면 생기는 그것을 영혼이나 생명의 고유한 특성 내지 역량으로 간주해왔던 서양 근대의 지배적인 철학 전통과 달리 비인간적인, 더 나아가 비유기적인 물질에게까지 귀속되며, 이는 존재론의 차원에서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분할했던 오래된 위계적 대립틀의 해체를 낳는다.

베넷의 시도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물들의 역량 또는 비인간적인 물질들의 행위 역량을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사고하기 위해 스피노자(그 자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들뢰즈-과타리에서 유래하는 아펙트(affect)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번역본에서는 정동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 발표문에서는 아펙트라고 표현할 것이며, 스피노자의 affectus 개념은 정서라고 옮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는 아펙트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는 아펙트가 정치와 윤리의 핵심이라고 내내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인간의 신체에 제한되지 않는 아펙트로 나아갈 것이다. 이제 나는 아펙트적인 촉매가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관계 능력의 향상보다는, 비인간 신체 내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촉매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이 역량(power)은 초인격적(transpersonal)이거나 상호주관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이념적으로도) 인간으로서 상상될 수 없는 형식에 내재하는 비인격적(impersonal) 아펙트다. 여기서 나는 주술성(enchantment)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두 방향을 강조한다.[번역본에서는 “enchantment”황홀함이라고 번역하는데, 뒤에서 지적하겠지만, 막스 베버와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적절한 번역어라고 하기 어렵다.] 첫 번째 방향은 주술성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그의 행위 역량이 강화되기도 하는 인간을 향한다. 두 번째 방향은 인간의 신체 및 다른 물체들에 (유익하거나 해로운) 효과를 만들어내는 사물의 행위 능력(agency)을 향한다. 유기적 신체와 비유기적 물체, 자연의 대상과 문화적 대상 ...... 모두가 아펙트적이다. 나는 여기서 아펙트를, 일반적인 신체가 갖는 활동성과 반응성이라고 폭넓게 지칭하는 스피노자주의적 개념(a Spinozist notion of affect, which refers broadly to the capacity of any body for activity and responsiveness)에 기반해서 해석하고 있다. ...... 내가 비인격적 아펙트 또는 물질적 생동(material vibrancy)이라고 말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물질에 깃드는 정신적인 부가물 또는 생명력’(life force)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생기론이 아니다. 나는 물리적 신체에 들어가 그것에 영혼을 불어넣는 별개의 힘을 상정하지 않으며, 아펙트를 물질성과 동일시한다.”[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17. 강조는 원문의 것이고, 번역은 수정.]

 

아펙트에 대한, 더 나아가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대한 베넷의 이해 방식이 지닌 난점들 내지 모호함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그가 아펙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왜 그것이 생기적 유물론을 이론화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해보겠다. 우선 베넷은 아펙트를 신체적인/물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스피노자 자신이 아펙트 또는 아펙투스(affectus)에 대해 제시하는 정의(󰡔윤리학󰡕 3부 정의 3)와 이것에 기반을 둔 󰡔윤리학󰡕 및 다른 저술들에서의 용법과 비교해볼 때, 베넷의 아펙트 정의는 사실은 스피노자 자신보다는 들뢰즈의 정의(특히 󰡔천 개의 고원󰡕에서 확립된)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베넷은 2아펙트적 신체들이라는 제목의 절에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들뢰즈과타리의 배치 개념과 관련하여 관계론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들뢰즈의 해석을 준거로 삼아 스피노자의 아펙투스 및 코나투스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다.[같은 책, 77.]

둘째, 더 나아가 베넷은 아펙트를 인간 또는 생명체에 고유한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것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확장한다. “비인격적 아펙트 또는 물질적 생동이라는 대목이 보여주듯, 아펙트는 비인격적 사물들에도 내재하는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아펙트야말로 물질적인 사물들을 무기력(inert)”[같은 책, 42.]하거나 수동적인 수단”[같은 책, 54.]으로 간주하는 인간 중심적 편향에서 벗어나, 물질의 행위성 내지 생동을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적 자원이다. 이렇게 이해된 아펙트는 인간의 관계 능력의 향상을 산출하는 촉매를 뜻하기보다는 비인간 신체 내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촉매를 의미한다고 베넷은 지적한다. 촉매의 사전적인 의미가 자기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물질의 화학 반응을 매개하여 반응 속도를 빠르게 하거나 늦추는 작용을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베넷이 아펙트를 촉매로서, 그것도 비인간 신체, 특히 물질적 사물 내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촉매로 이해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아펙트는 물리화학적인 변용 작용 그러한 작용을 수행할 수 있는 사물의 행위 능력을 지칭하는데, 이때의 행위 능력은 촉매로 작용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르지 않다. 앞서 인용했듯이 베넷이 생기를 자신만의 궤적, 성향 또는 경향(trajectories, propensities, or tendencies of their own)을 지닌 유사 행위자(quasi agents)나 힘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사물들의 역량으로 정의하는 것은 이러한 개념적 변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점은, 비인격적 아펙트와 관련하여 주술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넷이 사용하는 주술성 개념은, 알다시피 막스 베버에서 유래한 것이다. 베버는 전근대세계와 구별되는 근대세계의 고유한 특성을 탈주술화”(Entzauberung, disenchantment)로 규정한 바 있는데(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학문(1917)), 이 말의 뜻은, 근대인들은 자신의 주변 환경, 특히 자연 세계를 불가해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는 세계로 이해하지 않고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는 목적합리성(Zweckrationalität)으로서의 근대적 합리성의 결과인 동시에 그러한 합리성이 발전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따라서 탈주술화 개념은 자연의 지배자로서의 인간 대 인간의 이익을 위해 계산하고 활용할 수 있는 대상 내지 수단으로서 자연, 곧 능동적 주체로서의 인간 대 수동적 객체로서의 자연이라는 존재론적 구별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베넷이 비인격적 아펙트, 따라서 물질의 생기와 관련하여 주술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의도적인 일임을 알 수 있다.[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인간의 자기도취를 논박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성이 비인간 자연과 어느 정도 공명한다는 의인관을 조금은 받아들이고 갖출 필요가 있다.”(24)]

이렇게 이해된 주술성은 두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첫 번째 측면은 인간 이외의 다른 사물들에 주술적인 힘 내지 역량이 깃들어 있다고 느낌으로써 자신의 행위 역량을 증진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측면이다. 주술성에 대한 믿음과 감각은 (경우에 따라) 행위 역량의 증대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은 더 나아가 주술성을 사물의 행위 능력 자체로 이해한다. 이 두 번째 측면이 사실, 주술성 개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베넷의 핵심 논점을 잘 보여준다. 물론 주술성 개념을 복원함으로써 사물의 생기, 비인격적 사물에 고유한 행위 능력을 옹호하려는 것은 불가피하게 의문을 낳을 수밖에 없다.

베넷은 책의 첫 머리에서부터 자신의 저술 목표가 하나의 철학적 기획 및 그와 관련된 하나의 정치적 기획”[같은 책, 7.]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곧 베넷의 궁극적인 목표는 존재론적이거나 인식론적인 게 아니라 규범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다. 사실 인간 중심주의 내지 인간 예외주의를 비판하고 존재론의 차원에서 모든 사물의 존재론적 수평성을 긍정하는 것, 아울러 그동안 인간의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의 지위만 부여받았던 비인간적 존재자들, 특히 물질적 사물들에게 고유한 생기(vitality)를 긍정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규범적 함의를 지닌다. 특히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같은 다중적인 생태적 위기를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서, 물질의 생기 내지 사물들의 역량/권력”(power of things)을 옹호하는 것은, 인간 중심주의에 입각한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반()생태적 속성에 대한 문명론적 고발이라는 함의를 지닐 뿐 아니라, 좀 더 호혜적이고 지속 가능한 대안적 문명 건설을 위한 규범적 기초의 탐색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베넷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물들의 역량/권력에 입각한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을 이 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특히 이 책의 7장과 8장에서 집약적으로 논의된다. 베넷은 존 듀이와 자크 랑시에르를 대화의 상대방으로 삼는다. 그가 존 듀이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듀이가 공중”(public)을 관계론적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공중을 인간 시민들에 의해 구성된 실체로 한정하는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듀이가 말하는 공중은 문제에 반응하면서 창발하는 것으로서, 명시적인 합리적 계획 내지 의도에 따라 형성되고 통제되는 집단들이 아니라, “교호-작용(trans-action)의 간접적인 결과들에 체계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이 마땅하다고 여길 만큼 그러한 결과들에 변용된 사람들로 구성”[John Dewey, Public and Its Problem, p. 16; 󰡔생동하는 물질󰡕 249쪽 주 13)에서 재인용.]되는 것이다. 베넷이 주목하는 교호-작용이라는 개념은, 명시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개인들이나 집단들 간의 상호작용이나 합목적적인 전략적 행위와 달리, 우발적으로 생성된 문제들로 인해 피해를 겪고 그것에 반응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신체들 사이의 변용 작용들을 가리킨다.[이런 측면에서 이 개념은 캐런 바라드의 내부적 작용”(intra-action)이라는 개념과 비교해볼 만하다. 캐런 바라드, 행위적 실재론: 과학실천 이해에 대한 여성주의적 개입, 󰡔문화과학󰡕 59(2009).] 이 과정 속에서 신체들의 연합”[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248.]으로서의 공중은 형성되고 분해되었다가 다시 다른 문제를 계기로 재형성된다. 따라서 듀이가 정의하는 공중은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우발적인 문제들에 의한 반응 및 변용 작용(“교호-작용”) 속에서 인도되는것인데, 베넷은 브뤼노 라투르를 원용하면서, 듀이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러한 공중이 반드시 인간의 분투”(endeavors) 내지 인간의 노력”(efforts)[같은 책, 252~53. 주지하다시피 “endeavor”“effort”는 영어권에서 conatus 개념의 번역어로 널리 쓰인 용어들이다.](강조는 원문)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가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베넷 자신은 2장에서 2003년 미국과 캐나다를 연결하는 송전망의 이상 작동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정전사태를 인간과 비인간(전기, 발전 장치, 송전선, 전력회사, 소비자, 연방 에너지규제위원회 등) 사이의 교호-작용 및 이를 통한 공중의 형성의 적절한 사례로 제시한다.

베넷이 랑시에르의 정치이론에서 주목하는 것은 공중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잠재적인 파열”(disruption)[같은 책, 257. 번역본에서는 분열이라고 옮기는데, 이것은 부적절한 번역어다.]의 힘이다. 그가 볼 때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공동체에서 신체들이 분배되는 질서에 대한 독특한 중단”[자크 랑시에르, 󰡔불화󰡕, 160; 󰡔생동하는 물질󰡕, 258쪽에서 재인용.]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치적 제도 내에서의 권력의 분배를 둘러싼 합법적인 투쟁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을 다시 나누고 지각 가능한 것의 체제를 전복”[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262.]시키는 파열의 작용에서 찾아야 한다. 베넷은 랑시에르가 민주주의적 행위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파열이라든가 폭발”(eruption) 같은 은유들 자체가 이미 정치 행위가 자연의 힘과 유사하다는 점을 암시”[같은 책, 260.]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비인간에게 데모스의 참여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으며, 파열은 반드시 합리적인 담론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수반해야”[같은 책, 261.] 한다고 간주한다. 곧 랑시에르는 데모스 내지 인민을 형성된 사물이나 고정된 실체로 이해하지 않고, “통제하기 어려운 활동 내지 비규정적인 에너지의 흐름으로 간주하고, 데모스를 이런저런 특수한 신체들로 환원할 수 없는 초과”(excess)[같은 책, 같은 곳.]로 파악하고 있음에도, 비인간적인 사물들에게 행위 능력을 부여하는 데 대해서는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베넷 자신이 지적하듯이 민주주의 이론이 인간 중심적인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평등한 자유의 이념 및 제도,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성립하고 실행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언어를 다룰 줄 알고 사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같은 책, 263.]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베넷은 민주주의의 핵심을 전복적인 파열에서 찾는 이론가인 랑시에르가 민주주의 또는 정치를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데모스의 통치 역량을 불신했던 플라톤적인 편견에 버금가는 편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적 민주주의 개념으로는, 인간들의 정치적 행위에 미치는 비인간적 사물들의 영향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미국인의 전형적인 식습관이 이라크 침공을 유발하는 프로파간다에 대한 광범위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가?”[같은 책, 264.] “가족농이 기업식 농업으로 전환될 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문화가 패스트푸드 소비문화로 변할 때, 공중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펼쳐질 때, 석유 채굴과 유통이 가진 폭력을 인식하지 않은 채 연료를 소비할 때”[같은 책, 280.] 생태계가 어떤 변화를 겪고, 인간의 생활양식이 어떻게 굴절되며, 개인들 및 집단들의 정체성 형성이 어떻게 변환되고 이것이 정치에 어떤 효과를 초래하는가? 베넷이 보기에 이러한 질문은 오늘날의 정치적 실천의 중대한 쟁점이지만, 랑시에르의 인간 중심적인 민주주의 개념으로는 여기에 제대로 답변하기 어려우며, 사실 질문을 제기하기조차 어렵다.

따라서 비인간적인 사물들의 행위 능력을 긍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규범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의 조건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 자신이 유기적이면서 비유기적이고, 인간적이면서 물질적인 작용들 및 신체들의 배열”(array of bodies)[같은 책, 276, 강조는 원문.]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 자신이 강력한 물질성”[같은 책, 273.]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베넷은, 스피노자, 낭만주의, 화이트헤드 및 니체, 카프카, 베르그손, 그리고 들뢰즈와 과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자들과 문인들이 제기한 바 있는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같은 책, 286. 󰡔윤리학󰡕 1부 정리 29의 주석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natura naturansnatura naturata라는 용어들은 대개 능산적 자연소산적 자연으로 번역되지만, 이 논문에서는 일본어에서 유래하는 이 번역어들 대신 산출하는 자연산출된 자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의 기초 위에서, 인간과 다른 비인간적 사물들에게 능동적인 생성의 능력,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같은 책, 287. 강조는 원문.]을 긍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정치를 위해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3. 베넷의 이론적 강점과 난점

 

베넷의 작업은 무시할 수 없는 이론적 강점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베넷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비인간적 행위자들(actors) 또는 오히려 (행위자네트워크이론에서 유래한 개념을 사용하자면) 행위소들(actants)에 고유한 행위 능력을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물론 및 생기론과 이중으로 구별되는 관점이다. 둘째, 베넷은 인간적 지각의 바깥에, 언어적 표상 너머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물질 및 그것에 고유한 행위 능력을 탐구하려 하지 않고, 관계론적인 입장에서 비인간적인 사물들의 행위 능력에 대해 사고하려고 한다. 그가 스피노자 철학 또는 오히려 들뢰즈와 과타리의 스피노자 전유에서 유래하는 아펙트 개념에 주목하고, 실체로서의 사물들의 본질 내지 정체성이 아니라 (역시 들뢰즈와 과타리에서 유래하는) 배치 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셋째, 규범적 또는 정치적 실천의 측면에서도 베넷의 논의는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해준다. 실로 물질의 생기라는 개념은, 사회정치적으로 인정받는 가치 있는 삶과, 가치 없고 따라서 살해해도 무방한 삶(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의 규범적 구별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비판할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이러한 구별을 오직 인간적인 존재자에게만 한정하는 관점들 역시 문제 삼을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날마다 우리나라 및 전 세계의 확진자 수와 위중증 환자의 수, 사망자 수를 계산하면서 확진된 이들에게 연민과 위로를 보내고 사망한 이들을 애도해왔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또 다른 종류의 팬데믹, 훨씬 더 장기적이고 치명적인 팬데믹을 겪고 있는 생명체들(조류독감, 구제역 등)의 안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을 기울여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의 팬데믹이 우리의 팬데믹, 우리의 문명적 삶의 양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베넷의 생기적 유물론은 우리의 규범적 상상력의 범위와 깊이를 훨씬 더 확장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베넷은 환경에서 생기적 물질성으로 이동함으로써 환경 내지 자연의 보호자로서 인간이라는 관념, 그리고 그것이 함축하는 인간과 환경적 조건 사이의 외재적 관계라는 관념과 단절할 수 있게 해준다. 베넷의 생기론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 물질성을 공유하고 있으며, 인간의 행위성은 항상 이미 더 복잡한 물질적 배치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물들의 생기라는 발상은 우리가 인간성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성, 곧 사물성을 인정하고, 이점에 입각하여 공중 및 정치적 행위를 사고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는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한 정치학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생태적 정치학을 사고하려는 흥미로운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베넷의 논의가 여러 가지 난점 및 모호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려운데, 내가 보기에는 베넷이 스피노자 철학을 전유하는 방식에서 이러한 점들이 뚜렷이 나타난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베넷이 이 책에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는 스피노자는 정확히 말하면, 들뢰즈(과타리)에 의해 전유되고 활용된 스피노자다.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베넷은 스피노자의 아펙투스 개념을 신체적인것으로 이해하면서, 더 나아가 인간의 신체에 제한되지 않는 아펙트’”, 비인격적인 아펙트”[같은 책, 19.]로 그 개념을 확장하고자 시도한다. 또한 그는 코나투스 역시 신체적인것으로 규정한다. “다른 신체들과 연합하여 자신의 행위 역량/권력(power)을 향상시키려 노력한다는 의미를 지닌 코나투스적 신체.”[같은 책, 14.]

(2) 베넷은 󰡔윤리학󰡕 2부 정리 13의 주석에 나오는 매우 문제적인 구절을 생기적 유물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명제로 받아들인다. 󰡔윤리학󰡕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준 것은 완전히 일반적인 것이어서 다른 개체들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animata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줄표 사이의 해당 구절의 라틴어 원문은 이렇다. “omnia, quamvis diversis gradibus, animata tamen sunt”] 베넷은 이를 다음과 같이 활용한다. “모든 사물이 서로 다른 정도라 할지라도 살아 있다”(all things are “animate, albeit in different degrees”)고 주장한 스피노자.”[같은 책, 43; Jane Bennett, Vibrant Matter, p. 5.]

(3) 베넷은 아주 흥미롭게도 양태(modus, mode)의 존재론에 입각하여 코나투스 및 아펙트 개념을 재해석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2장의 아펙트적 신체들이라는 절에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적 신체 개념이 모든 사물이 동일한 실체양태들이라고 보는 존재론적 시각이라는 맥락에서 연원”[같은 책, 77.]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양태 자체가 많은 단순한(simple)[번역본에서는 일관되게 “simple”이라는 용어를 단일한이라고 잘못 옮기고 있다.] 물체들의 모자이크 조직 또는 배치”[같은 책, 78.]라고 말한다. 또는 단순한 물체들이라는 표현 대신 아마 원시-물체들(proto-bodies)이 더 적절한 용어일 것이다”[같은 책, 79. 이것은 󰡔윤리학󰡕 2부 정리 13의 주석 이하에 나오는 이른바 자연학 소론의 문제적인 개념 중 하나인 “corpora simplicissima”와 관련된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아무튼 베넷에 따르면 단순한 신체들 ...... 과 그러한 신체들이 형성하는 복합적이고 모자이크형인 양태들 모두 코나투스적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양태를 이렇게 풀이한다.

 

여기서 양태라는 말은 동맹들을 형성하고 배치들에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다른 양태들을 변화시키고/양태화하고(mod(e)ify) 다른 양태들에 의해 변화된다. 그러한 변화의 과정은 하나의 양태의 제어 하에 일어나는 게 아니다. 어떠한 양태도 위계적인 의미를 지닌 행위자가 아니다. 언제나 우연이라는 요인에 종속되어 있으며 모든 마주침에 내재하는 우연성(chance or contingency)에 종속되어 있는 (변화하는 하나의 집합으로서의) 다른 양태들의 (변화하는) 변용에 맞서 각각의 양태들이 견디고 다투기 때문에, 긴장이 없는 과정은 없다.”[같은 책, 79~80. 해당 대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What it means to be a “mode,” then, is to form alliances and enter assemblages: it is to mod(e)ify and be modified by others. The process of modification is not under the control of any one modeno mode is an agent in the hierarchical sense. Neither is the process without tension, for each mode vies with and against the (changing) affections of (a changing set of) other modes, all the while being subject to the element of chance or contingency intrinsic to any encounter.” Jane Bennett, Vibrant Matter, p. 22.]

 

이것은 스피노자의 양태 개념에 대한 참으로 흥미로운 해석이다. 첫째, 이러한 해석에서 양태들은 끊임없는 변화 과정에 있으며, 양태 자체가 사실은 일시적인 변화의 산물이면서 변화의 촉매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양태는 실체가 아니라 항상 이미 복수의 양태들이 형성하는 동맹들내지 배치들이다. 둘째, 베넷은 양태들 사이에는 아무런 위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의 변용들을 견디거나 그것에 맞서 변용하는 작용을 수행하기 때문에, 양태는 본질적으로 긴장의 과정 속에 존재한다고 이해한다. 셋째, 양태의 기본적인 존재론적 양상은 우연이며, 베넷은 우연을 표현하기 위해 chance or contingency라는 두 개의 용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III.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

 

이제 3장에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겠다. 스피노자 철학을 일종의 유물론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드물지 않게 존재해왔다.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자들의 스피노자 수용은 논외로 하더라도, 마르크스에서 알튀세르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스피노자는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앙드레 토젤, 김문수 옮김, 스피노자라는 거울에 비친 맑스주의, 󰡔트랜스토리아󰡕 5 (박종철출판사, 2005) 참조.] 최근의 사례를 살펴보면, 앙드레 콩트-스퐁빌은 자신이 한때 유물론자로서 스피노자주의자였지만, 더 이상 자신은 스피노자를 일관된 유물론자로 간주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자신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스피노자주의의 유물론적 측면과 비유물론적 측면을 구별한 바 있다.[André Comte-Sponville, ““Nous avons été spinozistes”, une lecture matérialiste de Spinoza”, Association des Amis de Spinoza, 2020. 10. 21. https://aas.hypotheses.org/706 (2023.6.15. 접속)] 반면 짧지만 유용한 소책자에서 파스칼 세베락은 스피노자의 유물론을 경험적 유물론, 존재론적 유물론, 방법론적 유물론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하고 있다.[Pascal Sévérac, Qu'y a-t-il de matérialiste chez Spinoza? (Paris: HDiffusion, 2020).]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을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전유하려는 베넷과 같은 이론가들의 시도는 상당히 오랜 이론적 전통 위에 서 있는 셈이다. 하지만 베넷의 스피노자 전유는 흥미롭기는 해도 몇 가지 난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스피노자 철학을 역설적 유물론으로 파악해보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내가 이해하는 바,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을 5가지 테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첫 번째 테제: 물질과 정신의 동등성과 동근원성

 

일반적으로 유물론은 물질과 정신의 대립 및 위계를 유물론 성립의 일반 조건으로 삼고 있으며, 이점에서 신유물론도 예외가 아니다. 반면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은 물질과 정신의 대립 및 위계 관계를 거부하며, 오히려 물질과 정신의 동근원성동등성을 주장한다.

 

이것이 스피노자 형이상학의 핵심 중 하나인 속성 이론의 의미다. 스피노자에게 속성(attributum)실체의 본질을 구성”(󰡔윤리학󰡕 1부 정의 4)하는 것 내지 실체의 본질을 표현”(󰡔윤리학󰡕 1부 정리 10의 주석 외 여러 곳)하는 것이며,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인 신 또는 자연은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을 비롯한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다(󰡔윤리학󰡕 1부 정의 6). 현대적인 어법으로 표현한다면 각각 물질적인 우주와 심리적 우주를 표현하는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은, 신의 본질을 구성하거나 표현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위상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더욱이 실재적으로 구별되는하나 없이 다른 것이 인식될 수 있는”(1부 정리 10의 주석) 이 속성들은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으며(1부 정리 10),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해 한정될 수 없다(1부 정의 2). 따라서 속성들은 서로 독립적이며, 속성들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상호 간섭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관계는 속성 내부의 양태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스피노자 당대에 충격적이었던 점은 사유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연장이 신의 속성 중 하나라는 점, 따라서 물질적인 것이 신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이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연장하는 실체는 신의 무한한 속성들 중 하나라고 결론을 내렸다.”(1부 정리 15의 주석) 왜냐하면 연장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은 결국 신이 물질적 본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무신론자라는 비판에 시달리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스피노자는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부정했음에도).

더욱이 연장이 신의 속성 중 하나라는 것은 자연학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결과를 산출했다. 물리적 자연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데카르트적 기획의 조건은 물질적인 것들에게서 모든 인과적 힘을 박탈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물리적인 것들이 지니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힘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일관성 있게 표현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데카르트는 물리적인 것들의 운동을 장소 이동 운동으로 한정하고, 물리적인 것들이 지닌 원인으로서의 힘을 모두 신에게 귀속시켰다. 오직 신만이 자연적인 것들을 움직일 수 있으며, 더욱이 그것들이 속해 있는 자연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에서 진정한 원인으로서의 신과 신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 사이에는 초월적인 간격이 존재하게 된다. 신은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을 계속 움직이는 원인이며, 자연 그 자체는 아무런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취른하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데카르트 연장 개념의 한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데카르트가 인식한 연장, 곧 불활성적인/정지하고 있는 덩어리(molem quiescentem)로부터 물체들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은, 선생께서 말했듯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정지 중에 있는 물질은 정지하고 있는 한에서 계속 정지하게 될 것이며, 좀더 강한 외부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면 운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가 이전에, 자연적 실재들에 관한 데카르트의 원리는 전혀 부조리한 건 아닐지 몰라도 아무 쓸모도 없다고 주저 없이 주장했던 것입니다.”[Benedictus de Spinoza,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Vol. IV, Carl Winter Verlag, 1925, p. 332.]

반면 스피노자는 물리적 우주를 표현하는 연장을 신의 본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데카르트와 달리 연장은 신 바깥에, 그리고 신보다 존재론적으로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의 물리적 자연은 신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음을 뜻한다. 스피노자의 연장, 곧 물리적 우주는 데카르트와 달리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무한하게 생산하는 역동적인 자연인 것이다.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 󰡔윤리학󰡕 4서문)이라는 정식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베넷을 비롯한 신유물론 이론가들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물질의 행위성을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자원을 발견하는 것은 일리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신유물론자들이 간과하는 점은, 스피노자의 신의 본질을 구성하거나 표현하는 속성은 연장 속성만이 아니라는 점, 스피노자의 신 또는 자연 또는 우주를 구성하는 속성들은 무한하게 많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속성 중에는 연장 속성 이외에 사유 속성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유 속성이 신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에, 사유 속성에 따라 신을 파악하게 되면, 이번에는 신 또는 자연은 정신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자연(사유 속성)은 물리적인 것으로서의 자연(연장 속성)과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것이며, 두 개의 속성은 영원에서부터 다른 모든 속성들과 함께 신을 구성해왔다는 점에서 동근원적인 것이다. 이러한 동등성 및 동근원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을 비롯한 각각의 속성은 신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실체가 지니는 모든 속성은 항상 실체 안에 함께 존재해 왔으며, 그 중 한 속성이 다른 속성에 의해 생산될 수 없고, 각각의 속성은 실체의 실재성 또는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1부 정리 10의 주석)

따라서 우리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역설적 유물론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서양철학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이 물질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신이 물질적 본성을 지닐 수 있는 조건, 곧 연장이 신의 속성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연장과 동시에 사유가 신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 따라서 신은 또한 정신적이라는 점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질과 정신이 동시에, 그리고 사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한하게 많은 다른 속성들이 항상 함께 신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신 또는 자연은 단지 무한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하며(1부 정의 6), 신 또는 자연의 절대적 무한성으로 인해, 우주는 무한하게 역동적이며 풍부한 것이다. 내가 볼 때 신유물론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오직 연장 내지 물질이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에만 주목하면서 사유 속성 내지 정신을 배제하거나 연장 속성보다 폄하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의 무한하게 풍요롭고 역동적인 자연 또는 우주를 상당히 빈약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뇌에 불과하다는 명제는 인간에게서 뇌라고 하는 물리화학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지만, 동시에 인간의 정신적 풍요로움과 역동성을 빈곤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반면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 정신의 역동적인 창발성은 우리가 아직까지 알지 못한 뇌의 수수께끼를 탐구하기 위한 풍요한 기반을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뒤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신체의 역량은 정신의 역량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테제: 관계론적 유물론으로서 양태의 존재론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은 실체 없는 유물론 또는 실체로서의 물체 없는 유물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전의 철학에서 실체로 간주되었던 존재자들을 양태로 재정의함으로써 모든 존재자들에게서 가상적인 자립성을 박탈하고 그 대신 물체를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이 지닌 원초적인 관계론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이다.

 

스피노자 철학은 대개 실체의 철학이라고 간주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실체는 가장 완전한 것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이며, 만물의 존재 근거로 제시되기 때문이다(1부 정의 6, 정리 11, 15, 16). 하지만 우리가 본 것처럼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신과 같으며, 또한 신은 자연 내지 우주와 같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피노자의 실체는 사실 (원인으로서 파악된) 우주 전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실체의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과도하거나 과소한 주장일 것이다. 과도한 이유는, 실체 이외의 다른 존재자들은 실체와 같이 자신 안에 있고 자신을 통해 인식”(1부 정의 3)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과소한 이유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은 사실 실체가 아니라 양태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스피노자 철학이 실체의 철학이라는 주장은 우주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오히려 양태의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며, 이 경우에만 스피노자가 실체를 우주 전체와 동일시하는 이유가 더 정확히 해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 존재론의 진정한 혁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까지, 그리고 데카르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실체라고 간주한 개별적 존재자들을 실체가 아니라 양태라고 규정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물들을 양태로 규정하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사고방식이다. “양태의 라틴어 원어인 모두스(modus)는 원래 척도라는 뜻 이외에도 방식이나 태도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실재나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그 사물의 모양이나 존재방식, 행위방식 등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 165항에서 양태들을 그것들이 속해 있는,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실체들 없이는 판명하게 인식될 수 없는”[René Descartes, Charles Adam & Paul Tannery, eds., Oeuvre de Descartes, Paris: Vrin, 1964~1974, vol. VIII-1, p. 30. 원석영 옮김, 󰡔철학의 원리󰡕 (아카넷, 2002), 51. 번역은 약간 수정.] 것들로 정의하며, “이성이나 상상이나 기억이나 의지 같은 사유 양태들, 그리고 부분들의 모양이나 위치나 운동 같이 연장에 속하는 다양한 양태들”[같은 책, 같은 곳. 그 외에 53, 56, 61항 등도 참조.]을 사례로 제시한다. 이 경우 양태들은 실재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의미할 뿐 실재들 자체를 가리키지 않으며, 따라서 실재성도 갖지 않는다.

반면 스피노자에게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들이다. 여기 있는 책상이나 의자, 건물, 나무, 그리고 지구 전체도 양태이며, 더 나아가 관념과 정신 역시 하나의 양태다. 양태들은 그것들이 속해 있는 속성에 따라 분류되는데, 연장 속성에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들이 속해 있으며, 사유 속성에는 심리적인 실재들, 곧 관념들이 속해 있다. 우리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두 개의 속성인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무한하게 많은 양태들을 지니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처럼 사물을 양태로 규정함으로써, 각각의 사물은 그것들이 실체로 규정되었을 때 지니고 있었던 가상적 자립성을 박탈당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1부 정의 3)이라고 정의되는 실체와 대비하여 󰡔윤리학󰡕 1부 정의 5에서는 양태를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대조를 이루는 두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실체가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양태는 기본적으로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를 나타낸다. 그리고 스피노자에게는 오직 신 또는 우주 전체만이 실체이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헤겔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용납하기 어려웠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스피노자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하면, 인간은 주체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인간에게는 윤리적 실천의 여지도 자유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아직 주체가 되지 못한 실체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철학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 철학에 미달하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스피노자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없이는 성립할 수도 없고 존속할 수도 없는 존재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양태의 존재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을 오직 관계 속에서만 실존하고 존속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관계론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관계에 선행하여 미리 각각의 사물들이 실체로서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사물들이 생성되고 존립하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자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1부 정의 1, 정리 11), 곧 우주 전체뿐이다.

스피노자 존재론의 관계론적 특성은,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singular thing)라는 개념을 통해 더 잘 드러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의 7에서 독특한 실재를 이렇게 정의한다. “나는 독특한 실재를,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이 정의에서 흥미로운 것은 구절인데, 이는 독특한 실재라는 것이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다수의 개체들이라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이 개체들이 공동의 결과를 산출하는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할 때다. 곧 그것들은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 우리가 보통 개체라고 부르는 것은 다수의 부분들의 연합이라는 점을 뜻한다. 우리말 개체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인디비둠(individuum)인데, 이것은 원래 나눌 수 없는을 의미하는 인디비두스(individuus)에서 나온 말이다. 곧 우리가 보통 개체라고 번역하는 라틴어 인디비둠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 쪼갤 수 없는 것, 따라서 마치 원자와도 같은 것을 뜻하는 단어다.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원자와 같은 나눌 수 없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학󰡕 2부 정리 13의 주석 이하의 자연학 소론에서 제시된 개체에 대한 정의가 잘 보여주듯이,[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거나 크기가 서로 다른 일정한 수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에 의해 압력을 받아(coercentur) 서로 의지할 때, 또는 그것들이 같은 속도나 서로 다른 속도로 운동하고 있을 경우에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전달할 때, 우리는 이 물체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단 하나의 물체 또는 개체를 합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물체들 사이의 이러한 연합에 의해 다른 모든 개체들과 구별된다.”] 그에게 개체란 그 자체가 복합체이며, 더욱이 아주 많은 부분들의 연합체다. 예컨대 인간의 신체는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서의 개체이지만, 그 신체를 이루는 각각의 신체 기관(, , , , , 간 등) 역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서의 개체다. 아울러 인간 신체를 이루는 약 31조개의 세포 하나하나 역시 복합체로서의 개체이며, 박테리아나 심지어 바이러스 역시 독특한 실재로서의 개체가 된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국가도 복합체로서의 개체이며, 지구 전체(또는 지구 시스템)도 그것을 형성하는 부분들 사이에서 동일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보존”(자연학 소론보조정리 5)하는 한에서 독특한 실재로서의 개체로 존속한다. 태양계나 은하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둘째, 독특한 실재는 원인이라는 점이다. 독특한 실재라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할 때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아주 다양한 부분들이 형성하는 고도의 복합체인데, 이 다양한 부분들이 하나의 인간 신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들 모두가 코나투스(conatus)라고 하는 공동의 원인으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틴어 코나투스는 우리말로 하면 노력을 뜻하는 개념으로, 특히 유한한 존재자, 곧 독특한 실재의 자기 보존의 노력을 표현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 7에서 코나투스를 모든 독특한 실재의 본질로 제시한다. “각각의 모든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추구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나의 눈과 코, , 손과 발, 몸통, 그리고 내장 기관 등은 각각 인간 신체의 상이한 부분을 형성하지만, 이것들 모두는 나의 신체를 보존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협력하여 수행하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이 다양한 부분들은 모두 하나의 동일한 인간 신체라는 개체 내지 독특한 실재를 형성한다. 국가와 같은 것 역시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코나투스를 자신의 본질로 하기 때문에 독특한 실재를 이룬다. 또한 광장에 모여서 시위나 집회를 하는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나 하나의 학술대회 역시 독특한 실재를 형성한다.

독특한 실재에 관한 제일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는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나 도나 해러웨이가 제시한 바 있는 홀로바이온트(holobiont)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굴리스는 주지하다시피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serial endosymbiosis theory)을 통해 공생발생 또는 공생진화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자연계의 생물종들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공생적 집합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홀로바이온트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다.[Lynn Margulis, “Symbiogenesis and symbionticism”, in Lynn Margulis & René Festereds eds., Symbiosis as a Source of Evolutionary Innovation, MIT Press, 1991; Lynn Margulis, “Symbiogenesis: The holobiont as a unit of evolution“, International Microbiology, September 2013; 린 마굴리스, 이한음 옮김, 󰡔공생자행성󰡕(1998) (사이언스북스, 2007).] ‘전체내지 온전한을 의미하는 홀로라는 접두어가 붙은 이 개념은 경계를 지닌 개체들 사이의 (외재적) 관계가 아닌, 관계를 통한 개체들의 생성, 관계 맺기를 통한 개체들의 공생을 표현하는 데 훨씬 적절하다. 이 때문에 해러웨이는 단위(unit) 혹은 존재(being)”를 대체하기 위한 일반적 명칭으로 홀로언트(holoent) 개념을 제안하면서, 홀로바이온트는 좀 더 넓은 의미의 공생적 집합체로 규정하고, 마굴리스가 게놈 연합체라는 뜻으로 사용한 홀로바이옴(holobiome)은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한 바 있다.[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 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마농지, 2021), 109.]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개념들은 원래의 생물학적 맥락보다 훨씬 더 확장될 수 있다. 일정한 생태 지역 전체가 홀로바이옴을 이루기 때문에, 산호초라는 홀로바이옴은 단지 산호초의 게놈과 미생물들의 게놈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중생물들과 어부, 죽어가는 산호초에 응답하는 예술가들이 모두 포함된다.

그렇다면 독특한 실재로서의 개인과 인간 종에 대한 생각도 바뀔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경계를 지닌 개인주의”(bounded individualism) 모델에 따라 사유하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환경의 관계로 이해된다. 반면 독특한 실재 개념에 따르면 독특한 실재로서의 인간 개인은 그가 관계를 맺는 다른 실재들과 분리해서 사고할 수 없다. 롭 던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및 기타 세균들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롭 던, 장혜인 옮김, 󰡔미래의 자연사󰡕(까치, 2023).] 따라서 화성 이주와 같은 것은,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다른 미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환경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 환경은 독특한 실재로서 인간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인 베넷을 비롯한 신유물론 이론가들이 횡단성”(transversality)이나 배치”(assemblage)를 새로운 유물론의 핵심 범주로 제시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적인 유물론을 위한 철학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은 올바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유물론 이론가들은, 뒤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관계론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개체성 내지 실재의 독특성이라는 측면, 또는 관계 속에서 개체들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하거나 또는 그 반대인 측면을 축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새로운 유물론의 규범적실천적 측면에서 애매성 내지 난점들을 낳을 수밖에 없다.

 

3. 세 번째 테제: 관념들의 물리학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은, 물체들 못지않게 관념들 또한 사물들 내지 실재들로 간주한다. 또한 물체들이 원인으로서의 행위성을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념들도 원인으로서의 행위성을 지닌다. 따라서 물체들에 관한 자연학 내지 물리학(physics)이 존재하는 것처럼 관념들에 관한 자연학 내지 물리학도 존재한다.

 

신유물론 및 이른바 정동이론’(affect theory)에서는, 물질의 행위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간학적 차원에서는 이를 신체의 행위성이나 또는 아펙트의 신체성 내지 물체성으로 확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정신의 행위성이 아니라 신체의 행위성을 주장하는 것이며, 아펙트를 신체적인 것 내지 물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에 대한 신체의 우위, 담론적인 것에 대한 아펙트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 유물론적인 것이다.[문규민, 󰡔신유물론 입문󰡕 참조.] 이 점에서 제인 베넷은 전형적인 신유물론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진정한 유물론의 길인지, 그리고 그럴 경우 유물론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규범적 측면에서도 이전의 유물론이나 관념론 철학들에 비해 더 진보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인지, 또한 인류세가 제기하는 쟁점들에 대해 더 효과적인 인식과 대응을 제시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세 번째 테제는 신유물론과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의 차이가 잘 드러나는 지점 중 하나다. 신유물론과 달리 스피노자는 단지 물체들 내지 신체들만 실재로 긍정하고 따라서 물체들/신체들의 행위성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 역시 실재라는 점을 긍정하며, 따라서 관념들에게도 물체들 못지않은(사실은 동등한) 행위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는 물체들이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며 관념들은 사유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라는 점에 존재론적으로 기초를 두고 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관념들의 형상적 존재(esse formalem idearum)는 사유의 양태다(자명한 것처럼). (1부 정리 25의 따름정리에 의해)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의 신의 본성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며,따라서 (1부 정리 10에 의해) 다른 어떤 신의 속성의 개념도 함축하지 않는다.”(2부 정리 5의 증명) “형상적 존재라는 스콜라철학의 용어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4번째 테제에서 더 부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에 주목해보자. 여기서 관념들이 사유 속성의 양태라는 점에 대한 논거로 제시되는 1부 정리 25의 따름정리는 유한 양태들의 능동성 및 코나투스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명제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1부 정리 34와 더불어) 󰡔윤리학󰡕 1부 마지막 정리인 정리 36(“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의 논거를 이루면서, 또한 3부 정리 6에서 코나투스 개념이 도입될 때 존재론적인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1부 정리 25의 따름정리는 특수한 실재들(res particulares)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과 다르지 않다. 곧 신의 속성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태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속성, 곧 신의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구절이다. 들뢰즈가 잘 보여주었듯이,[질 들뢰즈, 권순모현영종 옮김,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그린비, 2019).] 스피노자 철학, 특히 󰡔윤리학󰡕에서 표현”(expression)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경우에서 표현이라는 말은 사실 신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1부 정리 34)이기 때문에, 원인으로서 신의 역량을 표현한다는 것, 다시 말해 신이 지니고 있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나눠 갖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특수한 실재들, 또는 (스피노자가 좀 더 자주, 그리고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대로 하면) 모든 독특한 실재들은 신의 본질을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곧 무한하지 않고 유한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원인으로서의 역량 내지 행위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2부 정리 5의 증명은 이것이 물체들 같은 연장 속성의 양태들만이 아니라 사유 속성의 양태들인 관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관념들은, 한낱 표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또는 스피노자가 적절하게 표현하듯이 도판 위의 침묵하는 그림”(2부 정리 49의 주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다른 관념들을 산출하고, 따라서 다른 관념들과 인과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독자적인 실재다.[Lenn E. Goodman, “An Idea Is Not Something Mute like a Picture on a Pad”, Review of Metaphysics 62 (2009).]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정신을 관념으로 규정한다. “인간 정신의 현행적 존재(actuale mentis humanae esse, actual being of the human mind)를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은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독특한 실재의 관념과 다른 것이 아니다.”(2부 정리 11) 사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 철학에 관해 가장 분개한 점 중 하나가 이것인데, 그는 1702년에 쓴 보편 정신 학설에 관한 고찰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정신이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것이다. 관념들은 숫자나 도형처럼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념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G. W. Leibniz, “Considérations sur la doctrine d’un esprit universel”, in C. I. Gerhardt ed., Die philosophischen Schriften, vo. 6, Weidmann, 1885, p. 395.]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우리의 일반적인 견해와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는 사실 대개 정신은 관념들이 담겨 있는 기체(基體, substratum) 내지 용기(容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관념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는 관념은 추상적인 것이며, 행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스피노자처럼 인과적 행위성을 지닌 실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관념을 물체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실재라고 규정하면서 정신을 관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주 일관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신은 다른 독특한 실재들과 마찬가지로 복합적인 관념,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관념들의 연쇄다. 󰡔지성교정론󰡕에서는 사용되었지만 󰡔윤리학󰡕에는 등장하지 않는 정신적 자동장치”(automa spirituale)라는 개념은 스피노자가 정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김은주 옮김, 󰡔지성교정론󰡕 (도서출판 길, 2020), 85.]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인식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관념들의 연쇄가 전개된다는 뜻이다. 물론 인식에는 외부 물체가 인간의 신체를 변용함과 동시에 정신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아주 단순한 감각적 지각에서부터(2부 정리 16~정리 18) 비교와 차이, 동일성을 식별해내는 복합적 지각 작용(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와 주석), 그리고 추론과 직관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수준의 인지 활동이 존재한다. 스피노자가 상상, 이성, 직관적 인식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인식의 세 가지 유형을 구별할 때(2부 정리 40의 주석 2) 염두에 둔 것이 이러한 상이한 수준의 지적 활동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인식 활동을 염두에 두면서 이러한 구별을 제시하지만, 원핵세포와 같은 가장 단순한 생명체에게도 지각 작용은 존재한다. 그것이 주변의 환경 및 다른 원핵세포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생명 활동을 수행할 때, 그리고 린 마굴리스가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serial endosymbiosis theory)을 통해 보여주듯이 그것이 원핵세포에 머물지 않고 다른 원핵세포들과 결합하여 진핵세포를 형성하면서 공생발생 또는 공생진화를 이룩할 때,[린 마굴리스, 󰡔공생자행성󰡕, 앞의 책.] 여기에는 모종의 인지 작용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제인 베넷이 인용한 바와 같이 스피노자가 󰡔윤리학󰡕 2부 정리 13의 주석에서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준 것은 완전히 일반적인 것이어서 다른 개체들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animata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고 말할 때 animata라는 아주 번역하기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려고 한 바와 같이, 아마도 비유기적 물체들 역시 모종의 인지 작용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의 자연학 없는 물체의 자연학으로 충분한 것일까?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사유 속성 없이 연장 속성만 지닌 실체를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그럴 경우 실체의 역량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체의 자연학만으로는 양태들의 존재론적 행위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규범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지 않다. 4번째 테제와 5번째 테제에서 차례로 보여주겠지만, 사유의 자연학이 없이는 능동적인 역량 또는 능동적 행위성을 설명할 수 없는데, 이는 역량의 증대 및 역량의 능동화는 아펙트의 신체적 차원만이 아니라 관념적 차원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신체적 또는 물체적 차원에서만 파악된 아펙트는 강렬한 행위성을 표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능동적 행위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류세의 문제가 제기하는 실천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데 적절하게 기여할 수 없다. 사실 대개의 신유물론 이론가들은 행위성(agency)과 능동성(activity), 심지어 행위성과 자율성(autonomy)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스피노자에 준거하면서도 능동성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유의 자연학을 간과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다.


4. 네 번째 테제: 정신과 신체의 비례적 관계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은 정신과 신체 사이에 대립이나 위계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관념론 전통에서 말하듯 정신 내지 영혼이 신체에 비해 우월하거나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유물론 전통에서 주장하듯이 신체(또는 뇌)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 유물론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각각 상이한 속성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서로 상이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동일한 독특한 실재 또는 그 코나투스의 두 측면이며, 양자 사이에는 비례관계가 존재한다. 곧 정신이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일수록 신체도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런 측면에서도 스피노자의 유물론은 역설적인 성격을 드러내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속성 이론에서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의 동근원성과 동등성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체와 정신 역시 동일한 독특한 실재, 특히 인간의 본질적인 두 측면을 구성하며, 양자 사이에는 위계나 대립 관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개체이며, 그것은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된다”(2부 정리 21의 주석)고 말하는데, 이는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 또한 하나의 동일한 것이지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2부 정리 7의 주석)는 명제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것은 이른바 평행론”(parallelism)과 관련되어 있다. 라이프니츠에서 유래했지만 스피노자 철학과 관련하여 더 많이 사용되는 이 용어는, 하지만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하다시피 사실 이 용어로 지칭되는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적인 한 측면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여러 모로 부적절한 용어다.[특히 Chantal Jaquet, L'unité du corps et de l'esprit: Affects, actions et passions chez Spinoza, Paris: PUF, 2004 참조. 국내의 좋은 연구로는, 이혁주, 󰡔스피노자의 평행론󰡕 (연세대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5) 참조.] “평행론이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그것은, 들뢰즈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3가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6장 참조. 또한 질 들뢰즈,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 (민음사, 1999), 102쪽 이하 참조. 물론 이것을 평행론이라는 용어를 유지하면서 “3중의 평행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우선 그것은 사유 속성에 속하는 관념들과 연장 속성에 속하는 물체들 사이의 상응 관계를 나타낸다. 아마도 평행성이라는 말이 그나마 어울리는 것은 이런 차원이다. 이러한 상응이 가능한 것은 연장 속성 안의 물체들 사이의 인과관계와 사유 속성 안의 관념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동일한 하나의 인과관계의 동등한 두 가지 표현이기 때문이며(“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2부 정리 7의 주석)), 다시 이러한 인과연관의 동일성은, 각각의 속성들이 동일한 하나의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점에 존재론적으로 의거하고 있다(존재의 동일성).

그리고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정신과 신체가 동일한 실재의 두 가지 상이한 표현이라는 인간학적 귀결을 도출해낸다. 실체가 때로는 사유 속성으로 표현되고 때로는 연장 속성으로 표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개인을 비롯한 동일한 양태적 실재 역시 때로는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신체로 표현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리 7의 주석에서 원과 원의 관념의 사례를 들고 있다. “예컨대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연장 속성의 양태로서의 원은, 스피노자가 󰡔지성교정론󰡕 96절에서 설명하듯이, 중심과 원주를 가지고 있고 고정된 한 점을 축으로 선분을 회전시킴으로써 산출되는 물리적 실재인 데 반해, 원의 관념은 연장의 양태로서 원이 지니고 있는 형상적 본질”(essentia formalis) 내지 형상적 존재를 관념 안에서 대상으로서 재-현하는 것이다. 곧 원의 관념은 관념 안에서 대상으로 표상되거나 재-현된 원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연장의 한 양태로서의 원의 표상적 본질내지 표상적 존재”(esse objectiva)로서 원의 관념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이 뜻하는 바다. 원과 원의 관념의 관계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의 관계는 관념과 그 대상의 관계로서, 정신이 신체라는 물리적 양태의 관념이라면, 역으로 신체는 정신이라는 관념의 대상이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2부 정리 13)라고 말하며, 또한 신체의 관념과 신체, (2부 정리 13에 의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개체”(2부 정리 21의 주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결합을 스피노자는 합일”(unio)이라고 부른다.[스피노자가 사용하는 unio는 데카르트가 사용한 것과 단어는 동일하지만 의미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상이한 실체들로서의 정신과 신체의 unio 또는 󰡔정념론󰡕의 프랑스어로 하면 union을 말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는 실체들이 아니라 양태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union연합을 의미한다면, 스피노자의 unio합일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한 좋은 논의는 Chantal Jaquet, “Pourquoi parler d’union corps/esprit chez Spinoza?”, Különbség 21.1 (2021) 참조.]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3부 정리 2의 주석)는 명제도 도출해낸다. 정신과 신체는 서로 상이한 속성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규정할 수 없지만(1부 정의 2, 3부 정리 2), 방금 살펴본 것처럼 양자는 개인이라는 동일한 실재의 관념과 대상으로서 합일을 이루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합일은 정서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실재의 코나투스로 표현되기 때문에, 정신과 신체는 한 개체의 코나투스의 두 측면이며, 동일한 인과연관을 동등하게 표현한다. 이 때문에 정신이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일수록 신체도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69일 코기토 100호 기념 학술대회에서 토론을 맡은 정대훈 교수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평행론논평자에게는 기회원인론이나 예정조화를 넘어서는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논평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평행론이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이나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론가 뚜렷한 차이를 지닌다는 점은 이미 스피노자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근대철학 연구 일반에서는 잘 확립되어 있는 주제다. 기회원인론과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말브랑슈의 경우 신의 초월성이 여전히 유지가 될 뿐만 아니라 정신과 신체 같은 유한한 존재자들에게 아무런 인과적 작용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여러 차례에 걸쳐 말브랑슈를 비판하면서 그의 기회원인론은 신과 유한한 세계의 관계를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관계로 만든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대안이 예정조화론인데, 이 이론은 기회원인론보다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더 가깝지만(사실 평행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라이프니츠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불평등한 것으로 남아 있으며, 그 때문에 신과 세계의 관계에도 여전히 초월적 간극이 존재한다. 세 사람의 심신이론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Pascal Gillot, L’esprit, figures classiques et contemporaines (Paris: CNRS Éditions, 2007)1부 논의가 유익하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 모두 일정한 방식으로 스피노자주의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인데, 말브랑슈의 경우에는 특히 신과 (물질적) 세계 사이의 내재성이라는 함의를 지닐 수 있는 가지적 연장”(extension intelligible) 개념 때문에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으며, 라이프니츠의 경우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스피노자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어떤 의미에서 라이프니츠 철학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받은 영향을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말브랑슈의 스피노자주의에 관해서는 Jean-Christophe Bardout, Malebranche et la métaphysique (Paris: PUF, 1999) p. 227 이하를 참조하고, 라이프니츠의 스피노자주의에 관해서는 특히 Mogens Laerke, “Leibniz’s Encounter with Spinoza’s Monism, October 1675 to February 1678”, in Michael Della Rocca ed., The Oxford Handbook of Spinoza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8)을 참조.]

능동과 수동에서 정신과 신체 사이에 성립하는 비례성은 신체를 지휘하고 통제하는 정신이라는 사고방식, 플라톤의 󰡔파이돈󰡕에서부터 데카르트까지, 그리고 그 이후 오늘날 포스트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서양 철학의 유구한 관념론적 사고방식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런 점에서 탁월한 유물론적 효과를 산출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에서 이러한 관념론적 사고의 요체를 오직 정신의 끄덕임(nutu, 명령)에 의해 신체가 때로는 운동하고 때로는 정지하며, 정신의 의지 및 사유의 기술에만 의존하는 아주 많은 것을 하게 된다는 믿음,[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워렌 몬탁의 훌륭한 설명을 참조할 수 있다. Warren Montag, “Commanding the Body: The Language of Subjection in Ethics III, P2S”, in A. Kiarina Kordela and Dimitris Vardoulakis eds., Spinoza’s Authority, vol. 1 (New York: Bloomsbury, 2017).] 또는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양자 모두는 정신의 권능(mentis potestate)에 달려 있다는 믿음으로 요약한다. 정신과 신체 사이의 이러한 위계적 불평등은 대개 정신과 신체 간에는 능동과 수동에서 반비례 관계가 성립하다는 믿음과 연결되며(“영혼 안에서 수동인 것은 보통 신체에서는 능동”[René Descartes, ed. & trans., Ferdinand Alquié, Oeuvres philosophiques de Descartes vol.3 (Paris: Garnier, 1973), p. 953; 김선영 옮김, 󰡔정념론󰡕 (문예출판사, 2013), 19. 번역은 수정.]), 또한 정서 내지 욕망과 이성 내지 지성 사이에도 대립 관계 내지 반비례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반면 스피노자는,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정신과 신체를 실체로 이해하지 않고 양태로 파악하며,[어떻게 서로 상이한 본성을 지닌 정신과 신체가 서로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또는 어떻게 양자가 능동과 수동에서 비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정신과 신체를 모종의 실체로 이해하는 발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일단 정신과 신체를 자립적인 실체로 간주한 다음, 어떻게 이 양자가 서로 결합될 수 있는지, 어떻게 비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질문을 하기 때문에, 이 질문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뇌를 정신의 본질 내지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는 관점, 겉보기에는 유물론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관념론적인 관점으로 귀착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Pascale Gillot, “Les neurosciences cognitives: un ‘materialisme cartesien’?”, Cités 65 (2016) 참조. 따라서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스로 믿는 것처럼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라 사실은 데카르트적인 유물론자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안토니오 다마지오, 임지원 옮김, 󰡔스피노자의 뇌󰡕 (사이언스북스, 2007). 이 문제는 조만간 더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양태로서의 정신과 신체를 동근원적이고 동등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반비례 관계나 대립 관계를 설정하지 않으며, 정서와 이성 내지 지성 역시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부적합한 인식인 상상과 관련되는 정서로서 수동 정서와 적합한 인식인 이성 내지 직관적 지식과 관련된 정서로서 능동 정서 사이의 차이 및 대립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성을 통해 정서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 정서에서 능동 정서로 이행하는 것이 스피노자 윤리의 요체를 이룬다.

여기에서 능동성과 수동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외부 대상에 대해 더 많은 활동을 가하는 것과 외부 대상에게서 더 많은 작용을 겪는 것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적어도 큰 행위성을 지닌 것과 더 작은 행위성을 지닌 것의 차이를 뜻하는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스피노자는 일반적인 능동과 수동 개념과는 매우 다른, 상당히 독창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5. 다섯 번째 테제: 원인의 두 형태로서 능동과 수동

 

스피노자의 능동과 수동 개념은, 통상적인 관점과 달리 행위를 가하는 것과 행위를 겪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개념은 오히려 원인의 두 형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능동과 수동을 원인 개념으로 정의함으로써, 스피노자는 한편으로 변용하기-변용되기와 능동-수동의 차이를 분명히 표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능동화의 과정을 윤리적 활동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능동성은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핵심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 자율성은 모종의 타율적 자율성(hetero-autonomy)으로만 성립 가능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의 5번째 테제는 능동과 수동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대개 능동을 어떤 대상에 대해 작용을 가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반대로 수동은 타자에게서 작용을 겪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는 능동은 우리가 어떤 활동의 원인이 되는 것이고 수동은 우리가 어떤 원인을 통해 이루어진 활동을 결과로서 겪는 것으로 파악한다. 능동과 수동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오래된 생각이며, 데카르트 역시 󰡔정념론󰡕에서 능동과 수동을 이렇게 이해한다.

 

“1. 한 기체(sujet)에 대해 수동인 것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항상 능동이라는 점.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보겠다. 곧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이루어지는 또는 새롭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이 일어나는 기체는 수동(passion)으로, 그것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은 능동(action)으로 부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능동체와 수동체가 종종 아주 상이하긴 하지만 능동과 수동은 항상 하나의 동일한 것이며, 이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관계시킬 수 있는 두 가지 상이한 기체에 따라 두 가지 이름을 갖게 된다.”[René Descartes, Oeuvres philosophiques de Descartes vol.3, p. 952; 󰡔정념론󰡕, 17. 번역은 수정.]

 

반면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의 2에서 능동과 수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앞의 정의 1에 따라)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능동적이다(nos agere)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생겨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수동적이다(nos pati)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능동과 수동을 원인과 결과로 구분하지 않고, 원인의 두 가지 종류 내지 두 가지 양상으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우리는 능동적이며, 반대로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causa partialis)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우리는 수동적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의는 수동을 하나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차이를 보여준다. 수동을 결과로 간주하는 데카르트의 관점에서는 수동은 어떤 운동을 받아들이는 것 또는 어떤 운동을 겪는 것이 되지만,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이는 수동이 아니라 변용되기(affici, being affected)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능동 역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능동이 아니라 변용하기(afficere, affecting)일 뿐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에게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구별은 수동과 능동의 구별과 일치하는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두 가지의 구별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곧 우리가 어떤 타자에 대하여 작용을 가한다고 해서, 그를 일정하게 변용시킨다고 해서 우리가 능동적인 것은 아니며, 그러한 변용하기가 반드시 규범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역으로 우리가 타자에게 일정한 변용을 겪는다고 해서 그것이 규범적으로 나쁜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주 왕성하고 아주 강렬하게 활동을 하고 타자들을 변용시키면서도 수동적일 수가 있으며, 반대로 우리가 타자의 활동에 의해 많이 변용되고 영향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능동적일 수 있다.

이러한 범주 구별은 윤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결과를 산출하는데, 이를 이해하려면 바로 뒤에 나오는 3부 정의 3의 아펙투스에 대한 정의를 살펴봐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서(affectus),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affectiones, affections)이자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인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이 변용들 중 어떤 것의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고, 그렇지 않으면 수동으로 이해한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정서 또는 아펙투스는 신체의 변용들이자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인데, 제인 베넷을 비롯한 대개의 신유물론자들은 아펙투스를 신체적인 것, 더 나아가 물체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유물론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이라는 요소를 빼버려도 무방한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것을 빼게 되면 어떤 아펙투스가 능동적인 것이고 수동적인 것인지, 더 나아가 어떻게 수동적인 아펙투스에서 능동적인 아펙투스로 이행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들뢰즈 자신이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에서 잘 설명한 바 있듯이, 2종과 3종의 인식이라는 적합한 인식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을 조직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수동에서 능동으로 이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스피노자가 기술하는 조작 전체는 네 가지 계기를 보여준다. (1)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 수동적 기쁨. 이로부터는 아직은 부적합한 관념에 따라 욕망들 또는 정념들/수동들이 따라 나온다. (2) 이러한 기쁜 정념들에 유리한 어떤 공통 통념(적합한 관념)의 형성 (3) 이러한 공통 통념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우리의 행위 역량에 의해 설명되는 능동적 기쁨 (4) 이러한 능동적 기쁨은 수동적 기쁨에 덧붙여지지만, 수동적 기쁨에서 생겨나는 정념들/수동들로서의 욕망들을, 이성에 속하며 진정한 능동들인 욕망들로 대체한다.”[Gilles 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Éditions du Minuit, 1969, p. 264;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323.]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데 핵심적인 것은 2종의 인식인 공통 통념(notiones communes, common notions)이다. 예컨대 채집과 수렵 생활을 하던 원시인이 산 속에서 우연히 맛보게 된 맛있는 산딸기는 그에게 기쁨의 정서를 경험하게 할 것이며, 그의 존재 역량을 증대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 뒤 다른 곳에서 마주친 비슷한 모양의 산딸기, 하지만 이번에는 독을 품고 있는 산딸기는 그에게 꽤 큰 슬픔의 정서를 안겨주고 따라서 그의 존재 역량을 감소시킬 것이다(3부 정리 11의 주석). 이 원시인은 전자처럼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후자처럼 슬픔을 주는 대상은 미워하게 될 것이다(3부 정리 13의 주석). 이런 경험들을 통해 원시인은 어떤 산딸기가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맛좋고 영양가 있는 것이고 어떤 산딸기가 독이 들어 있는 해로운 산딸기인지 식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원시인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식별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자신의 적합한 지식의 범위를 늘려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원시인이 더 많은 기쁨을 경험하고 반대로 슬픔은 덜 경험하도록 해줄 것이다. 이는 원시인이 더 이상 외부 대상에 의해 우발적으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대상을 식별하고 더 나아가 그 대상들을 배치하거나 조직할 수 있는 역량을 획득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량이 곧 원인으로서의 역량이며, 이것이 원시인을 수동적인 상태에서 능동적인 상태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정서 내지 아펙투스라는 것이 단지 신체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 특히 우리가 실천적인 대응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제인 베넷이 스피노자의 아펙투스 개념을 신유물론적으로 전유하면서 우연성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스피노자가 󰡔윤리학󰡕 1부 정리 29와 정리 33 및 그 주석들에서 자연 안에는 우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필연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주장할 때 염두에 둔 것은, 양태들 사이의 질서와 연관이 일정한 규칙성 내지 법칙성을 갖고 있다는 점, 따라서 그것은 원칙적으로 인식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자연 안에는 불가해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베넷처럼 양태의 존재론의 기본 양상을 우연이라고만 규정한다면, 여기에는 합리적 인식의 가능성이 매우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 현상들만이 아니라 공중의 형성 및 소멸과 재형성 같은 사회 현상들도 그저 예측 불가능한 우연적인 마주침과 교호 작용의 결과들로 간주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인지적 경험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더욱이 이것은 규범적인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낳는다. 베넷은 2장에서 2003년의 대규모 정전 사태를 우발적인 배치들의 행위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베넷은 배치의 행위성과 정치적 책임을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양한 인간들과 비인간들이 함께 작용하는 배치의 행위성에 주목할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5천만 명에게 영향을 미친 대규모 정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어떤 특정한 개체들이나 집단 또는 특정한 배치에 귀속시킬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력 관리를 민영화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한 의회 및 행정부와 이러한 개혁의 수혜를 받고 최대한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 전력 관리의 안전성을 소홀히 한 전력 회사들은 배치의 행위성의 여러 행위소(actant)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들에게 이 결과의 책임 대부분을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 베넷의 주장이다. 더 나아가 그는 특정한 집단이나 개체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행위적 능력들의 망을 정교하게 식별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책임 공방을 일삼을 뿐인 도덕주의 정치”[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111.]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단일한 인간 행위자들에 관한 가정에 입각하여 사건을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베넷의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이것을 근거로 정치적 책임을 분산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단순한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제안한 바 있는 구조적 부정의와 그것에 대한 정치적 책임(“집단적 책임”)을 묻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아이리스 매리언 영, 허라금 외 옮김,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이화여대 출판문화원, 2017).] 흥미롭게도 매리언 영은 개별 행위자의 잘못된 행위나 국가의 억압적 정책과 구별되는 도덕적 잘못”[아이리스 매리언 영,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 115.]으로 구조적 부정의를 정의하면서, 이러한 부정의는 보통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범위, 곧 허용된 규칙과 규범의 범위 안에서 수많은 개인들과 집단 및 제도가 각자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을 추구하면서 비의도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 발생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베넷이 우발적인 배치의 행위성을 말하면서 분산된 책임을 말하는 반면, 영은 우발적인 상호작용들의 결과로 산출되는 구조적 부정의 및 집단적 책임에 관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베넷의 신유물론이 스피노자의 아펙투스를 신체적인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결국 우연성이라는 범주를 양태적 세계의 기본적인 존재론적 양상으로 간주하는 것의 귀결이다.

마지막으로 인류세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논점을 더 제기해보자.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기후변화의 정치학의 자본주의 정치학 그 이상이다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학자들이 행성의 관리인으로서 인간들에 대해 쓸 때 제기되는 진정으로 어려운 문제는, 개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박테리아 및 바이러스 중 다수가 인간의 삶의 형식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을 때(많은 것은 우호적이기도 하지만), 그것들과 맺는 관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 행성에서 인간 종의 자연사는 박테리아 및 바이러스의 역사 및 활동을 함축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Dipesh Chakrabarty, “The Politics of Climate Change Is More Than the Politics of Capitalism”, Theory, Culture & Society, 34. 2-3 (2017), p. 32; 기후변화의 정치학은 자본주의 정치학 그 이상이다, 󰡔문화과학󰡕 97 (2019), 155. 번역은 수정.] 차크라바르티의 질문은 인류세에 대한 실천적 대응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논점을 제기하는데, 이는 스피노자 능동성 개념의 또 다른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능동성으로서의 강인함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해하는 한에서의 정신과 관련을 맺고 있는 정서들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능동(능동적인 작용, actiones)을 나는 강인함(Fortitudo)과 관련시키며, 강인함은 굳건함(一以貫之, Animositas)과 관대함(Generositas)으로 나누겠다. 왜냐하면 나는 굳건함, 각자가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대함, 각자가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우정으로 연결되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오직 행위하는 이의 유익(utile)을 목표로 하는 능동적인 작용을 나는 굳건함과 관련시키며, 다른 이의 유익함도 목표로 하는 능동적인 작용은 관대함과 관련시킨다. 따라서 절제, 절도 및 위험에 직면하여 마음을 다잡는 것(animi praesentia) 등은 굳건함의 일종이며, 겸손함(Modestia)이나 너그러움(Clementia) 등은 관대함의 일종이다.”(󰡔윤리학󰡕 3부 정리 59의 주석)

 

이 정의에 따르면 강인함은 굳건함과 관대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자가 이성의 인도에 따르는 욕망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타자들과 이성의 인도에 따라 우정을 맺으려는 욕망을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아마도 인간 행위자를 염두에 두고 강인함을 정의했겠지만, 이러한 정의를 인간 종 바깥으로 확장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첫째, 타자와의 우정을 맺으려는 욕망이 능동성의 본질적인 요소라는 점이며, 둘째, 하지만 타자들은 나 또는 우리에게 항상 우호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 심지어 그 타자는 우리의 존립을 위협하는 힘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해러웨이는 인간 대 비인간, 생명 대 무생명,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대립을 탈구축하면서 -산적”(sym-poietic) 지구를 상상하기 위해 인류세 대신 쑬루세(Chthulucene)라는 명칭을 제안한 바 있다.[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하기󰡕, 앞의 책.] 이것은 스피노자의 강인함 개념이 함축하는 타자와의 우정 어린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을 인류세 시대에 적합하게 확장하고 번역하려는 돋보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정을 맺고 공생하기를 실천하려는 타자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심지어 우리에게 적대적인 타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나 에볼라 바이러스 등과 우정 어린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또한 쓰나미나 지진, 화산폭발이나 산불 등과 공생할 수 있을까? 이것들은, 신유물론의 행위성범주를 빌려서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따라서 강력한 행위성을 지닌 물질적 존재자들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행위자들이 능동적인 행위자들일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금 거론한 것들을 될 수 있는 한 피하거나 방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인간들의 코나투스에 기반을 둔 것일 터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강인함의 첫 번째 측면, 곧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망의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현대 스피노자주의의 초석을 제시해준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이와 관련하여 스피노자 윤리학을 표현하기 위해 이기적-이타주의”[알렉상드르 마트롱, 김문수김은주 옮김,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린비, 2008), 266.]라는 역설적인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사실 스피노자 윤리학이 코나투스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그것은 모종의 이기주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적합한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냐 아니면 상상적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냐에 따라 능동적 이기주의냐 수동적 이기주의냐로 구별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일수록 자기 보존이 적합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전자의 경우일수록 이기주의는 그것의 대립항인 이타주의와 결합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한 독특한 실재들이 타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하고 실존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보존의 이기주의는 타자의 보존을 포함할 수밖에 없고, 자기의 보존을 적합하게 또는 능동적으로 추구할수록 타자와의 관계 역시 더욱 우정 어린 환대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타자들에 대하여 우정 어린 환대를 베푸는 것이 쉽지 않지만, 타자가 비인간, 특히 지질학적 타자를 포함한 비유기적 물체들까지 확장된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환대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적합한 환대이고 부적합한 환대인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 우리의 환대를 확장해야 하는 것은 인류세 시대의 시대적 요청이지만 우리는 아직 그 환대의 역량을 가질 만큼 능동적이지 못한데, 그것은 우리가 환대해야 하는 대상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인류세 시대에 어떤 범주들로, 어떤 개념들로 우리 자신을 사유해야 할지 이제 막 배움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터이다. 스피노자의 역설적 유물론은 이러한 배움에서 중요한 동반자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IV. 결론을 대신하여

 

결국 스피노자 철학을 유물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역설적인 특성의 유물론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 글에서 말해보고자 했던 핵심이며, 그러한 역설적 유물론이 인류세 문제를 사고하는 데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이 글의 또 다른 핵심이다. 알튀세르는 유고로 발표된 유물론의 유일한 전통에서 자신이 이해하고 활용했던 스피노자주의를 해명하면서 스피노자의 철학적인 전략을 게릴라 전략이라고 말한 바 있다.[루이 알튀세르, 권은미 옮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매진, 2008).] 그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가 신에서 시작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곧 스피노자는 스스로 무신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신론을 있는 그대로 주장하기보다는 자기 적수의 최고 요새를 포위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자신이 자기 자신의 적수 자체인 것처럼적들의 요새 중심에 자리를 잡고서 요새의 점령자들 자신을 향해 대포를 돌려놓는일을 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스피노자는 스콜라철학자들과 당대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담론을 거부하지 않고, 또한 그러한 담론들 바깥에서 자신의 무신론 요새를 만들어놓고 외재적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적들의 요새인 형이상학적신학적 담론 내부로 들어가서 그 요새 내부의 무기들이 형이상학자들과 신학자들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더욱 큰 철학적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으며, 17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입장의 주류 철학 담론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유일신에 대한 기독교 신학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형이상학적신학적 담론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도발적인 해석(‘자기원인개념 및 신 즉 자연개념으로 집약되는)의 진정한 의미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주장을 우리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은 왜 스피노자의 유물론은 역설적인 형태를 띤 것일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역설적인 성격으로 인해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인지 이해하는 데 한 가지 실마리를 제시해준다. 스피노자 당대에는 유물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스피노자 역시 자신의 철학을 유물론 철학이라고 이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은 정신에 대한 물질의 우위를 주장하지 않고, 정신이 물질로 환원될 수 있다고 간주하는 대개의 유물론보다 훨씬 더 일관되고 강력한 유물론적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가 서양의 지배적인 관념론 철학 전통이 발휘하는 지배 효과, 곧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누구보다 민감했고, 그것을 그 내부에서 철저하게 분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는 유물론이라는 용어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자기 철학을 일관된 학설(doctrine)로서의 유물론으로 전개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단지 이론적 담론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 지배의 담론이기도 한 당대의 철학신학 담론들에 대한 내재적인 탈구축 작업을 통해 여느 유물론 철학들보다 더 강력한 유물론적 효과를 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세 문제 및 신유물론 담론과 관련해서도 여전히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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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6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23-07-0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그렇네요. ˝공진성˝이라고 해야 할 것을 ˝공성진˝이라고 했네요. 저런 실수를 ㅠㅠ 공진성 선생님이 섭섭해하시겠네요. ㅠㅠ 벌써 인쇄 끝났을 텐데

겨울산 2023-07-24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감사합니다. 정말 많이, 새로운 이야기 배우고 갑니다. 건강하시길!

balmas 2023-07-25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산님 오랜만이시네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