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영어로 읽었던 프랑수아 퀴세의 "French Theory"가 올해 초 난장출판사에서 번역, 소개되었다.

우리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프랑스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지난 30여 년 동안 미국에서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지성사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프랑스철학'에 대한 황당한 오해와 어처구니 없는 중상, 또는 뜬금없는 예찬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한번 일독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다만 몇 가지 측면에서는 퀴세의 이런저런 주장이나 해석에 동의하기 어려운데,

혹시 나중에 서평의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의 장점과 약점에 대해 좀더 상세하게 논의하기로 하고

오늘은 한 가지 황당한 오독만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문제의 대목은 국역본 62쪽에 나오는데, 이 대목은 퀴세가 1966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미국에서의

프랑스 철학의 수용 또는 발명의 시발점이 된 학술대회를 소개하면서 데리다의 발표문의 논지를

요약하는 대목이다. [기록과 차이])(국역본 제목은 [글쓰기와 차이]이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이 책의

제목은 이렇게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에 수록된 [인문과학 담론에서 구조, 기호, 유희/작용]이라는 글이

바로 데리다의 발표문인데, 퀴세는 데리다 발표문의 핵심 논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미국에서는 이 마지막 공식이 곧 정설이 된다. 여기서 데리다는 “단절된 직접성이라는 구조주의의 주제”, 즉 “놀이를 사유하는 데서의 부정적이고, 향수에 젖은, 죄책감의 ... 측면”을 넘어서 그 “유쾌한” 니체적 측면을, “오류도, 진리도, 기원도 없는 기호 세계”에 대한 순수한 긍정으로 나아가라고 요청한다. 데리다는 강령을 읽듯이 이렇게 결론지었다. “해석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 중에서 “놀이의 영역을 벗어나 ... 진리를 해독하려는 꿈”을 버리라고, 그보다는 “놀이를 긍정하고 인간과 인간주의를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시급하다고 말이다.”

 

퀴세의 이 주장은 정말 황당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퀴세가 인용한 대목에서 퀴세의 주장처럼

유쾌한 니체적 측면을 옹호하거나 "오류도, 진리도, 기원도 없는 기호 세계"에 대한 순수한 긍정으로 나아가라고 요청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 “해석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 중에서 “놀이의 영역을 벗어나 ... 진리를 해독하려는 꿈”을 버리라고, 그보다는 “놀이를 긍정하고 인간과 인간주의를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시급하다고 말이다”"라는 주장을 제시한 적도 결코 없다.

 

퀴세의 황당한 발명과 달리 데리다 논문의 마지막은 이렇다.

 

"이 두 가지 해석[레비스트로스적-루소적 해석과 니체적 해석-인용자]이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고 자신들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을 첨예하게 만들어야 함에도, 나로서는 오늘날 선택하기가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는 선택이라는 범주가 아주 사소해지는 영역 (잠정적으로 계속 역사성의 영역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에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무엇보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의-인용자] 환원 불가능한 차이의 공통의 지반, 그 차연을 사고하려고 시도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L'ecriture et la difference, Seuil, 1967, p. 428. 강조는 데리다.

 

어떻게 퀴세는 데리다의 이 결론을 저렇게 독창적으로 재창조해낼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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