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에 나올 [정치체에 대한 권리] 역자 후기를 올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고 또 번역도 즐겁게 했던 책인데,
독자 여러분에게도 행복한 독서의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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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 수구 세력이 반역을 독점하게 만들지 말자
여기 우리가 펴내는 {정치체에 대한 권리}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저작 중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가령 그의 주요 저작들 중에서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공동으로 저술한 {인종, 국민, 계급: 애매한 정체성들}[Etienne Balibar &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La Découverte, 1988; {인종, 국민, 계급: 애매한 정체성들}, 진태원 옮긴, 그린비, 2012 에정]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맹목점으로 남아 있던 인종, 국민의 문제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저작으로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의 확고한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대중들의 공포}(1997)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를 중심으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고, 폭력, 경계/국경, 인종주의, 보편성 등의 문제를 통해 현대 정치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문제작으로 1990년대 프랑스 철학계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한 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우리, 유럽의 시민들?}은 출간되고 나서 곧바로 영어를 비롯한 유럽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유럽 연합과 관련된 논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반면 {정치체에 대한 권리}는 이런 저작들에 비하면 덜 알려져 있을뿐더러 영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로도 별로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그렇다면 굳이 서양의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소개되지 않은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간할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보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역자가 이 책을 완역하여 출간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실천가, 활동가로서 발리바르의 면모를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 의미가 있다. 발리바르는 그 세대의 프랑스 철학자들(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장-뤽 낭시, 피에르 마슈레 등) 중에서는 국내에 가장 일찍 소개되고 또 가장 많이 읽힌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작들은 대개 아주 높은 수준의 이론적 논의를 담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로서는 발리바르가 어떤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그의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게 되었는지, 그의 추상적인 논의 속에는 어떤 정세적ㆍ실천적 경험들이 녹아 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이 책은 90년대 이후 발리바르 사상의 주요 요소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참여와 분석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서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시민불복종에 대하여」와 「우리가 “미등록 체류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라는 두 편의 글은 분량은 매우 짧지만 매우 강렬하고 생생하게 활동가 발리바르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있다. 이 두 편의 글에서 발리바르는 이른바 “불법체류자” 내지 미등록 체류자를 실정법의 관점에서 무조건적인 단속이나 추방의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들까지도 처벌의 대상으로 만드는 프랑스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왜 프랑스 시민들이 시민불복종 운동에 나서야 하는지, 매우 감동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적 시민권인가 인민주권인가?」와 더불어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국민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듯이 1980년대 이후 프랑스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이 세력을 점차 확장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며, 국민전선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왜 정치의 재발명이 필수적인지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발리바르는 이러한 정세적ㆍ실천적 경험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현대 세계가 직면한 근본적인 정치적ㆍ윤리적 쟁점을 개념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집약해서 말한다면 시민불복종이 어떤 의미에서 국가 또는 정치체의 토대를 구성하는지 이론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정치체의 토대로서 시민불복종이라는 생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소박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방종과 일탈, 불법 행동을 조장하려는 무책임한 발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나 최근 몇몇 정치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종말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시민불복종은 계급투쟁이나 혁명 같은 본질적인 개념에 비하면 얼마간 사소한 도덕적 저항이거나 심지어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질서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혁의 시도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법치국가의 원칙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수호하려는 입장에서 본다면, 여타의 불법 행위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시민불복종 행위는 정치체의 근본을 뒤흔드는 행위일 뿐 어떤 의미에서도 그 토대로 간주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발리바르의 관점은 양쪽 모두에게 비난받기 좋은 입장일 것이다.
발리바르의 이러한 관점이 어떤 이론적 기초에서 비롯했고 또 얼마나 다면적인 구조적ㆍ정세적 분석들을 전제하는지 여기서 길게 논의할 생각은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들이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발리바르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 구체적이고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교양 대중들 스스로 이 책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나 종말론적 정치철학의 관점 및 그 반대편의 관점들에 비해 발리바르의 입장이 지닌 강점과 의의에 대해서도 굳이 상세하게 논의할 생각은 없다. 이런 문제는 별도의 자리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은 간략히 지적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시민불복종을 정치체의 토대로 사고하려는 발리바르의 관점은 한편으로 정치체를 시민권 헌정constitution of citizenship으로 개념화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으며[이 점에 관해서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에 수록된 「역자 해제」 중 특히 455쪽 이하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이 근대 정치체(곧 국민사회국가[발리바르가 사용하는 ‘국민사회국가’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앞의 책에 수록된 「용어해설」을 참조])의 핵심을 이룬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치체를 시민권 헌정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정치체가 자연적(혈통과 같은)이거나 초월적인 기초(종교와 같은)를 갖지 않으며 오직 시민들 자신의 호혜적인 상호 구성 활동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근대 정치체는,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혁명에서 보듯이 봉건적인 예속 관계를 철폐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시민들 자신의 봉기적 행위에 근거하여 성립했다. 따라서 이렇게 성립한 헌정 질서는 시민들의 봉기를 자신의 정당성의 원천으로 삼고 있으며, 헌법을 비롯한 법률 문헌 안에 그 흔적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시민불복종을 정치체의 토대로 개념화하려는 발리바르의 관점은 무책임하게 방종과 불법행위를 조장하려는 발상이라기보다는 저항권에 입각하여 헌정 질서의 정당성을 새롭게 파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정부의 정책이 헌정의 정신을 위반하거나 그것을 위태롭게 할 때 헌정 자체의 이름으로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행위는 정치체의 근본을 뒤흔드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헌정의 토대에 입각하여 헌정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며, 시민성을 재발명하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오류나 과오 또는 무책임한 방종으로 판명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시민불복종의 주체들은 이러한 위험의 책임을 스스로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통치자들의 부당한 정책이나 그릇된 실정법에 저항하려는 자세야말로 능동적 시민성의 핵심을 이루며, 따라서 헌정의 토대를 이룬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관점이다.
다른 한편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시민불복종 행위가 프랑스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압제에 대항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 곧 프랑스 시민들의 타자들에 대한 억압에 대항하여 이루어진 행위라는 점이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 국적과 인종 등에 상관없이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모든 개인의 보편적 인권에 기반을 둔 고귀한 인도주의적 행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좀더 적극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시민불복종 행위는 타자에 대한 억압이 근대 정치체의 모순(시민권=국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이러한 행위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모순이 타자들의 인권 및 시민권만이 아니라 프랑스 시민들 자신의 인권과 시민권 역시 제약하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근대 정치체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좀더 민주주의적인 새로운 시민권 헌정을 구성하려는 시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이래로 발리바르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것처럼, 이러한 새로운 시민권 헌정은 더 이상 국민국가의 질서 위에서만 구성될 수는 없다. 시민권을 국적nationality 내지 국민됨nationhood의 틀로 한정하려는 근대 국민국가에 고유한 정치 논리는 이미 처음부터 시민권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그 토대와 모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세계화가 본격화되고 이주가 일반화하면서 국민사회국가의 모순은 한층 더 첨예한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주권의 약화에 대한 대응으로 국민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외국인을 배척하려는 수구적 국민주의 및 인종주의가 유럽 전역에서 확산되고, 유럽의 아파르트헤이트(더 나아가 범세계적인 아파르트헤이트)의 장벽이 세워지면서 수많은 외국인들/이방인들(특히 무슬림들 및 아프리카인들)이 물질적ㆍ상징적 폭력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것은 국민사회국가의 모순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최근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인종주의적 테러 사건은 유럽의 그 어느 나라도 이러한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프랑스 시민의 타자들에 대한 억압에 맞서 전개된 1996-97년의 시민불복종 운동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관(貫)국민적transnatinal 민주주의 운동, 관국민적 시민성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관국민적이라는 것은, 국민국가의 종언이나 소멸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국민과 외국인/이방인의 차이를 완전히 철폐하거나 국경의 무조건적인 개방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 정치의 구조적 조건으로 가정돼 있는 국경/경계의 제도가 단지 대외적인 지리적 경계를 중심으로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정치체 내부에서 시민들의 민주주의적 삶의 질서를 제약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국가적인 국적이 시민성을 가두고 조건 지을 것인가 아니면 규정되어야 할 한도 내에서 시민성이 국적을 넘어서 그것을 상대화할 것인가 여부다. 어디서 그리고 누구를 위해 시민성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떤 조건들 속에서 새로운 시민권 제도가 우리로 하여금 모순적인 두 가지 요구, 곧 차이에 대한 권리라는 요구와 차이로부터 차이화할 권리라는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해줄 것인가?”(101-102쪽)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말하는 관국민적 민주주의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근대적 정치체로서 국민사회국가의 토대를 이루는 능동적 시민성의 차원을 복원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능동적 시민성은 국민적인 것의 틀 속에서는 실체화된 단일한 인민주권과 논리적으로 연결돼 있다.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 관국민적 민주주의는 이러한 실체화된 인민주권을 다양체로서의 우리(237쪽)로 탈-구축해야 하며, 시민들의 공동체를 “운명공동체”로, 곧 “공동체 없는 공동체, 미리 존재하는 공동체적 실체 없는 공동체, 주권의 초월성 없는 공동체”(240쪽)로 재건설해야 하는 과제를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과제는 단지 국가적인 수준만이 아니라 지역적 수준, 초국가적 내지 국제적인 수준에서 동시에 수행되어야 할 과제다. 역자는 이러한 발리바르의 통찰이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치의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서나 그러한 현상들이 표출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사고하는 데서 귀중한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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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주요 개념들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 덧붙인 「용어해설」에서 설명해놓았기 때문에 이 책에는 별도의 「용어해설」을 수록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 유럽의 시민들?}과 몇 가지 달라진 번역어들이 있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간략히 해명해두겠다.
먼저 civilité의 경우 이전에는 발음만 옮겨서 ‘시빌리테’라고 번역했는데 이 책에서는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시민다움이라는 개념의 의미에 관해서는 다른 책에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고[에티엔 발리바르, {폭력과 시민다움}, 진태원 옮김, 난장, 근간 참조], 여기서는 이러한 번역어를 택하게 된 이유를 간략히 밝혀보겠다. 우선 발리바르는 시빌리테 개념을 citoyenneté 개념, 곧 시민성/시민권이라는 개념과 긴밀하게 결부시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말 번역에서도 이러한 긴밀한 연관성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가 이러한 상호 연관성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곧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는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시빌리테 개념이 시민(곧 정치적 주체)의 본성 및 그 법적, 제도적 틀을 뜻하는 시민성/시민권 개념과 관련하여, 시민의 정치 윤리를 지칭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말에서 ‘~답다’나 ‘~다움’은 본질이나 동일성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당위나 책임 같은 윤리적ㆍ규범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민다움은 시민성/시민권이라는 개념과 맞짝을 이루면서 후자가 지닌 윤리적 함의를 드러내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영어의 시빌리티civility나 프랑스어의 시빌리테라는 말은 철학적인 개념이기 이전에 일상어로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도 시빌리테라는 용어 자체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 용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용법과 어떻게 차이를 두느냐 하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시빌리티 내지 시빌리테의 번역은 일차적으로 이 용어들의 일상성을 살릴 수 있어야 하는데, 기존에 사용된 ‘시민인륜’이라는 번역어보다는 시민다움이라는 말이 좀더 적절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citoyenneté 개념의 경우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서는 줄곧 ‘시민권’으로 번역했는데, 이러한 번역은 citoyenneté에 담긴 이중적 함의, 곧 정치적 활동의 주체로서 시민을 뜻하는 주체적 함의와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제도적 함의를 온전히 살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경우에 따라 ‘시민성’과 ‘시민권’이라는 번역어를 함께 사용했다.
또한 nation, nationalisme, ethnicité에 대한 번역에서도 이전과 다소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서는 nation은 대부분 ‘국민’으로 옮겼고 nationalisme은 대개 ‘민족주의’로, 그리고 ethnicité는 ‘종족성’이나 ‘종족체’로 번역했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좀더 숙고해본 결과 좀더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nationalisme은 ‘국민주의’로, ethnicité는 ‘민족성’이나 ‘민족체’로, 그리고 ethnique는 ‘민족적’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사실 nation을 ‘국민’이라고 번역하면서 nationalisme은 단순히 ‘민족주의’로 번역하거나 또는 ethnicité를 ‘종족성’이나 ‘종족체’로 옮기는 것은 용어들의 통일성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개념적 일관성이라는 점에서도 적절치 않다.
다만 대개 ‘종족적 민족주의’로 번역되는 ethnonationalisme의 경우는 ‘민족적 국민주의’를 뜻하기 때문에 줄여서 ‘민족주의’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이 표방하는 “프랑스인들의 프랑스” 같은 노선이 이러한 의미의 ‘민족주의’를 잘 드러내준다. 또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단일 민족’의 신화에 기반을 둔 우리나라의 통상적인 ‘민족주의’ 관념 역시 이러한 의미의 민족주의에 가깝다.
따라서 역자가 보기에는 nationalism을 단순히 ‘민족주의’로 이해하기보다는 ‘국민주의’와 ‘민족주의’로 분류해서 이해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현상들을 좀더 다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룬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부연하지 않겠지만[이 문제에 대한 역자의 관점은 다음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진태원, 「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역사비평} 96호, 2011년 가을호. 참고로 이 글은 국사학자들 및 서양사학자들과의 토론 및 논쟁을 위해 집필한 글인데, 후속 논쟁을 통해 nation, nationalism, ethnicity 등에 관한 쟁점들이 좀더 분명히 해명될 것으로 기대한다],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독창성을 더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나 현대 정치(철학)의 쟁점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나 nation, nationalisme, ethnicité, racisme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이 책에서는 이전에 ‘동일성’이라고 번역했던 identité라는 단어를 대부분 ‘정체성’이라고 옮겼다. ‘동일성’이라는 번역어가 identité에 함축된 어원적 의미라든가 이 단어가 지닌 다양한 함의를 표현하기에 더 적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비롯한 발리바르의 저작에서 이 단어가 주로 ‘정체성’이라는 의미(국민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개인적 정체성 등)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말의 일상 어법을 고려할 때 ‘동일성’보다는 ‘정체성’이라는 번역어가 발리바르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새로 채택한 번역어들이 과연 이전의 번역어들보다 더 나은 것인지, 그리고 발리바르의 사상을 이해하고 현실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 더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을지 역자로서는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런 만큼 역자로서는 이 용어들을 무조건 고집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지금까지 역자 나름대로의 공부와 성찰을 통해 이러한 번역어의 채택이 최선이었다고 믿을 뿐이다. 앞으로 혹시 좀더 좋은 제안이 제시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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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의 현대정치철학 세미나 동료들과의 공동 작업의 소산이다. 오랫동안 이 책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을 함께 읽고 토론하면서 역자의 잘못된 생각이나 번역을 바로 잡아주고 여러 가지 좋은 제안을 해준 동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미안하게도 늘 번역자 명단에 나 한 사람의 이름을 올리게 되지만,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번역이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독자들에게도 그들의 공로가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역자가 재직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사업단의 아낌없는 세미나 지원 및 출판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주변에서 각종 행정적인 잡무와 형식적인 전시성 사업 계획들로 인해 연구자들의 연구 능력이 저하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개인적 관심사를 존중하고 격려해주는 민연 HK사업단 특유의 분위기 덕분에 역자는 늘 편안하게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민연 HK사업단과 동료들에게 감사드린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 이어 두 번째로 발리바르의 책을 후마니타스에서 펴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큰 기쁨이고 영광이지만, 게으른 역자를 만난 후마니타스 여러분들께는 큰 고통의 시간이 아니었을지 걱정스럽고 죄송하다. 오랫동안 원고를 묵묵히 기다려준 안중철 편집장님과 최미정 선생님을 비롯한 편집부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 분들에게 다소나마 보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1년 9월
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