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대중과 교통

  스피노자 정치학의 현재성은 대중과 교통의 문제로 집약된다.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대중의 문제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밝힌 사람은 바로 안토니오 네그리이고,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 이후 스피노자 정치학은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스피노자 연구가들이 네그리의 대중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 네그리의 입장은 소수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네그리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로는 P. Macherey, "Negri: de la mediation a la constitution(description d'un parcours speculatif)", in Avec Spinoza, op. cit.; Manfred Walther, "Negri on Spinoza's Political and Legal Philosophy", in Edwin Curley & Pierre-Francois Moreau eds., Spinoza. Issues & Directions, op.cit; Marin Terpstra, "What does Spinoza mean by "potentia multitudinis"", in E. Balibar et al. eds., Freiheit und Notwendigkeit. Ethisch und poltische Aspekte bei Spinoza und in der Geschichte des (Anti-)Spinozismus, Konigshausen & Neumann, 1994 참조.] 그렇지만 네그리의 해석의 독창성이나 영향력 등을 감안해 볼 때 스피노자의 정치학에 관한 논의, 특히 대중의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는 네그리의 문제설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네그리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야만적 별종}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르네상스 시기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개시된 위기 속에서 생산력의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로의 조직화의 노선(네그리가 권력potestas의 노선이라고 부르는, 홉스/루소/헤겔로 이어지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노선)과 이러한 조직화에 반대하는 노선(마키아벨리/스피노자/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대중의 역량potentia의 노선)의 대립에서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위치시킨다. 네그리에 의하면 근대성이라는 것은 "서양 합리주의의 선형적 발전도, 서양적 이성의 운명도 아니"며,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의 지배 사이에 항상 양자택일이 존재해 온 모순적인 전개과정"이다.[Antonio Negri & Michale Hardt, Labor of Dionysus: A Critique of the State-Form, U of Minnesota P, 1994, p. 282.] 따라서 그에 의하면 대중의 자유로운 생산력과 자본주의적인 지배관계, 또는 역량과 권력 사이의 대립 노선이 서양의 근대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간을 구조화하는데, 스피노자는 부르주아 생산관계의 헤게모니가 성립하는 고전주의 시기(17세기)에 이러한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생산력과 존재의 충만한 역량을 강조하는 "야만적 별종"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일반적인 문제설정을 토대로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반근대성]이라는 중요한 논문[A. Negri, "L'antimodernite de Spinoza"(1991), in Spinoza subversif: Variations (in)actuelles, Kime, 1994.]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이, 독일관념론, 특히 헤겔에 의해 절정에 이르고 하이데거에 의해 완성과 비판의 이중적인 전환점에 도달한 서양의 근대성에 대한 시초에서의 근원적인 비판과 대안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그에 의하면 헤겔 철학은 존재와 생산력의 충만성에 대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초월적 매개-국가의 조직화의 위기를 나타내는 것인데, 이는 특히 현존의 충만성-대중의 생산력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표현으로서 헤겔의 현실성Wirklichkeit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 헤겔의 현실성 개념은 부정적인 매개―네그리에 따르면 이는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생산력의 포섭과정을 개념적으로 표현하는 것―를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일 뿐, 대중의 원초적인 역량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처럼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성은 존재 내지는 현존의 직접적인 충만성으로서는 불필요한 부정적인 매개를 통해 획득된 것이기 때문에, 네그리에게서 변증법 일반은 존재에 대한 외재적이고 지배적인 관계, 즉 현존-대중의 직접적인 역량에 대한 지배권력의 초월적이고 착취적인 조직화의 논리를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네그리는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의 현사실성Faktizitat 개념과 현존의 회복의 시도를 높이 평가하면서(그러나 그는 하이데거가 존재를 무와 관련시키는 것은 서양 근대성의 지속적 잔여라고 간주하여 비판한다) 하이데거가 서양 근대성의 전개과정의 정점임과 동시에 전환점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네그리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현재성은 바로 스피노자가 서양 근대성의 최초의 헤게모니가 성립하는 과정―부르주아지의 자기구성과정에 다름아닌―에서 이 헤게모니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대표한다는 점에 있으며, 또한 이러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세계에 대한 대중의 실천적 구성의 역량을 긍정하는 정치적 구성의 존재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네그리는 최근의 "Les cinq raisons de son actualit ", in Spinoza subversif: variations (in)actuelles, Kime, 1994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스피노자가 17세기에는 근대성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야만적 부정, 이례성을 대표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더 이상 이례성이 아니며 기원Ursprung, 원천, 원초적 도약"이라는 것이다. 즉 그에 따르면 오늘 "스피노자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규정이 아니라, 조건"이며, 우리는 "사고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어야 한다"(pp. 10-12). ] 네그리의 관점은 우리가 그의 관점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탈)근대성 논쟁의 쟁점으로서 주체의 역설적인 자기지배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이 주체의 역사적 구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네그리가 대중의 역량과 지배권력―또는 {디오니소스의 노동}의 용어법에 따르면 구성적-제헌적 권력 대 구성된 권력―사이의 관계를 외재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즉 네그리에 따르면 구성된 권력과 구성적 권력은 근대 서양사의 시초인 르네상스 시기부터 줄곧 서로 대립적인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지만, 이러한 둘 사이의 대립은 서로 별개의 진영을 구성하고 있는 독립적인 두 세력 사이의 외재적 대립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네그리의 관점은 일차적으로 네그리가 소외-재전유의 운동으로서 변증법 일반을 거부한다는 데서 비롯한다. 네그리에 따를 경우 변증법은 대중의 근원적인 세계구성의 역량을 초월적인 매개를 통해 재전유하려는 국가-생산관계의 논리를 표현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발전과정에 대한 네그리의 매우 독특한 해석과 결부되어 있다. 네그리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철학의 발전과정에는 상이한 두 단계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초기 저작에서부터 {윤리학} 1-2부에 이르는 단계(1661-1665)로, 이 단계에서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적인 범신론적 철학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능산적 자연인 실체와 속성이 소산적 자연인 (유한)양태들의 세계의 기본적(이고 초월적인) 구성원리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이에 비해 두 번째 단계(1670-1677), 즉 {윤리학} 3-4부와 {정치론}에서 표현되고 있는 성숙한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첫 번째 단계의 철학에 남아있던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지고(네그리는 이를 특히 실체 개념과 속성 개념이 3-4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그 대신 정치론에서 등장하는 대중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이라는 개념이 기본적인 세계구성의 원리로 제시되고 있다. 네그리는 말년에 이르러서 스피노자가 대중이라는 세계구성의 주체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는 철학사에서 유례없는 완전한 내재성의 철학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네그리는 {야만적 별종} 이후 발표된 중요한 논문에서 일종의 '자기비판'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네그리가 대중을 주체로 간주하고 있다는 비판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자신은 {야만적 별종}에서 대중의 주체적 성격을 충분하게 주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A. Negri, "Reliqua desiderantur. Conjecture pour une definition du concept de democratie chez le dernier Spinoza", in Spinoza subversif, op. cit. 참조. 대중의 주체적 성격과 이에 따른 스피노자 철학에 고유한 내재적 목적론에 대한 강조는 최근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특히 A. Negri & M. Hardt, Empire, Exils, 2000; 윤수종 옮김, {제국}(이학사, 2002); A. Negri, Kairos, Alma Venus, multitude, Calmann-Levy, 2001 참조.]   따라서 네그리에 따르면 비록 스피노자가 이 개념에 따라 민주주의 이론을 완전하게 체계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스피노자의 최후의 저서인 {정치론}은 1677년 스피노자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군주정과 귀족정, 민주정이라는 세 가지 정치체제를 비교고찰하고 있는데, {정치론}은 민주정에 관한 논의가 막 시작된 11장에서 중단되었다.] 이를 철학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 바로 스피노자의 현재성이 있으며, 좌파의 이론가들은 스피노자가 남겨놓은 철학적 유산에 따라 이를 보다 완전하게 체계화해야 할 이론적 의무가 있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적어도 두 가지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네그리가 자신의 단절 테제에 따라 {윤리학} 1-2부에 담겨있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신플라톤주의적 유산으로 기각하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포함하고 있는 풍부한 이론적 잠재력을 무시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들뢰즈나 마트롱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그 자체로 중요한 철학적 역량과 의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윤리학과 정치학을 위해 필수적인 이론적 기초가 된다.[이에 관해서는 주 20)에 소개된 마슈레와 발리바르의 작업들 이외에도, Bernard Rousset, La perspective finale de l'Ethique et le probleme de la coherence du spinozisme, Vrin, 1968; C. Ramond, Quantite et qualite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PUF, 1995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스피노자의 존재론 전체가 신플라톤주의적인 범신론에 물들어있다는 식의 비판보다는 스피노자 존재론 내에서 전개되는 경향과 반경향을 구분하고, 이런 갈등이 제기하는 이론적 쟁점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문제이지만, 네그리의 관점은 두 번째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교통 또는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네그리와 거의 동시에 스피노자 철학-정치학에서 대중의 문제의 중요성을 제시했지만, 네그리와 매우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발리바르의 문제설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사상의 전복적인 독창성은 국가와 정치의 문제들에 관해 "대중의 관점point de vue des masses"을 취했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한다.[E. Balibar, "Spinoza, l'anti-Orwell. La crainte des masses", in La Crainte des masses. Politique et philosophie avant et apres Marx, Galilee, 1997;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 진태원 옮김, {스피노자와 정치} 앞의 책 참조.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multitudo는 동질적 집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대중의 관점"이 아니라 "대중들의 관점"이라고 표현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대중'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겠다.] 그에 따르면 대중의 관점이란 국가 자체의 관점도 아니고 인민의 관점이나 민주주의적 관점도 아니며, 엄밀하게 말해 계급적 관점도 아니다. 대중의 관점이란 "[역사적] 정세 및 정념의 체제들 ...에 따라 어떤 정치적 실천이 이러저러한 해결책을 향하도록 방향짓는 기회들을 규정하는 것은 최종 분석에서 대중의 상이한 실존양식들"[ E. Balibar, "Spinoza, l'anti-Orwell. La crainte des masses", in La Crainte des masses, op. cit., p. 59.]이라고 파악하는 관점이다. 이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함축한다.
  (1) 대중 또는 다수자는 사회의 존재론적 기초를 구성한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한 국가의 군주 또는 통치자는 자신에 고유한 역량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역량에 기초하여 이를 조절하고 통제하면서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어떤 사회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내부로부터 오고, 사회를 가장 잘 통치하는 군주는 자신의 신민들의 정신을 잘 통치하는 자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이 나온다.[Spinoza, Tractatus-Theologico-Politicus/Traite  theologico-politique, 17장 참조.]
  (2) 그러나 이는 대중이 자기 스스로를 이성적으로 통치할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대중이 선험적이거나 본질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집단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스피노자에게서 대중은 주체의 지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네그리가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주체로 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독창성은 바로 비주체적인 철학과 정치학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이러한 이중적 지위는 다시 우리에게 이중적인 탐구의 방향을 제시한다. 한편으로 이는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의 관점, 즉 대중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재고찰하게 만든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스피노자 철학의 고유한 입장은 역량의 현행성, 역량과 인과적 활동의 동일성에 있으며, 유한양태들은 이러한 존재론적 전제 덕분에 고유한 능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 자신이 당대 네덜란드의 공화주의 지도자였던 드 비트 형제가 대중의 폭동으로 무참히 살해되고 오란녀 왕정이 복고되는 정치적 반동의 경험(1672)을 몸소 겪고 {정치론}에서 이론적으로 확인했던 것처럼―또 20세기의 참혹한 역사가 다시 한번 입증했던 것처럼―국가의 존재론적 기초를 이루는 대중은 결코 이성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다. 이런 상황에서 네그리처럼 대중의 역량과 지배권력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 관계로 제시하는 것, 따라서 대중에 내재한 근원적 도착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외면하는 것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적합한 인식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중요한 것은 대중의 운동의 근원적 복합성과 갈등, 대중의 운동에 내재적인 도착의 가능성의 이유, 메카니즘에 대한 질문이며, 이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게 해주고 가능한 답변을 모색할 수 있게 해주는 철학적 문제설정은 어떤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비주체적인 정치학의 이론적 위상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우리가 서두에 제기했던 질문과 관련해 볼 때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재정식화될 수 있다. 비주체적인 대중의 정치학은 정확히 말해 그것이 인민의 관점도, 민주주의의 관점도, 계급의 관점도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에 의해 해방의 정치와 무관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해방의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 속에서 가능한 해방의 정치란 어떤 것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고찰로 이 글을 마무리해 보기로 하자.
   이 질문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최근 발리바르의 또다른 문제설정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는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빌리테]라는 최근의 한 논문에서 해방liberation의 정치의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하고 있다.[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e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e", in La Crainte des masses, op. cit..] 첫째는 해방emancipation으로서 이는 일체의 억압과 구속, 신분 및 각종 차별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 즉 인민의 자기규정, 자율적 주체의 구성운동을 가리키며, 특히 부르주아 혁명에서 잘 예시된 바 있다. 둘째는 변혁transformation으로서 이는 첫 번째 개념에서 문제가 된 자율적 주체의 구성을 규정하는 타율적 조건, 즉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사회경제적 구조, 그리고 푸코의 경우에는 생권력 및 생윤리적 조건들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가리킨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종언과 탈근대성의 이중적 정세하에서 이 두 가지의 고전적인 해방의 개념에 대해 세 번째의 또다른 개념을 추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안하는 세 번째 개념은 시빌리테civilite로서, 이는 타율성의 타율성, 즉 해방의 정치와 변혁의 정치 모두의 성립가능성을 규정하는 조건 자체를 문제삼는 정치이다. 그에 따르면 이 개념은 초객관적 폭력과 초주관적 폭력이 정치의 가능성 자체를 침식하고 있는 정세, 즉 사회적·국제적 조건에서 유래한 착취와 폭력이 거의 자연적인, 또는 천형의 재앙으로 나타나는 상황―예컨대 에이즈와 내전, 기아 등으로 시달리는 아프리카―그리고 주체 자신의 내적 제어를 넘어서 주체 자신으로부터 표출되는 폭력이 일반화되고 있는 상황["그 자신들의 근원에서, 모든 규정적 조건과 모든 구조 밖에서 '근본적인 악' 또는 폭력의 본래적인 원천을 인지해야 한다는 개인들에 대한 긴급한 촉구와 동시에 또한 고유하게 주체적(그리고 간주체적)인 모든 해방운동의 변증법 ...의 전개의 불가능성의 조건이 이 상황 속에 있는 것이다." 발리바르,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공감, 1995), 200쪽(강조는 인용자).]에서 특히 필수적인 개념이다. 이는 시빌리테의 정치가 정치의 불가능성을 조건짓고 있는 조건들을 전위시켜 해방의 정치의 변증법을 재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스피노자주의적인 '억압의 최저한도', 혁명적인 '인권의 정치' ... 등등에 공통적인 전제는 항상 관개체적(貫個體的, transindividuel) 관계(이른바 효용, 공감, 형제애, 공산주의, 교통 등등)가 본래 주체의 긍정과 결부되는 최소한의 인간적 본성이라는 관념이었다. ... 그러나 제도의 생산과 폭력의 생산이 거의 구별되지 않는 ... 상황의 일반화 때문에, 그러한 표상은 점점 더 비현실적이게 된다. 아마도 이는 정치의 가능성을 부단히 삭제하는 주체적-객관적 폭력의 각각의 형태를 모든 곳에서 퇴치한다는 목표를 동시에 확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정치적 실천도 더 이상 사고될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일 것이다." 발리바르,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 앞의 책, 200-201쪽(강조는 인용자-번역은 다소 수정).] 
  시빌리테의 정치에 대해 스피노자의 대중의 문제설정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 국가나 인민, 계급 같은 일체의 정치의 주체, 주체의 정치학의 '가능성의 조건과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대중이라는 점이다.[인식과 실천의 가능조건에 대한 탐구를 통해 철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문제제기 중 하나는 바로 데리다의 유사 초월론quasi-transcendental 의 문제설정이다. 이는 가능성의 조건은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이라는 점, 즉 초월론적 근거, 초월론적 기의, 또는 기원으로서의 근거는 항상 이미 파생적이라는 점을 밝혀줌으로써 철학의 한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스피노자의 대중의 문제설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데리다의 유사 초월론적 문제설정에 대한 하나의 소개로는 진태원, [차에서 유령론으로. 국내의 데리다 수용에 대한 하나의 반성을 위하여], {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년 가을·겨울호 참조.] 즉 대중은 서양의 근대 정치학에서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불가능한 개념으로 배제되어 왔지만, 동시에 정치체제의 존립과 변화를 최종심급에서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근대 정치의 가능성 자체를 규정해 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정세에서 정확히 문제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주체의 정치학의 가능성 자체라면, 그리고 이 조건들이야말로 정치의 가장 중요한 대상 중 하나가 되고 있다면, 스피노자의 대중의 정치학에 주목할 충분한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이처럼 대중이라는 개념이 근대 정치학에게―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불가해한 개념으로 나타났던 이유, 하지만 스피노자의 정치학 및 철학에서 중심적인 개념으로 나타났던 이유는 실은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관계의 존재론이 근대 철학에 극히 낯설고 불가해한 철학이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관계의 문제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통한 실체의 구성에서부터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접합, 개체의 구성 및 사회성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개체의 동일성 자체가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에서도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이는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초월적인 존재나 미시적인 원자에 이르기이는 스피노자 철학을 적합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양, 질, 관계, 양상 같은 기본범주 및 근거율의 문제를 재고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서는 게루 및 들뢰즈, 마트롱 같은 대가들의 저작 외에 특히 E. Balibar, Spinoza: From Individuality to Transindividuality, op. cit.; C. Ramond, Quantite et qualite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op. cit.; Elhanan Yakira, Contrainte, necessite, choix. La metaphysique de la liberte chez Spinoza et chez Leibniz, Gran Midi, 1989를 참조.]까지 자연적 세계의 구성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단위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내재성의 철학이라는 것, 하지만 동시에 그 대가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불변적이거나 선험적인 동일성(및 일체의 목적론)에 기초할 수 없으며, 동일성의 구성을 동일화와 탈동일화, 또는 스피노자의 용어법대로 하자면 능동화와 수동화의 갈등적인 과정으로만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 그의 관계의 존재론은 능동화의 운동 자체를 항상 하나의 가능성, 또는 오히려 역량의 문제로 제기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사변적인 논의 자체에서도 항상 이미 실천적 지향을 내포하고 있으며, 역으로 능동화의 가능성에 대한 선험적 보증의 부재, 즉 비주체적 조건 속에 실천운동의 가능성의 근거를 마련해 놓음으로써 해방의 정치를 새롭게 사고하려는 노력에 대해 이론적 자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스피노자는 마르크스보다 근 200여년 앞서 마르크스가 제기한 질문, 즉 각 개인의 발전이 모든 사람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관계―그 역이 아니라―에 관한 질문을 먼저 제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자원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당하게 스피노자가 마르크스의 선조였다고, 또는 마르크스가 스피노자의 후손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 그들의 후손으로서 이번에는 우리가 그들의 질문을 물려받을 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기원도 목적도 없는, 그리고 보증도 없는 운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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