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성과 역량의 존재론

  이렇게 해서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필요성이 확인될 수 있다면, 그 다음 제기되는 문제는 이런 문제설정에 기반해서 우리가 하나의 해방이론을 마련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 문제는 철학적 구조주의뿐만 아니라 탈구조주의 일반에게 핵심적인 쟁점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프랑스 철학(및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스피노자의 현재성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확인시켜 주고 이를 체계화한 (초기) 알튀세르의 작업의 문제점은 이론적 반인간주의 위에서 가능한 해방이론의 존재론적 기초―또는 탈주체적인 철학적 인간학의 형식―를 제시해주지 못했다는 데 있다[알튀세르의 스피노자 전유는 복합적이며 다양한 쟁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를 충분히 다룰 수는 없다.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전유에 관한 별도의 논의를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구조인과성 개념에 관해서만, 그것도 극히 개략적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이 문제에 관해 관심있는 독자는 Andre  Tosel, "Spinoza au miroir du marxisme", in Du materialisme de Spinoza, Kime, 1994; Pierre-Francois Moreau, "Althusser et Spinoza", in Pierre Raymond ed., Althusser philosophe, PUF, 1997을 참조. ].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튀세르의 필생의 이론적 과제는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는 것이었는으며, 이 작업의 핵심 과제는 마르크스가 이룩해낸 인식론적(·정치적) 절단(coupure)을 확인하고 이러한 절단의 기초 위에서 전마르크스주의적인 유산을 청산하고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철학의 자원을 활용했는데, 왜냐하면 철학에서 긴급한 과제는 유물변증법의 이론적 핵심을 체계화하는 데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헤겔의 목적론적 변증법을 교정할 수 있는 이론적 준거, 즉 스피노자의 반목적론적 철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론적 목표에 따라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구조인과성이라는 개념 아래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위해 필수적인 범주로 도입한다. 구조인과성은 "자신의 효과들 속에서 구조의 실존"을 나타내는 범주로서 이에 따르면 "구조는 경제적 현상들의 측면과 형태 및 관계들을 변형시키게 될 경제적 현상들 외부의 본질이 아니며, 또한 그것이 현상 외부에 있기 때문에 부재하는 하나의 원인으로서 그것들에 효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구조의 "환유적 인과성" 속에서 그 효과들에 대한 원인의 부재 ... 가 의미하는 것은 구조가 그 효과들 속에 내재한다는 것, 용어의 스피노자적인 의미를 따르자면 효과들에 내재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며, 구조의 실존 전체는 그 효과들 안에 있다는 것, 즉 자신의 고유한 요소들의 종별적 결합에 불과한 구조는 그 효과들 외부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L. Althusser, "L'objet du "Capital"", in Althusser et al., Lire le Capital, PUF, 1996(3e ed.), p. 405(강조는 알튀세르).]
  알튀세르의 설명에 따르면 구조 인과성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구조 또는 원인은 부재하는 원인으로서 자신의 부분들 속에 내재하며, 따라서 자신의 부분들과 외재적-초월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구조는 자신의 부분들의 결합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즉 부분들의 종별적 결합에 불과하기 때문에 부분들은 자율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인과성 범주는 부분들에 대한 구조의 작용의 유효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기계론적 인과성(데카르트)과 구조 안으로 모든 부분들을 통합해버리고 이에 따라 부분들의 자율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표현적 인과성(라이프니츠-헤겔)에 대한 이중적 비판의 의미를 지닌다.[이는 또한 방법론적 개체론과 방법론적 전체론에 대한 이중적 비판으로 읽힐 수 있다.] 
  알튀세르가 구조 인과성 개념을 통해 특히 해명하려고 한 문제는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 또는 사회구성체를 이루는 다양한 심급들(경제·정치·이데올로기 및 인식) 사이의 관계의 문제였으며, 알튀세르의 시도는 이론적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극히 풍부한 성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이 개념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알튀세르의 이론적 유산의 핵심 중 하나로 남아있지만 이 개념은 알튀세르에 의해 전유된 방식으로는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지니고 있는 실천적 함의를 충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이는 무엇보다도 알튀세르의 구조인과성 개념이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인식론적 관점에서만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알튀세르는 바슐라르-캉길렘적인 프랑스 역사인식론의 전통에 기초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설명의 체계로서 존재론이란 전(前)과학적인 철학적 가상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세계에 대한 설명이 개별 과학들에게 넘어간 근대 과학혁명 이후 철학의 고유한 과제는 개별과학들의 역사와 구조를 설명하는 과학사적 이론, 즉 인식론적인 것에 있다고, 또는 이른바 '자기비판' 이후에는 과학적 활동 내부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경계선을 긋는 활동에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적 논변들 역시 17세기에 고유한 철학적 이데올로기의 장 내부에서 관념론적이고 신학적인 입장들에 대한 투쟁을 위해 불가피했던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 간주하고, 이를 '존재론'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마르크스에 의해 새로 창설된 과학인 역사유물론을 개조하는 데 필요한 인식론적 범주인 구조인과성 개념을 이로부터 추출해냈다.
  우리가 근대 철학(또는 칸트 철학) 이전처럼 여전히 존재론을 존재자에 관한 보편적인 학문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비가역적인 철학적 원칙이지만, 존재론은 모든 철학작업에 함축되어 있는 전제로서, 또는 적어도 하나의 문제설정으로서는 여전히 필요하며, 이는 특히 윤리학이나 사회이론 같은 실천이론을 위해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리고 구조 인과성, 또는 스피노자식으로 하자면 내재적 인과성 개념 역시 존재론적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그 개념이 지니고 있는 윤리적·실천적 함의가 충분히 드러날 수 있다.[후기 알튀세르의 작업이나 유고들은 이런 방향에서 수행되고 있으며, 그의 제자들인 마슈레와 발리바르 역시 80년대 이후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관한 주목할 만한 작업들을 발표하고 있다. P. Macherey, Hegel ou Spinoza, Decouverte, 1990(19791); 진태원 옮김, {헤겔 또는 스피노자}(이제이북스, 2004); idem, "Action et operation. Sur la signification ethique du De Deo", in Avec Spinoza, PUF, 1992; E. Balibar, "Individualite, causalite, substance. Reflexions sur l'ontologie de Spinoza", in Edwin Curley & Pierre-Francois Moreau eds., Spinoza: Issues and Directions, E.J. Brill, 1990; idem, "Individualite et transIndividualite chez Spinoza", in Pierre-Francois Moreau ed., Architectures de la raison: Melanges offerts a Alexandre Matheron, ENS editions, 1996; 국역,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진태원 옮김, {스피노자와 정치}(이제이북스, 2004); idem, Spinoza: From Individuality to Transindividuality, Eburon Delft, 1997 참조.] 이런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적 체계를 해명하는 일은 특히 들뢰즈(및 마트롱)에 의해 가장 탁월하게 수행되었으며, 따라서 스피노자의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존재론적 토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의 요체가 담겨있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는 독창성과 논변의 치밀함, 내용의 풍부함을 모두 갖추고 있는 철학사 연구의 걸작 중 하나로, 한 두 가지 주제에 따라 요약하기 어려운 포괄성과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우리의 논의주제에 맞춰 일의성univocite 과 역량potentia/puissance의 문제를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관한 논의만 간단하게 살펴보겠다.[이하 [일반행동학과 내재성의 윤리]까지의 내용은 필자의 [들뢰즈: 인간과 사상], {사회비평} 2000년 여름호의 일부를 수정·보완해서 전재한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초월성에 대한 집요한 비판 위에 구축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보기에 초월성에 기초한 철학들이야말로 뿌리깊은 지배의 표현이자 원천이기 때문이다. 초월성의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특히 두 가지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는 동일성의 철학(플라톤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성의 철학(헤겔 철학)인데, 이 양자는 실은 그가 '초월성의 구도plan de transcendance'라고 부르는 하나의 뿌리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들뢰즈가 초월성의 구도 또는 신학적 구도라고 부르는 사유의 '독단적 이미지'는 근거와 근거지어지는 것들 사이의 존재론적 양의성equivocite, 존재론적 분리를 상정한다. 이에 따르면 근거지어지는 것들, 즉 유한한 개체들은 초월적 근거와의 닮음의 정도에 따라 위계화되고 정돈되지만, 초월적 근거는 항상 유한한 존재자들의 세계로부터 은폐되고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주어진 것들(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유한양태들)은 스스로를 배치할 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주어진 것들을 질서지어주는, 그러나 또한 주어진 것들을 초월해 있는 어떤 근거를 가정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근거와 근거지어지는 것들이 분리되는 이외에도, 다시 근거지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분할이 발생하게 된다. 즉 초월적 근거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이 근거가 설정한 질서에 따라 적절하게 분류되는 '좋은 모상들'과, 그렇지 못한 나쁜 모상들 또는 모의물simulacre들이 나뉘어지는 것이다.[모의물/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특히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에서 플라톤주의의 재해석 및 전복을 위한 하나의 준거로 도입한 개념이지만, 일부에서 생각하듯이 들뢰즈 철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들뢰즈 자신은 특히 {천개의 고원} 이후에는 명시적으로 이 개념을 더 이상 사용하고 있지 않다. G. Deleuze, "Lettre-preface", in Jean-Clet Martin, Variations. La philosophie de Gilles Deleuze, Payot, 1993 참조. 여기에서는 초월성의 철학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에 따라 이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초월성의 구도는, 그가 이를 '신학적' 구도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철학의 진정한 지반이 아니며 철학 이전의 종교적 유산이 철학 내에서 지속되고 재생산되어온 흔적일 뿐이다. 이는 근대 이전의 '초월적 신'의 형상에서부터 근대의 '도덕법'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초월성의 원칙을 보존하고 재생산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의 권리와 역량을 부인하고 억압하는 데 기여해 왔다.
  들뢰즈에게서 철학의 진정한, 유일한 지반은 고대의 스토아학파와 중세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스피노자에서 니체에 이르는 철학자들이 전개시켜온 '내재성의 평면plan d'immanence'(초월성의 '구도'와 내재성의 '평면'의 불어 원어는 똑같이 plan이지만, 의미는 전혀 상이하다)이다. 이 평면에서는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 아무런 존재론적 분리도 발생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들은 각각 근거와 근거지어지는 것들로 설정되지도 않는다. 하나의 의미, 하나의 목소리를 갖는 일의적 존재는 존재하는 다양한 것들이 스스로를 분배하는 유목민적 배치에 따라 차이들을 생산해낸다.["일의성의 본질은 존재가 단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데 있지 않다. 그 본질은 존재가 자신의 모든 개체화하는 차이들 또는 내적 양상들에 대해 단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데 있다." Deleuze, Difference et repetition, PUF, 1968, p. 53(강조는 들뢰즈).]      
  아무런 근거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들을 분배하고 배치할 수 있는가, 이는 최악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이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자연상태'로의 회귀를 철학적으로 옹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들이 제기될 수도 있으나, 들뢰즈에 따르면 이는 초월적 근거에 의해서만 존재론적 질서가 가능하다는 부당한 전제를 깔고 있다.
  여기에서 가능한 것le possible과 잠재적인 것le virtuel을 구분하는 베르그송의 용법이 유용해진다. 이 구분법에 따르면 초월성의 철학은 가능한 것과 실재적인 것le r el을 구분한 뒤, 다시 가능한 것과 잠재적인 것을 뒤섞는다. 이렇게 되면 잠재적인 것은 그 자체로는 실재적인 것이 아닌 가능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며, 이에 따라 자기자신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초월적 근거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베르그송에 따르면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전적으로 실재적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초월성의 철학이 실재적인 것과 혼동하고 있는 현행적인 것l'actuel은 이 잠재적인 것의 자기생산 운동의 우발적인 결과인 것이다.   
  스피노자 철학의 경우 이는 역량 개념의 문제로 집약된다.[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 개념의 의미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의로는 Deleuze, ch.5 "Puissance", in Spinoza et le probleme de l'expression, op. cit.; Charles Ramond, "Le noeud gordien. Pouvoir, puissance et possibilite dans les philosophies de l'age classique", in idem, Spinoza et la pensee moderne. Constituions de l'Objectivite, Harmattan, 1998; Bernard Rousset, "Les implications de l'identite spinoziste de l'etre et de la puissance", in idem, L'immanence et le salut. Regards spinozistes, Kime, 2000; Francois Zourabichvili, Le conservatisme paradoxale de Spinoza, PUF, 2002 참조. 이 문제에 관한 필자의 관점으로는 진태원, [스피노자는 역량의 철학자인가? 스피노자 철학의 한 가지 쟁점](미발표 원고) 참조.] 스피노자 철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역량 개념은 전통적으로 가능성의 의미로 사용되어온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가능성이란 그 자체로는 비실재적이며, 실재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원인, 근본적으로는 초월적 원인을 필요로 하는 것을 지칭한다. 이에 따라 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중세 철학 이후 근대 철학까지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창조 개념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사용되었다. 신학적 논변에서는 신의 지성은 어떤 사물의 가능적 본질을 형성하고 파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신의 의지는 이러한 가능적 본질을 현실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신과 피조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존재론적 양의성)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본질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유비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가능적인 본질이 현실화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초월적인 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베르그송의 '잠재적인 것'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역량 개념을 가능적인 것으로부터 구분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윤리학} 1부 정리 34)이며, 역량은 항상 "현행적actualis"이다(이는 현행성과 잠재성을 대립시키는 전통적 관점에서는 완전히 용어모순적인 주장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서 역량은 실현되기 위해 다른 외부 원인을 필요로 하는 가능적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들을 생산해는 원인의 활동 자체를 가리킨다. 즉 현행적 역량은 활동하는 역량, 원인으로서의 역량이며,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신의 역량은 신의 활동하는 본질essentia actuosa 이외의 것이 아니다"({윤리학} 2부 정리 3의 주석)라고 말하고 있다.
  이 테제는 다만 능산적 자연, 즉 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한양태들에게도 해당된다. 코나투스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는 이를 잘 보여준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어떤 사물이 존재 속에서 스스로 존속하려는 역량 또는sive 코나투스는 이 사물의 주어진 또는 현행적 본질 자체이다."({윤리학} 3부 정리 7의 증명) [그리고 "정신의 코나투스 또는sive 역량은 정신의 본질 자체이다." ({윤리학} 3부 정리 54의 증명).]  범신론적 관점에 따라 스피노자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관계를 외재적·대립적으로 파악하며(이 때 주요한 전거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vel 다른 것 안에 있다"는 {윤리학} 1부 공리 1이다), 이에 따라 능산적 자연의 능동성은 곧 소산적 자연의 수동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는 텍스트 자체에 의해 지지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 원리와도 어긋나는 관점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유한자의 자율성은 다름아니라 능산적 자연의 절대적 무한성 또는 절대적 능동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자기원인으로서의 신,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로서의 신({윤리학} 1부 정의 6)은 일체의 부정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에 의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인식될 수 없다"(1부 정리 15)는 이유에 의해 일체의 구속 및 갈등관계에서 벗어나 있다. 구속 및 갈등은 존재의 유한성을 전제하며,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데 비해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인 신은 본질상 외재성 및 대타성을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신은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은 것을 생산한다는 것(1부 정리 16), 즉 "특수한 사물들은 신의 속성들의 변용들 또는 신의 속성들이 엄격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양태들"(1부 정리 25의 보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는 바로 그 이유에 의해 모든 사물의 능동성의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신은 자기 자신의 원인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모든 사물의 원인이라 불려야 한다."(1부 정리 25의 주석)는 스피노자의 주장이 따라나온다.[G. Deleuze, "Spinoza contre Descartes", in Spinoza et le probleme de l'expression, op. cit. 참조.] 따라서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은 내재적 인과성과 상호함축관계에 있으며, 이를 통해 유한자의 능동성의 존재론적 기초가 마련된다.  
  스피노자의 역량 개념은 나름대로의 난점을 지니고 있으나[이는 당대의 과학혁명의 영향 아래 일체의 질적 특수성들을 수학화-양화하려고 했던 17세기 철학에 고유한 난점, 즉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의 새로운 구획의 과제에서 유래한다. 더욱이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일종의 "관계적 유명론"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스피노자에게서 이는 새로운 개체화 이론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와도 연결된다. 이에 관해서는 특히 주 25)의 문헌들 및 E. Balibar, Spinoza: From Individuality to Transindividuality, op. cit.를 참조. ]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이 지니고 있는 실천적 함의들이다.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가 말하듯이 초월성의 구도가 진정한 철학적 지반이 아니라면, 왜 철학의 본래 지반도 아닌 것이 이처럼 오랫동안 철학을 지배해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역으로 내재성의 평면이 유일한 철학의 지반이라면, 왜 이는 그처럼 오랫동안 철학사에서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을까?
  그 이유는 존재하는 것들, 또는 이 경우에는 인간 자신들의 존재론적·윤리적·정치적 역량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즉 인간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능동적으로 조직해내지 못하고 수동적 조건 속에서 자신의 역량으로부터 분리되면, 언제든지 초월적 권력potestas/pouvoir/power이 실행되며, 이들은 이 권력에 따라 조직되고 이에 예속되는 것이다. 또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월적 권력은 그 자체로는 존재론적으로 기생적이며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존재하는 것들의 내재적 역량을 활용하여 존재하는 것들 자신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의성의 존재론이 다양한 존재자들, 또는 인간들의 능동화-차이화의 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면, 이는 이들의 내재적 역량을 강화하고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을 자신의 핵심적인 실천적 과제로 갖게 된다. 이렇게 되면 초월성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존재하는 것들-인간들 자신의 내재적 역량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인간학과 윤리학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일반행동학과 내재성의 윤리

  스피노자 철학에서 존재론과 인간학-윤리학의 연관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들뢰즈의 논의를 계속 따라가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가 보기에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은 일반행동학ethologie에 기초하고 있다. 에톨로지는 원래 동물들의 행동을 고찰하고 기술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인 '동물행동학'을 가리키는 명칭이지만, 들뢰즈는 윤리학과 동물 행동학이 모두 에토스ethos라는 희랍어 어원에서 유래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동물행동학을 인간들의 행동과 동물들의 행동, 더 나아가 존재자들 일반의 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행동학으로 확장시키고, 일반행동학에 기초하여 윤리의 문제들을 새롭게 제기한다.[스피노자와 관련된 들뢰즈의 일반행동학 논의로는 {스피노자의 철학} 6장 [스피노자와 우리] 및 G. Deleuze-F.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pp. 310-318 참조.]
  이처럼 동물행동학이 일반행동학으로 변형·확장되는 것은 스피노자의 일의성의 존재론의 논리적 귀결이다. 일의성의 존재론은 일반행동학에 대해 세 가지 함축을 지니고 있다. (1) 활동으로서의 역량. 앞서 살펴본 것처럼 스피노자에게서 역량은 가능한 것으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결과를 산출해내는 현행적 힘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스피노자에게서는 실존과 원인으로서의 활동이 별개의 범주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서 존재론은 행동학을 필연적으로 함축하게 된다.[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에릭 알리에즈는 들뢰즈의 존재-행동학onto-ethologie을 하이데거의 존재-신학onto-theologie의 문제설정에 대한 대안으로 설정하고 있다. Eric Alliez, La signature du monde ou qu'est-ce que la philosophie de Deleuze et Guattari?, Cerf, 1993 참조.]
  (2)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론적-형식적 동등성. 일의성의 존재론에 따를 경우 (잠재적) 존재와 (현행적) 존재자들 사이에는 '존재론적 분리'가 아니라, '존재론적 중립성'이 존재하며, 모든 존재자들에 중립적인 존재 덕분에 존재자들은 형식적 동등성을 유지하게 된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는 "신은 모든 사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1부 정리 18)라는 것과 "신은 자기 원인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에서 모든 사물의 원인이다"(1부 정리 25의 주석)는 말로 표현된다.
(3) 모든 존재자들은 비실재적인 가능태들로서, 초월적 근거를 통해 비로소 실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재적 역량을 통해 독자적으로 실존할 수 있다는 점. 스피노자 철학의 경우 이는 실체와 양태들이 공통적인 형식으로서의 속성들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러한 존재 역량의 내재성은 인간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 주체와 객체, 내부와 외부 사이에 설정되어 있는 범주적 간극을 무효화하거나 적어도 부차화시킨다. 따라서 일의성의 존재론에 의거할 경우 모든 존재자들에 공통적인 내재적 역량과 일반적 행동의 메카니즘을 설명하는 문제가 중요해지며, 인간들의 고유한 행위방식을 설명하는 윤리학 역시 일반행동학에 기초하게 된다.
  일반행동학의 문제설정은 들뢰즈 스피노자 해석에서 가장 독창적인 측면 중 하나로,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적 존재자들이 관계의 측면과 역량의 측면에 따라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모든 존재자들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특정한 관계를 통해 자연 세계 속에서 하나의 개체로 구성된다({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 스피노자에게서 연장하는 모든 물체는 운동하거나 정지 중에 있으며, 운동하는 것은 가변적인 빠르기에 따라 운동한다. 따라서 아주 작은 단순 물체들이 개별적 물체(또는 복합적 물체)를 합성하기 위해서는 운동과 정지, 또는 빠름과 느림의 특정한 관계/비율을 유지해야 한다.[스피노자의 자연철학에 관한 논의는 Andre  Lecrivain, "Spinoza et la physique cartesinne", Cahiers Spinoza 1(1977) & Cahiers Spinoza 2(1978)참조. 또한 스피노자에서 자연학의 지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A. Matheron, "Physique et ontologie chez Spinoza", Cahiers Spinoza 6(1991)과 Daniel Parrochia, "Physique et politique chez Spinoza", Kairos 11(1998)의 논쟁도 참조.] 이 관계가 유지되는 한 하나의 개체는 계속해서 그 개체로 존재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존재자들 사이의 상호 작용은 변용affectio과 정서affectus의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모든 존재자는 실체의 무한한 역량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런 한에서 자신의 내재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데, 스피노자에게서 이는 다른 존재자들에 의해 변용되고 다른 존재자들을 변용시킬 수 있는 능력potestas 속에서 구현된다. 모든 존재자는 자신에게 해로운 존재자들과 마주칠 수도 있고, 자신에게 이로운 존재자들과 마주칠 수도 있다. 전자처럼 자신에게 해로운 존재자에 의해 변용될 경우 각 존재자는 존재 역량의 감소를 겪게 되고, 심각한 경우 자신의 본성이 파괴되어 개체로서 해체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이처럼 존재 역량의 감소를 가져오는 정서들을 스피노자는 "슬픔tristitia"의 정서라고 부른다. 하지만 후자처럼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들과 마주치는 경우 각 존재자는 존재 역량의 증대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존재 역량의 증대를 가져오는 정서들을 스피노자는 "기쁨laetitia"의 정서라고 부른다.      
  들뢰즈는 빠름과 느림의 관계, 변용과 정서의 관계 각각을, 운동학적(運動學的, cin tique) 측면과 동역학적(動力學的, dynamique)측면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경도와 위도(또는 세로와 가로)라는 지리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경도적 측면과 위도적 측면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 이런 용어법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생물학적 범주 구분을 해체하면서 윤리학에 새로운 관점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들뢰즈는 수레를 끄는 말의 경우, 경주용 말보다는 수레를 끄는 소와 더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분류법은 각 기관의 기능과 이 기관들의 조직방식에 따라 존재자들을 분류하고 판단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이는 존재자들이 실제로 행동하는 방식이나 이 존재자들이 할 수 있는 것, 즉 활동역량의 문제를 제대로 밝혀주지 못한다..["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규정하지 못했다"({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 스피노자의 이 주장은 들뢰즈의 일반행동학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주춧돌이다.]  하지만 일의성의 존재론에 따를 경우 중요한 것은 각각의 존재자들의 존재역량, 즉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며, 이는 각각의 존재자들의 변용능력과 정서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행동학의 관점을 채택할 경우, 같은 생물학적 기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존재자들의 분류와 평가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일반행동학의 관점이 윤리에 대해 지니는 함의는 선·악이라는 도덕적 가치나 더 나아가 일체의 초월(론)적인 도덕적 판단기준에 관한 문제를 무효화한다는 점에 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니체가 "심판의 체계"로서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좋음과 나쁨이라는 내재적 역량의 문제로 전환시키고 있다고 본다. [니체와 스피노자의 공통점에 대해서는 들뢰즈, [윤리학과 도덕의 차이에 관하여], {스피노자의 철학} 참조.]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반 행동학에 기초한 내재성의 윤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다룬다.[이하의 논의는 Daniel W. Smith, "The Place of Ethics in Deleuze's Philosophy: Three Questions of Immanence", in Eleanor Kaufman & Kevin Jon Heller eds., Deleuze & Guattari: New Mappings in Politics, Philosophy and Culture, U of Minnesota P, 1998의 평주에 많이 힘입었다.]  첫째는 실존양식을 규정하는 문제인데, 이는 앞서 본 것처럼 운동학적 측면과 동역학적 측면에 따라 파악될 수 있다. 둘째는 실존양식을 평가하는 문제이다. 모든 유한한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코나투스를 자신의 본질로 삼고 있고, 이는 존재역량에 따라 좌우되는 한에서 당연히 슬픔보다 기쁨이 더 가치있고 좋은 게 된다. 하지만 슬픔과 기쁨은 모두 수동적인 것, 즉 자신의 본성에 따라 어떤 것을 산출해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외부 사물들과의 본성의 일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기쁨의 정서를 통해 존재역량의 증대를 경험하는지 슬픔의 정서를 통해 존재역량의 감소를 경험하는지는 처음에는 우연적인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존양식에 대한 평가의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실존양식의 평가에서 궁극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수동성의 능동화의 문제이다.[정서문제에서 스피노자의 커다란 독창성 중 하나는 정서와 이성을 대립시키지 않고, 정서 내에 이성의 요소, 즉 능동성을 도입했다는 점에 있다. 이에 관해서는 들뢰즈의 저서 이외에도 특히 Charles Ramond, "Impuissance relative et puissance absolue de la raison chez Spinoza", in Christian Lazzeri ed., Spinoza. Puissance et impuissance de la raison, PUF, 1999 및 Pascal Severac, "Passivite et desir d'activite chez Spinoza", in Fabienne Brugere & P.-F. Moreau eds., Spinoza et les affects, PUPS, 1998를 참조.] 스피노자는 어떤 일이 우리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때 우리가 '능동적'이라고 말하고, 우리가 이 일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할 때 우리가 '수동적'이라고 말한다(3부 정의 2).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역량이 아무리 증대된다 하더라도 이것의 원인이나 조건이 외적인 것으로, 따라서 우연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때 이는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역량이 증대되는 원인이나 조건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이를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능동적인 존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야 우리는 비로소 초월적 권위의 목적과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의 역량이 좌우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실존양식의 평가는 어떻게 우리가 능동화될 수 있는가라는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니체에게서 이는 영원회귀의 문제이다. 들뢰즈, 이경신 옮김,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7) 참조. 이 번역은 많은 오역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될 수 있으면 외국어 판본을 함께 참조하면서 읽어야 한다.]
  셋째, 내재성의 윤리는 새로운 실존양식을 어떻게 창출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두 번째 문제와 더불어 이 세 번째 문제는 우리를 윤리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이끌어간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영역이 사회적 영역이고 우리의 실존양식의 성격이 사회적 영역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한, 우리의 능동화의 문제는 새로운 실존양식의 창출, 그 사회적 조건의 변혁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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