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에 썼던 글을 하나 올립니다. [모색] 2호에 실린 글인데, 1960년대 이후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의 동향을 개괄하는 글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있을 테고, 과거에 공적 지면에 발표한 글을 다시 올리는 것도 쑥스럽고 해서 좀 뭣하긴 하지만, 앞으로 제가 발표할 몇몇 글들에 대한 <서론>의 명목으로 올립니다. [모색] 2호가 품절된 것 같으니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들한테 얼마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각주와 관련하여 약간의 정보를 추가하고 용어와 관련하여 약간 수정한 것 이외에는 원래 [모색] 2호에 발표된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내용과 관련하여, 특히 알튀세르와 들뢰즈의 관계에 대하여 한 가지 자기비판을 해야 할 게 있는데, 이는 앞으로 독립적인 논문의 주제로 다룰 생각이어서 첨삭 없이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스피노자의 현재성: 하나의 소개
스피노자의 '현재성'
이 글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쓰여졌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 글은 스피노자의 현재성의 이유들을 '논증'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그저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의 몇 가지 측면들을 보여주려고 할 뿐이다. 이는 매우 간단한 이유, 즉 그럴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확인하는 비교적 간단한 작업에도 한 편의 논문은 너무 제한적이다. 이는 필자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의례적인 수사법이라기보다는 그만큼 '스피노자의 현재성'이라는 제목이 우리에게 낯설고, 따라서 이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설명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스피노자가 아직까지 너무 낯선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서양철학이 도입된지 5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서양철학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국내에는 신뢰할 만한 스피노자 저서의 번역서가 거의 없는 데다 학위논문이 거의 배출되지 않고 있고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논문이나 저서도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히 제한된 지면 내에 외국에서의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설득력있게 소개해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기껏해야 또하나의 최신 외제이론을 수입한다는 비아냥을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소개하고 확인해야 할 필요성, 또는 더 나아가 필연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서양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철학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종언과 (탈)근대성의 이중적인 이론적 정세에서 좌파적인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적어도 외국의 경우에는 쉽게 확인될 수 있는 사실로, 가령 알튀세르나 발리바르, 들뢰즈 같은 현대 프랑스의 주요 철학자들이나 안토니오 네그리(및 마이클 하트) 같은 이론가들은 스피노자에 관한 중요한 저작들을 산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론적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특히 프랑스나 이탈리아, 또는 미국의 여러 이론가들의 작업에서 스피노자는 300여년 전에 활동한 과거의 철학자가 아니라, 현재의 이론적 정세를 파악하고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준거로 현존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스피노자는 서양철학사의 위대한 한 철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좌파의 현재 및 장래를 위해 마땅히 소개되고 연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적어도 한번 제기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국내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소개의 범위를 제한할 수 있는 비교적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내에서 최근 형성되고 있는 스피노자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들뢰즈 또는 네그리 같은 철학자들의 작업에 대한 관심과 연속선상에 있는데[이는 국내에 유일하게 번역·소개된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서들이 바로 이들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명백하게 확인될 수 있다. 루이 알튀세르, 서관모·백승욱 옮김, {철학과 맑스주의}(새길, 1995); 에티엔 발리바르, [반오웰-대중의 공포], 루이 알튀세르 외, 김민석 옮김, {마키아벨리의 고독}(새길, 1991)(이 글의 국역본은 오역의 한 표본이다),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윤소영, {알튀세르의 현재성}(공감, 1996); 안토니오 네그리, 윤수종 옮김, {야만적 별종}(새길, 1996)(이 역시 번역에 문제가 많다); 질 들뢰즈,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민음사, 1999); 마이클 하트, 이성민·서창현 옮김, {들뢰즈의 철학사상}(갈무리, 1996)(이 책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 참조. ], 실제로 이들의 작업은 스피노자의 현재성이라는 문제설정의 중심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대상을 이들의 스피노자 연구의 주요 측면들을 소개하는 데 한정한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국내에 스피노자를 소개하는 데 더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스피노자의 기원
먼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외국, 특히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의 현황을 간단하게 개괄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는 이론의 여지 없이 현대적인 스피노자 연구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연구의 질적·양적 측면 모두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으며, 특히 스피노자 원전의 새로운 판본이 프랑스 대학 출판사(PUF)에서 라틴어-불어대역본으로 출간중에 있다는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지금까지 스피노자 원전의 대표적 판본으로 사용되어온 칼 게파르트본(Carl Gebhardt, Spinoza Opera 4 vol., Carl Winter, 1925)을 대체할 새로운 판본은 총 8권으로 기획되었으며, 제 3권인 {신학정치론}이 1999년에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texte tablie par Fokke Akkerman, trad. Pierre-Francois Moreau & Jacqueline Lagree, PUF, 1999. {정치론}은 근간이 예고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스피노자 연구의 중심지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국내에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프랑스 제도권 철학은 전통적으로 유럽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철학사 연구를 중시하는 곳이고, 이런 전통 덕분에 프랑스 제도권 철학은 위대한 철학사가를 다수 배출해왔다. 중세철학 연구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에티엔 질송Etienne Gilson이나 현대적인 스피노자 연구의 초석을 마련한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 또는 페르디낭 알퀴에Ferdinand Alquie 나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 같은 사람들은 프랑스 철학사 연구를 대표할 만한 대가들이며, 이들의 작업 이외에도 프랑스 제도권 철학은 특히 소위 '고전주의 철학'이라 불리는 근대 합리론 분야에서 현재까지 많은 업적을 배출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전통에도 불구하고 60년대까지 프랑스에서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는 극히 드물었다[이에 관해서는 특히 마트롱의 증언을 참조할 수 있다. Pierre-Fran ois Moreau & Laurent Bove, "A propos de Spinoza: Entretien avec Alexandre Matheron", Multitudes n 3, 2000. 이 대담은 이외에도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의 지적·정치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런 불모 상태에서 벗어나 프랑스에서, 또는 세계 전체에서 현대적인 스피노자 연구 전통이 세워진 것은 바로 1968-69년 2년 동안이었다. 바로 이 2년 동안 마르샬 게루의 {윤리학} 1부에 대한 기념비적 주석서[Martial Gueroult, Spinoza vol.1 Dieu(Ethique, 1), Aubier, 1968; Spinoza vol.2 Ame(Ethique, 2), Aubier, 1974. 원래 3권으로 기획된 게루의 {윤리학} 주석작업은 게루의 죽음으로 2권까지만 출간되었다.]와 더불어 들뢰즈와 마트롱의 스피노자 연구가 출간되었고[G. Deleuze, Spinoza et le probleme de l'expression, Minuit, 1969; A. Matheron, Individu et communaute chez Spinoza, Minuit, 1969(nouvelle ed. 1988).], 이 저작들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5월에 발생한 학생-노동자의 반역으로 프랑스 사회가 격동에 휩싸여 있던 바로 그 때, 2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연구의 신기원이 확립되었고, 새로운 스피노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말하자면 스피노자 연구에서 '에피고넨의 시대'의 시작을 알린 이 연구들을 기점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는 다른 어떤 철학자에 대한 연구에 견줘보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는 풍요로운 성과를 낳고 있다[프랑스에서 산출된 주요 스피노자 연구 목록은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 말미에 첨부된 [참고문헌]을 참조하기 바란다. 또한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역자 해제]도 참조].
68년 5월의 반역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68년 5월의 반역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논의하지 않겠다. 최근의 주목할 만한 논의로는 68년 5월 반역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Esprit Createur n 1, 2001을 참조.]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대중운동 중 하나인 68년 5월 운동을 배경으로 해서 현대적인 스피노자 연구가 확립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는 특히 우리가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철학자들에게 그러하다.
우선 정확한 인과관계야 어찌 됐든 이 반역운동이 '현대 프랑스 철학'[편의상 단수로 사용했지만, 이는 항상 복수로 읽혀야 할 표현이다. 하나의 단일한 철학, 특히 하나의 민족철학(독일철학, 프랑스 철학, 한국철학 ...)이 존재할 수 있으며, 또 존재해야 한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극히 위험한 발상일 뿐만 아니라, 사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도 큰 장애가 된다. (현대) 프랑스 철학은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그 자체 내에 극히 다양한 역사와 노선, 갈등과 경쟁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관한 특히 유익한 논의로는 Pierre Macherey, "Y-a-t-il une philosophie fran aise?", in idem, Histoires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1997, PUF, 1999 참조.]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때까지 프랑스 철학은 현상학적 실존주의에 대한 구조주의적 비판이라는 주요 전선 내부에서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언어학적·인류학적 구조주의에 대한 철학적 구조주의의 비판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65년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의 출간과 66년 푸코의 {말과 사물}, 라캉의 {에크리}의 출간은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68년 반역은 여기에 새로운 분화, 새로운 내부투쟁을 도입했으며, 데리다, 들뢰즈, 리요타르 등 소위 탈구조주의적인 철학이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간 자의적인 이런 식의 분류보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더 중요한 것은 68년 반역이 철학에 제기한 문제들이다. 68년 반역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두 가지 질문을 축으로 하고 있다. 첫째, 대중의 반역이 왜 혁명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는가? 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오이디푸스}(1972)의 주도적 질문을 빌려오면, 왜 대중은 스스로 지배되기를 원하는가? 이에 답변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유명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관한 논문을 썼고, 푸코는 70년대 내내 서양의 근대 주체의 계보학에 관한 연구에 매달렸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반오이디푸스}를 써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 결과 해방의 담지자로 간주되었던 주체가 실은 지배체계 재생산의 핵심장치라는 점이 드러났다.
둘째, 대중은 이처럼 우둔하고 자신의 착취자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지만, 또한 대중은 때로는 반역할 줄도 안다. 어떻게 대중이 반역하는 일이 가능한가? 좀더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구조에 사건이 도래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는 지속가능한 것인가, 또는 지속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좀더 복잡하고 좀더 어려운, 그리고 아마도 현대 프랑스 철학의 유산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줄 이 질문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다. 이는 주체 없이 변혁을 사고해야 할 필연성은 무엇이고, 이를 위해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들(지배, 혁명, 주체, 대중, 지식, 구조, 관계, 타자, 차이 등)이 어떻게 개조되어야 하는지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들은 스피노자 철학 또는 현대적인 스피노자 전유와 관련하여 크게 네 가지 문제로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구조주의 이후 현대 프랑스 철학과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적 문제설정인 이론적 반인간주의에 관한 문제이다.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철학적 필요성은 어디에서 비롯하고, 왜 스피노자 철학이 이를 위해 필수적인 준거점이 되는가? 둘째는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존재론적 기초와 관련된 문제이다.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기초짓고 있는 존재론적 문제설정은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이 문제설정은 전주체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탈주체철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이로부터 세 번째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반인간주의적 존재론 내에서 도출될 수 있는 인간학의 형식은 어떤 것이고, 이것이 어떻게 비주체적인 능동성을 가능하게 하는가? 네 번째 문제는 대중의 정치라는 쟁점이다. 정치에서 대중의 문제설정의 의의는 무엇이고, 이는 근대적인 해방의 정치를 어떻게 전위시키는가?
스피노자 철학의 출발점: 이론적 반인간주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국내에서 비교적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지만, 정확한 이론적 쟁점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설정이 함축하고 있는 이론적 쟁점을 가장 분명하게 지적한 사람은 발리바르이다. 그에 따르면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철학적 구조주의의 중심적 문제설정으로, "라캉, 후기 푸코, 또는 알튀세르 등 어떤 위대한 철학적 '구조주의자들'도 ... 주체를 실격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그 반대로 고전 철학에 의해 기초의 위치에 장착된 이러한 맹목적인 노력을 해명하고자, 즉 구성하는 기능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주체를 이행"[발리바르, [(철학의) 대상: '절단'과 '토픽'],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이론, 1993), 213-214쪽(강조는 발리바르).]시키고자 했다. 이런 해명에 따르면 결국 철학적 구조주의에 고유한 문제설정으로서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철학적 근대성의 원리로서 (초월론적-구성적) 주체가 모든 인식과 활동의 가능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타율적 조건 위에서 성립한 파생적 존재라는 통찰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를 이론적,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고유한 이론적 과제로 삼고 있다[이는 또한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가 각각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추구했던 과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설정은 20세기의 역사적 경험, 즉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가 근대성에 제기한 충격적인 질문은 주체의 자기지배라는 문제이다. 주체는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적 근대성에 의해 인식과 행동의 궁극적인 원리로 설정되었으며, 계몽주의에서부터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주체는 억압과 착취, 불의와 수탈의 역사로부터 자기자신(곧 인류 전체)을 해방시킬 존재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는 역사의 주체(루카치) 또는 해방의 주체라는 관념이 가상적이라는 점, 또는 적어도 자기 내부에 근원적 도착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잔혹하게 입증했다. 파시즘을 통해 해방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가 파시즘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고, 스탈린주의를 통해 해방의 전위로서 공산당이 노동자 대중의 이름으로 노동자 대중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세기 후반 서방 마르크스주의 및 다른 비판적 사상가들의 이론적 고투는 이 잔혹한 '역사의 이중주'에 의해 드러난 주체의 자기배반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이론적 노력의 절정을 이루는 것―구성적 주체의 복권불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입증했다는 점에서―은 바로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을 통해 주체의 역설, 해방적 주체의 자기배반의 원인이 실은 주체의 뿌리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주체가 인식과 실천, 세계의 유의미성을 근거짓는 근원적 기초가 아니라, 어떤 비주체적인 익명적 질서, 즉 주체를 주체로 만들어냄으로써, 주체가 스스로를 자율적이고 주권적인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듦으로써 주체를 자신의 재생산 메카니즘에 종속시키는 어떤 질서―푸코에게서는 담론의 질서, 라캉에게서는 상징적인 것, 알튀세르에게서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공통적인 논점은 주체가 순전한 가상이라거나 허구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주체적 질서에 대한 주체의 예속이 주체가 구성적-주권적 주체로서 성립할 수 있는 조건―따라서 또한 동시에 주체가 완결될 수 없게 만드는 조건―을 이루며 이런 한에서 주체는 근원적으로 타율적이라는 점에 있다[80년대 이후 주목할 만한 윤리-정치적 저작들을 계속 출간하고 있는 데리다는 철학적 구조주의의 이 문제설정을 자기나름대로 다시 취해 발전시키고 있다. 예컨대 J. Derrida, ""Il faut bien manger" ou le calcul du sujet", Jean-Luc Nancy ed., Cahiers confrontation 20. Apres le sujet qui vient, Hiver 1989 참조].
하지만 이는 철학적·정치적 근대성에게는 형용모순 그 자체이며 참을 수 없는 이론적 도발로 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주체를 근원적으로 타율적인 존재, 예속화의 산물로 제시함으로써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은 결국 자율적인 인식과 실천, 곧 해방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봉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들에게는 곧바로 지배에 대한 기능주의적 정당화라거나 규범적 혼란에 빠져있다는 식의 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이런 비판들이 무시할 수 없는 실천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류의 비판들은 구성적 주체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또는 해방의 문제설정을 규범 내지 타당성Geltung의 문제설정으로 대체[이는 특히 존 롤스 또는 하버마스의 관점이다. 이들에 대한 스피노자-마키아벨리적인 비판으로는 Jacques Bidet, "Eloge du principe de libre difference, ou: De Rawls a Marx, par une remontee infiniment lente, en passant par Machiavel et Spinoza", La Pensee 313, Janvier-Fevrier-Mars, 1998 참조.]하는 위에서만 성립가능한 비판들이다. 따라서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문제설정은 해방의 선험적 불가능성에 대한 비관주의적 고백이라기보다는 해방의 현실적 조건에 대한 문제제기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 경우 필요한 것은 비주체적인 해방이론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스피노자는 철학적·정치적 근대성과는 달리 '자유로운 주체'라는 관념은 가상중의 가상에 불과하고 모든 미신과 예속의 근원이라고 주장했으며, 철학적 구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가상에서 벗어나 주체의 근원적 타율성을 적합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해방의 참된 조건이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 관념론 이래 지나치게 신비화되어온―이는 범신론이라는 단어로 집약된다―스피노자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의 요소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확인해 보는 게 필수적이다.
스피노자 철학의 출발점, 즉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성격이 가장 명시적이고 논쟁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곳은 {윤리학} 1부의 [부록]과 {신학정치론}의 [서문]이다. 알튀세르[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이론적 모태는 흔히 생각하듯이 라캉의 이론에 있다기보다는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에 있다. 이는 알튀세르와 라캉(주의) 사이의 이론적 쟁점을 살펴보는 데 매우 중요한 논점 중 하나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한 가지 해석으로는, 진태원, [라깡과 알뛰세르: '또는' 알뛰세르의 유령들 1], 김상환·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창작과 비평사, 2002) 참조.] 또는 들뢰즈 이전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 두 텍스트는 스피노자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 내적 동기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다[이 두 텍스트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좋은 논의로는 L. Bove, ch. 7 "Pourquoi les hommes combattent-ils pour leur servitude comme s'il s'agissait de leur salut?", in La strategie du conatus. Affirmation et resistance chez Spinoza, Vrin, 1996 참조.]. 먼저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인간의 모든 가상, 모든 편견의 뿌리는 목적론적 관점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모든 편견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편견에 의존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자연사물들이 사람들이 그러듯 어떤 목적에 따라 작용한다고 가정하며, 신 자신이 모든 사물들을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인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Edwin Curley ed. & trans.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vol. 1,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p. 439/ Bernard Pautrat trad., Ethique, Seuil, 1999, pp. 80-81.]
그에 따르면 이러한 목적론적 편견은 두 가지 인간학적 사실에서 비롯한다. 첫째, 모든 유한한 사물의 현행적 본질이 코나투스, 즉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윤리학} 3부 정리 6, 7)이듯이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다(3부 정리 9의 주석). 이에 따라 "우리는 어떤 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원하거나 욕망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하고 의지하고 원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이 어떤 것을 좋다고 판단한다."(같은 곳) 그런데 둘째,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야기시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1부 [부록], 강조는 인용자)는다.
욕망의 대상에 대한 의식과 욕망의 원인에 대한 무지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는 가상과 적합한 인식 사이의 괴리 때문에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행동이 자율적인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가상하게 되며, 자신들의 의지의 지배력을 넘어서는 모든 자연활동 역시 초월적 존재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가상하게 된다. 이런 가상은 "자연을 완전히 전도"시킬 뿐 아니라, 자연을 주재하는 초월적 신에 대한 각종 의례와 관습들을 만들어냄으로써 편견을 미신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런 미신적 관습은 전제군주에 의해 예속화의 근본 지주로 활용된다. "전제정치의 근본적인 신비, 그 지주와 버팀목은, 사람들을 기만의 상태 속에 묶어두고, 종교라는 허울좋은 명목으로 ... 공포를 은폐하여, 사람들이 마치 구원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Tractatus Theologico-Politicus/Traite theologico-politique, pp. 61-63/(영역본), Samuel Shirley trans., E. J. Brill, 1989, p. 51.]에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이렇게 해서 자연의 전도가 실천적으로 완성되는데,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본질은 코나투스, 즉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충동인데 반해, 이 경우 인간들은 다른 존재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며, 이를 큰 명예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런 도착적 행동은 단지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 전제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실천적으로도 중대한 과제를 제기한다. {신학정치론}을 집필하게 된 스피노자의 근원적인 동기, 더 나아가 {윤리학} 후반부 및 {정치론}(1675-1977)의 전개방향을 결정짓게 된 계기는 바로 이러한 반자연적, 반본성적인 도착이 가능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러한 도착을 방지할 수 있는 해결책에 대한 모색이었다.[들뢰즈-가타리의 문제설정의 출발점 역시 바로 이러한 도착의 이유에 대한 질문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 세기에 걸친 착취 이후에도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현실적으로 착취와 예속을 원할 정도까지 모욕과 착취를 감내하고 있는가? 대중의 무지나 환상을 파시즘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욕망을 해명할 수 있는 설명, 욕망의 관점에서 정식화된 설명을 요구했을 때, 라이히(Reich)는 사상가로서 가장 심원한 경지에 도달한다. 대중은 전혀 순진한 얼뜨기들이 아니다. 어떤 지점, 이떤 일련의 조건들 아래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원했으며,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대중의 욕망의 이러한 도착이다." G.Deleuze-F.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1972), trans. Robert Hurley et al.,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3, p. 29(강조는 들뢰즈-가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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