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 동문선 현대신서 97
베르트랑 오질비 지음, 김석 옮김 / 동문선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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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미국에서 부는 지젝 열풍이 남한에도 고스란히 날아와(이는 너무 당연한 결과지만, 또 너무 진부하고 부끄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제 국내에서도 라캉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라캉 자신의 저술(곧 책이나 논문)이 한편도(!) 국역되어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참 놀라운 현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그만큼 라캉의 저작이 하루빨리, 그리고 신뢰할 수 있게 번역되기를 바라는 여러 독자들의 열망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라캉에 관한 연구의 고전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오질비의 책이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이렇게 사장되어 가는 것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참 아쉬운 일이다. 이는 아마도 오질비가 이 책 이외에는 단행본 저작을 내지 않은 데다 발표한 글들도 매우 적은 편이어서 미국에 별로 소개되지 않았고, 그래서 라캉에 관심이 많으신 여러 연구자들(대개 영미문학 전공자들이고, [아마추어] 정신분석가들이 몇몇 섞여 있는)들 역시 당연히(?) 이름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저간의 사정 때문이리라.

오질비는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영미권에도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프랑스의 좌파/구조주의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높이 평가받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고등사범학교에 2002/2003년 학기부터 설치된 [현대 프랑스 철학 연구 센터]에서 그가 알랭 바디우, 이브 뒤루 등과 함께 강좌를 맡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다. 그리고 그는 올해 나온 발리바르의 책(L'Europe, l'Amerique, la guerre)에서 발리바르와 '우정어린' 논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오질비의 이 책은 그의 철학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책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오질비의 책은 소위 정통 라캉주의자인 자크-알랭 밀레류의 해석에서 벗어나 라캉의 정신의학 박사학위 논문에서부터 1949년 라캉이 발표한 [거울 단계] 논문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라캉의 이론을 탐구하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1960년대 말-70년대 초의 소위 마템에 기초한 후기 라캉 중심의 해석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이며, 따라서 벌써 영미권에서 정형화되기 시작한 정통 라캉주의적 해석과 다른 관점에서 라캉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준다.

2) 하지만 오질비는 단순히 1933-1949년까지의 라캉의 저술에 한정하지 않고, [에크리]만이 아니라 라캉의 후기 저술, 예컨대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 개념](1964)의 쟁점들이 어떻게 이 시기의 라캉의 작업 속에 함축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는 캉귈렘의 과학사 연구나 푸코의 작업과 라캉의 작업을 비교함으로써, 1960년대 구조주의 진영 내부의 지적 쟁점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제공해 주고 있다.

3) 오질비의 문체는 매우 간결하고 명쾌하지만 또 한편으로 상당히 함축적이어서, 적은 분량 안에서 매우 많은 논의내용을 담고 있으며, 내가 보기에 이것들 대부분은 구조주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라캉의 이론, 더 나아가 구조주의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오질비의 이 책은 필독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번역은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공들인 역주도 책을 읽는 데 상당히 도움을 준다. 하지만 두어 군데 오역이 있고, 몇군데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들은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무책임한 오역과 날림 출판으로 악명높은 출판사에서 이 정도 수준의 번역서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출판사의 책이라면 다시는 사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독자들도 한번 이 책은 믿고 구입해 볼 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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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2005-04-1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절 읽었어요. 집중하니까 이해가 되긴 되네요.
그리고 뒤의 원주/역주는 철학적 지식이 부족한 저에게는 많이 도움이 되네요. 두고 궁금할 때마다 보면 좋겠어요.
예전에 읽은 책에서는 시니피앙, 시니피에를 능기네 소기네 하던데 이 책에서 처럼 그냥 그대로 시니피앙, 시니피에 하니까 더 낳은 것 같네요. 이해하기가요.
아무튼 라깡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책을 추천해 줘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