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화장품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대유적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청동거울에서 화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 5∼6세기경의 고분벽화를 통해 그 시대의 화장 정도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분대화장(고려시대)

역사상 최초로 화장을 국가정책적으로 장려하고 화장법을 가르친 것은 고려 태조 왕건 때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왕건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교방을 궁궐 내에 설치하고 기생들에게 화장법을 가르치고 반드시 그 방법으로만 화장을 하도록 했는데 그 방법은 머릿기름으로 윤기를 내고 눈썹을 다듬어 먹으로 버드나무 잎 모양처럼 가늘게 그리며, 뺨은 복숭아처럼 입술은 앵두처럼 연지화장을 하고 얼굴은 백분을 짙게 발라 피부를 창백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초기의 분대화장은 조선말까지 기생들의 변함없는 화장으로 이어졌다.

 

연산군의 135등급과 매분구의 등장(조선시대)

화장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연산군을 빠뜨린다면 큰 실수! 연산군의 심미안(미인을 보는 눈)은 1천명의 기생들을 뽑아 몸매와 얼굴 생김새에 따라 135등급으로 분류하고 그녀들의 화장품을 충당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령을 내릴 정도였다. 또한 숙종 때에 화장품을 집집마다 팔러 다니는 매분구가 등장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 외판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제1호 화장품 '박가분'(1916년)

박가분은 일제 총독부가 하나의 공산품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화장품 산업화의 첫 호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박가분이 나오기 전까지 화장품이란 일본 또는 중국의 무역상을 통해 몰래 들어오는 것들이 전부였다. 박가분이 처음에는 포목상의 경품이었으나 방물장사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유명해졌으며 국내 화장품으로는 처음으로 신문을 통해 광고를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많은 납 성분으로 박가분을 사용한 많은 여성들이 심각한 납 부작용을 일으키자 점차 인기가 수그러들게 되었다.

 

동동구리무가 왔어요∼(1937년)

1937년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화장품 원료를 간신히 구하여 화장품을 만들어도 담을 수 있는 용기가 없어 판매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화장품을 각자의 용기에 덜어서 파는 분매가 유행하게 되면서 동동구리무가 등장하게 되었다. '앞집 이쁜이. 뒷집 꽃분이. 옆집의 곱단이 어서 나와요. 돈 없어 못사는 사람은 공짜로도 발라줘요' 라는 유행어까지 생겨났다.


 

콜드크림은 만능크림(1945년 해방이후)

6.25전쟁 이후 화장품을 생산 할 수 있던 미비한 시설마저 파괴되자 PX를 통한 외제 화장품의 밀수가 성행하게 되었다. 콜드크림은 우리나라에서는 화장을 지울 때는 크린싱으로, 마사지를 할 때에는 마사지 크림으로, 기초 화장시에는 밑 화장용으로 거의 모든 화장단계에 사용하는 만능크림처럼 여겨졌다. 또한 콜드크림과 더불어 밀수된 코티분은 피부에 쏙쏙 스며드는 사용감과 향긋한 향내로 양공주들을 비롯한 모든 여성들의 마음까지 몽땅 사로잡게 된다. 하지만 외제판매 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삼엄한 감시 속에 밀거래를 해야 했으며 분을 파는 아줌마는 속치마 자락에 숨겨서 팔았으며 제품을 어렵게 구한 여성들은 냉장고에 숨겨놓고 몰래 몰래 발라야만 했었다.

 

화장품 산업의 본격화와 성장의 시대(1960∼70)

60년대는 우리나라 화장품산업이 본격화된 시기로 피부를 희게만 표현하던 화장법에서 화운데이션의 개발로 자연스러운 피부를 표현하는 화장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아이섀도우,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립스틱 등의 출시로 메이크업 제품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대였으며 최초의 남성 화장품이라고 할 수 있는 포마드가 등장했다. 이러한 화장품 산업의 본격화로 방문판매가 도입되고 70년대 성장기로 접어들면서 현대적인 화장품으로의 기술도약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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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30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아저씨, 이거 퍼가도 되죠? 두고 눈으로 만져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