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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폴 오스터 정도의 작가라면 새로운 소설을 읽기 전에 주어지는 선험적 독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날의 선발 투수 명단을 보며 시합의 흐름을 예상하듯이. 그래서일까. 나로서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한 번을 더 읽은 뒤에도 미진함이 가시질 않았다. 채워지지 않는 공백 때문에 이 소설에 관해 글을 쓰기가 대단히 어려웠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는 몇 가지의 키워드가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독자마다 분명히 그런 것이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있지 않을까. 우연과 선택의 문제, 고립과 자유의 문제, 뭐 이를 테면 이런 추상적 개념들도 폴 오스터의 키워드 목록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 소설은 여전히 폴 오스터 다운 폴 오스터의 소설이지만 또 왜 그렇게 미진하고 맥이 빠지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것도 폴 오스터 답다고 해야 할까?


모리스 헬러는 자신의 아들인 어린 시절의 마일스 헬러가 『앵무새 죽이기』라는 소설을 읽고 내린 결론에 감동을 받는다. "상처를 입어 보아야만 비로소 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셋 파크』를 읽고 나는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나는 마일스 헬러의 태도에 감동을 받은 모리스 헬러 때문에라도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는 강박이 든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것이 어렵다. 서브프라임 사태라는 최악의 경제 공황과 비도덕적 자본주의의 행패로 인한 실패의 이야기일 뿐인가? 선셋 파크라는 황량한 지역에 불법 거주하며 공동체주의를 염원하는 무리의 이야기인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홈리스 생활기인가? 해체된 가족의 복원을 바라는 가족의 탄생기인가? 어느 결론도 불만족스럽지만 또 제각각이 아주 생뚱 맞은 감상도 아니다. 어째서 선셋 파크의 이야기가 헬러 가문의 이야기처럼 읽힐 수 있는가(마일스 헬러와 모리스 헬러, 또 그들 가족의 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메리 리의 이야기를 합치면 이 소설 분량의 2/3를 차지한다)? 이 소설이 헬러 가족의 이야기라면(분량으로만 본다면) 빙 네이선과 패거리들의 이야기는 무엇이며 그들이 없는 선셋 파크라는 건 또 무엇인가? 왜 선셋 파크는 자신이 마치 소설의 주인공인 것처럼 구는가?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폴 오스터가 각자 실패한 젊은이들, 마일스 헬러와 빙 네이선, 엘런 브라이스와 앨리스 버그스트롬을 한 장소에 함께 모여 살도록 종용하는 실험을 펼쳤지만 결국 이것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이들이 이 작은 공동체 내에서 빙 네이선의 바람 대로 서로 격려하고 위로 받고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의 힘을 발견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이들의 문제는 제각각이었고, 함께 있어도 공통점이 없었고, 설사 공통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미국의 사회는 분할되었고, 가족이 해체되었으며, 이제 더 이상 낙관적인 전후 세대의 윤리 의식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아마 그것이 선셋 파크의 초상이 아니겠느냐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황량하게 홀로 떨어진 선셋 파크의 버려진 집처럼, 그들의 맞은 편에 놓인 무덤처럼, 결국은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죽음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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