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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그야말로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 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경제적
양극화와 곤궁, 사회적 문제가 된 취업과 실업의 문제 등이 뾰족한 대응책도 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실감할 것이다.
이 달에 전달 받은 두 권의 소설이 모두 그와 무관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우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시대의
거울이라는 오래된 소설의 명제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점이 있다. (공교롭게도) 두 권의 소설이 모두 일본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도, 쓰나미와 원전 누출이라는 참담한 재앙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고, 고통의 현재진행형일 자국민들에 대한 위로의 심정이 보통의 일본 작가들이라면 지닐 보편적 심리 상태가 아닌가 하는 추측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소설의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작가의 의욕이 작품을 망친 것은 아닐까 싶은 안타까움이 독자인 나에게는 남는다. 작가의 의욕이란 비난 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엔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선량함의 의지'와 비슷한 것이다.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세상이어서는 안 돼'라는 목소리에 대고 누가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비관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손해를 보지 않고서는 착한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이 오늘날의 시대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손해를 보는 모두가 착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행위는 선량함과 무관하다. 그리고 세계는
선량함으로 조직되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적이든, 불합리하든, 혹은 인간적이거나 비인간적이든 오늘날의 세계는 선량함마저 상품으로 팔
각오와 실행력을 갖추고 있다. 적당히 포장된 선량한 기업의 이미지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보다
효과적으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전략에서 창조 된다. 선량함이란 무엇일까. 쉽게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소크라테스라면 선량함을 '아는 것'이라 말 할 것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선행은 선행이 아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 주장에 기대어 본다.
호스트, 호스티스, 프리터, 술집 마담, 야쿠자, 고아로 자란 형제, 자살한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딸 등등. 사회에서 소외 받고
천대받는 직종에 종사하는 인물이거나 인간적인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원숭이에게 복수하는 '게'들이다.
그러나 웬 걸. 이들의 복수극에 속도를 가해야 했는지 아니면 실상 작가는 현재의 사회적 문제아들이 형편 없어 그리 관심이 가지
않았는지 우리의 '게'들은 그 처량한 사회적 냉대를 가볍게 무시하고 적당히 평화로운 삶들을 살아 가는 듯 보인다. 속았다.
하마터면 나는 호스트와 호스티스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제법 살 만 하잖아, 싶은 생각을 하게 되고 만다. 그들의 어려움과 말 못할
속사정은 독자의 상상력이 채워가야 할 공백으로 남겨 둔 것일까. 어쨌거나 솔직한 심정으로 값비싼 유모차를 몰며, 아르마니 셔츠를
입고 살아가는 자들을 속물적 차원에서 남의 얘기 읽듯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복수극이 통쾌할 리 없다.
사실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복수를 행하는 인물은 단 두 사람이다. 부모를 자살로 몰고 간 에노모토를 차로 치어 숨지게 한 미나토
게이지. 역시나 자신의 부친에게 자살을 강요한 정치가에게 복수하는 소노 유코. 우리가 그들의 복수에 언뜻 공감하고 동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조금 위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나토 게이지의 차에 치어 숨진 에노모토 요스케는 악덕 자본가에 다름 아니지만
그것으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다면 우리가 등 뒤에서 칼을 꼽고 도덕적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해보라. 내리
3선한 실력자인 정치가의 비리를 숨기기 위해 자살한 부친을 대신해 정치에 불법적으로 개입하는 소노 유코에게선 위험한 기운이
감지된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매니지먼트 하고 있는 입후보자를 사지로 몰아세우는데 거리낌이 없다(준페이가 야쿠자에게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거리 연설을 강행하려 한다). 그리고 정말 우습게도, 많은 유권자들은 개개의 정치인이 아닌 바로 그 정치적
생리에 대해 씻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꽤 많은 복수극들을 읽거나 본 경험이 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그것은 끊임 없는 피와 공포의 <퍼레이드>이다. 아마도 작가는 그 사실을 끝끝내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인정하지 못하면 극복하지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