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매혈기 - 글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킨 한 평론가의 농밀한 고백
김영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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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혈(賣血)!

자신 몸속에서 피를 뽑아 겨우 목숨 부지할 돈을 마련하는 삶이 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결국 자신을 축내서 생명을 잇는 끔찍한 업(業)이다. 마치 제 꼬리를 입에 물고 빙글빙글 도는 상상동물, 우라보노스의 희귀한 모습을 떠오르게 만든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소설 <허삼관 매혈기>처럼 지독하진 않지만,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종이 위에 자신의 검은 피를 희생하고 연명하는 삶이 아닐까 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상상을 하는 것 같다. 평론가라는 직업은 주기적으로 글을 뿜어대야 한다. 자기가 쓰고 싶을 때가 아니라, 써야 할 때, 즉 마감날짜에 맞춰서 질기고 농도 짙은 날실과 씨실로 텍스트의 집을 지어야 한다. 영화평론가라면, 이 (텍스트)집 안에는 수많은 영화들이 먼지와 함께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영화감독 하길종의 이름이 잠깐 나온다. 아마 그는 누구보다도 이런 매혈의 고독과 고통을 알지 않았을까?    저자는 무협영화에도 일가견이 있다. 70년대의 향수랄까. 그의 추억을 따라가다보면 왕우와 이소룡이 대비되는 기이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소룡이 이상적인 영웅의 모습이라면, 왕우는 땅에 붙어 있는 현실적인 인간, 그래서 비장미를 끌어올린다. 저자는 물론 이 후자의 맛(자멸적인 캐릭터)을 선호하고, 샘 페킨파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러한 만남이 이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감독과 평론가 사이로 이어진다니 신기한 일이다. 더 신기한 건, 이명세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나온 꿈 이야기다. 이명세 감독은 가끔 꿈에서 이미 돌아가신 명감독들이 출몰해서는 이런저런 말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영화에 몰두하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이렇게 이 책에는 쟁쟁한 감독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 김영진과의 직접대면을 거친 살아 있는 흔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박찬욱, 김기영, 이창동 같은 우리나라 감독은 물론이고, 기타노 다케시, 허우샤오시엔, 아녜스 바르다 등등. 나는 특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의 대담과 식당에서 다시 마주 친 일화가 소탈한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았다. 허우샤오시엔의 롱테이크의 비밀?은 새로운 영화의 눈을 밝게 하는 따끔함이 있었다. 즉, 알파벳으로 (빠르게) 연결해 뜻을 만드는 서양 문자와 달리 글자 하나에 이미 뜻이 담긴 한자처럼 영화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화면을 동양화 마냥 길게 잡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영화평은 그렇게 어렵거나 분석적이진 않다. 아마 저자가 책의 전체적인 균형을 위해 어느 정도 조절을 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도 영화 <밀양>에 대한 부분은 좀 다르다. 영화평론가로서의 심도를 가지고 밀양의 비밀스런 빛을 섬세하게 더듬고 있다.  이 책 3장에 해당하는 뒷부분에는 또 따로 저자가 즐겼던 영화들이 빠르게 돌아간다. 편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앞서도 잠깐,  이 책에 나온 무협영화 이야기를 했다. 이소룡보다 왕우에 끌리는 저자의 취향과  자멸적인 '매혈'의 느낌이 어우러진 멋진 글귀를 이 책에서 발견했다. 이것을 끝으로 내 짧은 책 감상을 마치려 한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얼마만큼의 피를 뽑았을까?

 

"영웅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서야 겨우 악의 미미한 흔적 하나를 지워낼 수 있을 뿐이다."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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