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2월 3주
사람들에게는 가끔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단 하루의 기억이, 평생동안 아름답게 기억되는 추억이 되기도 하고, 단 하루의 경험이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죠. 또, 단 한번의 만남이 이후의 삶을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비록 순간의 짧은 만남에 지나지 않더라도, 비록, 찰나의 감정일 뿐이라도, 이런 기억들은 시간이 흘러도 절대 잊혀지지도, 지워지지도 않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향기와 추억은 강해질 수도 있죠. 어쩌면 그 순간이 짧았기에 더욱 오래 더욱 잊혀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만추는 바로 그런 만남과 인연을 그린 영화입니다. 짧지만, 강렬한, 그래도 더욱 잊을 수 없는 인생의 한 순간에 대한 의미를 그린 영화라고 하면 어느 정도 정의를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의 위협과 의심을 견디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른 애나는 수감된지 7년만에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는 72시간의 외출을 허락받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애나는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남자는 애나에게 급하게 차비를 빌리게 되고, 애나는 그저 무심하게 그에게 돈을 빌려주죠. 물론 받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돈을 빌린 남자는 호스트로 소위 말해 나이 많은 누님들 등이나 쳐먹고 사는 제비입니다. 애나는 별 의미 없는 그와의 만남을 무시하려 하지만 이 남자는 웬일인지 애나곁을 맴돌죠. 물론, 이 남자 역시 처음부터 애나에게 감정을 가진것은 아닌듯 합니다. 그저 호스트로 일하며 체득한 특유의 서글함일 뿐일지도 모르겠구요. 아직까지 그는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고, 그녀 역시 그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다시 그를 마주치게 되고, 그와 함께 72시간의 시간 중 어느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시간을 말이죠.
7년의 시간동안 감옥이라는 격리된 세상에 살고 있다가 아주 짧은 시간동안 세상으로 나오게 된 애나는 가족에게서도, 그리고 세상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그녀 자신도 이제 곧 스스로가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현실속으로 파고들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하죠. 그래서 터져나오는 슬픔도,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소외감도 결코 표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와 다른 나라에서 건너와 그녀의 모국어인 중국어로는 대화도 할 수 없는 낯선 남자 훈에게서는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를 통해 슬픔을 토해내고, 그에게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할 수 있었죠. 그리고 그 역시 그녀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위로하고 함께 합니다. 사랑을 느끼기에는 짧은 시간, 그 짧은 시간동안 그들은 이제 막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헤어지게 됩니다. 그녀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날 그들이 함께한 안개가 짙었던 어느 버스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채로..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이유인지, 극장에는 개봉첫날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꽤 많은 비율이 여성관객이었음은 두말할 나위없을 테구요. 하지만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을 그리며 만추를 찾은 관객들에게 만추는 그다지 친절한 영화는 아닙니다. 시크릿 가든의 현빈을 위한 영화이기 보다는 오히려 여주인공인 애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고, 시크릿 가든 속 까도남 이미지의 재벌3세 김주원이 아닌 뺀질한 제비 훈이 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기대를 가지고 극장을 찾은 관객이 아니라면, 그저 만추라는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궁금했던 관객이라면 만추는 꽤 괜찮은 영화입니다. 스펙타클한 영상미도 없고, 빠른 전개로 긴장감을 주는 영화도 아니지만 섬세하게 그리고 비교적 감성적으로 주인공인 애나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는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목처럼 싸늘한 가을바람처럼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이기도 하구요.
밴드의 기타리스트 루이스와 장래가 촉망되는 재능있는 첼리스트 라일라는 각자 자신만의 음악세계에서 나름의 재능을 인정받고 있는 이들입니다. 루이스는 밴드음악을 하고, 라일라는 클래식 연주를 하고 있죠. 이들은 어느날 우연히 파티에서 서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게 되죠. 아주 짧은 순간의 만남이지만, 이들은 분명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날 밤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루이스와 라일라는 결국 헤어짐이라는 아픈 상처를 얻게 됩니다. 그들이 헤어지고 난 후 라일라는 자신이 루이스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을 알게 되고, 라일라는 그 아이를 낳게 되지만, 그녀에게 촉망받는 첼리스트의 미래를 포기하게 할 수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낳은 아이가 유산되었다는 거짓말을 한 후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렇게 고아원으로 보내어진 라일라의 아이는 기타리스트인 아버지와 첼리스트인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아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진 아이로 성장하게 되는데요. 어느날 아이는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고아원을 떠나버립니다.
어거스트 러쉬는 짧은 하룻밤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한 생명이 자신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부모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담은 영화입니다. 아이는 이 여행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세상에 알릴 기회를 얻게 되고, 이 재능을 통해 다시 부모님을 만나게 됨은 물론, 그동안 헤어져 지내던, 그리고 서로를 그리워만 하던 루이스와 라일라를 다시 한 자리에 서게 하죠. 긴 시간의 만남은 아니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서로를 알아보았던 한 쌍의 남녀와, 그들의 사랑이 만들어낸 하나의 생명, 그리고 두 사람을 비로소 하나로 만들어주는 이 아이의 존재가 음악이라는 세 사람의 공통분모와 서로를 끝없이 그리워하고 추억했던 마음으로 이들을 완벽한 사람들로 만들어줍니다.
영화 자체는 훗날 어거스트 러쉬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아이의 재능과 이 아이의 여행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짧은 만남에도 서로를 향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열렬히 사랑했던 이들의 간절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그 하룻밤이, 인생 전체를 흔들어버린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었던 것이죠. 만추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생길 수 있는 강렬하고도 깊은 교감에 해서 이야기 한다면, 어거스트 러쉬의 루이스와 라일라는 짧은 시간동안 사랑을 느낀 두 사람이 그 사랑을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워하며 추억하는가를, 그리고 그 사랑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서로를 서로에게 향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의 감동적인 이야기,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며 감동적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학교로 돌아가는 기차 안, 셀린느는 우연히 그 기차안에서 제시라는 이름의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셀린느는 프랑스 여인이고, 제시는 미국청년이죠. 제시는 유학을 온 여자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뜻하지 않은 실연을 겪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이들은 길지 않은 기차여행동안 서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시간을 채워가죠. 그리고 그 시간동안 서로가 잘 통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헤어짐이 아쉬운 제시는 셀린느에게 함께 기차에서 내려 하루의 시간을 함께 보내자고 제안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지만 셀린느 역시 제시와 헤어지기가 아쉬워 그의 제안을 수락하죠. 그들은 그 하루의 시간동안 서로 더욱 많은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그러나 그들에게 중요했던 인생의 여러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은 날이 새기 전까지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서서히 혹은 너무도 빠르게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이제 제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비포선라이즈는 개봉한지 정말 오래된 영화입니다. 벌써 15년이나 흐른 영화이니까요. 또 이 영화는 크게 강렬한 사건이 있지도 않고, 엄청난 반전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저 셀린느와 제시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어감을,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겨남을 새벽녘의 아련한 모습처럼 희미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영화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화려한 치장없이, 그리고 대단한 사건 없이도 사랑이란 그 존재자체만으로 아름답고, 사랑이란 때로는 짧디 짧은 찰나의 순간에서도 느껴지는 것이라는 걸 이 영화는 보여주니까요. 이들의 인생에서도 사랑이란 감정은 그리 큰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으로도 충분하죠.
하지만 비포선라이즈의 커플들은 이 사랑에 대해 확신까지는 가지지 못합니다. 아마도 실제 우리에게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추의 애나와 훈 커플처럼 무작정 기다리거나, 어거스트러쉬의 루이스와 라일라처럼 한없는 그리움을 간직하기 보다는 비포선라이즈의 커플처럼 망설이고 두려워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비포선라이즈는 앞선 두 영화보다 더욱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후 비포선라이즈는 비포선셋이라는 영화를 따로 제작해 이들의 훗날의 모습도 보여주긴 합니다. 하지만, 비포선라이즈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순간의 강렬한 감정에 대한 젊은 남녀의 고민과 망설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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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다고들 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들이 경험한 사랑에 기초해 내릴 결론들이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바로 그 찰라에 가까운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일겁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중요한 것이라면, 누군가의 인생은 분명 그 찰라의 순간에 의해 변화하는 걸테구요. 꼭,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만추나, 어거스트러쉬, 비포선라이즈의 남녀처럼 순간에 인생을 걸만한 사랑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들이 보여주는 그 단 한순간이 정말 중요한 이유는, 그 시간의 길고 짧음이 아니라, 그 순간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일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