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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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안에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끼고 있는 터키의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제국의 식민지 '비잔티움'으로 시작되었던 이곳은 서기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스만투르크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수백 년간 서아시아 일대의 가장 큰 제국의 수도로 번영을 거듭했다. 현재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로 옮겨졌지만 여전히 터키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이다.
 
그런데 이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은 해협만은 아니다. 전통과 서양, 부유층과 빈곤층,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터키인과 소수민족(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등). 도시와 시골. 이러한 균열들이 중층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마음의 낯섦>의 주인공은 이스탄불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 주인공 이름은 '메블루트'다. 그러나 실제로 메블루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사실은 이스탄불의 이야기이며, 메블루트는 이스탄불에게 인격을 부여한 존재라고 했다고 느껴진다.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때 이스탄불을, 이스탄불을 설명할 때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저자 오르한 파묵의 말을 알고 나면, 소설의 주인공이 메블루트라는 개인인 동시에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낯섦>의 공간적 배경은 이스탄불이며, 시간적 배경은 열두 살 소년 메블루트가 시골에서 상경하는 1969년부터 그가 노년에 접어드는 2012년까지의 40여년간이다. 주인공 메블루트는 이스탄불 시내에서 '보자'를 파는 거리상인이다. '보자'는 소설의 중심이 되는 소재인데, 약한 알코올에 들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알코올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음주가 금지되었던 오스만투르크제국 시대에 사람들이 죄책감 없이 마시기 위해 만들어진 터키의 전통 음료인 것이다. 메블루트는 보자를 팔러 다니며 사람들이 물으면 신에게 맹세코 보자에는 알코올에 들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 무스타파는 보자와 함께 요구르트도 팔았지만, 70년대 말 이스탄불에 요구르트 유통망이 확보되면서 요구르트 장사는 접어야 했다. 보자 역시도 8, 90년대에 들어서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잊혀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평범한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의 이야기를 비극으로, 평범한 사람보다 모자란 사람의 이야기를 희극으로 분류했다. 얼굴이 약간 잘 생겼고 다른 사람들보다 순진하다는 사실 외에는 평범함 그 자체인 메블루트의 이야기는 비극도 희극도 되지 못한다. 체르노빌, 천안문, 9.11 등의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목격하지만 메블루트는 포레스트 검프가 아닌 것이다. 등신대(等身大)의 평범한 소시민 그 자체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중간중간에 등장인물들이 1인칭 시점의 서술을 하며 끼어든다. 메블루트의 아버지 무스타파, 메블루트의 사촌 쉴레이만과 코르쿠트 형제, 메블루트의 친구 페르하트, 메블루트의 아내 라이하, 라이하의 자매인 웨디하와 사미하, 메블루트의 장인인 압두르라흐만 등 주요 인물들이 1인칭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어 3인칭 화자가 시골에서 쉴레이만을 향해 짖는 개 이야기를 한 직후에 쉴레이만이 "사실 개들은 마을에서 나를 보고 전혀 짖지 않았다. (중략) 어쨌든 시골에서 개들이 나와 메블루트를 대하는 태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난 그저 이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58)라며 반론을 제기한다. 메블루트 주변의 여러 등장인물들이 1인칭 시점으로 참견을 하고 들지만, 메블루트만은 1인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3인칭 화자가 메블루트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시점의 도입은 소설 기법으로서 재미있기도 하고, 메블루트의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보완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특징적인 시점들에 숨겨진 저자의 진짜 의도를 짐작케하는 부분이 있었다. 메블루트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이스탄불 시내에는 좌파와 우파가 나뉘어 항쟁을 벌인다. 서로 상대방에게 린치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기관총 등을 들고 암살이나 테러를 벌이기도 한다. 메블루트는 어느 날은 절친한 친구인 페르하트를 따라 좌파 포스터를 붙이기도 하고, 다른 날은 사촌인 코르쿠트와 쉴레이만 형제를 따라 민족주의의 벽보를 붙이기도 한다. 메블루트 자신은 "사실 난 공산주의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게 좋아. 그런데 왜 신을 믿지 않지?"(156)라고 말하며 양쪽 모두에 거리감을 나타낸다. 메블루트의 아버지 역시 "어차피 가련한 보자 장수와 아들에게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거다. 우리는 중립이야"(151)라고 말하며 어느 쪽의 이념도 부정하는 실용적 입장을 취한다.

이 과정에서 좌파의 편에 선 페르하트와, 우파의 편에 선 코르쿤트, 쉴레이만이 각각의 관점을 1인칭 시점에서 서술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페르하트는 우파는 먼저 자신들을 공격한 원수들이라 주장하고, 코르쿠트는 좌파가 불온한 음모를 꾸미는 악당들이라고 주장한다. 좌파와 우파의 관점에서 번갈아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부분은 양자의 입장을 잘 나타낼 수 있는 한편, 독선과 오만에 빠져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가지는 이념 대립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3인칭 서술의 중간중간에 수시로 참견하는 등장인물들의 1인칭 시점은 모든 사건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그 해석들은 어떻게 보면 옳은 동시에 어떻게 보면 틀리기도 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82년, 군 복무를 마친 메블루트가 라이하라는 여자와 야반도주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1969년부터 2012년까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만, 소설의 프롤로그는 메블루트가 사촌 쉴레이만의 도움으로 라이하와 도망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보다 4년 전인 1978년, 메블루트의 사촌 형 코르쿠트는 '웨디하'라는 여자와 결혼을 한다. 메블루트의 아버지 무스타파는 원래 자신의 형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형제간의 공동 재산(이라고 무스타파가 주장했던) 토지를 코르쿠트의 결혼 자금으로 팔아버리자 격노한다. 무스타파는 아들 메블루트에게 코르쿠트의 결혼식에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지만, 메블루트는 코르쿠트의 결혼식에 간다. 그 자리에서 신부 웨디하의 두 여동생 라이하, 사미하를 보게 되고 막내인 사미하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런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것은 아닌지라 사미하의 이름이 '라이하'라고 착각한 채 엉뚱한 라이하에게 몇 년간 연애편지를 보낸다(이러한 오해의 배후에는 사미하를 짝사랑한 쉴레이만의 농간이 있었음이 나중에 드러난다.)

이 소설에는 젊은 남성이 미혼 여성에게 사랑에 빠져 여자와 함께 도망치는 에피소드가 반복적으로 나온다(메블루트와 라이하 커플을 비롯해 총 세 번 등장한다). 도주혼(逃走婚)이라고 해야 할지, 납치혼(拉致婚)이라고 해야 할지, 가출혼(家出婚)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이러한 이야기는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비교적 빈번하게 문제가 되는 것 같다(문득 든 생각인데 한국에서도 예전에는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슬람 문화권의 인권 문제로 거론되는 명예살인이 이런 맥락에서 등장하게 된다. 문란한 행위를 했다고 여겨지는 젊은 여성을 아버지나 오빠가 살해하는 행위다. 터키의 이스탄불은 이슬람 원리주의 색채가 약한 탓인지, 저자인 오르한 파묵이 서구화된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내 마음의 낯섦>에서는 명예살인의 논리가 부정된다. 딸이 두 명이나 도망친 압두르라흐만(메블루트의 장인)은 두 딸의 결혼을 사후적으로 허락할 뿐 아니라, 딸들이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행동한 것을 자랑스럽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쉴레이만은 짝사랑하던 사미하가 도망치자 예비 장인이었던 압두르라흐만에게 "인간은 명예를 위해서 삽니다"라고 말하며 명예살인을 암시한다. 압두르라흐만은 "다들 아는 것처럼 명예 문제라는 말은 사람들이 서로를 마음 편히 죽이기 위해 꾸며낸 핑계지(290)"라고 대답한다. 도주혼은 여성이 집안에서 스스로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해주는 결혼 상대 대신 서로 좋아하는 상대와 결혼하기 위한 자발적 행동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메블루트가 라이하(라고 착각했던 사미하)에게 쓴 연애편지에 관한 오해는 결말에 이르러 운명과 의도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메블루트의 의도는 사미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지만, 운명은 라이하와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메블루트가 아닌 코르쿠트의 주례사에 나오는 다음 말은 메블루트와 라이하의 사랑을 잘 요약하고 있다. "우리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지. 첫째는 누군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경우지.(중략) 두 번째는 결혼한 후에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네.(169)"

한편 코르쿠트와 쉴레이만 형제는 밉상스러운 행동을 자주 한다. 쉴레이만은 사미하에 대한 짝사랑 때문에 메블루트가 라이하와 결혼하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사미하가 자신을 버리고 페르하트와 도망치자 라이하에게 메블루트가 애초에 연애편지를 보낸 상대가 사미하였다고 폭로하기도 한다. 쉴레이만과 메블루트 사이에는 경제적 격차가 있다. 메블루트의 아버지는 형제들의 재산을 형이 가로챘다고 성토하기도 하고, 쉴레이만의 집안은 여러 사업을 통해 메블루트보다는 부유해졌다. 쉴레이만은 1인칭 독백 부분에서 "우리 가족들 중에 아직도 거리를 돌아다니며 요구르트를 파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마음이 아프다"(189)라며 메블루트에 대한 생각을 토로하기도 한다. 친구인 페르하트 역시 전기검침원 일을 하면서 메블루트보다는 경제적으로 나아졌다. "메블루트는 젊었을 때 공산주의자인 척하다 결혼해서 자본주의자가 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414)며 그에 대한 경멸을 드러낸다. 페르하트는 "꿀을 집는 사람이 손가락을 빤다는 것은 사장들도 알아"(490)라고 말하며 전기검침을 하며 뒷돈을 챙기는 일에 대해 정당화한다.

메블루트는 쉴레이만이나 페르하트의 도움을 받아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물론 보자 파는 일도 계속하면서). 그러다 21세기 들어 메블루트가 살던 무허가 판자촌이 고층 건물로 재개발되면서 메블루트는 큰 돈을 손에 넣고 아파트로 이주하게 된다. 메블루트의 이야기는 중산층의 성공신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의 낯섦>이라는 제목처럼 이 소설은 언뜻 보면 낯설게 느껴진다. 소설의 중심적인 소재가 되는 술 "보자", 판자촌 "게세콘두" 등의 고유명사들은 생전 처음 들어본 것들이고, 책에 그려진 터키 현대사와 이슬람 문화 또한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급격한 근대화와 좌우대립, 군사쿠데타 등 한국 현대사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소년 티를 벗기 시작한 메블루트와 쉴레이만이 서로의 얼굴에 콧수염이 난 것을 확인하고 포옹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쉴레이만은 메블루트에게 "하지만 넌 좌파 스타일로 콧수염을 길렀네. (중략) 모른 척하지 마. 좌익주의자들이나 가장자리를 삼각형으로 다듬는다고"(179)라며 놀린다. 콧수염도 좌파우파가 따로 있다니 웃기면서도 슬프다.

이 소설은 가장 터키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터키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의 독자들 또한 공감할 수 있는 삶에 대한 보편적 고찰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반전(反轉)된 거울상처럼 또 하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십년간 "찹싸아아알떠어어억"을 외치며 서울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또다른 메블루트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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