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룬다티 로이,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 인도 민주주의 르포르타주
아룬다티 로이 지음, 노승영 옮김 / 시대의창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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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인도인민당의 나렌드라 모디가 인도 총리로 취임하였다. 한국의 언론에서는 '흙수저' 출신인 모디의 이력을 부각시켰고, 인터넷에서는 악수할 때 지나치게 센 악력(握力)이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구자라트 주의 총리였던 시절에 발생했던 무슬림 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논하는 인물이 적었다. 1997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구자라트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02년 2월, 아요디아에서 돌아오던 힌두교 성지순례단이 타고 있던 열차 객실에 불이 나 58명이 산 채로 타 죽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 직후 나렌드라 모디 주 총리가 이끄는 구자라트 인도인민당 주 정부는 구자라트에 사는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인종 학살을 지휘했다.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으로 전 세계에 번진 이슬람 혐오증이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구자라트 주 당국은 2000명 이상이 학살당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 여자들은 윤간당하고 산 채로 불태워졌으며, 무슬림 15만 명이 집에서 쫓겨났다.(27,28) 

아룬다티 로이의 묘사와 달리 모디 총리나 인도인민당이 구자라트 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는 볼 근거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인도인민당이 힌두지상주의적 우익 성향 정당이며, 모디가 이슬람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 총리까지 되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공유되는 견해인 것 같다.

이 책은 9.11테러 이후 인도에서도 이슬람 테러가 빈발하면서 이슬람포비아가 확산되고 우경화가 진행되는 2000년대의 인도사회를 저자가 비판하는 책이다. 이보다 앞서 90년대 말, <9월이여 오라>에서 인도의 핵실험과 댐 개발을 비판한 저자는 이 책에서도 신자유주의, 미제국주의, 힌두파시즘에 대해 격렬히 반대한다. 지금은 잊혀진 조지 부시 대통령 역시 이 책의 주요 비판 대상 중 하나다. 지금은 퇴임한 조지 부시와 달리 힌두파시즘의 대표적 인물로 묘사된 모디는 이 책이 출간된 몇 년 후, 인도의 총리가 된다.

중국과 함께 세계의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있는 인도는 중국과 달리 다양성과 관용,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인권의 측면에서 갈 길이 많다. 2001년 12월 발생한 의회 테러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한 네 명 중 두 명은 누명을 벗고 풀려났고, 형이 선고된 나머지 두 명도 수사 과정에서의 고문이나 증거 조작 등의 부적절한 인권 침해가 있었음을 저자는 폭로한다.

인도의 10억 인구 중 10%는 이슬람 신자다. 무굴제국 등 여러 이슬람 왕조의 지배 이후로 계속된 종교 갈등은 1945년의 파키스탄 분리이후에도 상흔을 남기고 있다(이후 동파키스탄은 인도의 지원을 받아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공식적으로 폐지된 카스트 제도는 비공식적으로 여전히 남아있고, 급격한 경제성장은 빈부격차라는 또다른 갈등을 낳았다. 이러한 여러 갈등들이 힌두파시즘이라는 형태로 분출되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파시즘을 견인하고 있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하층 계급이라고 말한다. '흙수저' 출신의 우익 정치인 모디처럼 말이다.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집단을 수탈하고 내쫓고 박멸하려는 계획에서, 가장 가난한 집단이 보병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구자라트의 달리트와 아디바시, 수천 년 동안 상위 카스트 계급에서 멸시받고 억압받고 쓰레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 이들이 압제자와 손잡고 백지장 차이로 자기들보다 덜 불운한 사람들을 공격한 이유를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중략)
불행한 이들이 자신 바로 다음으로 불행한 이들에게 분노와 증오를 내뿜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진짜 적은 접근할 수가 없고, 난공불락에 불가항력적인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68)

흔히 불가촉천민이라 불리는 달리트와 아디바시의 인권에 대해 우호적 관점을 가진 저자는 이들이 정작 혐오세력이라는 현실에 모순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나치스의 대두부터 최근의 트럼프 현상에 이르기까지 극우 파시즘이나 인종차별주의를 지지하는 계급이 누구냐에 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다. 하지만 저자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파시즘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인도 극우주의의 향방과 함께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p.s. 모디 총리는 올해 서울평화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수상을 결정한 사람들은 이 책을 안 읽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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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랑자의 세계 국가를 바라보는 젊은 중국 지식인의 인문여행기 2
쉬즈위안 지음, 김태성 옮김 / 이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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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회비평가 겸 작가이자 인문책방 운영자"로 저자 소개에 나와있는 중국의 쉬즈위안(許知遠)의 인문여행기다. 저자의 전작인 <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가 중국 이곳저곳을 여행한 뒤 쓴 책인 반면, <한 유랑자의 세계>는 인도, 부탄, 러시아, 유럽, 이스라엘, 아프리카, 미얀마 등을 여행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저자가 발견하는 것은 중국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러시아를 여행하며 러시아의 후진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가 공유하는 경험을 의식하고 있다. 냉전 시대의 사회주의 독재와 경제의 자유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강력한 독재적 리더십이 계속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엿보인다. 인도에서도 타고르와 네루(책에는 "네루다"라고 나오는데 인도 초대 수상인 자와할랄 네루의 誤記인 듯)의 동양 정신을 논하는 한편, 급격한 경제성장을 하며 '친디아(Chindia)'로 호명되는 중국과 인도의 모순에 대해 논한다. 베를린 장벽의 옛터에서는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의 홍콩을 방문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다. 마지막 장에서는 민주화가 갓 성공한 2013년 당시의 미얀마에서 중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의 일종의 모범을 보고 있다.

이렇듯 우리가 몰랐던, 혹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중국과 세계의 관계가 언급되고 있어 흥미롭다. 무엇보다 2010년대 명실상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우뚝선 중국인들의 세계관이 잘 나타난다. 저자는 미국이나 일본의 방문기는 적고 있지 않지만, 이제는 쇠락한 유럽이나 아직 뒤처진 러시아에 대한 방문기에서는 서구에 대한 열등의식을 뿌리치고 중국몽(中國梦)을 꿈꾸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한편으로 최근 들어 중국이 뒷마당으로 만들고 있는 아프리카에서는 중국인 기업가들이 현지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내보인다. "1910년 조선이 일본이 병합되었을 때 (중략)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조선은 원래 우리의 속국이었다"라고 생각했다"(111)는 것처럼 19세기까지의 중화주의가 부활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가 세계 어느 곳을 가서도 중국의, 혹은 중국과 유사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중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1930년대 독일의 에른스트 블로흐가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여러 시제(時制)들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을 두고 만들어낸 말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사회문화에 대해서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폐쇄적 사회주의 국가에서 30여년만에 G2로까지 압축성장에 성공한 중국이야말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도, 급격한 발전에 성공한 인도에서도, 저개발국가인 아프리카에서도,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쇠락해가는 유럽에서도 저자는 중국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리라.

또 한 가지 이유는 세계 어딜 가든 중국인 화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방문기에서도 현지의 중국인 교민이나 유학생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중국인 화교의 역사를 훑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국인 유학생 모임 내의 선거전을 묘사한 부분은 흥미로운데, 칭화대학 학벌 카르텔을 등에 업은 유력 후보와 조직표는 없지만 특이한 캐릭터로 예상치 못한 돌풍을 일으킨 후보 간의 대립이 중국사회 그 자체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중국의 굴기를 우려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중국이 다시 집단주의를 인정하면서 폐쇄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지성, 반엘리트주의 정서가 갈수록 농후해지는 반면, 협애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흥기하면서 저열한 대중문화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나는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고 좌절과 절망감을 느꼈다."(393) 어디에선가 저자를 중국판 블랙리스트 작가로 소개하는 것을 보았는데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에 대해 심각한 통제가 여전한 중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한국의 블랙리스트와 비교하는 건 저자의 용기 있는 언론 활동에 대한 과소평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민주화 직후의 미얀마를 통해 중국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미얀마에서는 군부의 여전한 영향력, 로힝야족 문제, 언론 통제 등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 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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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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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되는 해였다. 그의 사상을 받아들인 마르크스주의는 구소련이나 북한 등의 독재, 인권 탄압 등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지만, 정작 칼 마르크스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 평전은 간명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마르크스의 생애의 사상을 다루고 있어 도움이 된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의 트리에에서 개종유대인 변호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트리에는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해 라인연방으로 편입되었다가 독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1835년 본대학에 입학하고 몇 년 후에는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게 된다. 이곳에서 헤겔과 포이엘바흐의 영향을 받아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사상을 완성시킨다. 1842년에는 쾰른의 <라인 신문> 편집장을 맡았다가 러시아 비판으로 인해 발매가 금지된다. 이후, 파리와 브뤼셀을 오가며 좌파 사상가들과 교류를 하며 문장을 쓰곤 했다. 이 시기 헌신적인 친구이자 지적 동지인 엥겔스와 만남을 가진다.

1848년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선언>을 발표하며 마르크스의 이름은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된다. 이로 인해 파리와 브뤼셀에서 쫓겨난 마르크스는 영국으로 망명해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머물렀다. 런던에서 마르크스는 세 자녀가 죽을 정도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생활을 했고 엥겔스의 원조와 미국의 <뉴욕 트리뷴>에 보내는 원고료로 연명했다. 그는 바쿠닌, 프루동, 푸리에 등의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격렬하게 논쟁하기도 했다.

1864년 만들어진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는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 다시금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1867년 <자본론> 1권을 출판함으로써 전 유럽에 명성을 날리게 된다. 특히 러시아에서 <자본론>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면서 마르크스는 기존의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자본주의가 낙후된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을 점치게 된다. 원래 계획했던 <자본론> 2, 3권을 완성시키지 못 한 채 마르크스는 1883년 폐종양으로 사망한다.

저자인 이사야 벌린은 그에 대해 "마르크스는 매력이라고는 거의 없으며 행동도 촌스러운 편인데다 늘 맹목적인 증오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강렬하면서도 정력적인 성격, 개념이 분명하면서도 포괄적인 견해들, 그리고 시대 상황에 대한 폭넓고 탁월한 분석에는 적들조차도 매료되었다"(20)고 평가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성인군자와 같은 성품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경제학, 사회학, 철학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사야 벌린은 1909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1915년 러시아로 건너갔다가 러시아혁명 이후인 1921년 영국으로 이주한 인물이다. 자유주의를 옹호한 벌린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얼핏 보기에는 소극적 자유보다 적극적 자유가 더 좋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실제로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자유의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한 벌린 자신은 소극적 자유를 옹호하며 적극적 자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루소가 대표적인 적극적 자유는 개인에게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자유를 행사할 것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체주의를 낳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필요의 왕국이 아닌 자유의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한 마르크스의 자유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주장한 구소련 등의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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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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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1부는 1인칭 화자 주인공 토니 웹스터의 40년 전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토니는 고등학교에서 천재적인 동급생 에이드리언과 만나고 존경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대학에 들어간 토니는 같은 대학의 베로니카와 연애를 시작한다. 베로니카의 집에 초대 받아 가족들과 만나지만 베로니카의 아버지와 오빠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불쾌한 경험을 한다. 토니는 베로니카와 헤어지고, 자신이 소개시켜 줬던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가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후 에이드리언이 철학적 이유로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2부는 4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노년이 된 토니에게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500 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유산으로 남기고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늙은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넘겨받기 위해 늙은 베로니카에게 다시 연락을 취하게 되고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전여친의 어머니가 40년 만에 유산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가 뜬금없기 짝이 없는데,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토니에게 오래 전 가족들이 했던 일에 대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자친구의 집에 가서 가족들과 만나는 일이 어색하고 불편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 아닌가? 영화 <겟 아웃>에서처럼 여자친구 가족들이 최면을 걸어서 노예로 만들려 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적어도 처음 읽었을 때는 베로니카의 가족들이 토니에게 그렇게 심한 일을 했는지 이해가 영 되지 않았다.

짐 브로드벤트와 샬롯 램플링이 노년의 토니와 베로니카를 연기한 영화판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를 보았다. 영상으로 보니 "아하, 그런 거였군" 싶은 대목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소설을 다시 한 번, 이번에는 고유명사에 주의하면서 읽어 보고 몇 가지 발견이 있었다. 노년의 회한, 왜곡된 기억, 이중반전 뒤에 숨겨진(혹은 나만 몰랐던) 또 하나의 주제, 계급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베로니카의 풀 네임은 '베로니카 메리 엘리자베스 포드'다. 평범한 이름이지만 미들 네임이 두 개다. 베로니카의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전업주부. 이것도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1960년대 당시의 영국에서는 공무원이 상류층에 해당했을까?(왕족과 귀족이 아직 있는 영국의 계급사회는 한국의 계급사회와는 다르지만 일단은 무시하고 넘어가자.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원래 의미의 상류층, 귀족 계급은 아니다.)

그리고 치즐허스트. 토니가 찾아간 베로니카의 가족이 사는 집이 있는 곳이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그런 동네가 있는가보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영화를 보니 베로니카의 집은 말 그대로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었다. 베로니카의 집을 영상으로 보자 토니가 겪어야 했던 내적 갈등의 상당 부분이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베로니카 집안의 경제적 상황을 약간은 과장되게 연출했을 수도 있지만, 소설에서도 젊은 토니와 베로니카의 계급 차이는 강조되고 있다. 토니는 베로니카의 가족들이 자신의 사회적 계층과 지적 수준에 대해 심문하는 듯하다는 표현을 사용했고, 오만과 경멸을 느꼈다며 모욕과 굴욕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이는 토니 자신이 인정하듯이 열등감과 피해망상으로 왜곡된 기억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에이드리언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는 언급이 지나가듯이 나올 뿐이다(이 소설에서 스쳐지나가듯 언급되는 많은 에피소드들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중요한 복선 중 하나다). 대신에 장학금을 받아 케임브리지에 입학한 에이드리언의 천재적 두뇌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강조된다. 케임브리지는 베로니카의 오빠이자, 자신에게 경멸스러운 태도를 보였다고 토니가 느낀 잭이 다니는 대학이기도 하다.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가 사귄다는 소식이 젊은 토니의 사회적, 경제적, 지적 열등감을 배증시켰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참고로 영화에서는 토니의 지적 수준에 대해 소설에 나타난 것보다 더 한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베로니카의 집에서 식사 시간에 나눈 대화에서 토니는 쪽팔린 상황에 처하게 된다)

40년 뒤의 토니와 베로니카는 상황이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토니는 폭스바겐 폴로를 타고 다닌다. 폭스바겐 폴로라는 고유명사로 토니가 중산층에 무사히 안착했음을 알 수 있다. 베로니카 역시 폭스바겐 폴로를 탄다. 베로니카의 오빠인 잭의 상황은 토니의 상상 속에서만 짐작되는데, 토니는 처음에는 골프 클럽에서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상상했다가 나중에는 사회에서 여러 실패를 거듭하고 세계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것으로 상상한다. 점차 밝혀지는 베로니카와 그 가족들의 비극적 이야기로 짐작컨대, 베로니카의 집안이 토니가 기억하는 치즐허스트 시절보다는 가세가 기울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생판 모르는 사람에 가까운 토니에게 500파운드의 유산을 남긴 걸 보면 쫄딱 망한 것 같지는 않다. 고유명사의 벽은 여기에도 있다. 500파운드가 얼마 정도인지 처음에는 감을 못 잡았다. 검색해 보니 한국 돈으로 73만원, 토니의 말 대로 어중간한 금액이다.

영화에서는 사회적, 경제적 역전이 보다 과장되게 연출된다. 소설에서도 나오는 늙은 베로니카의 허름한 차림도 그렇지만, 베로니카가 사는 곳은 런던 시내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낙후된 곳으로 그려진다. 늙은 토니의 집과 비교해 보면 더욱 명확히 베로니카 집안의 몰락이 느껴진다.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인가, 패자의 자기기만인가? 이 소설의 주된 테마 중 하나다. 베로니카의 집안과 에이드리언의 배신에 상처를 입은 젊은 시절의 토니는 패자였다. 그래서 이 소설의 1부는 패자의 자기기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2부에서 숨겨졌던 과거사들이 드러나면서 토니는 패자가 아님을, 오히려 승자에 가깝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결말에서의 깨달음(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은 토니에게 노년의 회한과 함께 40년간 계속되었던 열등감, 피해망상, 자기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사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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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의 세계화 - 왜 전 세계적으로 엘리트에 대한 공격이 확산되고 있는가
존 B. 주디스 지음, 오공훈 옮김, 서병훈 / 메디치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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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들어서 세계 정치에 있어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 영국의 브렉시트, 프랑스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결선투표 진출과 유럽 극우정당들의 약진 등등 미국과 유럽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징후들이다. 이것뿐이라면 우경화, 내지는 극우화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겠지만, 저자는 미국 대선에서의 버니 샌더스 열풍, 그리스의 시리자와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좌파 정당의 집권까지 더해 "포퓰리즘의 세계화"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좌파, 우파, 중도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날 수 있는데, 이러한 포퓰리즘을 하나로 관통하는 논리는 기득권 엘리트에 대한 반감과 증오다. 포퓰리즘 세력은 정부, 제도권 정당, 대기업, 지식인 등의 엘리트들을 적으로 묘사하며 기득권들로부터 권력을 국민들이 되찾아야 한다고 호소한다. 얼핏 보기에 극과 극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는 샌더스와 트럼프가 기득권 엘리트에 대한 반감이라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샌더스와 트럼프는 각각 월스트리트 점령운동과 티파티의 적자(嫡子)라 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대의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해 국민들이 광범위하게 가지고 있는 반감을 기존 정당들과 정치인들이 적절하게 흡수하는 데 실패한 데서 기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민주주의 본연의 가치로 회귀하려는 시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미국과 유럽의 사례를 다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포퓰리즘 정당이나 정치인은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굳이 찾아보려고 노력한다면 조원진이나 이재명, 새정치민주연합 합당 이전의 안철수 정도가 포퓰리스트로 분류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포퓰리즘이 바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것 같지는 않다.

포퓰리즘의 역설은 성공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실패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집권 가능성이 없는 야당일 때에 기존 정치권에 대해 무차별적인 비판을 가하며 실현가능성이 낮은 대안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실제로 집권하게 되면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게 되고 자신들이 비판했던 '기득권'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을 지지했던 지지기반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정치적 행보를 하지 않을 때는 지지율이 높았지만 민주당이라는 현실 정치세력과 결합하면서 인기가 폭락한 안철수가 좋은 예다. 유럽연합이나 국제기구들의 긴축 압박을 단호하게 거부하겠다는 공약으로 집권한 그리스의 '시리자(급진좌파연합)' 역시 집권 후에는 호언장담했던 것과는 달리 국제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지지층의 실망을 야기했다.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지, 혹은 4년 임기라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는 흥미롭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떤 사람들은 많았지만 집권 2년차에 들어선 트럼프는 한미FTA 개정, 철강 수입 제한, 북미정상회담 등에 성공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집권한 이후에 보다 현실적인 방향으로 선회한 부분은 많지만, 현실과 장밋빛 공약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으며 성공한 포퓰리스트로 기록될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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