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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굿바이, 레닌>(2003)이라는 독일 영화가 있다. 1989년 베를린의 벽이 무너질 당시, 혼수상태에 빠진 주인공의 어머니가 6개월만에 깨어나는데, 열혈 공산당원이었던 어머니에게 차마 동독이 망하고 통일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던 주인공은 어머니에게 아직 동독이 망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코미디 영화다. 통일 직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풍자하고 있는데, 동독 시절 어머니가 즐겨먹던 통조림을 찾기 위해(통일 이후에는 브랜드가 없어져 구하기 힘들었던 듯하다) 쓰레기장을 뒤지던 주인공을 보고 이웃집 할아버지가 혀를 차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고, 이제는 청년이 쓰레기장까지 뒤지네. 동독시절에 이런 일은 없었는데..."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이 성립된 것은 기껏해야 1949년이지만, 소련은 1917년부터 1991년까지 74년간 존속했다. 소련이 멸망했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소련 이전의 러시아를 기억하지 못했고, 소련이 그들의 조국이었다. <굿바이, 레닌>의 주인공 어머니는 영화 마지막에 숨을 거두지만, 많은 소련인들은 1991년 이후에도 러시아인(혹은 벨라루시인, 아르메니아인, 타지크인, 체첸인 등등)으로서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실제로 소련인들에게 소련의 붕괴는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충격이었다고 한다. 이 책의 인터뷰이 중 한 명인 마르가리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갑자기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어요. 그냥, 없어진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내려다 보니 어느새 다른 국가의 국기가 걸려 있었던 거예요.다른 나라에서 살게 된 거죠. 남의 나라에서요.(140)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도입으로 소련은 개방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파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조직하여 1991년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감금하는데, 이에 반항한 수십만의 소련 시민들이 모스크바의 의사당로 몰려들었고, 쿠데타는 실패로 끝난다. 이를 계기로 소련은 해체되고, 러시아연방 등으로 분열된 것이다.


그러나 10년뒤,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쿠데타가 성공했으면 어땠을 거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랬다면 위대한 나라를 보존했겠지요."

"공산당이 아직 정권을 잡고 있는 중국을 한번 보세요. 지금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에요."

"조국을 배신한 대가로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심판했겠죠."(중략)

"전 그날 의사당에 모였던 사람들 중 하나에요. 지금 느끼는 기분은 '속았다'에요. (35, 36)


소련의 전체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는 결코 고르바초프를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섰던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 같은 장밋빛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일부 사람들이 부호가 되어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어떤 사람은 소련 붕괴 이후의 90년대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끔찍한 시절이었거든요. 머릿속에서 180도 회전이 일어났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변화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도 허다했어요. 정신병원이 환자들로 북적거렸죠. (중략) 거리에선 총소리가 줄곧 들렸어요.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고, 매일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났죠. 뭔가를 더 가져 가려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가져야 했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던 거예요. 어떤 사람은 파산했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갔어요. (40)


 

알렉시예비치는 소련 붕괴 후 20여년간 정신없이 뛰어들어 흩어지는 수많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온갖 목소리들을 하나하나 주워담았다.


"옐친과 그 일당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훔쳐갔소! '술을 마셔요! 부자 되세요!' 언제쯤 이 모든 것이 끝나려는지....."(중략)

"나 같으면 저 빌어먹을 부르주아들을 탱크로 싹 밀어버릴 텐데!"

"공산주의는 유대인 칼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거야."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사람은 스탈린 동지뿐이야. 이틀만 스탈린이 되돌아와서 모두를 쏴 죽였다면.... 그런 뒤에 얼마든지 다시 흙으로 돌아가 누워도 되잖아."

"주여,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제 모든 성인을 섬길 거에요!"

"이 스탈린의 개들아! 너희 손에 묻은 피가 채 식지도 않았다, 이놈들아! 황제 일족은 왜 죽인 거냐, 이 나쁜 놈들아! 네놈들은 아이들마저 잔인하게 도륙했잖아!"

"위대한 스탈린 없이 위대한 러시아 를 만들 수는 없어." (46, 47)


그 과정에서 스탈린체제와 제2차세계대전부터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련 붕괴, 그 이후에 대한 사람들의 갖가지 기억들을 모은다. 그러한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보완하기도 하며 국민들이 가진 하나의 단일한 서사를 해체시킨다. 예를 들어 히틀러와 싸워 이긴 소련의 위대한 영웅들의 전쟁으로 기억되는 제2차세계대전에 대해 다른 목소리들, 다른 기억들을 복원해낸다. 나치 독일의 학살로부터 도망쳐 빨치산에 참가했지만 오히려 소련 빨치산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유대인의 기억, 소련의 통치보다 독일 점령군의 통치가 나았다며 독일 앞잡이와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어느 여인의 기억, 전쟁이 끝난 후 먹을 것을 구걸하던 독일군 포로에 관한 기억, 스파이로 몰려 수용소로 보내진 어느 아이의 기억... 수많은 작은 목소리들을 건져 올림으로써 평범한 서민들의 작은 이야기들을 완성해냈다.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전쟁세대는 소련 붕괴 이후의 변화가 익숙치 않고, 신러시아를 당연시하는 젊은 세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불만을 토로한다.


"우리 손자들이었다면 아마 '위대한 조국전쟁'(제2차세계대전을 가리킴)에서 패했을 거야. 요새 애들에겐 사상도 원대한 포부도 없어." (중략)

"내가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면 애들은 옛날이야기 취급을 해버리지. 그러곤 이런 질문들을 해. '왜 군인들이 연대 깃발을 사수하기 위해 죽었던 거예요? 다시 새로운 깃발을 만들면 됐잖아요.' 날 보고 대체 누굴 위해 전쟁을 하고 사람을 죽였느냐고 묻는다니까. '스탈린을 위해서 하셨어요? ' 어이구, 이 철없는 것들아! 너희들을 위해서다, 너희들!

"항복을 하고 독일놈들의 군화를 핥았어야 했나 봐......(262)


청년세대는 노년세대의 성과를 이해하지 못하고 노년세대는 그런 청년세대에 울분을 토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의 세대갈등과도 비슷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소련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고, 스탈린을 찬양하는 인터뷰이들 중 몇 명은 스탈린 체제 당시에 자신의 가족, 혹은 자기자신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스탈린 시절 부인의 가족이 폴란드에 남았다는 이유로 잡혀가 감옥에 수감되었던 바실리 노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영국 스파이, 일본 스파이들, 가방 끈이 짧았던 어떤 시골 영감은 마구간을 방화했다는 이유로 잡혀 들어왔고, 어떤 대학생은 유머를 잘못 말해서 잡혀 왔었지. (중략) 그 유머 때문에 학생은 '일체의 연락이 불가능한 수용소 10년형'을 선고받았어. 스탈린과 닮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운전수도 있었어. (246)


바실리 노인은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명예회복을 위해 전쟁에 참가했고, 당원자격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옐친의 러시아를 혐오했으며, "난 공산주의자로 죽고 싶어.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256)라고 말했고, 실제로 자신의 유산인 아파트를 공산당에게 남기고 죽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 같은 것일까? 한국에서도 청년세대가 박정희를 비판하면 "그 시대에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라고 역정을 내는 노인들이 있다고 하는데, 소련과 스탈린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심리인 것일까?


전쟁, 수용소, 감시와 밀고, 빈곤, 혁명, 학살, 테러, 이민, 사랑, 자살...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한 러시아인들은 참 불행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항상 고통에 대해서 말을 하죠. (중략) 우리들은 수용소에서 복역했고, 전쟁을 치를 때는 시체로 천지를 덮었어요. 맨손으로 체르노빌에서 핵연료를 퍼냈지요. 그랬는데 지금은 무너진 사회주의 폐허 위에 앉아 있어요. (중략) 우리는 우리만의 언어가 있어요, 바로 고통의 언어에요. (52)


러시아인들만큼 고통과 절망을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또 있을까? 아니다. 이 책에 묘사된 고통과 절망의 이야기들은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모습은 약간씩 바뀌어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것들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책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며 한국을 떠올렸다.


대중 사이에서 소련에 대한 동경이 일어났고, 스탈린 숭배자들도 나타났다. 19세에서 30세까지 젊은이들의 절반 이상이 스탈린을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꼽고 있다. (중략)

구시대적 발상들, 다름 아닌 '위대한 제국', '철의 손', '러시아만의 고유한 길' 등의 사상들이 부활하고 있다. 소련의 국가가 다시 불리고, '나쉬'라는 이름이로 불리는 콤소몰도 활동하고 있다. 공산당을 재현한 것 같은 집권당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대통령의 권한은 공산당 총서기장의 절대적 권력과 같다.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정교회가 대체하고 있다. (19)


시민혁명으로 독재체제를 무너뜨렸으나 그 결과 찾아온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빈부격차에 실망하고 과거의 독재를 그리워하는 나라, 역시 이 나라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위대했던 시절의 독재자를 닮은 강한 지도자를 원하는 나라, 과거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극단적 대립이 계속되는 나라, 자신의 나라에 희망을 느끼지 못해 다른 나라로 이민하고 싶어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혐오하는 나라, 국가를 위한 전쟁에 나서는 영웅들은 찬양하면서도 딸의 의심스러운 자살에 대한 진실을 요구하는 어머니를 경찰이 잡아가는 나라. 물론 구소련이나 러시아보다는 우리나라가 훨씬 좋은 나라임은 틀림없지만, 어쩐지 우리나라도 러시아와 같은 모순 가득한 문제들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번역상의 문제가 눈에 띈다. 일단 "공산당 매니페스토(정권 공약)"(406)라고 되어 있는 단어는 문맥상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 맞을 듯 싶다. "별장"이라고 번역하면 될 단어를 굳이 "다차"라고 러시아어 단어로 표기하는 것 또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러시아문화에 관한 역자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대부분 넘어간다. "아는 지인"(452)이라는 잘못된 표현도 또한 나온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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