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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아침에 어머니가 DMB로 뉴스를 듣는 소리에 깬다. 그리고 전날 저녁 뉴스와 토시 하나 다르지 않은 뉴스를 들으며 아침식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주부인 어머니는 하루 종일 DMB로 뉴스를 보시겠지만, 학생인 나도 뉴스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종이신문을 보지는 않지만,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흥미를 끄는 뉴스, 특히 연예 뉴스가 있으면 꼭 클릭하게 되고, 뉴스에 달린 댓글을 보고 킥킥거린다. SNS에서도 쉴 새 없이 새로운 뉴스를 읽게 된다. 저녁에는 집에 와서부터 쭉 TV 뉴스를 틀어놓게 된다. 특히 스포츠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나 기상캐스터가 오늘 무슨 옷을 입고 나오는지에 이목이 집중된다. 밤에 자기 전에 채널을 돌리다가 심야뉴스를 잠시 보고 잠자리에 든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뉴스에 중독된 시대, 바야흐로 '뉴스의 시대'다.
온갖 이례적인 사건들을 이처럼 단호히 추적함에도 불구하고 뉴스가 교묘히 눈길을 회피하는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뉴스 자신, 그리고 뉴스가 우리 삶에서 점하고 있는 지배적인 위치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없는 헤드라인이다. (10, 11)
도대체 우리에게 뉴스란 무엇이길래, 뉴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저자는 뉴스가 공포, 불안, 분노, 질시, 그리고 쾌락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뉴스는 끊임없는 재난과 범죄를 보도함으로써 공포와 불안을 야기하고, 극악무도한 범죄자들과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성공한 유명인사들에 대한 질시를 야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과 관계 없는 뉴스들을 보며 모종의 쾌락을 느낀다. 뉴스를 일종의 오락(entertainment)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뉴스는 우리에게 각기 할당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거나 흥미진진한 문제들을 찾아냄으로써, 그리고 이 더 큰 관심사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불안과 의심을 삼켜버리도록 용인함으로써 우리를 사로잡은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 기근, 침수된 마을, 잡히지 않은 연쇄살인범, 내각의 사퇴, 내년 최저생계비에 대한 경제학자의 예측 같은 외부의 혼란이야말로 우리를 내면의 평온이라는 감각으로 인도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15)
저자는 이러한 범죄와 사건사고, 부정부패만을 보도하는 뉴스의 부정적인 보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동전의 훨씬 유쾌한 쪽은 결코 뉴스가 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다. "87세 할머니가 일면식도 없는 15세 행인의 도움으로 철도역 층계를 세 계단 오르다"(50)와 같은 일상의 작은 기적들은 살인이나 강간 같은 극히 일어나기 드문 사건들에 밀려 뉴스가 되지 못한다.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지만,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뉴스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 것"이다. 요컨대 뉴스는 우리가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우리는 뉴스란 기본적으로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한 묶음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국가가 그저 절단된 손, 불구가 된 할머니, 지하실에 죽어 있는 소녀 셋, 당혹스러워하는 수상, 수조 파운드에 달하는 부채, 기차역에서의 동반자살, 그리고 해안 지대에서 벌어진 치명적인 오중추돌 사고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중략)
뉴스가 제공하는 국가에 대한 소식들이 국가 그 자체는 아니다. (52)
어떤 의미에서는 저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치나 사회에 대한 비판 대신 온갖 "미담"들만이 뉴스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것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어용뉴스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매체비평이나 언론 관련 서적들과 비교했을 때, 이 책이 원론적이고 추상적이다 못해 나이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은, 아마 저자가 뉴스의 배후에 있는 권력이나 자본의 문제는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한국의 언론이 서양의 언론과 비교했을 때 심각하게 절망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고 싶지는 않다). 저자는 뉴스가 권력이나 자본과는 별개로 존재하며, 뉴스의 문제를 뉴스라는 대상과 그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문제로만 보고 있다.
그렇게 저자가 내놓은 결론은 다소 황당하다.
우리는 전쟁, 부채, 폭동, 실종된 아이들, 시사회 뒤풀이, 신규 상장, 불한당 같은 미사일 등이 전례 없는 중요성을 갖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뉴스가 부추긴 인상에서 놓여날 필요가 있다.(중략)
뉴스가 더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때 우리는 타자와 상상 속에서만 연결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타자를 정복하고 망가뜨리고 만들거나 없애는 일을 그만둘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할당된 짧은 시간 속에서 견지해야 할 자신만의 목적이 있음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291, 292)
저자의 주장은 뉴스를 잠시 끄자는 것이다. 어차피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사고들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으니, 우리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주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 뉴스를 보는 시간을 할애하자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사적인 문제에만 얽매여 공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한 태도가 바람직한 것일까? 국회에서 어떤 정책들이 결정되고, 어떤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무관심해도 괜찮을 만큼, 사회를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만약 뉴스를 보지 않고 지내다 어느 날 병원에 갔더니 의료민영화로 의료비 폭탄을 맞게 된다면? 만약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해 있는 줄 모르고 어떤 나라에 여행을 가게 된다면?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뉴스를 안 보고 타인과 대화가 되는가?
그렇지만 이러한 불안을 가지게 되는 것 자체가 뉴스에 단단히 중독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뉴스는 우리의 실생활과 별다른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물론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관심을 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쓸데없는 뉴스는 과감하게 끊을 수 있는 뉴스다이어트가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뉴스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알고, 주체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찾아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정치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진을 빼는 데 검열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냉소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이 힘은 사람들 대다수를 혼산스럽고, 따분하고, 정신 사납게 만들어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에 관여한다. 그리고 이는 가장 중요한 사안의 맥락을 대다수 대중이 단 한순간도 붙잡을 수 없도록 무질서하고, 복잡하고 단속적인 방식으로 사건들을 보도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36)
'뉴스의 시대'란 뉴스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그 뉴스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뉴스과잉의 시대'인 것이다. 뉴스과잉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게 되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