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하는 성질 잡는 뇌과학
가토 토시노리 지음, 고선윤 옮김 / 평단(평단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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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토록 분노를 참기 어려운 것일까? 타인의 말과 행동에 그토록 예민하고 불안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불안한 마음은 분노를 일으키고 충동적인 감정은 순간적으로 이성을 마비시킨다. 분노는 상대에 큰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남기기도 한다. 분노는 두렵다, 또한 무섭기까지 하다. 그런데 우린 분노에 너무 서툴고 심지어는 무관심할 정도로 분노의 진행과정을 알지 못한다. 분노는 자기학대의 과정일까, 타인에 대한 혐오일까? 누구나 분노를 싫어하고 증오하지만 누구나 쉽게 분노를 배출하는 하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하다. 우린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지만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잃기도 한다. 심지어는 가장 소중한 가족관계를 위기로 몰아넣곤 한다. 인간의 많은 감정들 중 분노만큼 우릴 힘들게 하고 사회적 관계를 쉽게 허무는 것도 없을 것이다.

 

분노는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뇌의 비명이다. 욱하는 성질 잡는 뇌과학의 감정 컨트롤 기술의 핵심이다. 분노의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분노를 받아들이는 자신의 생체적 구성, 특히 뇌의 역할이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통제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뇌의 같은 기능을 하는 복수의 신경세포가 모인 기지를 뇌번지라는 영역으로 규정해 각 뇌번지의 과부하가 뇌압을 상승시켜 스트레스에 대한 기저로 분노를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즉 분노는 우리가 살기위한 최소한의 뇌번지 방어이자 통제수단의 최상위구조다. 사고계 뇌번지(이성영역)는 이제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때 받는 스트레스를 통제하지 못할 때 폭발한다. 특히 타인과의 이해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이해계번지를 중심으로 한 뇌의 영역이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욱하는 성질은 뇌의 많은 기능들 중의 하나 일뿐이다. 결국 인지적 과정을 통한 분노의 인식은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는 이론이다.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에 놓일 때 극도의 혼란이나 불안을 느낀다. 분노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불편한 상황을 피하는 것이지만 과부하가 걸린 뇌번지를 운동뇌번지로 이동해 잠시 쉴 틈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욱하는 분노가 치솟을 땐 무엇을 해야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까? 상대간의 분노는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파국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불안한 상황을 계속 유지하지 말고, 어떤 문제든 바로 결정짓지 말 것이며, 하는 일에 대한 진행을 멈추라고 충고한다. 또한 분노하는 상대를 대할 때는 듣는 귀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지금 화가 났으니 나에게 집중하고,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신호를 분노의 징후로 받아들이고 최대한 경청하는 것이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 최선의 선택임을 강조한다.

 

우린 왜 모든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만 이루어져야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분노는 사회를 혼란시키고 가정을 파괴하며 인간적인 삶을 무너뜨린다. 우린 분노를 다루는데 무척 서투르다. 분노는 쉽게 일으키지만 분노에 대한 예측과 문제해결에 대해선 지나치리만치 어리숙하다. 우린 뇌의 기능을 공부함으로 분노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다양한 환경적 요인들을 배제함으로 호르몬 작용을 통제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아니다. 우린 뇌의 본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욱하는 우리의 감정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잘 다룬다면 얼마든지 긍정적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전전두엽이 이성이라는 큰 교두보를 마련한 것도 생명에 대한 원론적인 고찰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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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5년, 미래경제를 말한다
유신익 지음 / 메이트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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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자본시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린 소용돌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전 세계 자본가들과 기업, 투자자들은 모든 소용돌이의 주요인들이다. 또한 국가의 성장이나 환율, 통화량 역시 소용돌이의 큰 변수들 중의 하나다. 가장 큰 변수는 이를 해석하는 본인일 것이다. 매일 변화하는 지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할까? 혹 어제의 지표로 모든 가능한 투자를 실행하고 있진 않는가? 승자의 확률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주요인이 되든지 아니면 애초에 들어가지 않는 방법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낮은 진압장벽 덕분에 많은 이들이 실패의 쓴맛을 보며 절망적인 투자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매순간 투자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거대 패권국 미국이 있다. 그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진정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주인이다.

 

3년 전만 하더라도 마치 모든 상황이 뒤집어질 것 같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자본시장의 절망은 패닉으로 이어졌고 높은 인플레이션은 사회적 기능을 잠식할 최대의적으로 전 세계 경제시장을 짓눌렀다. 하지만 2024, 다우와 나스닥지수는 연일 사상최고치를 경신하며 마치 투자는 미국주식에 라는 공식을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각인시켜주고 있는듯하다. 반면에 신흥국들은 달러발 유동성 팽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운 경제상황에 직면해있다. 지속적인 자국통화 가치하락과 전쟁발 원자재가격 상승이 소비자물가 상승과 임금상승을 부추기며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런데 왜 미국 경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홀로 상승하고 있는 것일까?

 

경제는 과연 과거의 이론처럼 효율적일까? 지난 20년 동안 케인스주의와 신고전주의는 큰 위기 속에서 저마다의 경제적 이론을 수행하며 경제학자들과 투자자들의 실질적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미중간의 무역 갈등으로 시작된 미국의 폐쇄정책과 IRA법안이라는 자국내 투자는 세계 경제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달러화 패권정책이 숨겨져 있었다. 이제 미국을 이해한다는 것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숙고해야한다는 의미다. 오직 미국과 미국인을 위한 정책, 다소 시기상조일지는 모르지만 이미 경제 패권은 미국으로 기울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경제의 신은 죽었다. 신이란 개념은 절체절명의 명령어에 가깝다. 그동안 자본주의를 통치하던 경제의 신은 무엇이었을까? 합리적인 시장과 이성적인 투자자(?), 과연 이들의 선택과 행동이 경제성장을 이끌고 혁신을 가져왔을까? 시장의 비합리성과 인간의 비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은 경제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증명되고 있다. 우린 비합리적인 시장에서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존재에 가깝다. 시기마다 위기의 해법은 다르지만 분명 서로를 위한 공존 혹은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나름의 조화를 이루며 위기를 극복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위기 뒤엔 분명한 혁신과 변화가 뒤따랐으며 인류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맞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솔직히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르면 분명한 결과가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제 이론이 설립될지도 모른다.

 

다가올 5, 미래경제를 말하다. 유신익 박사님의 현대화폐이론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책이다. 무기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시작으로 미국의 통화팽창에 대한 극한의 위기와 기회를 다루고 있다. 특히 눈여겨 볼만한 지식이 디지털화폐의 시나리오다. 이미 디지털화폐는 중국이 선점을 하고 있지만 미국 역시 CBDC를 통한 달러의 생환에 모든 가능성을 걸고 있는 듯하다. 미국은 이번 인플레이션발 위기를 통해 달러의 위상을 톡톡히 체험했을 것이다. 또한 엄청난 부채규모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을 위한 유동성 팽창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맛보았을 것이다. CBDC는 미국과 지구의 미래를 어떻게 변환시킬 수 있을까?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인간의 심리와 편리함을 추구하는 과거 지향적 편견이 자리를 잡는다면 미국이 원하는 경제적 실험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세계패권을 실현할 것이다.

 

우린 스스로의 정체성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을까? 우리의 인지는 생각보다 과거 보존적이며 편견이 가득하다. 또한 권위의 위계에 상당한 신뢰를 부여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뚜렷한 목적보단 감정에 휘둘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변화해가는 금융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금융시장을 이해하는 것보다 자신의 투자패턴을 분석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 않을까 생각해본다. 짜인 시스템 속에서 승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매일 쏟아지는 정보에 대한 해석 역시 만만치 않다. 고전적인 경제이론이 서서히 저물어 가는 듯하다. 세상은 다른 방식을 원하는데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투자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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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님의 선(禪) 명상
영화 지음, 윤희조.박재은 옮김 / 운주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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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부좌하고 허리를 반드시 세운 채 눈을 감고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명상, 몇 분만 지나면 종아리부터 시작해 온몸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앉아있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고 눈을 감고 몰입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줄 몰랐다는 자책감과 한숨이 여기저기 터져 나온다. 몸은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마음은 종잡을 수 없이 분주하기만 하다. 잠시만 몸을 쉬고 마음을 내려놓은 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명상은 자신을 바로 보는 시간과의 교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앞만 보고 달리는 시선이 내면을 바라볼 때 비로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에 대한 통찰이 시작된다.

 

우린 명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입문이 결코 쉽지 않다. 정보는 많지만 지속가능도 어렵다. 명상은 오롯이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과정이 전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물질적인 풍요나 즐거움보다는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의식적인 작업이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명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고 오롯이 혼자만의 세계로 몰입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 세상은 분주하게 흘러간다. 더불어 내 몸과 마음도 분주하다. 하지만 우린 고요하고 정적인 일상을 추상한다. 명상은 분주한 삶을 내려놓고 생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좇아가는 가장 현명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선 명상은 대승불교 선을 중심으로 명상에 집중하면서 높은 수준의 영성에 도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일반적인 명상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특히 출세간의 지혜를 얻기 위한 삼매과정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더불어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을 설명해준다. 명상은 단계가 있다. 각 단계마다 입문하는 방법이 다르고 체득하는 경험이 다르다. 선을 집중력이라 말하는 영화스님의 말씀처럼 자아를 버리고 내면에 집중한다는 것은 지식이나 이론만으론 결코 알 수 없고 이를 수도 없다. 흔히 내려놓기나 마음챙김등을 통해 다소간의 안정과 평화를 누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나는 이유가 명상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과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선지식을 통해 명상의 실체적인 형상을 구전하다. 명상은 혼자 시작하지만 특별한 스승이 필요한 이유다.

 

명상의 진전을 위해선 덕과 복이 필요하다. 특히 선함과 계율을 강조하는데 선은 바른 선정을 길러주고 계율은 올바른 명상을 인도한다. 저자는 정직함에 대해 강한 의식을 부여하며 선행을 베풀고 덕을 쌓는 것이 진정한 수행자의 길이며 복을 짓는 길이라 말한다. 이는 자신을 바로보기로부터 시작해 타인에 대한 배려, 은혜에 보답하고 양보하는 등 불필요한 집착과 번뇌를 일으키는 외부적인 상황을 내려놓기 위한 최소한의 수행이다. 廻光返照(회광반조)란 빛을 되돌린다는 뜻이다. 평상이 우리가 주목하는 외부감각을 비추는 빛을 내부로 돌리는 것이다. 감각에 치우친 외적 대상은 우리의 생명을 고갈시킨다. 빛을 안으로 돌려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한다는 의미는 명상의 가장 큰 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적체험을 한다는 것은 본래 자신을 만나는 과정이다. 본래의 모습,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상태다. 지금껏 경험해왔던 생각이 자아라는 형태로 자신을 만들어왔다면 본래의 나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명상은 체험의 과정이다. 깊은 집중력으로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만나는 과정이다. 선은 지관과 사유수를 의미한다. 思惟修(사유수) 사유의 수행을 의미하고 이는 삿되지 않는 정념과 이로운 정념을 포함한다. 止觀(지관)은 멈춘다는 지와 통찰한다는 관의 의미로 지의 과정은 망념을 없애고 마음을 차분히 한다는 뜻이다. 마음속의 끊임없는 번뇌와 집착은 외적인 사유가 아니라 명상을 통해서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지를 통해 마음이 고요해지면 시야가 명료해진다. 관은 지혜를 이루는 통찰의 과정이다. 우린 명상을 통해 스트레스 감소, 기억력 증강, 혈압 낮춤, 만성통증 감소 등 다양한 효능을 기대한다. 하지만 명상은 이러한 기대치를 훨씬 능가한다. 자신에 대한 올바른 믿음은 사회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우린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것일까? 명상이 답을 주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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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 어제의 불행이 오늘의 행복이 되는 쇼펜하우어의 지혜
이동용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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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위험하다. 스스로를 지혜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거만하게 만들기도 하기때문이다. 거만한 사람이 배움을 통해 권력자가 된다면 그는 치밀한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배움은 선택의 범위를 넓혀 스스로의 자유 의지를 확장한다면 공존이라는 사회적 평등을 실현 할 수도 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 한가? 논어 학이1장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배움에 대한 즐거움이 넘치는 문장이다. 배움은 분명 마음을 설레게 한다. 우린 어렸을 적 배움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배움에 극히 소극적 마음을 가지게 된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대부분의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배워야 하는 이유는 즐거움도 있지만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한 변화에 목적이 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두려움을 느낀다. 지식에 대한 성찰 역시 지속적이지 않다면 불확실한 생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배움이란 평생을 통해 수용해야할 자기선언이자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을 통찰하기 위한 최소한의 덕목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배움이 필요하다. 이왕이면 즐겁게 배우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키울 수 있다. 헌데 배움은 결코 즐겁지마는 않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생각과 지식 혹은 경험을 모두 내려놓는 순간을 맞이해야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배움은 과거와의 결별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기부정은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다. 편향적이고 일방적인 배움은 삶을 구속한다. 자유를 얻는다면서 자기생각에만 빠진다면 배움에서 얻는 효과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쇼펜하우어를 주목해야하는 이유도 배움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배움은 무엇을 의미할까? 중세 시대 1000년을 아우르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강한 부정은 르네상스를 중심으로 한 인본주의의 탄생을 재촉시켰다. 그리고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중심으로 탁월한 사상과 작품을 남기며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

 

쇼펜하우어 역시 그 중 한 인물이었다. 그는 세상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누구나 이럴것이다라는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흔히 그를 세상을 비평하는 염세주의자로 평가한다. 하지만 우린 사상가를 논할 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넘겨짓는 오류를 범한다. 쇼펜하우어에겐 거대한 벽이 있었다. 그는 인간이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거론한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하지만 고통을 인내해야만 하는 이유는 신 때문이 아니다. 자신을 위한 고통의 감내, 세상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중심은 어디인가? 진정으로 당신이 바라고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인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이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다.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의 방법은 염세주의 철학이 주는 뜻밖의 위로로부터 시작한다. 삶의 여정을 통해 만나는 수많은 상황들을 통해 무엇을 받아들이고 뱉어야하는지 인간 본연의 마음과 생에 대한 생각, 그리고 고통스러운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주제들을 저자 특유의 감각적 표현을 빌려 쇼펜하우어 철학의 정수를 표현한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는 결국 불행이든 행복이든 모든 삶속에서 펼쳐지는 개인이 맞이하는 총합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린 그 속에서 살아가고 숨을 쉬고 타인을 만나고 자신을 바라본다. 인생이란 여정의 끝을 가늠하지만 경험하지 못했기에 막연히 흘러가는 강물에 몸을 의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삶의 여정의 일부분이다.

 

우린 쇼펜하우어, 니체에 열광한다. 그들의 말 한마디가 주는 메시지가 너무도 탁월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단 눈앞에 놓인 현실에 집중하는 것이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데 훨씬 유용하다는 당시로선 혁명적인 철학사상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철학은 살아 움직인다. 철학은 인간이 중심이다. 인간의 모순과 인식은 각자의 세계라는 고유한 특수성으로 사회의 포괄적인 수용범위를 넓힌다. 인간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세상의 답을 알기를 원한다. 위대한 사상가들의 아포리즘을 100개정도 암기해 평생을 바라본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자기계발은 없다는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여본다. 삶의 철학은 자신의 평가에 기초한다. 자신의 생각과 기억, 그리고 경험이 자신의 모든 것이다. 배움에 대한 중요성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만 제대로 보고 있지 않다. 그래서 가슴을 뜨겁게 하고 생각에 죽비를 때리는 아포리즘이 필요하다. 자신을 가치를 높이는 것은 삶의 의미를 북돋아 준다. 지옥 같은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다. 현실을 바로 보는 것은 자신의 선택뿐이다. 선택을 잘 하기 위해선 끊임없는 배움이 필요하다. 학문이 끝나면 철학이 시작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이젠 자신만의 철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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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인간, 그리고 하나님 - 실재에 대한 통전적 앎을 위한 과학과 신학의 연대
이안 바버 지음, 김연수 옮김 / 샘솟는기쁨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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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신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관점은 인간이 기록하고 경험한 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신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초월적 경험이자 인지적 대상이다. 인간은 인지적 과정을 통해 사물을 분석하고 기억하며 후대에 전달한다. 우린 이를 경험이라는 틀을 만들어 정체성이라 부르고 자아를 확립한다. 하지만 세상은 불확실하다. 이에 대한 두려움은 의식적인 사고를 쉽게 무너뜨리며 절대자에 대한 숭고한 힘을 갈망하게 된다. 즉 신에 대한 생각과 신과 인간의 관계는 지속적인 합의와 일탈이 반복되는 이론이자 실체다. 신은 어디 있는가? 전통적인 신학의 신은 너무 다변적이다. 공포와 시기의 신이자, 사랑과 희망의 신이다. 신은 인간의 모든 상황에 관여하는 것 같지만 인간은 신의 부재함을 느끼는 경우가 훨씬 많다.

 

자연, 인간, 그리고 하나님, 위기의 순간마다 혹은 변환의 순간마다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특별한 세 가지의 논점이다. 자연은 물리적 법칙이 적용되는 과학의 영역이다. 또한 신이 창조한 절대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과학적 가설은 언제나 인류에게 필요 이상의 진보를 선물해 주었다. 인간은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지만 자연의 이면에 감추어진 규칙과 질서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인간에게 삶의 방향과 평화와 공존, 사랑과 영생이라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선물해 주었다. 인간, 인간은 무엇일까? 너무도 많은 설명이 필요한 복잡계 유기체인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자 하나님의 자손이자 본래 그대로인 존재다. 세상의 규칙과 질서를 원했기에 과학이란 학문을 탄생시켰고 내적인 갈망을 해결하기 위해 신을 찾아 나섰다.

 

본 책의 주제는 과학과 신학의 연대다. 그 중심에 진화론과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양립성, 기독교 원죄론에 대한 이해, 신경과학과 인공지능과 영혼의 관계. 신학과 윤리학을 중심으로 한 환경의 변화 등 과학과 신학을 통한 인간 이해에 관한 심도 있는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저자는 진화론의 생물학적 과정들로 자기조직화, 불확정성, 하향식 인과율, 정보의 전달등을 예시하며 불확실성에 대한 해결자로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한다. 그런데 최근 신경과학의 발달은 이러한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인간의 인지적 과정과 선택에 대한 결정이 다양한 환경적 외부요인들의 의해 발생한 유전적 변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를 벗어나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를 투사한다. 이런 감정은 오직 인간 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고통일는지도 모른다. 위협이나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 인간의 성장을 지속시켰다면 신에 대한 형상 역시 인간의 내면적 모습을 따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진화와 신의 영역 다툼은 더 이상 특별한 논점이 아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진화를 알 수 없고 신이 우리 안에 있다는 믿음은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우린 신과 진화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할까? 인간이란 존재에 다양성이 존재해야하는 이유는 생존에 대한 불확실성을 입증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아닐까?

 

신에 대한 생각, 유독 역사의 진실여부를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종교의 역사에 관해서 그리 너그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초월적 대상에 대한 생각은 지속적으로 변해왔고 초월에 대한 의미 역시 과거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되지만 종교는 여전히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처럼 때론 그림자처럼 인간 내면을 통제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 때문일까? 다윈은 적자생존이라는 설정을 표현한 적이 없다. 인간의 생물학적 고찰은 후생유전학으로 발전되어 더 이상 유전자 결정론에 얽매이지 않는다. 분명 우린 1세기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생리적 변화를 발견하고 종교의 염원인 영생의 초입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모든 세포는 생존하기 위해 필연적인 변화를 거친다. 종교에 대한 생각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연, 인간, 그리고 하나님이 주는 메시지는 포괄적이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이 모든 것이 삶의 중심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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