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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 열여섯 소년, 거장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산책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저녁에 시간 있으면 집에 와 책을 읽어 줄 수 있겠나?"
방과후 서점에서 일하는 열 여섯 소년에게 단골인 65살 노인이 다가와 말한다. 그 노인은 바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당시 보르헤스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토록 좋아하는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하고도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던 소년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알베르토 망구엘. 산책자. 2007) 은 저술가인자 독서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이 십대 시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나고 난 뒤 자신의 책에 대한 시선과 정신적 성장을 그려 놓은 책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책장과 책장 사이에 머무르게 한다.
장석주 시인도 그의 산문집 지면에 두 사람의 얘기를 소개한다.
"국립 도서관장을 지낸 보르헤스에게 피그말리온 서점 알바생 소년 망구엘은 책 읽어 주는 사람으로 발탁된다. 그의 서재에서 열 여섯 소년이 책을 읽으면 보르헤스는 눈을 감고 조용히 경청했다. 훗날 망구엘은 보르헤스를 이렇게 기억해 낸다." 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알맹이였다. 그는 수천 년전에 시작돼서 한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러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장석주 산문집"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어디에서 구할까.">
“하지만 보르헤스와 나누는 대화는 내가 생각하기에 모름지기 대화란 그래야 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책에 대해, 책의 태엽 장치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가들과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 또는 확신 없이 직관적으로 얼핏 스쳐갔던 것들을 보르헤스의 목소리로 들으면 그 짙고도 명백한 광채 속에서 그것들은 찬란하게 반짝였다. 기록 같은 건 하지 않았는데, 그와 마주 앉은 저녁 시간이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만족스러웠다.”12~13쪽
"서른 살부터 서서히 진행되다가 쉰여덟 번째 생일을 치른 후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그의 실명은 독특한 것이었다. 하지만 눈이 멀어 세상을 떠난 영국계 증조부와 조부에게서 약한 시력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예견된 실명이기도 했다. (…) 보르헤스는 자신의 실명을 자주 거론했는데, 주로 문학적인 차원에서였다. 자신에게 ‘책과 어둠’을 주신 ‘신의 아이러니’를 거론한 것은 유명하고, 호머나 밀턴 같은 역사 속의 유명한 장님 시인을 들먹였으며, 자신이 호세 마르몰에 이어 눈이 먼 세 번째 국립도서관장이라는 얘기를 할 때는 미신적이었다.15쪽
"우주를 도서관이라고 부르고 낙원을 ‘도서관의 형태로’ 상상한다고 실토한 사람의 서재치고는 그 규모가 실망스러웠는데, 어떤 시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란 단지 ‘지혜를 모사(模寫)’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책이 넘치는 공간, 책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책장, 원고더미가 길을 막고 빈 틈새마다 빼곡한 잉크와 종이의 정글을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와서 보면 몇 귀퉁이에만 얌전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27쪽
"있잖니, 눈이 멀지 않은 시늉을 하며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처럼 책을 탐독하고 싶어. 새로 나온 백과사전이 얼마나 갖고 싶은지 몰라. 지도의 강줄기를 따라가고 수많은 항목에서 놀라운 내용들을 찾아내는 상상을 한단다.”"28쪽
보르헤스의 방은 평범했다. 철제 침대와 의자 하나, 작은 책상과 나지막한 책꽂이 두 개가 전부였다. 그의 세계는 오롯이 언어로 채워졌고, 음악과 색과 형상은 좀처럼 그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특히 그림을 보는 눈과 음악을 듣는 귀가 없었다. 브람스를 존경한다고 했지만, 그의 음악은 듣지 않았다. 탱고와 밀롱가를 흥얼거리기도 했지만, 탱고를 지나치게 예술화시킨 피아졸라는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재즈가 좋다고 했고, 영화 를 높이 평가했다.
가끔은 그가 직접 선반에서 책을 고르기도 한다. 어떤책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서, 어김없이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곳 예를 들어서 외국에 갔다가 책방에 들를 때가 있는데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 보르헤스는 모형지도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훑듯 이 책등을 어루만진다. 그곳의 지형을 알지는 못해도 살갗으로 지리를 읽는 것같다. 한번도 펼쳐본 적이 없는 책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 뭐랄까. 장관의 직관 같은 것이 지금 만지는 책의 내용을 알려주는 지 분명히 눈으론느 읽을 수 없는 그책의 제목과 이름을 판독해 낸다."35~36쪽
보르헤스의 또 다른 전복은 모든 책은, 어떤 책이건, 다른 모든 책들의 전망을 자동적으로나 지적으로 품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보르헤스는 이 생각을 극한으로 추구할 수 있다면, 그게 사실이라고 믿었다. 글이라는 건 결국 자모 스물네 개(언어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겠지만)의 조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모들의 무한한 조합은 상상할 수 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책이 꽂힌 완벽한 도서관을 제공한다. (87쪽)
그는 모든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글을 신뢰했고, 직접 시범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글을 읽는 우리 독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우주라고 부르는 무한한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알려주었다. (97쪽)
망구엘은 4년동안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책 읽기, 글쓰기에 대해 탐닉하게 된다.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고 통해 정신적으로 성숙해졌고,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달라졌다고 말하는 망구엘이 그의 인생에서 보르헤스는 거대한 산이 아닐까.
이 책을 읽다보면 낯선 작가 보르헤스가 좀더 가깝게 느껴지고 그의 문학이 궁금해지게 한다. 작가들에게 그들만의 문체가 있다면 그의 문체는 '보르헤스적'이다. 보르헤스를 통해서 한편 망구엘을 본다.
"저녁에 시간 있으면 집에 와 책을 읽어 줄 수 있겠나?" "있잖니, 눈이 멀지 않은 시늉을 하며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처럼 책을 탐독하고 싶어. 새로 나온 백과사전이 얼마나 갖고 싶은지 몰라. 지도의 강줄기를 따라가고 수많은 항목에서 놀라운 내용들을 찾아내는 상상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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