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 조선 화가들의 붓끝에서 되살아난 삶
이일수 지음 / 시공아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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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는 걸 좋아한다. 그렇다고 그림에 대한 지식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보이는대로 본다. 우멍하게 들여다고 있으면 그림속 소제들이 바늘귀만한 느낌으로 내게 말을 걸어 온다. 무식하면 용감하다했던가. 순전히 그 느낌만으로 그림앞에 선다.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작가는 보지 않았다. 제목만 봤다. 사람 냄새가 날 것 같아서다. 책을 빌려와 앞 두세 꼭지와 무턱대고 중간 꼭지를 펼쳐 보고는 동네 단골 서점에 바로 주문해 받았다. 제목도 그렇거니와 묵은 그림들을 읽어주는 작가의 해박함과 입담 좋은 말솜씨가 버무려져 글맛이 난다. 그림을 그냥 보는 나에게 그림은 이렇게 보는거야"라고 귀띔해 주는 것 같다.

 

그제야 작가를 찾아봤다. 갤러리나 박물관에서 전시를 기획하고 나 같은 대중들에게 그림을 통해 지적 유희와 감성을 키워 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가 쓴 책으로 <즐겁게 미친 큐레이터>,<뜨거운 미술 차가운 미술> 등 11권의 저서가 있는 전문 그림 이야기꾼이다.

 

 

 

 

 

이 책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맨 앞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조선 화가들의 그림 중 신윤복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는 <기다림>이다. 책 표지에도 걸려 있다. 저자는 그만큼 이 그림에 애정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저자의 말에 의하면 그림에는 머리로 지적 유희를 즐기며 보는 그림이 있고 촉촉한 가슴으로 보는 그림이 있다. 가슴과 가슴이 만나고 머리와 머리가 만났을 때 비로소 그림을 보는 즐거움과 감동이 배가 된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혜원 신윤복의 그림인 만큼 가슴이 먼저 알아보는 그림이라고 하겠다.

 

저자가 그림을 어떻게 보고 읽어내는지 그림<기다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림 속 키가 큰 여인은 따듯한 봄날 담 모퉁이에 붙박여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 비스듬히 기대서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저자는 저곳에서  누군가를 오래 기다리고 서있었을 거라 추측한다. 주름이 풍성한 치마 위 두른 앞치마를 보고 화려하지 않지만 깔끔하고 고운 자태를 읽어낸다.

 

옛날 여인들의 고단한 노동을 뜻하는 앞치마인데 그림 속 앞치마에서는 고단함보다는 인생에 순응하는 여인이나 하얀 미사포를 쓰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여인으로 다르게 본다. 또한 저자는 눈썰미는 예리하다. 그림 속 여인의 소품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설명하며 거기에 섬세한 감성까지 입힌다. 옛 그림을 읽어주기로 유명한 작고한 오주헌 작가나 손철주작가와는 다른 특유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예를 들면 여인이 얹은 트레머리와 이마와 목덜미 솜털에 가 있는 시선이다. 다소 무겁고 답답해 보이는 트레머리에서 저자는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음과 장신구 하나 꽂혀 있지 않은 모습에서 그녀가 정갈하고 소박한 성품의 소유자는 걸 읽어낸다. 거기다 이마와 목덜미의 솜털, 동정 아래 깃, 짧고 야무지게 맨 짧고 붉은 저고리 어느 것 하나도 그녀가 보면 의미가 살아난다.

 

얼굴을 외로 틀고 있는 여인의 시선을 따라가면 버드나무 가지가 휘늘어진 방향, 불가에서 뜻하는 버드나무의 의미, 뒤춤에 보이는 모자(송낙-불가의 스님이 납의(누덕이 옷) 함께 착용)를 보고 여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안타까워하며 그 암시를 짚어낸다. 무심코 보았으면 그냥 지나쳐버림직한 그림도 그 속에 담긴 뜻을 알려주니 그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은 이 밖에도 옛사람들의 삶과 사랑과 시대를 그림으로 읽어준다. 조선의 화폭에 담긴 노선비의 세상을 걱정하는 눈길, 신분 차별에서 오는 울분, 백성들의 궁핍한 삶을 바라보는 관리의 고뇌엔 찬 눈빛 조선의 생태학을 나비로 들려주는 그림 등 그림들을 통해 저자가 들려주고 싶은 말은 무궁무진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을 좇아가느라 힘들다고 말한다. 저자가 왜 책 제목을 그리 부쳤을까. 지금보다 더 어렵던 옛날 사람들의 치열했던 삶을 돌아보라고 그런 건 아닐까. 그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너머를 보려 한다는 일, 참 매력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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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녀석은 휘파람을 잘 분다. 처음엔 노래도 아니고 장난처럼 아무렇게나 불어대더니 요즘은 제법이다. 무슨 곡인지는 모르지만  멜로디가  귀에 붙는다. 샤워할 때 , 아침에 학교 갈 때, 이어폰을 꽂고 음악들을 때, 시도 때도 없이 휘파람을 불어댄다. 그러다 보니 저녁에도 신이 나 있는 날이 많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 두 번이지. 귀에 거슬려  "저녁에 휘파람 부는 거 아니야. " 하면 녀석은 되는 이유를 따져 묻는다.

 

어릴 적 어른들한테 강압적으로 안된다는 얘기만 듣고 자랐지 그 이유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고 커서도 알려고 찾아본 적 없다. 아마 이 말도 그런 맥락 중에 하나였다. "옛날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며 도깨비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할머니나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왜 그런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살았다.

 

그런데 <소설가의 일>이란 책을 읽다 보니 김연수 작가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아주 그럴듯하고 설득력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일은 안 하고 자꾸 몽상에 바지니까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제 밥벌이를 못하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뭐 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소설가가 되어 이십 년 정도 소설을 써 보니까 거기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겠다. 그 숨은 뜻을 알기 위해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 하는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데서 출발해보자.

 

"감정이입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이 꼭 내 것인 양 느껴진다는 뜻이니까 공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공감이라는 걸  쥘리앵 소랠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마음 졸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을 읽으며 손에 땀을 쥔다는 말이 꼭 그 뜻이다. 감정이 같아지면, 몸도 한 몸이 되는 셈이다. 때로는 소설 속 주인공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건 그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공감능력이 아주 뛰어나다."(...)(160쪽)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이야기의 속성 때문에 나온 말이리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남들보다 감정이입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그건 특히 타인의 좌절에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테니, 자기 시간과 돈을 남들을 위해 쏟는 일도 많겠지. 이런 사람이야말로 전 세계 모든 할머니들이 걱정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162쪽)

책 읽는 재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처럼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흥은 쏠쏠하다. 좋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 맞아, 나도 그랬지. 하고 마음속으로 흡족해 공감을 꾹 누를 때는 ​생면부지의 작가와 교감을 하는 기분이다.

책은 항상 곁에 있는 든든한 친구며 변질되지 않는 응원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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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 두 편

 

 

반딧불 하나가 내 소매위로 기어 오른다, 그래, 나는 풀잎이다. - 이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것을 모르다니 -바쇼

<마음대로 詩 해독解讀> 간 밤, 세상에서 가장 짧다는 ​시(하이쿠)를 읽었다. 아마 시인은 봇물처럼 쏟아지는 감정을 하이쿠 라는 용기에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담느라 수도 없이 언어를 갈무리 했으리라.

스탠드 불빛아래서 읽는 시는 나도 모르게 여백에 갇힌다.반딧불이가 팔로 기어오르는 모양을 상상하고 내가 풀잎이 되는 순간을 떠올리면 이슥한 밤기운이 감도는 듯 하다.

 시는 행간을 읽되 그 사이의 고요까지 읽어야 제 맛이 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어둠속 반딧불이 빛같다.​ 언어의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고 최대한의 의미를 담아낸 시인처럼 순간을 영원처럼 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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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한 땅을 뚫고 나온 버섯이다.
이름은 모르겠다.
나무들 새로 비치는 햇살때문인지 흰 빛깔이 눈부시다.
자제발광하는 것 같다.

잔개미들 이 버섯에 꼬여있다.
먹잇감을 탐색하는 중일까
위 아래로 흩어져 기어다닌다.
 

 

 


바로 그 옆에선 썩어가는 버섯도 있다.
핀 지 한참 됐나보다.
갓 가장자리가 위로 치켜져 있다.
흰 털모자를 뒤집어 쓰고 있다

버섯이지만 죽어가는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건 사색이 되어 새까맣고
또 어느건 뜨건 물에 넣었다 빼놓는 것처럼 풀어져 있다.

사람사는 세상이 요지경속이라는데
숲 속도 마찬가지다
 

 

 

 
계단 따라 내려오면서 난간대를 잡다 깜짝 놀랐다.
처음엔 벌집인줄 알았는데 뱀허물이다.
거기에 곤충들이 꼬였다.

바로 머리 위 나뭇가지에는 30cm는 족히 되는 허물에 파리 꼬이듯 붙어있다.
 

 

 

 
또 한 구석,
거미는 살기 위해 밤새 줄을 쳤을테고
잠자리도  살기 위해 가다가
거미줄에 걸렸다.

벗어나려고 몸부림 친 걸까.
거미줄이 그쪽만 성글다.
 
 

 

 

 
 
바로 그 아래 걸려든 곤충은
아직 숨이 붙어 있다.
벗어나려고 그러는지 뒷다리늘 모아 비비적댄다
뭘 잘못한 걸까. 그 모양이  한 번 봐 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비는 것 같다.

저것들은 죽어가고
거미는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겠지.
저것들 덕분에  또 하루를 살 것이고
또 어딘가에다 부치런히 줄을 치겠지.
 

 

 

 어제 오후에 내린 비로 숲은 젖어있고 나무들은 싱그럽다.

 

 



숲길에 세워진 길 안내판이다.
초행길인 사람들한테는
세 갈래 길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길 도우미다.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의 삶. 싱겁고 어리석은 줄 알지만
저 안내판처럼 고민할 필요없이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면
아까 잠자리나 곤충처럼 시험에 들지 않고 지름길로 접어들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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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해야 할 일을 깜빡깜빡한다. 사람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종종 있고

가스불, 현관문에 집착하는 횟수가 빈번하다.

그럴때마다 혹시? 하고 당혹스러워지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건망증이라고 한다.

 만에 하나 이게 건망증을 넘어 희귀성 알츠 하이머'라는 진단을 받는다면?​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 대학에서 유능한 언어학 교수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앨리스에게 이상징후가 나타난다.

 

강단에서 강의도중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조깅도중 갑자기 기계가 작동을 멈춰버린듯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 버린다.

 

원에서 내린 진단은 '희귀성 알츠 하이머'라는 병이다.

그것도 자식들에게 유전된다는 의사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나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녀.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아야 하는 그녀의 표정에 숨이 멎는 듯했다.

사랑하는 아이들, 평생을 함께 해온 다정한 남편 존, 그동안 열심히 일궈온 자신의 일과 삶, 앞에서

 

그녀는 말한다. "기억은 사라져도 나는 여전히 살아갑니다."

기억은 점점 흐려지지만 가족들과 함께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 나가는 앨리스는

아이들의 이름도 점점 집안의 동선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절망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 마저 머릿속의 지우개가 다 지워버리는 일은 비극이다.

살아가면서 기억은 때로는 살아갈 용기를 주고 힘들 때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뇌가 죽어가고 나를 '나'이게 해주는 기억들이 하나 둘 지워진다는 건

암흑을 넘어선 공포가 아닐까.

 

"지금이 내가 나일 수있는 마지막 시간일 거야."

 

고통스러움을 견디며 그저 애쓰고 있을뿐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여전히 앨리스였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영화속 '앨리스' 상황을 나와 동일시했다. 공교롭게도 쉰이라는 나이가 같고 제대로 늙어보지도 못한 나이때문이었을까. 삶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기에 삶인 것 같다.

 

이 영화를 본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기억 속에서 줄리안 무어가 아닌 앨리스가 여진히 남아 있는  무서운 병을 앓고 있는 그녀가 안간힘을 버티며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루게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과 '희귀성 알츠 하이머'에 걸린 주인공이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을 이해해 이 영화를 완성시킨 리처드 글랫저 감독의 열정에 숙연해진다. 줄리안 무어의 열연때문일까 '기억'과 '기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건강하며 아무렇지 않게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게 참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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