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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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는 유명한 신경과학자이자, 작가이다.

'신경과학'이라는 분야가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는 의학의 영역인 만큼

일반인들에게는 생경하게 느껴지는데,

올리버 색스는 일반인과 '글'이라는 매체로 소통을 해 온 분이다.

2015년 안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이 책은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저서이다.



사실 최근 들어 책을 끝까지 읽는 데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린 책이다.

나의 모국어로 읽는데, 외국어로 읽는 책만큼이나 힘들었다.

나의 배경지식이 부족한 것이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러나 지적 욕구를 자극하고 많은 부분 반짝! 하는 통찰력을 준 책이었다.



일상의 자잘한 사건도 탐구하는 마음을 가진 탐구자에게는 탐구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가 생생히 기억하는 어떤 화재 사건에 대해 그의 형은

그 사건 발생시 저자와 그의 형은 현장에 없었고,

아주 생생한 설명을 삼촌에게 들어다고 알려준다.



나 또한, 동일한 경험이 있다.

다섯 살 때 미술원(유치원 같은 데)에 안 가겠다고

길바닥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기억이 있는데

이것이 정말 내 기억인지, 엄마가 말해 준 것과 길에서 울고 있는 예전의 내 사진을 보고

내가 재구성해 낸 기억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해서 어린 나에게 전적인 감정이입을 해서 실제 기억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것들, 혹은 자기자신이 예전에 썼던 글들이

뇌리에 남아 그것을 재생산해 내는 의도적이지 않은 '표절'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매스컴에서 많이 나오는 표절 사건들을 보면 고의로 베낀 경우도 있지만

어디선가 언젠가 들었던 어떤 멜로디나 이미지가

어느 순간 자신에 의해 발현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표절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사고과정이라는 것이

그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올리버 색스의 지적이 무척 신선했다.



어려서부터 사부작사부작 앉아서 피아노를 치고 노래도 만들기도 했었다.

창작동요대회라는 게 있었는데, 내가 만든 곡으로 동생을 내 보겠다고 열중하기도 했다.

뭐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한번 맘 내키면 뭐든지 홀라당 버려버리는 성격 탓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러고 혼자 놀곤 했었다.

(첫 작사작곡한 노래는 생각난다. 이름하여 '몽당연필' ㅋㅋㅋ)



어쨌든 그러면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몇 곡 만들었던 것 같다.

어느날은 무척이나 쉽게 음이 잡히는 것이다.

악보 그리는 것을 정식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적당히 내가 보고 치고 부를 수 있는 만큼 그렸다.

꽤나 만족스러워 했던 곡이었는데, 세상에나.

그 다음 주 교회에서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같은 멜로디의 익숙한 곡을 불렀다.

가사는 달랐지만 그 음이 머릿속에 남아서 그걸 그대로 베껴서 그려놨던 것이다.

스스로도 신기해했는데 저자가 그런 내용을 다뤄서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면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아래와 같다.



진정한 독창성은 '기억과 차용'에서

'동화와 통합'의 수준으로 도약하는 잠복기를 통해 탄생하며,

이 과정에 관여하는 핵심 요인은

심오하고 의미 있고 능동적이고 개인적인 몰입이다.



...​



'남의 것을 완전히 소화시켜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자기 자신의 경험, 생각, 느낌, 입장과 혼합하여

얼마나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흔히, 작가들이 '필사'를 글쓰기 연습의 한 방법으로 제시하는데,

위대한 작가들의 글을 필사함으로써 좋은 문장구조와 어휘를 체화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미국의 코미디언 코난 오브라이언도 같은 말을 했었다.

당대의 최고의 코미디언들을 따라하고 모방하며 그들이 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코미디 스타일을 구축해 내게 된다는 것이었다.



완벽히 처음인 창조는 없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고 들은 것들을 통해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 같다.



저자는 정말 타고난 탐구자라는 생각을 했다.

청각을 잃어가면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 비슷한 음운을 가진 전혀 다른 말로 들리는데

그것을 탐구대상으로 삼아 노트에 자기가 들은 말, 실제로 상대방이 한 말을 기록하여 분석하였다.

또한 색전술을 받고 수면발작과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섬망 등 정신적인 증상까지 겪으면서도

자신의 자서전의 교정쇄를 수정하였다.

글쓰기가 즐거움이었고 오히려 글쓰기가 있었기에 고통을 이겨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던지...



상이한 동물들을 갈라놓은 심오한 생물학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든 동물들은 나름 다양한 수준의 정신을 발달시키거나 보유하고 있다.

우리도 그런 동물들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종교적인 이유로도 그가 신봉하는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

일부 각 종이 적응하기 위하여 변형되어 왔다고는 생각하지만 종 간의 진화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가 가진 "우리도 그런 동물들 중 하나"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모든 자연계 속의 동물들과 식물들에게 행하고 있는 모든 횡포에 대해

경종을 울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등생물이며 모든 것을 지배할 유일하게 높은 정신적 수준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오만하고 폭력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 영역에서 그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 지적한다.

우리가 흔히 예술가나 과학자 등에 대해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올리버 색스는 "여건 미성숙"이라고 지적한다.



모든 과학 분야에서 놀랍도록 흔히 발견되는 암점의 원인은 여건 미성숙뿐만이 아니며,

지식 상실, (한때 뚜렷이 확립된 듯 보였던) 통찰력 망각,

때로는 통찰력이 부족한 설명으로의 퇴행도 단단히 한몫을 한다.



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려면,

뭔가를 순간적으로 파악하거나 알아듣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우리이 마음이 이를 수용하여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에 맞닥뜨리도록 허용해야 한다.



평생을 탐구자로서 살아온 노학자가 죽음에 임하여 남겨준 이 주옥같은 지혜를 깊이 간직하고 싶다.

여담이지만, 과학, 의학 분야의 최고의 번역자의 경이로운 작품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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