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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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안 읽으면 안 읽었지, 책 한 권을 이렇게 오래도록 붙들고 읽긴 처음이다. 처음엔 안 읽혀서 읽으려고 무진 애를 썼고, 중간쯤 읽었을 땐 흠결을 찾아내기 위해서 애를 썼고, 나중에는 나 같은 전공자가 볼 때 이건 소설이 아니라 시트콤이야, 라고 결론을 냈지만, 그럼에도 오베라고 불리는 이 남자가 궁금해서 자꾸 읽었다. 

    잠깐, 이 책 어디가 불만이냐고? 그건 이 책 거의 모든 곳에 있는 저 재기 넘치는 비유적 표현들 때문이다. 뭐 이런 식이다.

    

오베는 마치 고백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상자를 바라본다(9면).

 

대신 그는 병원까지 가는 내내 그녀의 배를 계속 흘끗거렸다. 좌석 커버에 별안간 양수라도 흘릴까봐 신경 쓰여 죽겠다는 듯(165면).

 

오베는 핸드 브레이크까지 오기 위해 군용 장애물 코스를 뚫고 와야 했던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누가 눈에 레몬즙을 뿌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얼굴 근육이 뒤틀려 있었다(318면).  

 

 

   이렇게 현란하고 발랄한 말들을 남발하면 읽는 사람은 피곤하단 말이오, 작가양반!     

 

    결국 오늘에서야 다 읽었는데, 이걸 읽겠노라고 커피숍에서 다섯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었다. 마지막 백 쪽 정도를 남겨 놓고서는 다 큰 어른이, 게다가 덩치도 큰 인간이 쪽팔리게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다. 엉엉 울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참~~~

 

    원래 좀 감상벽이 있어서 감동적인 이야기에 쉽게 반응한다. 이런 따뜻한 감동이라니 오랜만에 경험하는 이 따뜻함이라니. 해피엔딩 따위는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오히려 그래서 더 쉽게 반응하는지도 모르겠다. 여튼 잘 팔리는 소설이란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영화의 스틸컷. 출연진들이 죄다 모여 있어서 가지고 왔다. 가운데 노인이 오베고, 그 옆에 임신한 여성이 파르바네다. 파르바네는 아랍어로 나비라는 뜻이다. 앗! 소냐가 없네~~

    우리가 드라마나 소설을 보는 이유는 어쩌면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말 막장스러운 막장드라마를 보면서, 쟤들은 보나마나 자매야! 하고 한심스러운 듯 추측을 하고서 결국 그 연인들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 거봐 내 말이 맞지, 하고 화를 내지만, 내심 그런 식으로 감정을 분출하고 싶어서 드라마를 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집에서 살아가는 것을 유추적으로 설명한 이 부분.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처음에는 새 물건들 전부와 사랑에 빠져요. 매일 아침마다 이 모든 게 자기 거라는 사실에 경탄하지요. 마치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서 끔찍한 실수가 벌어졌다고, 사실 당신은 이런 훌륭한 곳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벽은 빛바래고 나무는 여기저기 쪼개져요. 그러면 집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해서 사랑하기 시작해요. 온갖 구석진 곳과 갈라진 틈에 통달하게 되는 거죠. 바깥이 추울 때 열쇠가 자물쇠에 꽉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법을 알아요. 발을 디딜 때 어느 바닥 널이 살짝 휘는지 알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옷장 문을 여는 법도 정확히 알죠. 집을 자기 집처럼 만드는 건 이런 작은 비밀들이에요(프레드릭 배크만, <<오베라는 남자>>, 최민우 옮김, 다산책방, 2015, 410~411면).    


    모르긴 몰라도 아마 당신도 사랑이 이런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테지. 어쩜 내가 느꼈던 걸 이렇게 잘 잡아내지, 라고 생각했을 테지. 이것이 문학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정도의 통찰을 가졌다면 작가양반, 당신의 진정성을 인정해주겠네, 라고 말하는 걸로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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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관한 말들을 모아봤어요. 이건 완성이 아니라 볼 때마다 계속 작성하려구요. 제가 모르는 정의를 알고 계신다면 답글 좀 남겨주세요^^

 

<공자, 양화편> 중

자왈 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를 배우면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사물을 잘 볼 수 있으며,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고, 사리에 어긋나지 않게 원망할 수 있다.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된다.
  子曰 小子何莫學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논어 양화편>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중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중
1. 시는 가장 개인적인 언어로 가장 심층적인 세계를 가장 무책임하게 주파하는 장르
2. 시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려할 때 시는 실패한다. 

이것을 헤겔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일단 헤겔 이후의 세계에 들어서면 반복 개념은 ‘다시 정상화되고’ 전복적 예리함을 잃게 된다. 이 관계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피날레와 모차르트 이후의 낭만주의의 관계와 비슷하다. 즉 돈 조반니가 죽는 장면은 모차르트의 세계의 좌표들을 교란하는 무시무시한 초과를 낳는다. 하지만 비록 이 초과가 낭만주의 쪽을 향해 가리키지만 본래적인 의미의 낭만주의에 이르면 전복적 예리함을 잃고 ‘다시 정상화된다.’(<헤겔 레스토랑>, 894면)


신영복, <담론> 중
기승전결이라는 시의 전개구조가 그렇습니다. 먼저 시상을 일으킵니다. 기라고 합니다. 다음 그 상황이 일정하게 지속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승입니다. 이러한 양적 축적의 일정한 단계에서 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질적 변화입니다. 그것을 전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지금까지의 과정이 총화된 다시 말하자면 기 승 전의 최종적 완성형으로서의 결로 마무리되는 구조입니다. 기승전결은 사물의 변화나 사태의 진전을 전형화한 전개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란 그런 점에서 '변화의 틀'익도 합니다. 사물과 사물의 집합 그리고 집합의 시간적 변화라는 동태적 과정을 담는 틀이며 리듬이기도 합니다(35~36면).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破算)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 <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 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 게 된다.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중
아도르노의 유명한 말에는 수정을 가해야 할 것 같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불가능해진 것은 시가 아니라 산문이다. 시를 통해서는 수용서의 견딜 수 없는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환기할 수 있으나, 사실주의적 산문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할 때, 이 불가능성은 가능한 불가능성이다. 시는 그 정의상 언제나, 직접 말할 수 없는 것, 오직 넌지시 암시될 수만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는 말이 닿지 못하는 곳에 음악이 가 닿을 수 있다는 경구와도 통한다.
…중략…
여기서의 묘사는 윌리스 스티븐스가 ‘장소 없는 묘사’라 칭했던 것으로 예술에 있어 고유한 것이다. 이는 그 묘사의 내용을 역사적 시공간 속에 배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이 묘사하고자 하는 현상의 배경으로서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공간을 창조해내는 묘사다. 그렇게 해서 결국 그 묘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배후에 있는 현실의 깊이에 의해 지탱되는 외양이 아니라 탈맥락화된 외양, 실재 존재와 완전히 일치하는 외양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스티븐스를 인용하자. “모든 것은 겉으로 보이는 대로이며 그렇게 보이는 대로 존재한다.” 이렇나 예술적 묘사는 “그 묘사의 형식 외부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외부의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제 고유한 내적 형식을 끄집어낸다. 마치 쇤베르크가 음악을 통해 전체주의적 공포가 가진 내적 형식을 ‘끄집어’ 냈듯이 말이다. 그는 이 공포가 주체성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을 환기시킨 셈이다(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27~29면).


람핑, <서정시: 이론과 역사> 중

그런 의미에서는 나는 시를 ‘시행 발화Versrede’ 혹은 더욱 정확하게 말해서 ‘시행을 통한 발화Rede in Versen’로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38면).

발화라는 개념은 언어적 기호들의 의미 포함적이며 제한된 연속체가 제시해주는 모든 언어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38면).

시행 구성은 어떤 경우에도 율동적으로 동기가 부여된 휴지의 설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휴지들에서 시행 구성이 다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휴지의 설정은 음운상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동일한 단어들이 시행의 첫머리 혹은 시행의 끝에 위치함을 통해서 강조될 수도 있으며, 그러한 두 개의 휴지를 통해서 형성된 시행은 다시금 그 자체내에서 운율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이다. 시행은 첫머리나 끝에의 음운상 최소한 부분적으로 동일한 단어들의 배치와 시행의 운율적 규제는 매 시행 구성의 율동적 상부 구조화의 두 개의 기본적 가능성들로서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람핑, 서정시, 이론과 역사, 장영태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4, 47면). 

[발화의 특징으로는 언어성(언어적 기호 사용), 의미 내포성(의미론적 기능을 지녀야 함), 연속성(순서에 맞게 배열되어야 함), 유한성(확실한 시작과 확실한 종결을 가져야 함)]

[람핑은 시에서 중요한 것은 운율이 아니라 행으로 나눠질 때 생기는 ‘휴지’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시가 꼭 ‘발화’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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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투리드 방석 - 작은 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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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무 나라 여행 방석 쓰고 있는데 정말 좋아요^^ 게다가 예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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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북] 준치 가시 창비 빅북
백석 지음, 김세현 그림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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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창비께서 책을 사랑한다면 백석을 사랑한다면 돈질을 하세요, 라도 하시는군요. 고맙습니다. 이것이 막바지에 이르른 출판계의 징후적 현상인가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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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TH 더 패스 : 세상을 바라보는 혁신적 생각 - 하버드의 미래 지성을 사로잡은 동양철학의 위대한 가르침
마이클 푸엣.크리스틴 그로스 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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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묵자가 프로테스탄트와 비슷한데 왜냐하면 묵자가 하늘을 믿었다고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의 설명과 달리 묵가는 일종의 의협집단이었고, 이들은 집단의 규율에 충실했다. 묵자의 사상은 프로테스탄티즘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마르크스의 사상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묵자는 노동의 가치를 가장 중시했기 때문이다.

 

왜 저자는 이런 식으로 묵자를 오해하는가?

 

완전히 철학적 토양이 다른 곳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양철학의 전통이 어느 정도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서양에 동양철학의 토대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 얕은 토양 속에서 동양철학을 하려다보니 이런 오류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런 오류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동양철학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서양철학 1세대의 오류는 어느 정도 극복될 것이다.

 

여하튼 서양철학 1세대라 할 수 있는 저자는 동양철학을 다른 동양철학과 비교하지 않고 서양철학에 대응시킨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근본적 다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동일한 것으로 치부하다보니 왜곡과 곡해가 생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다. 서양사람들이 생소한 동양철학을 이해하는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소한 동양철학을 서양철학에 대응시키기 때문에 서양사람들이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도 읽힌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동양철학 책 보다 이 책이 훨씬 쉽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인식적 기반이 동양철학보다는 서양철학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의 역수입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동양인이 동양을 통해서가 아니라 서양을 통해서 동양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내가 나를 보기 위해서는 거울이 필요한데 서양은 지금 그런 거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거울은 나를 평면화시켜 나의 모습을 왜곡시킨다. 서양의 필터를 거친 동양은 온전한 동양이 아니라 서양의 눈에서 발견된 동양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서양인에 의해 서양화된 동양이라는 것. 그리하여 동양의 차이는 소거되어 버린다. 그렇긴 하지만 벌써 좌절해서는 안 된다. 그런 왜곡과 곡해로 거친다면 문제겠지만 이것이 반복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 반복을 진행시킴으로써 서로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몇 세기가 흐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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