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으로부터 멀리, 낮으로부터 더 멀리
박대겸 지음 / 호밀밭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SF, 호러, 미스터리, 오컬트, (소위)순문학 등 다양한 장르가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한 사람이 썼다는 게 의아할 정도로 다채로운 색깔과 정서를 보여주는 소설들은 단행본을 읽듯 각각의 작품마다 다른 매력이 있다.  



우리가 온전히 목마름과 추위를 동반한 고립과 단절에 처했을때 가장 바라는 건 의외로 서로 체온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다. 소설에서 보자면, 극단적인 외로움을 넘어 일상에서 늘 따라오는 반복되는 공포와 두려움은 극심한 난시로 안경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승호(부러진 안경), 이러나 저러나 결국 총을 맞게 되는 남자(글록17)로 대변된다. 또한 사회 안에서 존재감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인의 외로움은 <호세 알프레도를 찾아서>를 비롯해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집단 내 괴롭힘,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 갖는 외로움뿐 아니라 당면한 삶을 주어진대로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 길을 잃거나 반복되는 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 우리에게 고독은 늘 곁에 있다.  







 
소설에는 서술자 시점이 있다. 대부분 1인칭과 3인칭으로 쓰여지는데 사실 2인칭 시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2인칭 소설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적어도 내가 읽은 2인칭 소설은 다른 서술자 시점보다 독자의 긴장감이 길게 이어진다. 이 책에 실린 <빛의 암호> 역시 그렇다. 특히 독자가 등장인물의 '수첩'과 '죽음'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고 자신했을 때 그 수첩을 '너'에게 건넨 이유가 따로 있음을, 그리고 그의 죽음에 다른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너'라고 불리는 2인칭 시점 장치는 읽고 있는 내 마음을 더 묵직하게 눌렀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그런데 책에 실린 각각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가해지는 두려움이나 고통에 그대로 노출되어있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대면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글록17>의 주인공이다. 부조리한 선택을 강요받으면서도 이를 거부하지 못하는 모습도, 막상 도망갈 기회가 주어져도 차마 도망가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매순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희망적이다가도 비관스럽고, 한편으로는 무위와 체념이 오가는 소설들은 우리가 살면서 처하고 느꼈을, 적어도 한두 번은 겪었을 법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상황과 감정들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나비의 속도>에서 말하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에서 택시를 타는 사람들. 발열이 우리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이듯 쉼에  대한 욕구 역시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DNA에 새겨진 생존본능 중 하나가 아닐까.  



소설에서 좋았던 부분 중 하나는 거리에 대한 서술이다. 몇몇 작품('부러진 안경' '그날 있었던 일' '시간의 유속' 등)에서 인물들이 자신의 현 위치와 이동하면서 보이는 거리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독자가 인물과 함께 그곳에 있다는 현장감을 주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특히 우리나라 소설이다보니 알고 있는 지역이나 지명이 나오면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때때로 카프카적이고, 때때로 카를로스 푸엔테스 같은 느낌.  




오랜만에 눈에 훅 들어오는 우리나라 작가의 단편을 읽었다.
종종 근래에 나온 한국 단편들 중에는 소재나 전달하는 메시지, 심지어 정서적인 부분까지 너무 흡사해 읽고난 후에는 누구의 작품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뒤표지에 보면 '소설이 가진 힘을 믿는 새로운 정직성의 출현'이라는 문구가 있다. 동의하는 바다. 단편임에도 장편같은 힘을 가진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 출판사 지원도서

싸우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생명체들. 먹기 위해 싸우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싸우고, 때론 자연과 싸울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그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싸우기도 하고, 어떨 때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살고 싶어서 싸우기도 하지. 그도 아니면 그저 싸우고 싶어서 싸우기도 하고. - P17

이 남자는 왜 내 대답 같은 건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걸까.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상태로 계속 이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내가 그냥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까. - P1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 보고 "잭 런던이 쓴 느와르(혹은 스릴러)라고?" 이런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 나의 착각이었다. 암살, 청부살인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소재를 데려와 윤리의 딜레마와 사회 이념 및 철학적 의도를 가진 소설이다.  


꿈을 꾸며 이론만 늘어놓고 분노만 쏟아낼 뿐 어떤 성과도 이룩하지 못한 채 실질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날선 비판은 마치 작가가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 내뱉는 말처럼 들린다.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암살국 수장, 암살자 조직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가졌던 자가 (임시) 수장이 되어 조직을 운영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암살을 지목한 사람이 연인의 아버지이며 이제는 필사적으로 구해야하는 사람이 조직의 설립자라는 부조리. 이렇듯 소설은 처음부터 모순과 딜레마를 툭 던져놓는다.  


잭 런던은 일정 부분 자신을 투영하고 더 나아가 로망했던ㅡ돈 걱정 없는 부유한 사회주의자ㅡ모습을 덧붙여 윈터 홀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던 잭 런던의 한계는 암살국 조직원들이 대부분 학자, 교육자, 언론인 등 지성인 집단이라는 설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의구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으며 무자비하게 살인을 저지르면서 그것이 곧  도덕성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에 빠진 자들이 사회의 기득권층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질적 근심없이 사유와 도덕이 지배하는 고결한 집단. 그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그 계층에 진입하고 싶어했던 작가가 열망한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은 독자에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폭력은 정당한가', '상식에서 벗어난 약속도 지켜져야 하는가', '원시사회에서부터 진화한 인간에게 도덕 의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등 몇 가지 윤리적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아마 잭 런던은 인문학적(혹은 철학적) 차원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기보다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자로 살면서 본인이 가졌던 이중적 모습(신념과 동경)을 반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윈터 홀은 암살국이 옳은 기관인지의 여부와 그들이 갖는 명분의 정당성에 대해 따지지만, 설령 정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들에게 그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볼 문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결말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독자는 그들의 부조리를 알면서도 어느새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잭 런던은 걸핏하면 철학적 딜레마에 빠져 자기들끼리 논쟁을 주고받는 이 못말리는 고지식하고 고집불통 지성인 집단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단단하게 내려서 원칙과 신념이 존재하는 사회를 희망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스스로에게 바라는 소망을 담은 것이었을까.   


윈터 홀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자기모순ㅡ계약이 만료되어 그루냐의 결혼식을 보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결국 자기가 살아남는다면 그가 세운 암살국의 완벽한 시스템의 부정否定이 된다ㅡ에 괴로워하는 드라고밀로프의 모습 역시 잭 런던의 한 단면이지싶다(그런데 사실 소설의 결말은 잭 런던이 쓰지 않았다. 물론 그가 의도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쓰다보니 스스로를 '생각하는 기계'라고 칭하며 인생을 살지 못했다고 말하는 드라고밀로프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하든 사업을 하든 각자 나름의 성공적인 경제 성과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참 열심히 사는데 어째 삶의 생동감은 크지 않다. 이러한 드라고의 회한 아닌 회한은 소설의 맥락과 조금 동떨어져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끝내 마무리를 하지 못했던 작가의 당시 심경이 이와같지 않았을까, 나 나름대로 짐작해본다. ( 꽤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쩐지 내용 자체보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등장인물들을 설정했을지에 더 마음이 쓰였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 단단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그의 바람이 다 담겨있는 듯 느껴졌다.   


책을 덮으면서 상상해본다.
호놀룰루의 어느 섬에 모여 현실적으로 영양가 하나 없는 그 열띤 논쟁을 벌이는 유쾌한 그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서 웃고 있을 젊은 홀과 그루냐를.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먼 곳에서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칸이다."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스웨덴인 호칸의 이야기다. 모험소설 같다는 점에서 미국 버전 '신드밧드 모험'이라고 해야할까. 혹은 예상치 않은 곳에 던져져 살아남아야했다는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 같기도 하고. 하지만 호칸에게는 그들과는 다른 결의 삶의 경이가 있다.  


가난한 소작농인 아버지는 주인 몰래 빼돌린 말을 팔아 여비를 마련해 두 아들을 미국으로 보낸다. 형제애가 남달리 돈독했던 두 형제는 서로를 의지 삼아 배에 오르고, 뉴욕행 배로 갈아타는 과정에서 서로를 잃어버린다. 뉴욕행 배만 찾으면 형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아메리카'로 향한다는 말만 듣고 올라 탄 배에서 호칸은 뭔가 잘못됐음을 인지한다.  

 

 




호칸의 세계는 복잡하지 않다. 존중과 사랑을 주고 받는 데에 물리적인 계산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으로 이해하고 판단한다.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수치와 부끄러움과 도리를 알기에 손을 내밀고 거둬야하는 순간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사랑과 고통이 동시에 수반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닌 상대의 평온을 우위에 둔다.  


호칸은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인간의 탐욕과 포악, 침략과 약탈, 폭력성, 비열함, 이기심, 반면에 헬렌과 로리머와 에이서를 통해 사랑과 우정, 존중과 이해, 생명이 갖는 개별성의 존중과 자연을 통한 존재의 방법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때는 침묵으로의 침잠과 깊은 고독의 순간이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육체의 신성함, 생生과 사死로 엮인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과의 연대.  



소설은 독자를 광활한 초원과 사막 한가운데로 끌어와 호칸의 고독에 동참시킨다. 어린 시절에 건너온 뒤 일평생을 '아메리카'에서 보냈지만 여전히 어린애처럼 단답형으로 밖에 소통할 수 없는 호칸의 언어에는 거짓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독자는 호칸을 사랑하게 된다. 


​고향으로 향하는 여정의 첫걸음부터 그 여정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수반될지, 독자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갈 그를, 지지하게 된다. 



이 소설은 개척시대 이방인으로서 끝내 동화하지 못한 채 사막과 초원의 건조한 바람처럼 부유하는 한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의 사유다. 독자는 이을 통해 인간이 갖는 윤리적 철학을 통찰할 수 있다. 호칸이 지나쳐갔던 수많은 감정과 행위들. 두려움, 자괴감, 수치, 부끄러움, 무기력, 무감정, 무의미, 이질감, 자처한 고립과 단절, 죽음에 이를 것 같은 공포, 평온, 소생. 아마도 누구나 살면서 반복적으로 겪는 것들일테다.  


우리는 이 반복되는 과정의 침묵과 고독을 통해 스스로를 고찰하는 과정을 거치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예폐지론자 집안 출신의 어머니를 둔 여성해방운동가인 북부 여성 올리브, 남북전쟁에 참전하고 패전으로 일가가 몰락한 보수주의자인 남부 남성 랜섬,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을 겪으며 흔들리는 연설가 버리나.  




 



헨리 제임스는 이 소설에서 사회적 권리를 쟁취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운동을 하는 여성을 서술함으로써 사회적.개인적 한계를 보여준다. 소설 속 서술자는 올리브를 까다롭고 배타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성정으로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신분의 차별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인과의 상관관계를 왜곡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구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그리는데 이러한 시각이 당시 여성 사회운동가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보편적 인식임을 짚은 것인지 아니면 작가 본인의 관점을 빗댄 것인지 그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소설의 결말에 이르면 이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진다.  


망언록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벽창호같은 남성우월주의자 랜섬은 말할 것도 없고, 버리나를 향한 올리브의 소유욕과 집착도 불편하지만, 자의식 없이 그때끄때 감정에 이끌려 다니면서 어쩔 수 없다는 말로만 일관하는 버리나 역시 마뜩치 않기는 매한가지다. 가만 생각해보면 미스 버즈아이를 제외하면 이 소설에서 호감가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미스 버즈아이가 지속적으로 랜섬이 조만간 여성 진보주의자들의 동조자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듯 말할 때마다 도대체 그녀는 랜섬의 무엇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스 버즈아이의 예견이라기보다 소설에서의 표현처럼 그녀가 품고 있는 보편적 열망, 진보를 희구하는 열정의 표현이었으며, 예견이 아닌 소망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아니었나싶다. 


소설은 내내 독자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고구마와 동치미를 번갈아가며 선사한다. 작가는 왜 이런 결말을 선택했을까? 그가 짚고 싶었던 것이 당시 여성해방운동가들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그들이 넘기 힘든 사회적 한계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랜섬의 손을 들어주어 은연 중 작가 자신의 의중을 들어낸 것일까.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버리나는 어떤 삶을 살든 스스로 뿌리를 내리지 않는 한 끊임없이 흔들릴 것이라 예상된다. 



헨리 제임스의 묘사는 섬세하다. 특히 인물의 감정 및 심리에 대한 묘사는 탁월한데 풍경과 상황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소설은 3인칭 서술자를 두고 진행한다. 특히 관찰자 시점과 전지적 서술자 시점을 구분없이 오가면서 어느 순간 소설에 작가 본인이 끼어들어 독자의 관점을 유도하는데, 그야말로 시사성을 장착한 이야기꾼이다. 700쪽에 이르는 책을 지칠 새 없이 읽었으니 가독성은 좋다고 할 수 있겠다. 



나만 그런건가... . 책을 덮고도 한참이나 생각이 길어진다. 당시의 시대성과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성. 사실 헨리 제임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아직까지 조금(?)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중이다.  

저는 그저 제 일을 해내려고 했을 뿐이에요.(...) 진보의 흔적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진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점을 저는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훨씬 앞으로 더 나아가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P6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위픽
이혁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과학기술 윤리에서 시작해 기업 윤리를 지나 삶과 고통의 의미,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은 근미래라고 할 것 없이 지금의 세태를 얘기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AI를 과신해 인간이 해야하는 일들을 떠맡기면서 인간은 손가락 외에는 움직일 일이 거의 없어져 간다. 운전은 자율주행자동차가 하고, 양육과 교육은 인공지능이 대신한다. 아이들은 고글을 뒤집어쓰고 AI가 제공하는 교육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양육자는 편리성을 좇으며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제2의 양육자에게 자진해서 제 자리를 내어준다.  


소설에서는 AI에게 결괏값을 입력하는 주체인 인간이 도리어 수치화의 대상이 되는 모순된 상황이 일어난다. 슈마허 개발 회사의 사장인 세희는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고 되받아친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성적을 통해 철저하게 계급 사회를 이루고, 이는 기업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뿐인가. 보험사 평가액, 결혼 정보 회사의 회원 등급제, 서비스 업종에서 이루어지는 고객 등급 등 우리는 수많은 평가 기준에서 우열의 대상이 되어 숫자로 표시된다. 세희와 테드의 주장에 빗대어 봤을 때 과연 나는 얼마짜리 가격표가 매겨지려나.  


돌발 사고 시 노인보다는 아이를, 빈자보다는 부자를 선택하라는 결괏값이 입력된 자동차가 낸 사고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책임에 금전적 보상만 이뤄진다면 무방하다는 금전만능주의 사고를 과연 소설일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인간이라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구원한 것이라는 세희의 어불성설이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AI 슈마허와 함께 소설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것은 또다른 AI 아리스토텔레스다.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면 무버에서 내려오지 않고, 인간이 걷는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며 걷는 행위를 야만적이라고 말하면서 무버에서 내려오라는 부모를 향해 정신적 학대를 운운해가며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려고 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던지는 여덟 살 건주의 모습은 크게 어색하지 않다. 지금도 대형마트, 헤어샵, 식당에서 아주 흔하게 접하는 장면은 채 서너 살도 안 됐을 것 같은 어린 아이들이 태블릿 PC나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이다. 심지어 유모차에서조차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을 기술이 해결해 줄 거라고 말하는 세희와 아들에게 해도 되는 것, 해야만 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의 '기준'을 가르치겠다는 재호의 아내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소설 속 대다수의 어린이들이 무버 위에서 아르스토텔레스를 이용하며 부작용에 시달린다. 소설에서 보여지는 부작용은 현재 스마트폰 중독을 우려하는 양상과 비슷하다. 재호의 아들 건주와 매튜의 딸 애나는 둘 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사용하지만 두 아이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차이점은 부모와의 애착형성과 소통이다. 재호 부부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양육자의 자리를 위임했다면 매튜는 AI를 보조자 혹은 교육 도우미로 활용했다. 



이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우리는 그에 대한 답을 영인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조차 자율이라는 명분으로 악의적이고 잔인한 횡포와 억압을 자행해 왔다. 그런데 그 자율을 기계에까지 부여하려 든다. 영인은 사람이 사람인 이유 중 하나는 용기라고 말한다. 실패와 좌절 앞에서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용기, 불의를 제거하려는 노력, 우리가 견뎌내는 고통의 의미,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억. 영인의 말처럼, 나는 나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사람인지를 생각해본다. 



언제부턴가 로맨스 소설을 읽지 않는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면 내용도 정확히 모르면서 시큰둥해지곤 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읽어볼 생각이 들었다.   




덧.
1. 성장촉진제 주사를 맞을 아이들이 무버에 탄 채 길게 줄을 선 모습은 가히 상상만으로도 참담하다. 
2. 표지에 쓰인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이 하찮은 일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고'가 이렇게 뭉클한 말일줄이야.  




※ 출판사 지원도서

나는 봐야겠어요. 그래야 하는 게 있다는 걸, 원래, 누가 뭐라든 세상이 어떻고 세월이 어떻든 아무 상관 없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게 있다는 걸요.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걸 허무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게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있다는 걸요.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정의正義라는 말의 뜻입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 누구도 아니라고 할 수 없이 당연히 지켜야 하고 그래서 적어도 내 가장 소중한 단 하나만큼은 허무한 게 되지 않게 해주는 것. - P123

내가 사랑한 건 인생이나 세상 같은 게 아니었어요. 사람이었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사람들 때문에 내 인생도, 세상까지도 사랑하려고 했었죠. 날 지치고 두렵게 하는 사실과 진실들을 안 보고 못 본 척하면서까지요. 하지만 그렇게 사랑한 것마저 잃을 수 있어요. 아무 이유 없이요. 말했듯 그게 세상이고, 그게 인생이니까요. 하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건 그 고통이 다른 수많은 고통과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 고통엔 의미가 있죠. 아무도 몰라도 나는 아는, 나한테는 전부이고 모든 것인 의미가요. - P1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