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경 작가님은 '그분'이 아니었다면 이름만 아는 작가였을 것이다.

 

 

    2008년 5월,

 

    하관을 한뒤 흙을 덮고 달구질이 시작되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달구질

   을 함께 한다. 그 중에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머리를 스카프로 감싸고, 어두운 정장이 아닌, 파란색 이었나 그런 색 웃도리를 입고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6년 전이라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차림새와 몸짓이 좀 남달랐다. 보고

   있자니 동행했던 분이 '강석경 작가 아니야?' 한다. 아...... . 여기서 저렇게..... 그분과 남다른 

   인연이 있나 하는 생각은 잠시, 몇분간 바라 보았다.

     가시는 분에 대한 애통함이 아니라 훨훨 가시라고, 훌훌 벗어던지고 넓은 창공으로 훨훨 가시

   라는 기원 같은 몸짓이었다. 동행도 강석경 작가일 거라고 말했을 뿐인데 왜 이 분을 강석경 작

   가님이라고 믿었을까?

 

     다음달, 그분에 대한 글이 잡지에 실렸다. 그 글 중에 강석경 작가님의 글이 있었다. 글 끝에

   그날 그 시간의 광경이 나온다. 그리고 그분과의 인연이 실려있었다. 

 

 

   "처음 뵈었던 30여 년 전 그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존재만으로 가슴을 흔드는 이,

   내 생에서 이처럼 흠모한 사람도 없고, 이처럼 전적으로 한 인간을 좋아한 적도 없다."

 

   "그날 기억나는 것은 겁없이 문학의 세계에 들어선 내게 엄정하면서도 연민에 찬 표정

   과 선생이 손수 마당에 깔아 만들었다는 돌길이다. 널직한 돌을 딛고 고즈넉한

   마당으로 들어서면 동산으로 이어지는데......"

 

   "오리나무숲 바람 소리와 개울 물소리 들리는 외딴집. 스스로 택한 유배지 같은 이곳

   에서 그 얼마 뒤 선생은 더 멀리 더 깊이 터를 옮겼고, 나는 우연치 않게 이곳으로 이

   사 갔다. 선생이 이미 떠난 뒤지만 그 집 앞을 그냥 지나지 못하고 대문 틈으로 큰돌이

   깔린 마당을 들여다보곤 했다."

 

 

      이곳이 그분 손수 돌을 깔았다는 그집, 작가님이 들여다보곤 했다는 곳이다. 30년전과는 전

    혀 다른 모습이겠지.

 

       

          

 

     작가님은 어느날 이후,  가장 부러워했던 사람이 그분의 딸이었다고 했다.

     그 글을 읽은 이후,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사람은 작가님이었다.

 

 

     그후에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나 알 수 있을까 싶어 작가님의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

    래서 읽은 책이 '능으로 가는 길'과 '경주 산책'이다. 이 책에 몇 구절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단 몇 구절이지만 울컥했다. 그 부분만 읽고 또 읽었다. 이달에 나온 '이 고도를 사랑

    한다'에도 나온다. 아직도 이렇게...... .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책을 들고 경주를 찾아갈

    이유가 생겼다.

 

 

     '경주산책'과 '능으로 가는 길', '이 고도를 사랑한다'를 읽다보니 작가님이 왜 그분을 그리 흠

    모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세상과 사람들과의 대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자기를 지

    키고, 자신의 예술혼을 지켜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에 그분

    을 흠모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예술혼과 생명에 대한 사랑은 작가님의 작품에서도 느

    껴진다. 그런 느낌들이  묻어나는 구절들은 필사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이럴때마다 생각

    한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마지막 글을 읽을 수 있을까?"

    

       이게 안되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아는 동생때문에 작가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언니, 그 작가님 볼 수 있어요. 올래요?" 했을 때 흥분되었다. 그분과의 인연으로 시작되었

     지만 작가님의 작품을 읽으면서 특히 작년에 출간된 '신성한 봄'을 읽고는 한번 뵙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느끼고 싶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

     가? ... 너무 간절해서 그랬는지 취소되고 말았다.

 

       그때 작가님에게 전하려고 사진  한 장을 준비했었다. 내가 직접 찍은 그분의 사진. 활짝 웃

     고 계신다. 역광이라 색은 선명하지 않지만 환하게 웃고 계시는 그분의 모습이 좋다. 보는 분

     들이 좋다고 한다. 기회가 닿는다면 작가님에게 전하고 싶다.

 

     다음주에 경주에 갈때 책에 끼워서 가야겠다. 어느 고분 앞에서 우연히 뵐지도 모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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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스톤갭의 작은 책방 - 우정, 공동체, 그리고 좋은 책을 발견하는 드문 기쁨에 관하여
웬디 웰치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헌책방으로 시작해서 빅스톤갭의 사랑방이 되어가는 과정을 재밌게 들려준다. 책이 사람의 이야기이듯, 책방도 사람으로 인해 훈기가 가득해진다. 책으로 시작했지만 사람으로 끝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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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라디오 -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혜윤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잊지 못할 마술. 읽는 것만으로도 마술에 걸린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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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작가들의 마지막 글을 읽을 수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때까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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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오거리에서 내려 순천향병원을 지나서 이태원으로 간다. 병원을 지나니 길이 꺾이면서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경사가 심하다. 오르막의 꼭대기는 아래로 지하차도를, 양 옆으로 계단

    을 만들었다.계단을 다 오르니, 정면에 알록달록한 외관의 호텔이 보인다.  이태원으로 내

    려가다 커피숍에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앉았는데, 뒤에 히잡을 쓴 사람들이 있었다. 외국인이

    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이래서 이태원인가.....

 

 

     92.

       이태원이라는 이름의 역사는 놀랄 만큼 참혹하다.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이름은 조선 효종 때

    이곳에 큰 배나무 숲은 만들었다는 이유로 불리게 된 것이지만, 원래는 조선 시대 공무 여행자

    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여관이 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에서 왜군

    에 의한 치욕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또다른 이름이 이태원異胎圓이라는 믿기 힘든 이름이

    었다는 것은 참혹한 역사를 암시한다. 왜군들이 이 지역에 있었던 절 운종사에서 비구니들에

    게 성적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 근대 초기에는 일본인 전용 거주 지역이 조성되어 異他人이라

    는 이름도 갖게 되었으니, 이방의 문화라는 특색은 일찍감치 시작되었다.

 

      너의 이름은 뼈아픈 비밀과 같고, 나는 결코 '너'라는 단 하나의 이름에 닿을 수 없

    다. 너의 영혼과 삶을 정확하게 요약하는 이름은 없다. 이름은 불가능하지만, 또한 불

    가피하다. 너에게 꼭 어울리는 이름은 없다.

   

      

 

   "이태원터"라는 표지석은 이태원이 아니라 해방촌 끝자락 용산고등학교 정문에 있었다. 이태

   원터가 그렇게 넓지는 않았을 것 같고, 나중에 옮겨진 것이 아닌가싶다.  

 

   96.

       국가의 안과 밖이 전도된 이 장소에서 한국인은 다만 여행객일 뿐이다. 한국인을 여행객으

     로 만드는 이 기이한 공간을 소비하려는 한국인들로 이곳은 언제나 넘쳐난다.

 

   98.  

        이곳의 식당들이 주는 매혹의 핵심은 '오리지널'의 맛과 스타일에 유사하다는 것, 한국화되

     지 않은 본토의 맛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오리지널 이전에 있거나 오리지널 이후에 있

     는곳. 그 기이한 활기, 다양성의 과잉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뉴욕이나 홍콩이 될 수 없다.

 

 

    여행의 끝이 슬픈 이유? "다른 삶의 기미를 만날 수 있지만, 다른 삶은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109.

           이런 이질적인 이슬람 문화의 사원이 이태원 언덕 높은 곳에 서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상

         징이 될 수 있다.

 

 

   81.

         미군 기지의 북쪽, 가파른 남산 자락에 위치한 해방촌. 이 곳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곳

      은 인가가 드문 솔밭이었고, 갑오개혁 때까지 왕실과 문묘의 제사에 쓸 황소, 양, 돼지를 키

      우던 전생서가 있었다고 한다. 1908년경 용산 일대 군사기지를 완성한 일본은 주둔군과 군속

      가족 들을 이 일대에 거주하게 했다. 일본군 육군과 관사와 사격장이 이 부근에 있었다. 해방

      후 일본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집 없는 월남 피난민들이 들어와 자리잡게 되었다.

 

 

 

    

  

 

     해방촌 입구. 여기에서 해방촌 언덕꼭대기까지는 이국 

   적인 장소가 눈에 띈다. 아기자기한 작은 가게들이 나란

   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자그마한 가게 안에 삼삼오오 모

   여 브 런치를 즐기는 외국인들.

 

 

     해방촌 꼭대기에서 내려가는 길은 비탈길.. 가파른 길을 내려가며 여기가 남산자락이라는 것

   을 새삼 느낀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버스를 탓다. 그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는데 긴장되는 곳도

   있었다.       

  

 

      

      이동네 어디에서든 보이는 건 남산 N타워. 높고 우뚝하게 서있는 것이 강압적이다. 금방이라

    도 들킬 것 같아 다른 짓은 못 할거 같다.

 

       보성학교 앞 길가에서 오른쪽 경사진 계단을 내려가면 어둑어둑한 신흥시장이다. 계단 말

     고 파출소 앞까지 와서 시장 입구쪽으로 내려간다. 시끌벅적은 커녕 흥정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몇몇 아주머니가 시장 가운데 평상에 앉아 두러두런 이야기를 나누신다. 물건들을 내

     놓은 걸보면 물건을 파는 시장은 맞지만 너무 고요하고 어두워서 무섭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

     누시는 아주머니들 빼고는 구경하는 사람도 없었다. 가게도 몇개 되지 않는다. 시장이라는 말

     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장이다. 왜 찍냐고 물어볼까봐 카메라들기가 무서웠다.

        

 

                                        

 

      한남동, 이태원, 해방촌 모두 이질적인 것들이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숨을 쉬고 있다.

    그런 것들을 이질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더 이상해 질것이다. 그래서인가 남산 3호 터널앞

    '소월길'이라고 써놓은  이정표가 더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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