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개인주의자 - 온전한 자기 자신을 발명하는 삶의 방식
정수복 지음 / 파람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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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존중받는 사회를 끊임없이 타진해온 정수복 작가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책을 읽어본 것도 아니다.

이건 추측인데 아마도 내가 그동안 읽어온 여러 작가들의 책 속에서 자주 언급된 인물이지 싶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1980년대에 프랑스로 유학해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0년대에 국내로 돌아와 시민운동과 시민교육에 참여했다가

다시 2000년대에 프랑스로,

또 다시 2010년대에 돌아와서 학자이자 작가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는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개인주의자"라는 실존적 정체성을 학구적으로 접근했던 방법이

대로는 설득력이 있었고 때로는 따분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흥미로운 부분이면 한 번 더 읽고, 지루하면 그냥 스킵하면서 미련을 두지 않고 읽으려고 하였다.

1부에서는 개인주의에 대한 이론과 역사가 나오고


3부에는 개인주의자로서 살아감에 있어서 실천과 실전을 다루고 있는데

주석이 적지 않음에도 전반적으로 꽤 흥미롭게 읽었다.

아마도 문유석 작가의 <개인주의자 선언> 이후에 만나는

"개인주의자"에 대한 나의 지적 갈증을 간만에 해갈해주었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도 더해졌을 것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정수복 작가의 교양 인문학은

쓸데없이 들어간 문장들이 없고 문체는 이만하면 간결했으며

또한 명료했고 가끔씩 책 속에서 작가의 존재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주의"와 "개인주의자"의 정의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개인주의자 선언> 보다 <이타적 개인주의자>를 추천한다.

사실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었을 당시 내게는 제법 센세이셔널한 자극이었고

지금까지 나다운 삶을 운영해가는 데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는 책이지만

개인주의자에 관한 이론과 현상을 알고 싶거나

개인주의에 관한 교양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관련 주제도서를 찾는다면

정수복 작가의 이 책이 더 알맞다.

<이타적 개인주의자> 라는 말은 어찌 보면 형용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개인주의를 마치 이기주의로 착각하는 현실이 여전하다는 것을 짚어가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사실 나 또한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어떻게 다른지도 제대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펼쳐보게 되었다.

완독후 드는 생각은 개인주의자는 참으로 모든 걸 다 갖춘 존재가 아닌가 싶다.

내가 지향하는 여러 인간상을 두루 갖추며 살아가는 존재로 여겨진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고 비인간적인 전통이나 관습은 무조건 따르고 싶진 않다.

타당한 의견은 경청하고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지만

세상의 쾌락이나 재물만 추구하는 이들의 책임전가나 책임회피는 진짜 꼴불견이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듯 타자의 자유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인간 사이의 우호감과 연대감을 소중히 여기며

우리는 모두 각자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솔제니친의 말을 인용한 지점도 격하게 반긴다.

개인의 생각을 억압하는 다수의 횡포, 특히 국가권력이나 위계질서에 기반한 지배세력를

경계하며 소수의 의견도 존중하고자 노력한다.

궁극적으로 이타적 개인주의자는 자기 발전을 위해 자유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남의 자유도 최대한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품격있는 자유를 지향해야 함에 동의한다.

그러나 간혹 내 삶의 방식과 결이 다른 이들을 간혹 TV를 통해 만나기도 한다.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라고 목소리를 키우면서 타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감정적이고 기만적인 사람들.

저런 자들은 그저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얄팍한 이기주의자에 불과하다.

정수복 작가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반시민적인 집단주의자라 규정하며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개인이 바로 개인주의자라고 정의한다.

나아가 공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그 때 개인주의자는 시민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여러 방면으로 개인주의를 다루고 있는 <이타적 개인주의자> 에서

가장 관심이 많이 갔던 꼭지는 탐미적 쾌락주의로서 개인주의였다.

이건 마치 나를 대상으로 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란하지 않고 은은한 쾌락을 추구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과 여가를 배합하고

남들이 다 가는 값비싼 핫한 장소보다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기 마음에 드는 쿨한 공간을 찾는 사람.

남들이 따르는 유행과 관습을 거부하는 일상의 작은 반란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대목에서는 소름까지 돋을 정도.

트렌드라며, 요즘 핫하다며 그 추세를 쫓는 사람들이랑 나는 다르다며

한창 붐비다가 식어버리는 때를 기다렸다가 한가해지면

한 번 관심좀 가져줄까 그제서야 혼자 고개드는 게 나의 스타일이다 ㅋㅋ

어쩜 이렇게 내 삶의 방식을 꼬치꼬치 짚어내나 싶을 정도로... 한참 재밌게 읽어 나갔던 부분이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기를 발견하고

자연의 신비로운 변화를 관찰하면서

그윽한 즐거움을 누린다.

미학적 쾌락주의자는 매일매일의 삶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고

서서히 차오르는 즐거움을 추구하며

내면적 삶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마음의 충만함을 누린다.

<이타적 개인주의자> 중에서

자기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더불어 사회에 기여하는 삶이라면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독서는 내게 스스로 존엄한 존재라는 각성을 안겨주었고

독서라는 드넓은 간접 경험들은 나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문으로 인도해 주었다.

나아가 타자의 삶에 관심을 갖게 하고 타자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성을 갖춘 교양인으로서 나다운 삶의 길을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가고 싶다.


집에 있는 <개인주의자 선언>도 오랜만에 다시 들춰보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도 빌려왔다.

정수복 작가가 개인주의 아방가르드 그룹 속에서 소개했던 문유석 작가와 김수현 작가의 작품들.

"개인주의자"에 대한 나의 결론은 타자존중과 나다운 삶의 방식을 가꿔가는 것이다.

자기다움 속에서 타자와 이 사회 또한 놓치지 않는 것.

한 개인의 인생이 존중받지 못하고 오히려 무참하게 무시받았을 때

주변에서 저항하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바로 이타적 개인주의자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공익과 공공선을 추구하는 보편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그들을 보면서 한 번 더 깨닫는다.

보이지 않지만 그들과 나 또한 연결되어 있는 이타적 개인주의자임을 잊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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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세탁소 -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하이디 지음, 박주선 옮김 / 북폴리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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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이라는 나라와의 인연은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급작스레 가족여행을 다녀왔던 것과

청소년기 두 딸들이 대만 청춘 배우 왕대륙이 나오는 대만 영화를 좋아하는 정도이다.

그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대만 소설을 접했다.

북폴리오에서 나온 신간 <시간세탁소>'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라는 부제에 맞게

조용한 동네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특별한 세탁소에

소중한 의미를 지닌 물건들의 세탁을 맡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세탁소 주인은 시대의 트렌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구식의 공간에서

40대의 문학청년같은 느낌으로 손님들의 고민들을 들어주고 위로와 조언을 건넨다.

그래서 손님들에게서 얻은 별명도 '세탁소에서 마주친 소크라테스'.

그 구식의 공간 한 켠에는 찾는 이들로 하여금 눈을 비비게 하는 모습도 있다.

한쪽 벽면 책장에 책들이 많이 꽂혀 있어서 도서관 같은 세탁소이기도 하다.


신간을 접할 때마다 출판사에서 소개하고 싶은 지점들을 가늠하곤 하는데

<시간세탁소> 표지디자인도 그렇고 초반 읽어가는데 단박에

대한민국의 <불편한 편의점>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뭔가 연결점이 있을까 궁금해서 대만 소설에 대한 기사들을 검색해 보니

이미 대만에서도 <시간세탁소>와 같은 힐링 소설들이 자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가곤 했었던 것이다.

장소만 다를 뿐, 지친 인생들을 좀 더 부드럽고 가볍게 사람들과 소통함으로써

다시 힘내서 영위해가려는 인간의 소망은 국적을 불문하고 똑같은가보다.

액자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각각의 사연들을 접하고

그에 맞는 세탁소 주인의 처방들이 철학적이지만 일상적이기도 해서 가독성 좋은 소설이다.

아예 독서라는 걸 처음 하게 되는 독자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

나아가 이야기의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심리상담가이자 소설가인 저자 하이디는 심리상담가로서 일할 때는 리자원이라는 이름을 쓴다.

하이디는 필명.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한 저자는 알프레드 아들러가 남긴 "이야기가 곧 인생이다" 라는 말처럼

9가지 물건에 담긴 9가지 이야기를 실었다.

심리상담사로서의 경험도 <시간세탁소>가 탄생하는 데 있어서 큰 몫을 했으리라.

사람은 언제나 기억에 의존한다.

비록 기억이 가장 믿을만한 동맹은 아닐지라도.

기억의 감정은 항상 우리에게

마음 속 깊은 곳의 열망을 보게 된다.

<시간세탁소> 저자후기 중에서



북커버에 고이 담아두고 이동하면서 전철 안에서 읽었던 <시간세탁소>.

나름 홍보효과도 되서 신간이 나오면 서포터즈로서 자주 애용하는 방법이다.^^

더러워진 추억을 씻어주고, 구겨진 감정을 다려주고,

찢어진 관계를 꿰매 드립니다.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그런 바램을 토로라도 할 수 있는 곳이 주변에 있다면

누구라도 망설이지 않고 향할 것이다.

시간세탁소가 아마도 모두가 상상하고 소망하는 곳과 매우 근접하지 않을까.

읽으면서 좋았던 구절들은 이런 것들이 있었다.

P.53

틀에 박힌 갇힌 생각에서 벗어나야

생각과 목과 마음이 새로운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

속도를 늦추는 법을 계속 연습해야 할지도.

P.76

슬픔을 대할 때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있어주는 것이 해답일 때가 있다.

P.116

인생의 막다른 길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세요?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P. 200

통제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감정을 조절하는 것 뿐이야.

P. 209

인생에서 우리가 만나는 일은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나뉘어.

<시간세탁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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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의 법칙 - 충돌하는 국제사회, 재편되는 힘의 질서 서가명강 시리즈 36
이재민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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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험난한 환경, 약육강식의 세계를 보통 '정글'이라고 표현하는데

지금 전 세계 국가들의 보이지 않는 생존 경쟁 모드가 곧

"글로벌 정글"이라고 표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가명강 시리즈 36번째로 나온 책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재민 교수가 쓴 <지배의 법칙>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중국과 미국의 힘겨루기 속에서

급변하는 환경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국제사회의 질서는 붕괴되었으며, 또한 재편되어가고 있다.

불확실성이 날로 커져가는 오늘날, 이 힘의 논리 속에서

각국은 자국중심주의에 꽂혀 각자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 때 전 세계는 다자주의 체제를 수용하기도 했었다.

포괄적이고도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공동의 목표를 추구했던 국가간의 동맹이 그것이다.

그런 때에 WTO와 다양한 국제 기구들이 범세계적인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었다.

이제는 그런 체제가 비주류로 밀려나면서 국가간 협력보다는

자국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쪽으로 중심축이 변해가고 있다.

국가간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과 의도적 외면을 반복하는 등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태세 전환은 대수롭지 않다.

이렇듯 자국중심주의가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는 현 시대를 가리켜 신냉전 2.0 시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신냉전 1.0 시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자유주의 진영과

동구권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의 이념적 대립이 그것이다.

1946년 윈스턴 처질의 연설에서 언급되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철의 장막".

신냉전 1.0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진영 갈등이 시작되었다.

무기를 중심으로 직접 피를 보며 싸우는 열전과 다르게

전쟁 이회에 다른 방식으로 대립하고 대결하는 신냉전 구도에서

더 나아가 국가간 긴장상태가 디지털 영역, 극지방과 우주개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렇듯 신냉전 2.0 시대가 되면서 국가간 분쟁의 중심에서 힘의 질서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국제법이다.

세계질서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정한 상식적인 규범에 따라 많은 것이 작동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적용되는 규범인 국제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하며 우리나라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도록

경쟁할 준비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때이다.

<지배의 법칙>이 출간된 것도 이러한 흐름에 따른 것일테다.

법률전쟁 속에서 상대방을 공략해야 하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이념 대결이 아닌 논리 대결을 펼쳐야 하는데

현재 대한민국은 오히려 퇴보하는 실정이다.

이념적인 판단으로 한쪽에 온전히 기울어진 자세를 취하며 버젓이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적절하게 줄타기를 하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한 쪽에도 패를 보여줘선 안 된다는 외교의 속성을 이해하고 있다 보기 어렵다.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다가는 글로벌 사회에서 점점 고립되는 상황을 자처할 뿐이다.

자국중심주의로 변모하는 이 흐름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해관계를 지킬 수 있도록 국제법을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이재민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결국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2014년에 붉어진 긴장 상태가 2022년 2월 24일에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국제사회의 위기를 직면하게 되었다.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도 7개 국가로 쪼개졌는데

그 중 하나가 '세르비아'였다.

2008년 2월에는 세르비아에서 코소보가 독립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독립을 반대하면서 내전을 야기시켰다.

러시아는 세르비아 편, 서방 국가들과 한국은 코소보의 독립을 지지하며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입장에 서서 편을 나누어 다툼을 벌인 역사가 있다.

코소보 사태를 신냉전 시대의 단초로 보는 것은

범세계적 협의체는 힘을 잃어가고 이해관계가 통하는 국가들끼리 단합하여

대결 구도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힘을 얻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다자주의 체제는 이렇게 인기를 잃어갔으며

현재는 국제법으로 힘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각자도생을 위해

긴장 상태를 유지해가고 있는 것이 국제 사회의 현실이고 위기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충돌하는 양상은 지구 안에서만,

또는 지리적인 범위 내에서만 발생하고 있지 않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디지털 시대가 되어 지역을 넘어서는 세금 부과가 행해지는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유튜버는 우리 정부에만 세금을 내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만

미국은 자기들에게도 과세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돈은 한국에서 버는데 세금은 싱가포르, 아일랜드에 내는 어색한 상황도 연출된다.

한국보다 법인세가 낮은 다른 나라들에 서버를 두고

그 나라의 법인세 적용을 받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도 이득이기 때문에

이건 너무나 당연한 행동방식이다.

이렇기 때문에 점점 세계 질서에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 국제법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1996년 마이클 잭슨이 내한공연을 한 후에 16억원의 수익을 거뒀지만

당시 22%의 세율에 따른 4억여원의 세금을 한국 국세청에 내지 않았다.

이유는 서울에 물적 시설이 있어야 세금을 낸다는 조약 내용에 따른 것이었다.

당연히 글로벌 가수들은 해외에 물적 시설을 두고 투어를 하지 않는다.

이런 이슈가 있은 후에 결국 한미조세조약을 개정하여

규범에 따른 국제법이 다듬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제는 서울에 오지 않고 돈을 벌더라도 과세가 가능해진 것이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물리적인 사업장 없이 사업을 운영하는 기업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것이 일명 구글세인데

마이클잭슨 이슈가 바로 세금의 공을 쏘아올린 것이다.

기존에 영토에 부착되었던 과세권을 이제는 영토와 연결되지 않은 활동이라도

어떻게 수익창출을 이루었는지에 따라 정하기로 했다, 합의에 의해서!

그 나라에서 수익을 창출했으면 그 나라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디지털 경제 뿐만 아니라 지구 밖 우주와 극지방을 사이에 두고도

국가간의 미묘한 경쟁은 쉴 틈이 없다.

남극대륙과 북극해를 활용하면 물류 비용을 상당 부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영유권을 두고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인류의 공동유산인 우주 자원 또한 돈이 오고가는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과학기술의 힘을 업고 빠르게 진화하는 중이다.

그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주 쓰레기는 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어느 곳에 책임을 지워야 할지에 대해서도 긴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그에 따른 규범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언제나 씁쓸해 지는 것은 지구 환경에 피해를 주는 건

숱한 자본을 투입하는 강대국들인데

피해를 보는 것은 약소국, 후진국들의 차지가 된다는 것이다.

국제법도 강대국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 자명해 보인다.

이래서 자본이라 부르고 힘이라 쓰는 국제질서의 논리가 참으로 무섭다.

그 옛날 변방국가로서 세계무대에 데뷔한 조선은

어느덧 초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국가의 위상이 상당 수준에 올라선 때도 있었다.

(지금은 제자리 걸음으로도 모자라 퇴보하는 상태....ㅠ)

현재 이 세계의 새로운 규범을 이끌어가고 있는 두 나라를 꼽으라면 이견이 없을 것이다.

미국과 함께 G2를 꿈꾸는 중국은 반도체와 우주개발 등 다양한 방면에서

굴기를 내세워 세계 최강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쉼없이 내달리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속내는 공동 이익을 추구하자는 시진핑의 큰 그림과 다르게

중국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도 없고 G2 국가로 함께 윈윈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미국은 전 세계 안에서 최강자라는 패권을,

자기들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것에 혈안이 되어

긴장 상태를 오히려 이용하려는 모습까지 보이곤 한다.

이 열강들의 틈 속에서 한국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21세기북스의 서가명강 36번째 책인 <지배의 법칙>을 읽으면

국제화된 세상에서 국가간 합의에 기초한 규범인 국제법이

얼마나 중요해졌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국제기구와 국제사회가 움직이는 기본 틀이 국제법으로 자리잡는 흐름에서

우리들의 일상생활까지 스며들어 있는 걸 이 책을 통해 접하고 보니

그 영향력이 절묘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데 규범이 그것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이재민 교수는 진단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다양한 면면들을 살펴보니

국제법 없이는 크고 작은 분쟁들을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알면 알수록 국제법의 중요성이 크게 다가온다.

정치와 외교를 아우르는 <지배의 법칙> 덕분에

국제사회의 질서와 힘의 논리, 변화의 흐름 등 전반적으로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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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엑스 마키나 - 인류의 종말인가, 진화의 확장인가
베른트 클라이네궁크.슈테판 로렌츠 조르크너 지음, 박제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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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고

나아가 인류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인간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탑재된 본성을 인간은 거스르지 못하기에...

이러한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그 기저에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싶고

길들이고자 하는 욕망이 심연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인류에게 이로운 행위라는 판단도 깔려 있을 것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이기적 이타심"이라는


이중성을 벗어나긴 너무나 어렵다.

최근에 접한 니체의 잠언집 속 구절이 지금 이 시점에서 문득 떠오른다.



<동물이 학살을 피해 가축이 되는 원리와 도덕의 상관관계>


만약 벌레가 감히 우리에게 대항해 오면

어떻게 해서든 그 종을 멸종시키려고 갖은 방법을 찾아낸다.

반대로 어떤 동물이 우리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제공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생태를 분석한다.

물론 이것은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간편하게 원하는 것을 빼앗기 위한 노력이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 동물을 가축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가축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다.

물론 이것은 동물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다.

'재산'에 대한 책임감이다.

동물이 학살을 피해 가축이 되는 원리는

인간이 사회에 도덕을 들여온 과정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중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이 우월한 존재가 되어


이 사회를 선도하고 있는 인류는

다른 종과의 대립관계 속 우위 선점만으로 그 욕망이 끝나지 않는다.

인류가 창조한 과학의 기술로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노화의 속도를 늦추려 한다.

의도적으로 자연계의 이치를, 기존의 흐름을 바꿔


디지털 영생을 꿈꾸려 한다.

그 한가운데에 트랜스휴머니즘이 있다!

첨단 과학 기술의 힘이 과연 인류의 불완전성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될까,

아니면 인간성을 위협하는 섬뜩함으로 다가올까?

세계적인 항노화 전문가와 트랜스휴머니즘 철학자의

미래 지향적이고도 흥미로운 과학 철학 대담 속에서

각자 기술 진보와 인간 진화를 둘러싼


이슈들에 따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도시와 선진국가의 증가로

인류에게 편리함은 선사했지만 동시에 지옥 또한 경험케 하고 있다.

몰랐다면 더 편했을 세상에서 채워도 채워도 늘 공허한 마음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사회가 정한 성공의 기준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기술 최적화 시대에서 인간은 현재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호모 엑스 마키나>는 내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게 했던,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두 저자는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보았다.

"인간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 본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해


인간 자신을 초월하기도 한다."

이 문장 속에서 누군가의 향기가 전해진다.

인간은 자기 본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율적인 창조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초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니체는 말했었다.

두 저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바로


니체 철학의 열정적인 지지자라는 것이다.

혁신 기술에 관심이 높으며 과학적 사고가 진보를 실현한다고 확신하는 두 저자이지만

동시에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인류에게 이로운지,

아니면 오히려 인류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주창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술을 통해

인간이 계속 발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즉, 과학기술이 인류의 '발전'을 견인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런데 그 기술의 개념이 어디까지 적용가능한지, 어디까지 인류에게 이로운지에 대한

상식과 통념은 아직 미미한 상태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뜨거운 감자인 듯 하면서도

한 켠에서는 돈의 논리가 침투해 있어 활발한 움직임들도 엿보인다.




생명 연장과 불멸에 대한 인류 욕망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이 극복해야 할 생물학적인 한계를 거스르고자 하는 시도는


중국의 진시황부터 시작해서

16c 중반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인인 프랜시스 베이컨으로 이어진다.

그는 과학의 시대가 인류에게 열어준 새로운 가능성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아틀란티스>라는 유토피아 소설을 쓰기도 했다.

이로 인해 프랜시스 베이컨은 트랜스휴머니즘의 정신적 지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c 중반 프리드리히 니체는 '초인' 개념을 도입하여

트랜스휴머니즘 시각으로 인간을 조망하기도 하였다.

1932년에 발표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

현재 트랜스휴머니즘 사회에 대한 전형적인 상상 속 공포를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기 2540년으로 질병과 노화가 전반적으로 사라진 세상을 그리는 이 작품은

모든 인간은 건강하고 능력이 출중하며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태아부터 산업 시설에서 생산되어진다.

언제나 행복을 느끼게 하는 '소마'란 마약을 대량으로 사용하면서

모두가 만족하는 사회, 하지만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디스토피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대표적으로 트랜스휴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일론 머스크

의료기술 스타트업인 "뉴럴 링크"를 운영하며 실제로

화성이주 프로젝트로 말하는 우주 식민지화,


인간의 사이보그화를 꿈꾸고 있고 또한 실현중에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 미래주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치운동은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 트랜스휴머니즘 정당은 존재한다.

이 정당은 종교 관습이나 기도, 신화가 아니라 과학을 중요시한다.

인간의 구조상 생물학적으로 여러 결함들을 발견한 인류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고

트랜스휴머니즘이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믿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뇌와 신경 강화,


유전자 강화를 통해 인류가 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바로 이 지점에서 반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우려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류의 의도대로 유전자를 편집하여 개선된 인류만 남게 만드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위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부작용 범위가 허용가능하다면 두뇌용 비아그라의 개발과


시장에 풀리는 일이 괜찮은 것일까?

DNA를 튜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

이런 와중에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자신의 저서에서


'국민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허약한 아이를 버릴 것을 권장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참 충격적이기는 하다.

유전자 개선이라는 목표가 '선'이라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우생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떻게 반론을 제기할 것인가?

트랜스휴머니즘이 선한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사회 전반적으로 통용된다면

다른 인종간의 결혼 금지, 지적 장애인의 강제 불임 시술,

기타 바람직하지 않은 결혼에 대한 금지가 시행되었던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 시대와

지금이 뭐가 다른 것일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간다운 삶과

인류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인위적인 사회가 과연 친화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는 초음파 진단으로 남아를 선호했던 표적성별낙태의 역사가 있었고

2001년 미국에서는 청각장애가 있는 레즈비언 커플이


유전적으로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남성을

일부러 정자 기증자로 선택하여 마침내 청각장애가 있는 아기를 출산한 사례가 있었다.

부모의 요청에 의해 의도적으로 장애를 유발한 채 태어난 최초의 '맞춤 아기'인 것이다.

이 레즈비언 커플은 그들의 사랑이 애정의 또 다른 형태이듯

아이의 청각장애도 '또 다른 삶의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개인의 삶에 최적화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탄생의 과정이 있고난 후부터는 '삶'이라는 이름이

그 레즈비언 커플에게만 부여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듯 유전자 강화라는 선택지가 모두에게 이로울 수는 없는 일이라면

과연 이 방향성을 응원하면서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AI가 발달할수록 인류가 지닌 고유하고도 독보적인 능력들을

퇴행하게 만든다는 문제 제기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정도로

인간 세상에 너무 깊숙히 스며들어 버렸다.

점점 기술 진보가 주는 편리성과 그 영향력에 인간은 길들여지고 있고 예속되어

기술의 힘을 벗어나고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간다.

로봇에는 없지만 인간에게는 언제나 꿈틀대는 윤리의식이란 것이 있다.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각자가 정립하게 되는 믿음들.

고대 이집트 문화에서 사후세계를 믿었던 망자들의 여정을 안내하는

'사자의 서' 속 오시리스의 재판이 떠오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를 부활과 생명의 상징으로 여겼다.

망자의 심장과 마아트 신의 깃털을 양쪽 저울에 각각 올려놓고 그 무게를 비교함으로써

내세에서 영생할 수 있는지, 소멸될 것인지가 결정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이 한 사람의 전 생애를 담고 있다고 믿었고

그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우면 지은 죄가 적어


내세에서의 부활과 영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죄가 많은 것으로 판단하여


그 망자는 영원히 소멸되고 만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역사를


현대인들은 유물을 통해 접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도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성찰의 기회를 선물 받게 된다.

현재 내게 주어진 삶을 연장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기술을 첨가하여

인간성을 상실한 채로 발전만을 쫓을 것인가,

아니면 현재 이 유한한 삶 속에서 후회를 남기지 않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다시금 고민하고 비로소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갈 것을 택할 것인가.

기술에 최적화된 인간...!

인류는 과연 자유의지로 행복하게 생명이 연장되는 삶이

축복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미래 지향적인 과학 철학 대담 <호모 엑스 마키나> 덕분에

저마다의 잠들어 있는 윤리의식을 깨우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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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 프리드리히 니체 아포리즘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욱 편역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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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철학은 물론.... 나도 어렵다.

그가 남긴 잠언들 중에서 이건 무슨 말인지 몇 번을 읽어도

못 알아듣겠다 싶은 문장들이 있음에도...

그럼에도 끌리는 이유는 뭘까 곰곰히 생각해 본다.

나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했지만 나 자신도 마땅치 않아했던 면모들,

내가 바라본 이 세상과 인간들에 대한 통찰이

내 안에 있는 생각과 톱니바퀴가 맞춰지듯 탁 걸려 버리면

놓을 수가 없는 게 내게는 니체의 철학이었다.

이번에 만난 포레스트북스의 니체 아포리즘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를 통해

다시 한번 그가 남긴 사상들을 그러모아본다.

이 인생을 다시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라니... 처음 접했을 땐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영원회귀...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자기 자신으로 떳떳하고 부끄럼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열정과 의지를 끌어모아 자유롭게, 규범과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살아가라는

의미로 나는 읽었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중이다.

지금과 똑같은 삶이 다시 반복된다해도 아쉽거나 후회되지 않도록!

아모르 파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수많은 우연들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필연 또한 감사히 여기는 마음.

때로는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내 삶이 흘러갈지라도,

그 흐름이 고통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감내할 수 있는 그런 운명애 또한 품으며 살아가는 중이다.

고통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니체의 사상 또한 겸허히 받아들인다.

피로가 쌓여 지쳐있는 나, 한심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나를 조우하게 될 때는

본능에 충실하며 충분히 쉬어주는 게 좋다는 일상의 철학도

한 번 더 니체를 통해 새겨 넣는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되, 활기차게 삶을 즐기는 와중에도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는 시간,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은 내게 언제나 독서였다.

니체에게 독서란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라고 했다.

나에게 독서는 즐거운 고독을 즐기는 시간이다.

나를 좀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기 명분 쌓기로부터 거리를 두게 해주는 것이 독서이며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이 또한 독서이다.

앎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성향상 독서를 한다는 건

타인의 학문이나 영혼 속에서 잠시 산책하는 느낌이 들어서 역시나 참 좋아하는데

니체도 이런 즐거움이 좋았다니 괜시리 친밀감도 갖게 된다.

특별할 것 없지만 요즘 나는 제2의 삶, 일하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내가 원래 잘 하던 것을 너무나 오랜만에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감사히 얻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찾아온 이 효능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중이고

조금 지친다 싶을 때면 현재 내가 갖게 된 행복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물론 나 또한 노력해서 얻었지만 이 감사함이 지속될 수 있도록

진심을 더해야겠다는 다짐도 새롭게 하게 된다.

때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간다 싶으면 예민하게 나 자신을 감각하면서

건강 또한 챙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몸과 마음, 그 어느 것 하나 먼저이고 나중인 것이 없다.

몸을 챙기면 마음도 힘을 내고 마음이 단단해지면 내 몸을 챙기려는 의지가 샘솟는다.

이렇게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니체이지만 정작 그는

편두통, 우울증 과대망상 같은 정신질환을 겪으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니체는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고통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지만

이 모든 고통들 덕분에 자신의 철학도 존재하게 되었다고, 그러니 삶을 긍정하자고 말한다.

긍정하는 자가 되어 극복해야 할 대상인 인생을 당당히 마주하려는 의지의 소유자.

니체를 보면서 삶 속에서 수많은 영감을 얻게 된다.

이러니 니체에 빠져들 수밖에!


애정하는 도서관에서 오페라 공연이 있던 날.

니체 아포리즘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을 들고 갔다가

우연히 이곳에서도 니체를 만났다.

삶의 축복이란 이렇듯 우연으로 시작되나보다.^^

니체는 내가 밟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어디 하나 영향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가 남긴 책들과 사후 발견된 편지, 일기, 메모, 미완성 유고 등에서 발췌한 이 잠언집은

예술과 삶을 기가 막히게 연결한 니체의 생각도 담아내고 있다.

예술은 오직 삶을 위해서만 존재해 왔다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에 의해 멸망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예술'을 갖는 수밖에 없다.

정신의 소산 중 가장 지치고 허약한 것,

인생에 위협적이며 부정적인 것은 예술로부터 항상 보호를 받는다.

예술은 삶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움직임이며,

평범한 삶에서 도피할 수 있게끔

사람들을 자극하는 위대한 유혹이다.

예술은 삶을 부정하려는 모든 의지를

짓누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예술은 인식하는 자를 구제한다.

즉 비극적 인식에 사로잡힌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

....

예술이란 결국 삶의 문제다.

예술은 삶을 고양시키는 것을 찬미하고

삶을 약화시키는 것들에 반대해 왔다.

예술이 예술로만 존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예술은 오직 삶을 위해서만,

삶에 근거해서만 존재해 왔다.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p.80-81

인간에게 참회와 속죄를 요구하는 기독교적 윤리를 거부하며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다.

니체 또한 온 몸으로 고통을 감내하며 일상을 살아갔던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고자 부단히 의지를 일깨웠던 초인 아닌 초인이었다.

인간의 사상을 가두며 길들이려 했던 도덕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외쳤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으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다 보면

결코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누구로부터 지탄받을 일도 저지르지 않는다고도 한다.

우리가 믿는 그대로 세상은 움직이지 않으며

오염된 진실이 난무하는 세상이라며 뼈 때리는 충고를 하면서도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의지로 능동적인 삶, 긍정하는 삶을 사는 주체가 되라고 말한다.

니체 자신도 극소수 독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밝혔지만

그의 손을 떠난 책은 이 세상의 지혜가 되었고

니체를 수용하고자 하는 건 나의 몫이며 나의 선택이니까 한 마디로 내 맘 ㅋㅋ

니체 아포리즘... 예상한 대로 한 꼭지씩 짧지만 묵직한 울림을 전하는 그의 메시지들이 하나같이 다 좋았다.

물론 때로는 머리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활자로만 존재하는 문장들도 있지만

다 섭취하다 보면 너무 배가 부르니까 ㅎㅎ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것들만 즐겁게 취사선택해도 충분히 좋을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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