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엑스 마키나 - 인류의 종말인가, 진화의 확장인가
베른트 클라이네궁크.슈테판 로렌츠 조르크너 지음, 박제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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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고

나아가 인류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인간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탑재된 본성을 인간은 거스르지 못하기에...

이러한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그 기저에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싶고

길들이고자 하는 욕망이 심연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인류에게 이로운 행위라는 판단도 깔려 있을 것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이기적 이타심"이라는


이중성을 벗어나긴 너무나 어렵다.

최근에 접한 니체의 잠언집 속 구절이 지금 이 시점에서 문득 떠오른다.



<동물이 학살을 피해 가축이 되는 원리와 도덕의 상관관계>


만약 벌레가 감히 우리에게 대항해 오면

어떻게 해서든 그 종을 멸종시키려고 갖은 방법을 찾아낸다.

반대로 어떤 동물이 우리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제공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생태를 분석한다.

물론 이것은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간편하게 원하는 것을 빼앗기 위한 노력이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 동물을 가축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가축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다.

물론 이것은 동물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다.

'재산'에 대한 책임감이다.

동물이 학살을 피해 가축이 되는 원리는

인간이 사회에 도덕을 들여온 과정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중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이 우월한 존재가 되어


이 사회를 선도하고 있는 인류는

다른 종과의 대립관계 속 우위 선점만으로 그 욕망이 끝나지 않는다.

인류가 창조한 과학의 기술로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노화의 속도를 늦추려 한다.

의도적으로 자연계의 이치를, 기존의 흐름을 바꿔


디지털 영생을 꿈꾸려 한다.

그 한가운데에 트랜스휴머니즘이 있다!

첨단 과학 기술의 힘이 과연 인류의 불완전성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될까,

아니면 인간성을 위협하는 섬뜩함으로 다가올까?

세계적인 항노화 전문가와 트랜스휴머니즘 철학자의

미래 지향적이고도 흥미로운 과학 철학 대담 속에서

각자 기술 진보와 인간 진화를 둘러싼


이슈들에 따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도시와 선진국가의 증가로

인류에게 편리함은 선사했지만 동시에 지옥 또한 경험케 하고 있다.

몰랐다면 더 편했을 세상에서 채워도 채워도 늘 공허한 마음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사회가 정한 성공의 기준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기술 최적화 시대에서 인간은 현재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호모 엑스 마키나>는 내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게 했던,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두 저자는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보았다.

"인간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 본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해


인간 자신을 초월하기도 한다."

이 문장 속에서 누군가의 향기가 전해진다.

인간은 자기 본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율적인 창조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초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니체는 말했었다.

두 저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바로


니체 철학의 열정적인 지지자라는 것이다.

혁신 기술에 관심이 높으며 과학적 사고가 진보를 실현한다고 확신하는 두 저자이지만

동시에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인류에게 이로운지,

아니면 오히려 인류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주창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술을 통해

인간이 계속 발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즉, 과학기술이 인류의 '발전'을 견인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런데 그 기술의 개념이 어디까지 적용가능한지, 어디까지 인류에게 이로운지에 대한

상식과 통념은 아직 미미한 상태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뜨거운 감자인 듯 하면서도

한 켠에서는 돈의 논리가 침투해 있어 활발한 움직임들도 엿보인다.




생명 연장과 불멸에 대한 인류 욕망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이 극복해야 할 생물학적인 한계를 거스르고자 하는 시도는


중국의 진시황부터 시작해서

16c 중반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인인 프랜시스 베이컨으로 이어진다.

그는 과학의 시대가 인류에게 열어준 새로운 가능성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아틀란티스>라는 유토피아 소설을 쓰기도 했다.

이로 인해 프랜시스 베이컨은 트랜스휴머니즘의 정신적 지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c 중반 프리드리히 니체는 '초인' 개념을 도입하여

트랜스휴머니즘 시각으로 인간을 조망하기도 하였다.

1932년에 발표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

현재 트랜스휴머니즘 사회에 대한 전형적인 상상 속 공포를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기 2540년으로 질병과 노화가 전반적으로 사라진 세상을 그리는 이 작품은

모든 인간은 건강하고 능력이 출중하며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태아부터 산업 시설에서 생산되어진다.

언제나 행복을 느끼게 하는 '소마'란 마약을 대량으로 사용하면서

모두가 만족하는 사회, 하지만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디스토피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대표적으로 트랜스휴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일론 머스크

의료기술 스타트업인 "뉴럴 링크"를 운영하며 실제로

화성이주 프로젝트로 말하는 우주 식민지화,


인간의 사이보그화를 꿈꾸고 있고 또한 실현중에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 미래주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치운동은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 트랜스휴머니즘 정당은 존재한다.

이 정당은 종교 관습이나 기도, 신화가 아니라 과학을 중요시한다.

인간의 구조상 생물학적으로 여러 결함들을 발견한 인류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고

트랜스휴머니즘이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믿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뇌와 신경 강화,


유전자 강화를 통해 인류가 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바로 이 지점에서 반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우려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류의 의도대로 유전자를 편집하여 개선된 인류만 남게 만드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위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부작용 범위가 허용가능하다면 두뇌용 비아그라의 개발과


시장에 풀리는 일이 괜찮은 것일까?

DNA를 튜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

이런 와중에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자신의 저서에서


'국민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허약한 아이를 버릴 것을 권장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참 충격적이기는 하다.

유전자 개선이라는 목표가 '선'이라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우생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떻게 반론을 제기할 것인가?

트랜스휴머니즘이 선한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사회 전반적으로 통용된다면

다른 인종간의 결혼 금지, 지적 장애인의 강제 불임 시술,

기타 바람직하지 않은 결혼에 대한 금지가 시행되었던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 시대와

지금이 뭐가 다른 것일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간다운 삶과

인류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인위적인 사회가 과연 친화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는 초음파 진단으로 남아를 선호했던 표적성별낙태의 역사가 있었고

2001년 미국에서는 청각장애가 있는 레즈비언 커플이


유전적으로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남성을

일부러 정자 기증자로 선택하여 마침내 청각장애가 있는 아기를 출산한 사례가 있었다.

부모의 요청에 의해 의도적으로 장애를 유발한 채 태어난 최초의 '맞춤 아기'인 것이다.

이 레즈비언 커플은 그들의 사랑이 애정의 또 다른 형태이듯

아이의 청각장애도 '또 다른 삶의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개인의 삶에 최적화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탄생의 과정이 있고난 후부터는 '삶'이라는 이름이

그 레즈비언 커플에게만 부여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듯 유전자 강화라는 선택지가 모두에게 이로울 수는 없는 일이라면

과연 이 방향성을 응원하면서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AI가 발달할수록 인류가 지닌 고유하고도 독보적인 능력들을

퇴행하게 만든다는 문제 제기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정도로

인간 세상에 너무 깊숙히 스며들어 버렸다.

점점 기술 진보가 주는 편리성과 그 영향력에 인간은 길들여지고 있고 예속되어

기술의 힘을 벗어나고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간다.

로봇에는 없지만 인간에게는 언제나 꿈틀대는 윤리의식이란 것이 있다.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가면서 각자가 정립하게 되는 믿음들.

고대 이집트 문화에서 사후세계를 믿었던 망자들의 여정을 안내하는

'사자의 서' 속 오시리스의 재판이 떠오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를 부활과 생명의 상징으로 여겼다.

망자의 심장과 마아트 신의 깃털을 양쪽 저울에 각각 올려놓고 그 무게를 비교함으로써

내세에서 영생할 수 있는지, 소멸될 것인지가 결정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이 한 사람의 전 생애를 담고 있다고 믿었고

그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우면 지은 죄가 적어


내세에서의 부활과 영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죄가 많은 것으로 판단하여


그 망자는 영원히 소멸되고 만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역사를


현대인들은 유물을 통해 접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도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성찰의 기회를 선물 받게 된다.

현재 내게 주어진 삶을 연장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기술을 첨가하여

인간성을 상실한 채로 발전만을 쫓을 것인가,

아니면 현재 이 유한한 삶 속에서 후회를 남기지 않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다시금 고민하고 비로소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갈 것을 택할 것인가.

기술에 최적화된 인간...!

인류는 과연 자유의지로 행복하게 생명이 연장되는 삶이

축복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미래 지향적인 과학 철학 대담 <호모 엑스 마키나> 덕분에

저마다의 잠들어 있는 윤리의식을 깨우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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