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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작은 기억 하나.   

어쨋든 나는 그의 평전을 추천하면서, 지난 군시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그 시절 내가 <죄와 벌>에 대한 '독서'를 경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 - 도스또예프스키를 '읽는다는 것' - 은 내게 세계가 가지는 어떤 초월적 감정들을 분해하고, 해체시켜, 나의 과거 속에서 재조립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그를 생각하는 것이, 나 자신의 어떤 '고착상태',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한 돌파구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철학', 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굉장히 생소하게 들려온다. 만약 이 단어가 우리에게 풍기는 향기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꽤 다양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안락함과 젖과 꿀이 흐르는 그런 풍요로움을 상징하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재미있게도, 나는 군생활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일련의 독서를 통해서 이 '불편한 이름'을 획득했다. 아니, 그것은 반대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 시간을 빌어 또한 고백하건데, 그 이전에 나는 결코 철학을 '한다'라는, 불편하고 동시에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의 문장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비교적 장황한 설명이 뒤이어져야만 하나, 그것은 어쩌면 너무 편협한 개인의 일대기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다만 내가 지금 이렇게 뜬금없이 '철학' 운운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죄와 벌>이 가져다준 무한한 충격, 그리고 그의 작품들에게서 받은 어떤 지난한 영감, 또한 그를 추억하면서 얻게 되는 모종의 '분석적 함의'로 인해 내가 비로소 철학이라는 의미를 '실천praxis'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어쨋든 그는 결코 철학자가 아니다.(저자인 카 또한 왠일인지 이 사실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요지는, 그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해 여름, 한창 유행하던 신종플루로 '격리'된 채 천막에서 소일하며 <죄와 벌>을 집어든 것은 결코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동시에 결코 타인을 '향해'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오롯이 내 자신의 내부에서, 그 언저리의 작은 모퉁이에서 조용히, 그리고 그 자폐된 공간을 맘껏 향유하면서 (마치 내가 로쟈가 되어버린 듯이)그 책을 읽어내려갔다. 이후 나는 한 편의 글을 적었다.(그 글을 적은 '공간'은 지금 사라졌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 글이 내 최초의 '실천'이었다고 생각한다. 내부에서 이루어진 독서는, 반대로 글쓰기를 통해 외부로의 '확장'을 (내부로부터)이루어낸다. 나는 과거의 자신, 그리고 현재의 자신을 맘껏 조롱하며, 비웃으며, 또한 그러한 자신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폭로'를 통해 비로소 철학적 '시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건 꽤 시원섭섭한 경험이었다. <죄와 벌>이 가져다준 하나의 (관념적)쓰나미가 나라는 매개를 통해 타자에게 '흘러 들어갈 수' 있었던 최초의 경험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하이데거와 마르크스를 동시에 읽으며 느꼈던 모종의 '이물감', 그리고 이후 니체를 읽으며 느꼈던 '모호함', 칸트와 헤겔의 겉핥기를 통해 느낀 '견고함', 마르쿠제를 신봉하면서 생각했던 '나태함', 벤야민을 통해 느낀 자신의 '비겁함', 프로이트를 즐기면서 느꼈던 '억압감', 그리고 이후에 알게 된 수많은 현대 (정치)철학자들과 그들이 보여주(었)던 '충격들'을, 나는 결코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순간을 통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나 자신이 처음으로 '인식'했던, 그 이전에는 경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하나의 '이론적 실천'이었다. 

 

비범, 혹은 평범. 그리고 이중성 혹은 결여

그의 인생을 비범하다 말할 수 있을까.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니, 대신 비범하다고 해두자. 대체로 '평전'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그의 평전을 새로이 읽게되는 것은 그의 작품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을 그의 삶 속에 투영시켜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선, 저자의 생각에 따라(때로는 반대하며) 흘러가는 그의 여정이,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하나의 시처럼 다가왔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결실'을 맺어가는 과일나무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우리들로 하여금 '고난과 역경', - 러시아가(혹은 러시안이) 가진 어떤 근원적 아픔을 포함한 - 그것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형성시킨다. 그의 작품이, 다만 현재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의 '해석틀'이 되는 이유는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그의 '세계관'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비범한(위대한)' 누군가의 실천이란, 그래서 결코 특별하지는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건 우리들이 생각하는 '평범함' 속에서 비로소 잉태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도스또예프스키의(이제야 느꼈지만 '그'라고 줄여쓰고 있었구나..) '정체성'이란, 그 모든 이력 속에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용광로에서 나온 하나의 '철재(작품)', 그리고 그 철재가 다양하게 사용될(해석될), 여러 분야의(예컨대 철로라던지, 건축물의 철골이라던지) '타자성' 속에서 비로소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처럼 다양한 분석과 비평의 잣대를 가진 작품이 이전에 존재했던가?

"옴스끄 감옥에서의 4년간 도스또예프스키는 인간 사회의 보통의 인습과 규약에서 벗어난, 거의 인간 이하의 생존에 다다른 사람들과 생활했다. 그는 지리멸렬한 인간 열정의 있는 그대로의 요소들이 끓어오르는 심연을 응시했고, 그 심연은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왔다." p.83 

니체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선악의 저편(선악을 넘어서)>이 <죄와 벌>과 갖는 연관성이란, 마치 프로이트가 라캉에게 갖는 그것만큼이나 주요한 '누빔점'을 갖는다. 사실 '동시대인'으로서, 그들이 얼마만큼의 정서적 교류를 경험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 속에는 어떤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우리들은, 그 '응시'속에서 그 이외의 단 한사람, 바로 '니체'라는 하나의 '철학적 토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의 문제, 더불어 이러한 윤리적 작인으로부터 파생되는 '죄의식'의 문제는 결코 현대인의 '권리'의 문제와도 동떨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더 확대-재생산되어, 그리고 라캉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의 '영역'에 귀속되어 우리들에게 한층 더 가속화된 죄의식을 경험하게 해준다. 물론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은 이러한 '억압'을 부정한다.(그들은 오히려 이러한 모든 억압된 죄의식들에 대해 분자화된 '혁명'을 추구한다.) 이렇게 로쟈로부터 파생되는 일련의 윤리적 '문제제기'는, <백치>를 통해 형이상학적 구체성을 향해 나아가며 <악령>을 통해 정치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포획한다.  

".. 모든 현상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연역되야 한다면, 또한 모든 현실이 에고로부터 추출되는 것이라면 행위의 외적 기준 혹은 제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최상의 의무는 자기 자아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그리고 최상의 사명은 자기 개성의 발전과 성취가 아닐까? 라스꼴리니꼬프의 동기는 스스로가 초인임을 입증하고 도덕적 관습을 뛰어넘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p.232 

결국 이러한 '권리', 즉 주체가 가진 윤리적 '이율배반'의 관점에서 우리는 그의 '이후' 작품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테제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단지 헤겔을 참조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온전히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판단한다. 예컨대 그가 내비치고 있는 죄의식의 '주체'는 확실히 유물론적이다.  

"... 그것은 아마도 죄에 있어서의 공산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인바, 이것은 <악령>의 마지막 부분의 한 줄에 처음 나타나 그의 후기 작 전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는 자기 임종에 앞선 확각의 순간에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죄를 졌다"고 말한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조시마는 죽어 가는 형으로부터 "모두가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일에 죄를 졌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것은 어쩌면 속죄의 신학적 이론을 수학할 수 있게끔 하는 유일한 이론일 것이다.." p.351 

그는 단호하고 선언적인 태도로, '모든 죄의식의 주체'가 다름 아닌, '모두'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확실히 신학적인 언표로 들린다. 하지만 더불어 그것은 하나의 토대, 그러니까 죄의식이 가지는 일종의 하부구조를 담지한다. <이>로서 살아갈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침묵할 수 없는' 하나의 물음이다. 단순히 이러한 죄의식의 '주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죄의식 자체의 '전全책임성'을 인정하고 하나의 '권리'를 재-탄생시킬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모든 것'에 대한 '모든' 죄의식을 '모두' 해체하고만 있을 것인가? 

나의 경우엔, 모든 '해체의 작업'은 해체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필연성의 구조 내부에 잠식하는, '우연성'이라 불릴 만하다. 죄의식이 가지는 모종의 '권리'의 해체에 대한 모든 시도는 어떤 필연적 우연에 의해 해체되는 것일지도. 다만 그러한 작업이 잉태하는, 나머지로서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미성년>에서 그가 보여주는 비형식성, 그리고 주인공의 심리적 혼돈과 분열의 제 과정이야말로, 그러한 후기 작품에서 그가 주요 쟁점으로 생각하는 이중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저자인 카는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미성년>을 하나의 '위대한 실패'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어쨋든 또다시 모든 귀결은 이것이다. "인간 본연의 윤리, 그 무의식의 심연을 오롯이 장식하고 있는 바로 그 테제의 분열과 안티테제의 도전을 허용하는 모든 '죄의식'의 권리가 만들어내는 복합물로서의 '해체'의 잔여물이란, 과연 어떤 경로로서 이러한 '결여'의 공백을 대체하는 '이중적 욕구'를 만들어내는가?" 

그러므로 내게 만약 그의 평전을 읽고난 뒤에 남은 단 하나의 물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이여, '무엇' 때문에 당신은 <범인凡人>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소?"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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