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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정상에 이르는 길이 여러개라는 뜻도 되고, 산을 오르는 방법이 여러가지라는 뜻도 된다. 혹은, 그것은 산을 오르는 '이유'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대개는 건강과 행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산을 오를테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복'을 위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사색을 위해서 산을 오르기도 한다. 거칠게 보자면, 등산은 대개 무언가를 잔뜩 '채우는' 활동이 되거나, 혹은 무언가를 모두 '비우기' 위한 활동이 된다.

촘스키와 푸코라는 유명한 두 사상가의 대담은, 언뜻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로 판명되기도 하나, - 물론 공통점도 있다. 동시대의 두 인물에게는 푸코의 말마따나 어떤 정의된 '정의'가 있는 것이다 - 단순히 그 이분법이라는 것이 어떤 활동 그 자체의 즉물적인 목적을 위한 것은 아니다. 즉 다시 말해 두 사상가의 이분법적 구도는, 오히려 그 자신들의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회용' 대담에서는, 그러한 사상적 내밀함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히려 이 이분법적 구도에서 펼쳐지는 두 사상가의 '입심대결'에서 알아보아야만 할 것은, 그들의 내부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내부 - 그 사이의 분절된 간극과 그 간극만큼이나 즉자적으로 '분열된' 우리의 사유-체계이다. 

둘의 대담에서의 디페랑스적 요소 - 촘스키에 의해 정의되는 푸코적 텍스트와, 푸코에 의해 조명되는 촘스키적 텍스트에 관해, 그리고 필연적으로 지연되는 그 '해석'에 관해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인간성을 구성하고 있는 스키마를 기본 요소로 판명하는 촘스키의 언어관에 대하여, 푸코에게는 그 '인간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지표, 그러니까 기타 담론에 대한 하나의 '인식론적 지표'의 역할만을 할 뿐이며, 과학적인 개념으로서 작용하지도 않는다.  데카르트가 촘스키적 '창조성'에 하나의 기준이 된다면, 푸코는 그러한 일반적 '기준'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스피노자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촘스키가 주장하고 있는 '아나코 생디칼리즘'에 대해 푸코가 이렇다 할 반문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인데, "사회-정치적 권력과 신체들을 통제, 억압하는 감춰진 관계들의 폭로"를 위하여 과연 자유론적 사회주의가 올바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좀 더 끌고나갔으면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만 뒤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에 관해 사유하는 모습에서는, 역시 필자 자신이 푸코의 생각에 가깝다는(혹은 가깝고자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촘스키의 '보편문법'이 틀렸다거나, 비본질적인 내용이라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러한 '내면적' 사상에 잠식한 '내면'을 까발리고자 했던 것이 푸코의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 정치/경제 권력의 지배수단으로서 혹은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러 다른유형의 사회에서 발명, 유통된 개념입니다" 

이러한 푸코의 발언은, 일종의 '유토피아적' 구상에 대한 사변적 논쟁과도 일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의 말마따나, 과연 "계급 없는 사회에서의 '정의 논쟁'혹은 '정의의 정초'는 가능한가?"하는 것. 이것은 다만 인간성을 어떤 '보편-절대적 기반'으로 간주하는 촘스키의 '권위'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과연 계급과 계층과 억압과 공포가 사라진, 진정한 '민주주의'의 재건 속에서, - 그러니까 그러한 유토피아적 건설 속에서 - 우리가 느끼는 '정의'라는 개념과 '인간성' 내부의, 혹은 '주체'라는 '충분히' 분열된 개념은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 더불어 그것은 촘스키와 같은 비교-중도적 탈중심화에서는 결코 발견되어질 수 없는어떤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조를 중시하여 사건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처럼, 반대로 사건을 중시하여 구조를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유형의 사건들이 다양한 층위를 형성한다는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탈구조주의자적'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한 만하다. 구조에 편입될 수 없는 '사건'들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론적 경로들을 가지며, 그러한 의미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어떤 투쟁과 전략 - 상징주의적 분석이나 기호론적 분석, 그러니까 헤겔적 회피와 기호론적 안일함을 배재한 -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투쟁' 자체의 '현실'적 면면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면서' 사건의 탈구조화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이후에 나오는 권력과 '억압'에 대한 그의 의견은 꽤 유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억압이라는 개념은 권력의 효과를 규정하는 데 권력의 사법적 측면에 너무 치중하는 것입니다. 권력이 순전히 억압적인 것, '안 돼'라고 말하는 것뿐이라면 사람들이 그것에 순순히 복종하리라고 보십니까?" 

이러한 그의 의견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대안은, 권력 관계에 대한 분석이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부 구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진정한 분석과 대안도출이 어렵다는 것.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 그래서 그의 이러한 사상이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 국가의 범위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현실적 '혁명'이란 불가능하다. 그것이 어떤 '국지적' 혁명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대의'는 언제나 국가라는 틀이 아니라, 구조적 관계를 넘어선 탈구조적 '공동체'와 연대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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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임명하지 않은", 그래서 "그 누군가로부터도 임명되지 않은" 보편적 '개인'으로서의 우리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본질적' 분석에 대하여 그는 하나의 '관계망'을 남겨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관계망에 대한 분석틀, 상징계적 현실에 관한 비판적 분석틀을 위한 '보편적 개인'의 '투쟁'은 지금-여기에도 충분히 유효하다. 푸코를 읽는 것이 개인에게 언제나 '현실'을 읽어나가는 것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투쟁의 굴레, 그러한 '전체적이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우리의 사유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앞당길 수 있는 개인적 '주체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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