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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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쨋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단히 명료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칸트의 저서를 읽을 때 오는 그 '싸늘함'과는 별개로, 그의 저서에는 어떤 종류의 '따듯한 친절함'이 뭍어나오는 것이다. 더불어 이것은 대단치 못한 리뷰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게다가 평소에 그닥 관심이 없었던 그의 '공동체주의'이지만, 졸렬하고 단편적인 독서를 통해 필자가 과연 샌델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담보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과연 '도덕'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이해'되어야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모든 오해와 오독을 무릅쓰고 짧은 리뷰를 남겨보고자 한다.
물론 이 저서 전체의 구체적 리뷰는 필자에게 불가능하다. 그것은 칸트와 롤즈에 대한 독서가 끝난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그가 펼치는 일정 부분의 논리적 사고는 非아시권의 현실을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교육'에 관한 부분을 다룰 때 거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내용에 대한 '주석달기'를 감행해보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좀 '불완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도덕법의 근거는 실천이성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 즉 자율 의지를 가진 주체에서 찾을 수 있다. 경험적 목적이 아니라 "목적의 주체, 즉 그 자체로 이성적인 존재가 모든 행동 원리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오직 칸트가 말하는 "가능한 모든 목적의 주체"만이 권리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이 주체만이 자율 의지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이 주체만이 감각적 존재를 보다 더 높은 존재로 격상시켜주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독립적이고 이상적인 영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처럼 철저한 독립성만이 상황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초연함을 부여한다." (p.180-181)
예컨대 고진은 <윤리 21>의 서문에서 이런말을 했다.
"나는 이 책에서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하려고 했다. 칸트는 일관되게 도덕적=실천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가 도덕적이라든가 실천적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통상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것을 윤리라고 부르고, 도덕이라는 말은 통상의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즉 도덕이라는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를 '자유'라는 의무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한다."
오히려 더 헷갈릴 수도 있지만, 고진은 샌델을 읽는 데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또한 '칸트'를 통해 그의 '윤리'에 대한 생각을 펴 나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독서가 선행/후행 한다면 더욱 좋을듯 싶다.)생각해보니, 이 주제로 세미나 같은게 열리면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고진과 샌델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고 보는 필자이지만, 인용한 두 내용은, 롤즈를 넘어서기 위한 샌델의 '분석'이며, 또한 칸트를 재해석하기 위한 고진의 '재구성'이라는 점에서 참고해볼만 할 듯 싶다.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인문학적 사유의 '주변부'라고 인식되는 우리, 여기, 한국에서, 이렇게 고진만큼 샌델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 게다가 이렇게 '물밀듯' 저서가 쏟아져나오고 있으니 - 어떤 의미에서 썩 달갑지만은 않은 부분이다. '정의'와 '하버드'가 세트로 묶여 '시너지'를 만들어냈다면, 사실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왔던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이제서야 '제대로' 번역된다는 것은 아니러니하다. 게다가 이제 그는 그러한 공동체주의의 한계와 수정을 가하고 있는 입장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서는 '도덕'과 '정의', 혹은 '윤리'에 대한 '정초'가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칸트 전공자는 무수히 많으며, 롤즈, 밀, 듀이, 게다가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이들도 무수히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 또한 이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물론 어려워서 던져놓기 일쑤지만) 아둥바둥 거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는 어떤 '기시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철학과가 사라지고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것이며, 인문학도로(특히 철학도로) 자신의 미래를 전유함으로 얻을 수 있는 초라한 경제적 지표를 상상해볼 때이며, 혹은 그러한 현실을 박차고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게 지금 이 순간도 어떤 '목적'을 향해 투쟁하고 있는 홍대 인근이며, 국회 의사당 앞이며 하는 곳의 '운동'의 모습이 바로 그에 대한 '이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도덕'(혹은 윤리)의 '이름들'을 읽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의 동어반복적 '실천'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책에 대한 독서는, 바로 '도덕=실천'이라는 비공식적 공식에 대한 우리의 '움직임'을 촉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쨋든, '신호등의 빛'은 그 자체로 '도덕률'이 아니다. 칸트에 대한 답보가 의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빛은 그 자체로 도덕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도덕에 대한 관념의 '형이상'이다. 여기서 신호등의 빛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 빛이 아니며, 바로 우리 머릿속에서 어슴프레 빛나고 있는 그것, 우리가 '자율의지'를 가진 '주체'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어떤 '공백'에서 삐져나오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도덕률이란 바로 의식적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적 차원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에 가깝다. 그것은 무의식과 의식을 함께 '꿰뚫고' 삐져나오는 것이며, 샌델의 말처럼 어떤 '자아상'과 관련되는 것이라 할 만하다. 이상주의적 견해라기보다, 이것은 확실히 '법(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가운 점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대한 샌델의 이 엄격한 '공격'들이, 충분히 정당하다는 데에 있다. 정치(철학) 담론에 대해 그가 말하는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넘어서기'는,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공동체'가 단지, 개인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했던 '공백의 영역들'을 채우는 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