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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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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에서 자랐고, 바다에서의 기억이 많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 바다의 기억은 분열되어 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다다, 라고 내가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그런 분열된 기억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바닷가 태생과 같이, 나는 바닷내음이라는 걸 모르면서 지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의 냄새는 나의 냄새이므로, 나는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나 보다. 그런 것이다. 대부분의 삶이란, 그렇게 '정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은 모르고' 지나쳐가게 되는 것이므로. 하지만, 바다를 떠나 서울에 와 두 평 남짓한 원룸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가장 그리웠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냄새이자, 바다의 냄새였던 것 같다. 글쎄, 믿으련가 모르겠지만, 나는 서울에 올라와서야 바다내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유년시절의 나를 휘감았던 추억의 냄새라는 것도.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란, 의외로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풍경일 경우가 가장 많다. 특히 겨울의 바다를 거닐어 본 이라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을씨년스러움과 부피만 큰 고독, 혹은 끝없이 침잠하는 외로움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슐레가 바라본 바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매우 '생물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때로는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내어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백사장을 거닐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수평선의 풍경과 나는 얼마만큼의 '시차'를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 옆에서 보든, 위에서 보든, 때로 물속에서 보든, 바다는 바다다. 그것은 그저 '흘러 넘치고' 있다. 그것은 때로 인간을 보듬고, 인간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며, 간혹 인간을 그 누구보다 무섭게 위협하기도 하며, 그러다가는 다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끝없이 침묵하기도 한다.  

"그래 괴물아, 뭘 원하는 거냐? 사방에 보이는 난파에 취했구나. 뭘 더 바라느냐? - "너와 세계의 죽음을, 지구의 멸망을, 카오스로의 회귀를." (p.84) 

우리의 시각이 어떤 면에서 '아웃 포커싱'과 같은 기능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시각을 가장 집중시키는 것 또한 바다의 한 특징이다. 태풍이 오는 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방파제를 뚫고 올라오는 파도를 보노라면, 저 수평선 너머의 세상은 한없이 멀어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춤추는 바다의 앞에 선 인간은, 결국 한없는 존재의 나약함과 부질없음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미슐레의 물음에 대한 바다의 답변처럼, 바다는 어쩌면 태초의 카오스, 그 자신이 약동하던 시대의 카오스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아무리 큰 배와, 육지매립과, 4대강 사업을 넘은 4대양 사업을 통해서도, 심지어 '조니 뎁'이 100명쯤 있어도 결코 바다를 정복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바다가 가진 '광범위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본능' 때문이다.

"본능은 한동안 잠이 든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다. 그렇지만 잠들었는 붙잡힌 채 갇혀 있든, 마술에 취했든, 이런 상태가 곧 죽음은 아니다. 본능은 살아있다. 규석으로 짠 거친 해면 상태로. 움직이지도 숨쉬지도 않고, 순환기도 없이, 아무런 감각 기관도 없이 살아있다. 그것을 어떻게 알까?" (p.125)

땅거미는 바닷가에도 찾아온다. 한동안 횟집들이 켜놓은 울긋불긋한 불빛들이 하나 둘씩 일렁이기 시작하면, 비로소 황량한 바닷가 마을에도 저녁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 문득 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백열전구가 빛나고, 어슴프레하게 달빛이 얼굴을 내민다. 바다의 저녁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온다. 그리곤 바람이 분다. 언제나.  

"바다의 생명에 꿈이요 소망이자 복잡한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정착이다."(p.208) 

그렇게 해질 무렵의 바닷바람은, 우리를 한동안 머물게 한다.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은, 대게 그 광경 앞에 잠시 그 바닷가의 풍경속에 무겁게 가라앉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바다는 거울일까? 미슐레의 말처럼 바다가 가진 하나의 '욕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닷바람이 만드는 '주체로의 회귀'인 듯 보인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정착이며, 반대로 떠나갈 수밖에 없는 바다와 인간의 운명이다. 운명의 굴레는 그렇게 바닷바람과 함께 오는 듯하다. 

늦은 저녁, 백사장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는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같이 등대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등대가 비추는 바다 위의 동심원을 바라보는 일이다. 인간은 그렇게 바다를 보며 다름 아닌, 자신에게 덧씌워진 운명의 굴레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눌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루해가 저물었다. 바닷새는 늦게 날아와 파도를 부추기다가 다시 땅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절벽과 어둑한 정원 너머로 날카롭고 섬뜩한 밤새의 첫 울음이 들려온다. 그러나 새장은 벌써 닫혔다. 새들은 날개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잠들었다. 그녀도 안심하고 안도한다. 이윽고 깊은 숨을 토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를 품에 끌어안는다."(p.330) 

바다가 잠들면, 인간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떠난다. 하지만 '텅 빈' 집의 문은 닫혔다. 그것은 주체의 공간이다. 공허함을 가득 안고, 인간은 그렇게 바다를 떠난다. 하지만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바다에서 태어난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기어들어가 죽음을 맞이하고픈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자신과 바다를 끝없이 '포옹'하는 일이다. 그것이 깊이 잠들 수 있도록. 혹여 밤새가 날아와 울거나, 아득한 심연의 악몽을 꾸게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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