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을 자유>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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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책을 읽을 자유>
   

로쟈,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순전히 ‘입소문’에 의한 것이었다. 군 시절, 모 커뮤니티에서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고, 이후 그가 운영하는 알라딘 서재에 자주 출입하곤 했다. 특히, 그의 ‘지젝 읽기’는 필자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물론 지젝을 제외하고도 그는 정말 ‘인문학 서평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으며, 지금도 더욱 그러하니, 그의 명성에 대한 얘길랑 이쯤에서 접어도 무방할 듯싶다. 올해 여름에는 그의 첫 번째 저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어본 바, 과연 그가 ‘곁다리’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의 책벌레로서의 ‘열정’만큼은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그가 말했던 에세이스트로서의 김훈에 대한 사랑이나, 데리다주의자(?)로서의 면모, 국내 번역의 문제점들을 꼬집는 비판적/계몽적 시선에서 나아가, 이번의 저서 <책을 읽을 자유>에서는 그러한 ‘논점’들이 좀 더 ‘확장’되고, 현실과의 절합을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내고 있다고 정의내리고 싶다. 물론, 필자는 그에게 ‘조금 더’의 ‘이론적 실천’을 요구하고는 싶지만, 그는 확실히 ‘혁명적 투사’의 역할보다는 끈질긴 책벌레의 역할이 어울린다는 생각은 든다. 그가 단순히 ‘좌파 지식인’ 등의 탈을 쉬이 쓰기보다는, 진지한 분석가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 그의 글에 대해 무언가 ‘리뷰’를 쓴다는 것은, 필자에겐 꽤 어려운 일이다. 어떤 리뷰(비평)가 그러하지 않겠느냐만, 그의 글은 이미 하나의 정돈된 ‘리뷰’이므로, 그에 대한 ‘메타비평’은 그보다 더 나은 하나의 ‘창작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비평도 하나의 창작이라면.) 하지만 필자에게는 로쟈를 뛰어넘을 만한 지적 능력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평을 할 자유’ 따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하하. 하여간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을 한번 ‘훑어’보자. 다만 훑어보기에도 너무 방대하므로, 필자가 마음에 들었던 몇몇 키워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로쟈와 한국(문단)문학

재미있는 것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어왔던 ‘문학의 종언’ 담론에 대해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가 굉장히 ‘시차적’이라는 점이다. 해서, 그가 문두에 제시하고 있는 ‘어느 환자의 이야기’를 통해(자신이 낱알이라고 생각했던 환자) 한국문단문학에 대한 과잉이나 결핍된 사변에 대한 ‘동일성’을 피력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되는데, “하지만 닭이 그걸 알까요?”라는 황당한 물음은, 한국문단문학의 ‘대타자’로서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진 ‘믿음’의 ‘숭고성’을 환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의 무능과 부덕에 대해서, 불륜에 대해서, 몰락에 대해서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다시금, ‘핏빛 어두운 조수’가 퍼져나가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학에 대한 ‘가장된 순진한 믿음’, 곧 ‘참된 위선’의 회복처럼 보인다. 우리는 문학을 좀 더 진지하게 믿는 척할 필요가 있다.”(p.218)

더불어, 이와 함께 그가 제시한 인물은 당연하게도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를 수용한 ‘조영일’이다. “한국 문단문학은 창비, 문사, 문동이 장악하고 또 관리하고 있는 하나의 ‘생산관리 시스템’이다”라는 게 조영일의 분석 첫머리를 장식한다. 다만 로쟈의 분석에 따르면, 이것(<한국문학과 그 적들>)은 논쟁적이며 유익하지만, 가라타니의 종언테제와는 차별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영구혁명’이라는 사회적 의무, 도덕적 과제를 떠맡지 않게 된 문학의 시대적 현실을 말했다면, 조영일은 그러한 가라타니의 현실의식을 발판삼아 국내문단(학)의 ‘시스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조영일의 ‘쓴소리’는 개인적으로도 동감하는 바이다. 더불어 무엇보다 “문학은 끝났다!”라는 선언이 모종의 ‘결핍감’을 상징한다면, 우리에겐 그 결핍된 감정만큼이나 문학에 대한 ‘열정’이 표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것은 ‘문학’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반추된 비평정신’이 요구됨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문학은 언제나 과도기를 살아가는 분야이며, 또한 그래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문에서 (비평계의 슈퍼스타 K ?!) 신형철이 말한 것과 같이 필자도 그의 ‘길고 이기적인’ 글 중의 하나, <기형도의 보편문법>은 정말 집중해서 읽은 글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로쟈만큼의 ‘기형도 매트릭스’가 존재한다면 참 기쁠 일이겠다.(물론, 백석이 먼저다.) 그리고 로쟈가 유년 시절의 ‘훌쩍거림’으로『엄마 걱정』을 꼽았다면, 필자는 ‘훌쩍거림 이후의 단잠’으로 『꽃』을 꼽아보고자 한다. 어쨌든 울고 난 뒤엔 잠이 오는 법이다. 게다가 그것이 기형도처럼 ‘영혼이 타오르는 날’, ‘영원한 잠’을 자게 된 사람이라면 더더욱.

꽃 / 기형도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 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2. 로쟈와 ‘정치적인 것’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즉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p.443)

“······슈미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나’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p.446)

주로 뒷부분의 글들 - 정치나 철학 부분을 다룬 - 은 개인적으로는 좀 ‘길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물론, 원고 제한을 맞추느라 ‘노력한’ 로쟈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필자의 글처럼) 재미도 없이 긴 글을 좋아하는 변태적 취미를 가진 건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무페, 라클라우, 랑시에르에다 아감벤까지 죽죽 이어지는 ‘정치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2%의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 정치철학에 대한 입문적 내용의 부족함이라기 보단, 마술쇼를 보고 난 후의 ‘좀 더!’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하건, 그는 ‘정치철학’에 있어서도 필자가 본받아야 할 책벌레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서문에서 ‘책을 읽을 자유’라는 제목을 지은 이유를 설명하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의 한마디, “사랑스러운 여러분”을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을 고스란히 그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적인 것’과 관련하여 가장 뜨겁게(?) 읽은 글은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설명하는 <타는 목마름으로>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무페의 사상적 근원이 된 ‘칼 슈미트’에 대한 글을 한편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더불어 최근작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와의 접점도 존재하는 부분이라, 현재 ‘민주주의’가 처한 근본적 고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상탈 무페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은 적대감이 아니라 합리성과 중립성을 가장한 합의”라는 말에 따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정치, 즉 분열하는 H당과, 갈길 잃은 M당 등에 대한 ‘치 떨리는 노여움’이며, 진정한 의미로서의 ‘정치적 갈등’을 위한 ‘타는 목마름’일 것이다.

더불어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소개는, 유명한 ‘시라크와 미테랑의 대선’ 일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랑시에르는 이 일화를 통해 ‘정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통치과정과 평등과정의 마주침으로 일어나는 사건-현장)과 비교하여 로쟈는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을 언급한다. 또한 “정치절학의 전통적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단언하는 아감벤의 사유를 따라간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민주주이이며, 행복한 (정치적)삶인가?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번에 함께 읽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떠올리게 되는데, 아감벤에 의하면 오웰의 예술-정치적인 작가로서의 사상은 오늘날 정치-현실적으로는 ‘맞으면서 동시에 틀린’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글쓰기’라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내포한다는 점을 아감벤은 긍정할 것이며, 반대로 “(정치 권력적)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을 바란다는 점에서 단순히 오웰의 ‘정치적 목적’이라는 ‘고루한’ 용어의 ‘무비판적 수용’을 부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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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그의 ‘가라타니 고진’론(<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말했다>)은 거의 고진의 저서와 사상에 대한 ‘입문’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쉽게 쓰여 있다. 뭐, 로쟈의 말처럼 고진 자체가 이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간결하지만 핵심적인 저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데리다에 대해서는 지난 저작에서도 어느 정도 피력되었지만, 그가 데리다를 얼마나 ‘중요한’ 저자이자 철학자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필자도 로쟈 덕분에 최근 데리다의 <법의 힘>을 읽고 있으니, 왠지 물들어가는 기분이다.) 다만, 라캉에 대한 설명은 비교적 너무 ‘궁핍한’ 편이다. 라캉(만)에 대한 그의 글이 별로 없었는지, 아니면 지면상 데리다에 밀려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캉주의자의 발뒤꿈치를 따라가 보려는 필자에겐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어째, 계속 그에게 모종의 ‘원고청탁’만 하는 꼴인 것 같다.)
더불어,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 또한 벤야민을 잘 모르는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무엇보다 <“너 책이야? 나 장정일이야!”>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김훈’ 못지않은 장정일에 대한 애정도 느낄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다. 어쨌든 그의 글을 ‘훔쳐보고’난 후의 느낌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뭔가 ‘빚진 듯한’ 감정이 밀려오는 것이다. 게다가 훔쳐보았다는 관음증의 죄책감도 더불어.

그는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고 재인용하여 (그리고 힘주어)말한다. 공감되는 말이다. 다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책벌레의 아포리아’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것은 다른 용어로 ‘책벌레와 자유’의 관계를 의미한다. 책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책벌레와 먹이로서의 ‘책’의 관계망 말이다. 그렇다면 책벌레는 과연 ‘책을 읽을(먹을) 자유’가 있는 것일까? 책벌레는 책의 존재로부터 그 자신의 존재성을 부여받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책을 읽을(먹을) 의무’로 보이기도 한다. 즉 여기에는 ‘책’과 ‘책벌레’사이의 묘한 긴장, 그리고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관계 역전, 즉 헤겔이 말한 ‘주-노의 변증법’이 숨어있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반대로 “책은 한 인간의 인생 한 순간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병치된다. 즉 하나의 ‘텍스트’의 해석 대한 ‘시차적 다원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예컨대 누군가에겐, 한 권의 책이 인생의 여러 순간에 걸쳐 각각 다양한 ‘경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책벌레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절반의 자유지만, 비로소 ‘완벽한’ 자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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