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사랑
정찬주 지음 / 봄아필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다도(茶道)동아리를 활동할 때 배운 것들 중 하나가 일반적으로 차()를 지칭하는 말은 녹차(綠茶)이다. 녹차란 찻잎을 잘라 가마솥에 덖은 다음 볏짚에 차 잎을 비벼주고, 다시 가마솥과 볏짚에서 덖고 비벼, 차의 맛과 향을 내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차를 마시는 것에서 차라 결국 찻잎을 덖고 비빈 후에 만들어진 수제품이다. 그러나 보통 차를 마시는 녹차만 있는 것으로 알지, 그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다른 칭호가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124절기 중에 곡우(穀雨) 전후로 따는 차 잎을 우전(雨前), 입하 이전에 딴 찻잎을 세작(細雀), 입하 이후로 중작(中雀), 한 여름에 이르러 따는 찻잎은 대작(大雀)이라 한다.

 

보통 찻잎은 세작과 중작을 많이 마시고, 대작은 잎이 너무 커서 맛이 없고, 우전은 찻잎이 너무 작고 일손이 많이 필요하며, 찻잎의 기운이 세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 그래서 보통 세작과 중작이 시중에 많이 나온다. 처음 찻잎을 따서 만드는 우전이 나오는 시기가 2018420일 곡우를 전후로 다가온다. 24절기는 보통 양력으로 하는 법이나, 본래 우리 민족은 양력이 아닌 음력으로 날짜 계산을 많이 했다. 우전인 날은 차와 관련된 인물하고 깊은 관계가 있는 날이다. 음력 222일은 올해 47일이다

 

음력 222일은 1836년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능내리 여유당(與猶堂)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서거한 날이다. 그분이 태어난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원통하게 죽을 때이고, 그분이 돌아가신 것은 182년이 되어간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서거일은 특이하게도 회혼일이다. 병마절도사 홍화보의 외동딸은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 시집가서 다산 선생의 마지막 가던 날까지 함께 있었다. 물론 귀양의 고통은 그 가족 모두에게 절망이었지만, 다산 선생의 마지막은 행복이었을까? 아니면 절망이었을까

 

다산 선생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희망과 절망, 슬픔과 기쁨이 너무 교차한다. 2017년 추석, 나는 이때 정민 교수님의 <다산 증업첩><다산의 재발견>을 읽었다. 페이지 수가 700에 이르는 두꺼운 도서에 책 크기도 매우 커서 읽는 시간이 아주 길었던 책이었다. 다산 선생이 직접 쓴 편지와 다산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모우 번역하고, 당시 상황과 일반적으로 우리가 몰랐던 다산 선생의 모습을 잘 보여준 책이었다. 전에 강진 다산초당에 갔는데, 어느 누군가 아주 한심한 이야기를 한 것을 들었다.

 

강진은 바다가 접해진 남해권 지역이나, 한편으로 탐진강을 중심으로 논밭이 형성되어 있어 농촌과 어촌의 장점을 고루 갖춘 동네이다. 다산초당 정자에서 보이는 강진만을 넓은 바다로 이어지고, 강진의 백형인 정약전 선생을 그리는 마음을 그 자리에 서서 달랬다고 한다. 경치는 좋고, 동백나무 숲이 어울려져 있는 백련사도 옆에 있다. 초당에 오르는 산길은 약간 험하나 숲은 아름다리 나무가 우뚝 서 있고, 차나무가 산길 옆 경사에 비뚤하게 자라있다. 지금에서 보면 경치가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귀양을 온 입장에서는 답답하고도 편안한 곳이다. 그런데 어느 다산초당 방문객 한 사람이 초당 동암에 앉으면서 다산 선생이 여기서 귀양한 것을 두고 마치 휴양하러 왔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런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다산의 일생을 알고, 그가 겪은 풍파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런 발언이 나올 수 없다. 1800년 정조대왕이 붕어하고, 18012차례의 옥고를 치루면서 막내형인 정약종과 매형인 이승훈의 목을 저잣거리에서 베어졌다. 1791년 신해사옥으로 외사촌형인 윤지충과 윤지충의 이종사촌인 권상연 역시 참수되어 효수되었다.

 

신유사옥 이후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도 죽고, 훗날 천주교 탄압에서 정약종의 아들과 딸 역시 참수되었다. 가족들이 모조리 도륙되고, 큰형의 조카사위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자신의 사촌동생은 제주의 관노로 팔려가고, 황사영의 아이는 어느 작은 섬에 몸을 숨겼다. 도륙난 집안을 두고 멀리 귀양을 온 그에게 휴양이란 말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미 나는 할 말은 잃은 셈이다. 다산은 우리가 알기에 위대한 유학자, 정치가, 경세가, 법학자, 의학자, 교육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자한 아버지이면서 스승이기도 하다. 다산이 한국위인 중에서 항상 존경되는 분으로 선정되는 이유는 괜한 이유는 아니다.

 

이번에 읽은 <다산의 사랑>을 읽었다. 다산의 큰 모습을 보지만, 사람들은 작은 모습을 알 수 없었다. 다산의 따님이 친구에게 시집가고, 강진에서 과부를 만나 사랑을 하고 또 다른 딸을 가졌고, 다신에게 찾아온 제자들은 누구고 그들은 스승하고 어떤 교감을 지녔는지 말이다. 책을 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인 점은 다산 선생이 해배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다산초당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다산 선생과 18제자가 맺은 다신계(茶信契)가 무신계(無信契)로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다산 선생의 다신계가 해배 이후 서거하시자 거의 절명했지만, 20세기 다시 부활했다는 점이다.

 

국내 다산 선생의 연구자로서 위당 정인보 선생이 계신다. 그분은 잃어버린 조선에서 다산이란 존재란 조선의 마지막 등불이고, 우리 민족이 언제나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 평했다. 다산의 제자 중에 귤동마을 윤씨들이 많았다. 귤동마을의 윤씨는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와 같은 성씨이다. 그러나 촌수가 제법 먼 외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산을 받아주고, 다산을 위해 다산초당을 내어주었다. 다산초당에서 다산에게 찾아온 애제자들은 다산의 노년에 찾아와 스승에게 안부를 나누고, 다산 선생이 서거하고 그들조차 세상에서 사라질 때 누군가는 계속 다산의 영혼을 지켜줘야 했다

 

귤동마을의 윤씨 후손들은 다산초당을 보존했고, 다산 선생이 남긴 기록을 다시 찾아내어 세상의 빛을 보게 했다. 그러나 처음 다산 선생이 강진에 오실 적에 강진에 작은 주막의 노파만이 받아주었고, 아무도 그를 가까이 보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촌마을의 윤광택은 친구의 아들이 곤란해 하자 사람을 보내 위로했고, 다산 선생을 위해 몸과 마음을 위로해준다. 윤광택은 다산 선생이 귀양 온지 몇 년 지나자 세상을 등지고, 그분의 아들인 윤서유가 다산 선생을 친구로서 대해준다

 

그런 인연일까? 다신계의 정신은 아직도 이어져 가는 것이 참 대단한 것 같다. 올해 2018년 다신계 절목이 결성된 지 200주년이 된 해이다. 다산 선생이 1818년 강진에서 해배된 시기에 결성된 것이 다신계이기 때문이다. 친구 윤서유는 다산 선생의 외동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윤서유에게 방산 윤정기라는 다산학의 계승자인 아들을 얻는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다산의 따님의 5대손이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정약용 선생의 묘에 찾아와 다례(茶禮)를 올린 것이다

 

다산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분이 남긴 정신이 현대 한국에 남아있고, 특히 다도 문화와 조선 성리학 중 실학에 대해 연구하는 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유교학회에서 한국 조선유학에서 정약용 선생은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이렇게 위대한 분이라도 그도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고 싶었던 것이다. <다산의 사랑>에서 주인공은 다산이나, 오히려 다산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보단 다산의 옆에 붙어 있던 혜장 스님과 다산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해준 홍임 모녀가 인상이 깊다. 홍임 모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 문서와 편지가 나오면서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사람이 배고프고, 차향이 좋고, 술맛을 느끼는 것은 남녀노소 차이가 없는데, 왜 우린 그것에 얽매여야 했는가?

 

사실 다산의 사랑은 이 책의 제목인 <다산의 사랑>보다 <다산 증언첩>이 훨씬 나은 것 같다. 다산의 편지에서 묻어나는 글귀에서 그가 가진 애정, 특히나 배고프고 헐벗은 농민들을 바라보는 애민정신은 정말 감동이 밀려온다. 그런 다산이기에 그가 제자로 받아들인 사람은 양반문중만 아니라 농민이나 중인 부류도 있었고, 천민이던 사의재의 거처인 주막주인인 늙은 노파 역시 사람으로 대했다. 단지 그가 처해진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비참했을 뿐이다. 권력의 자리에서 부당한 세력에게 좌절했고, 그 부당한 세력에 가족까지 빼앗겼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강진에서 책을 읽고 더더욱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때 얼마나 적적하고, 이제 찾아오려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산은 본처의 눈치 대문에 홍임 모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본처이든 유배지에서 만든 첩(다산은 또 하나의 아내로 대해주나)이든 다산에게 모두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나 여유당에서 노년을 보내면서 강진 백련사에 머물고 있는 홍임 모녀에 대한 그리움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그의 심정을 어떠하랴? 조선시대 양반들은 본처가 있지만 대부분 첩을 두고 살았다. 그게 좋은 제도는 아니지만 당시 상황에서 유배지에서 홀아비처럼 살아가는 것은 너무 괴롭다. 밤에 혼자 심신이 피폐해져 잠 못 이루는 날이며, 서럽기가 그지없다.

 

홍임 모녀 역시 그렇다 홍임의 어머니는 30대 초반에 다산 선생을 만났지만, 그녀는 이미 1번 결혼 후 사별로 인해 혼자 사는 과부댁이었다. 조선시대 과부들의 삶은 비참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은 여자라는 사회적 덫도 있자만, 과부이기 때문에 아무나 대할 수 있다는 비인격적 시선이 은근히 잠재하기 때문이다. 과부라도 사람이고 여성이다. 과부도 사랑을 하고 싶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다산 선생처럼 고귀한 학자일 수 있다. 귀양 이후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났지만, 천주학쟁이로 귀양 온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란 쉽지 않다. 정분을 나눈 후에 계속 옆에 지키며 서로를 의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다산은 해배된 후 제자들이 올라오면 홍임 모녀를 잘 돌봐줄 것을 은밀히 전하나,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역사의 흐름에서 사라졌을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20세기로 오면서 한국에서 다산학이 중요한 연구대상이고, 21세기 다산 선생은 세계적 위인이 되었다. 영원히 묻혀버릴 것은 같은 그 어둠의 시간에서 이제야 그 아련한 시간들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평을 적은 후 조만간 나는 집안 일로 강진군에 위치한 항촌마을에 들릴 일이 있을 것이다. 어릴 적 시골에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항촌마을에서 뛰어 놀던 기억이 있다.

 

항촌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다. 다산의 친구인 윤서유가 살던 집은 윤서유의 일가 후손이 살고 있다. 다산 선생이 친구이자 사돈인 윤서유의 집에 놀러가고, 같이 농막에서 술을 마시며 유배지의 설움을 달랜 곳이다. 항촌마을 건너에 다산의 따님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 윤정기 선생이 잠든 묘가 위치하고 있다. 다산 선생의 슬픔과 기쁨이 숨 쉬고 있는 그 마을들이 점점 갈수록 인적 드문 곳으로 변할 때마다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건 항촌마을과 귤동마을의 윤씨들은 아직도 다산 선생이 남긴 발자취를 계속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다산 선생은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사랑했다. 또한 주변의 친구와 제자, 홍임 모녀 역시 사랑했다. 우리는 늘 다산 선생이란 존재는 거대한 민족의 태양처럼 여기지만, 그 이면에도 초가집 처마 같이 아담하고 다정한 모습도 있었다. 위에서 적었지만, 2018년은 다산 선생이 해배된 지 200년이 된 해이다. 다산 선생과 그 주변에서 보여준 여러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귀담을 만한 사연이 넘친다. 다산 선생이 서거하기 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 황상의 모습을 보고 원한 한 가지를 풀었다. 얼마 후 황상이 강진가는 길에 스승의 부음을 듣고 다시 여유당으로 돌아가서 장례식장을 지키고, 다시 강진에 내려와 스승의 죽음을 마치 부모의 죽음처럼 여기는 모습에서 인간의 도리는 말로 하기 쉬우나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다. 세상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향해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후회로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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