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품은 거의 없다. 옷가지 몇 벌과 노트, 그리고 거의 쓸모없던 노트북 하나와 외장하드 디스크 하나 정도이다. 옷이야 반 이상 처분했고, 몇 벌 양복이 큰 방의 장에 있다. 키가 나보다 크고, 다리도 나보다 길어서 내가 입을 수 없었다. 나도 다리가 내 키와 유사한 사람과 비교하여 긴 편(대신 목이 짧다)이나 아버지의 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만일 조카가 장성하거나 뒤에 결혼하여 내 자녀가 아들이라면 1번이라도 그 옷을 입혀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아버지의 물품을 정리하면서 최근 외장하드 내용을 찾아보았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다닌 외항선원이기에 항상 남는 시간에 뭔가 했어야 했다. 지나간 드라마나 영화들이 안에 있었다.

 

그리고 조카들의 사진과 아버지가 일에 사용한 업무자료와 아버지가 작성한 문건이 있었다. 참으로 슬픈 유언이 있었다. 아주 예전부터 정리한 글이다. 배를 타고 멀리 나가면 언제 어디서 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배를 타며 먼 나라에 가면 몇 개월 심지어 1년 넘게 해외에서 고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한국이란 사회에 회의감이란 절망에 벗어날 수 없었다. 보수라고 말하는 존재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지나가는 개만도 못하게 보고, 진보라는 말하는 입들은 밑바닥의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입만 두둥실 떠다니는 현실에서 과거의 비참한 일들은 아직도 계속 되는가?

 

언제 일을 하면서 해양과 관련된 종사사와 대화한 적이 있다. 한국이 발전한 이유는 국가가 제대로 도와준 것이 아니다. 이런 형태를 갖춘 것은 선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름 1방울도 나지 않는다. 자동차는 수천만대이나 기름 하나 나오지 않고 있으니 그 모든 원유가 배를 타고 태평양과 인도양, 대서양을 지나 우리 영해로 들어온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한국은 반도지형의 국가이고,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바다에 얼마나 많은 원혼들이 슬피 울고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성을 상실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이 오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집에 가고 싶다고 외쳤다. 내가 물었다. 집은 어디냐고? 영도에 있는 집이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시골 쪽을 이야기했다. 배고프고 가난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 아버지가 자라고 태어난 곳은 전남 강진군이다. 겨레의 역사 조선의 마지막 등불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살이를 한 곳이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이다. 아버지는 귤동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강진에 오고갔기 때문에 매년 집안제사로 찾아간다.

 

언제 부모님을 모시고, 작은아버지와 고모부 내외, 그리고 고모댁 사촌누나와 같이 가우도 옆의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강진군의 슬픈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우도 인근에 접안시설이 있는데, 일제시대 일본들이 전남지역의 쌀을 약탈하기 위해 만든 부두라고 이야기했다. 강진은 생각보다 아픔이 많은 곳이다. 다산의 유배 오는 것도 있지만, 다산이 바라본 농민들이 겪은 고난도 지켜본 곳이다. 그 이전에 가면 조선의 최고위기인 임진왜란의 여파가 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전후로 침공할 때, 왜적들은 조선인에게 공격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해남군 주변 민가를 약탈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칼을 베고, 그들의 귀와 코를 베어 일본으로 들고 갔다. 해남에 수군우수영이 있고, 해남 옆의 강진군은 그런 곳이다. 강진군 병영면(兵營面)이란 지역명이 있을 정도로 수군과 깊은 관계성이 있고, 이순신을 지원하던 고을 중에 강진군과 해남군이 있었다. 게다가 의병과 근왕병 중에서 해남과 강진 출신들이 많았다. 정유재란 당시 전남지역의 많은 의병과 근왕병들은 이순신 장군을 위해 군을 일으키다 수없이 전사했다. 마침 오늘 인터넷으로 진도에서는 매년 임진왜란 전몰자를 위한 굿판이 열린다고 한다.

 

해남군 우수영관광지는 대한민국에서는 국민관광지이나, 그 마을 주민입장에서 본다면 400년이나 더 지난 과거의 슬픔을 아직도 후손들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다. 생각하면 아버지가 태어난 곳도 바다 앞의 마을이고, 바다를 돌아다니며,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도 대마도가 보이는 절영도 앞바다에 위치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올해 2018년은 임진왜란이 끝이 난지 7갑자(420) 되는 해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지 같은 해이다. 임진왜란이 시작하여 정유재란이 시작된 해를 기념해서 계속 한국 조선역사와 관련된 학계에서 많은 발표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이래저래 보다보니 서애 유성룡 선생이 저술한 <징비록>을 읽고, 거기에 더해 <소설 징비록>을 읽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순신역사연구회에서 저술한 <이순신과 임진왜란> 4권을 읽었다. <징비록>을 읽어도 1가지만 읽은 것이 아니라 4가지 정도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도 필요하나, <난중일기><선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들을 모은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이야기하자면 이순신 장군을 벗어날 수 없으나, 그것은 일본 수군과 해전에 대해서이지 그 이상의 전쟁을 보자면 서애 유성룡을 볼 수 밖에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순신 장군의 대사에서 늘 무서운 적은 나에게 덤벼드는 적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두려움이라고 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껴야 할 대상이 분명 내 안의 두려움이 아니라 내 앞의 인간일 경우가 많다. 다행히 내가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란 책을 읽어서인지 <징비록>과 관련된 도서는 잘 읽혀갔다. <징비록>은 이미 전에 1번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은 이유는 현대사회 한국이 처한 현실과 역사적 맥락이다. <징비록>과 그리고 소설로 만들어진 징비록의 이야기들의 차이점을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어느 도서출판사가 뛰어난지 어느 번역가가 탁월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류성룡과 임진왜란>이란 도서를 읽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와 인문학자가 나와 논문을 소개하고, 담화로 통해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탐독할 수 있었다. 우선적으로 율곡 이이의 10만 대군 양병설이다. 율곡의 학문은 뛰어나나, 조선 최고의 영의정 중에 하나인 이준경은 이이에 대해 경계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명유대신(名儒大臣)들도 이이의 강직함에 비판을 했다. 이이가 보여준 학문의 깊이와 도량은 뛰어나지만, 그가 말하는 바는 현실의 상황을 다소 간파하지 못한채 이상적인 길만 제시했다.

 

동고 이준경은 임진왜란 이전에 을묘왜변을 토벌한 인재이고, 훈구대신을 몰아내고 사림세력을 조정으로 부른 신료였다. 그 역시 청렴하고 강직하나, 기본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영의정으로 정치적 조율을 제시하던 입장이었다. 율곡의 제자들은 후에 율곡 사후 그의 호를 다시 만들어진 후 율곡이 10만 대군양병설을 기입했다. 쉽게 생각하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다산(茶山)이란 호를 사용한 것은 1808년 다산초당에 들어가면서이다. 그 전에 삼미(三眉), 내지 사암(俟菴)이란 호를 사용했다. 다산 정약용이 1800년 이전에 다산이란 명칭을 사용할 수 없으며, 정약용 선생 사후 그런 명칭이 나왔다면 후대가 붙인 내용이다.

 

<류성룡과 임진왜란>에서 그런 내용이 나온다. 10만 대군일까? 물론 이이의 국방정책은 좋았지만, 임진왜란 당시 대부분 분전했던 세력이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동인은 기축옥사를 계기로 송강 정철에 대한 복수심에 따라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었다. 북인으로 정인홍, 곽재우, 김면, 김우옹 같은 남면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고, 남인은 류성룡, 김성일 같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었다.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는 동인으로 처음 류성룡과 친분이 있었지만 기축옥사 이후 정철의 처분, 임진왜란의 과정에 따라 결국 류성룡을 파직하게 만든다. 그때 등장한 인물로 이이첨과 남이공 같은 세력이다.

 

사실 동인의 적인 서인이나. 북인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북인은 광해군 집권 전후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고, 대북은 인조반정과 함께 몰락하고, 소북계열도 이괄의 난에서 억울하게 사라진다. 동인의 후예가 몰락하니 이제 남은 것은 서인들의 세계이다. 서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광해군을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모는 것이고, 그가 한 업적을 되돌리는 일이다. 정조시대로 가면 <호남절의록>이 간행되는데, 이책은 매우 재미있는 형국을 남긴다. 이름하며 혼군이삼(昏君李三)이란 단어가 나온다. 여기서 혼군은 광해군을 말하고, 이삼은 이원익, 이덕형, 이항목을 말한다.

 

이원익은 선조가 매우 아끼던 신하였다. 인척으로 말할 정도로 이원익을 아꼈고, 광해군 역시 이원익을 집권 초기 영의정으로 모셨다. 이덕형은 일본과 통상수교를 재개할 때 책임자고, 이항복은 이덕형의 친구로서 병조업무에 매우 밝았다. 전시업무를 수행하면서 재조산하를 이끈 재목이었다. 하지만 붕당의 갈등과 내정 및 외교적 파란이 결국 파국으로 이어졌다. 광해군이 가장 탁월한 업적은 임진왜란의 분조와 무군사, 그리고 명청교체시기의 외교전략과 군사보강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충성과 청나라에 대한 배척은 인조반정으로 이어지고, 광해군의 전략을 인조가 계속 유지했다고 하나, 막상 광해군이 펼친 외교를 부정해서 일으킨 반정이다.

 

광해군에게 문제가 없는 아니나, 그때나 지금의 역사학자의 논변에 참 모순이 많았다. 광해군이 성을 재건축에 많은 재물을 소비했다고 하나, 인조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들어간 재정이 30% 이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두고 보자면 어디가 문제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광해군을 두고 <호남절의록>에서 2가지 측면이 나온다.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그리고 이인좌의 반란까지 이어진다. 광해군을 두고 병자호란 시기에 혼군이라 칭하지만, 임진왜란에서 동군 내지 분조라고 칭한다. 의병들이 광해군의 교지와 명령서를 받들고 전장을 나가 공을 세운 이야기를 한다.

 

임진왜란과 병조호란을 두고 이래 차이가 난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임진왜란 최고 공신은 이순신과 류성룡이고, 의병장으로 김덕령과 곽재우가 있다. 이책에서 곽재우보다 김덕령을 더 많이 기록했다. 정인홍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을 정도이다. 당쟁의 효과가 임진왜란 역사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서거하고, 선조는 충무공이란 명칭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뒤에 삭탈관직을 해버렸다. 나중에 좌의정으로 추증했으나, 그의 사당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순신의 사당은 백성에 손에 이루어지고, 그의 시신은 광해군이 돼서야 고향인 아산으로 이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순신의 사당이 만들어진 시기도 광해군 시기였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외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있었다. 이순신이 노환으로 죽자 광해군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전쟁의 상흔을 잃은 것은 과연 누구이고? 전쟁에서 고통 받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징비록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일본 왜구가 참으로 나쁘나, 소서행장을 비롯한 종의지, 평조신 같은 부류는 계속 전쟁을 막으려 했던 것, 대마도란 곳이 아픔이 진하게 스며든 곳을 말이다. 대마도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중간에 끼여 곤혹을 당한 것을 보고 그들도 많이 힘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풍신수길이 죽고, 가등청정이 덕천가강에게 협력하여 풍신수길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자, 소서행장 역시 죽었다.

 

소서행장의 딸은 대마도 도주 종의지의 아내였다. 대마도주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패권이 덕천가강에게 가자,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고, 조선에 대한 외교를 다시 추진했다. 전쟁은 침공당한 자에게도 침공한 자에게도 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살기위해 침략자가 될 수밖에 없던 운명을 보면서 참으로 기구했다. 대마도주는 순수 일본인이 아니라 선조 중에 조선인이 있었다. 전쟁은 막을 수 있었고,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여러 차례 있어도 활용하지 못했다.

 

전쟁이 나자 왕과 대신은 도망가고, 목숨을 건 의병들은 지원도 못 받고 사라져갔다. 그나마

왜적은 총에 쓰러진다면 덜 억울하다. 선조의 질투는 조선의 운명을 계속 어둠으로 몰고 갔다. 한양에 돌아오자 피난갈 때 없던 자들이 이제 변방의 의병과 군관들을 모함했다. 김덕령 장군은 고문으로 죽고, 진주성을 버려지고, 이순신은 백의종군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 과거의 아픔을 잊었다. 선조가 전쟁보고를 받아야할 때 그는 아침이 지나도록 정무를 보지 않고 공빈 김씨의 처소에 있었다. 의주에 가서도 공빈 김씨의 치마 바람에 쌓이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소설에서 내시들은 전쟁상황을 보고하러온 당상관에게 임금은 씨름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남자와 남자가 씨름이라면 운동이나, 남자와 여자가 씨름을 하면 무엇이랴? 게다가 의주나 한양에 오니 대신들은 전략과 전투의 방식도 모르고, 입만 살아있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린 아이가 배가 고파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데, 이상하게 젖이 나오지 않았다. 어미는 전쟁에서 죽었고, 아이는 그것도 모른 채 계속 젖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징비록>에서 가장 슬픈 대목 중에 하나였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 받은 백성들이 밤새 울부짖다 아침에 일어나 나가니 모두 죽고 말았다.

 

류성룡은 백성을 하늘로 보았고, 류성룡과 이순신을 모함하던 이들은 권력을 하늘로 보았다. 천출이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막자 류성룡이 그를 관군으로 승격한 후 전쟁이 끝나자 그를 다시 천출로 만들어버렸다. 너나 할 것 조선의 백성인데 누구는 자기 살길과 재물만 챙기고, 백성들에게 목숨과 양식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백성이 없는 국가는 의미가 없지만, 그들의 존재는 들판에 널린 돌멩이처럼 이리 차이가 저리 차이는 신세였다. 토끼를 잡으면 개를 잡는다고 했던가? 전지재상 류성룡은 전쟁이 끝나자 파직되었다. 그가 나라를 일으키는데 제일 필요한 것은 개혁이다. 개혁에서 늘 난관은 기득권과의 대립이다. 기득권의 눈에는 류성룡은 제일 미운 대상이다.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은 양반지주가 반대하고, 이것을 먼저 주장한 정암 조광조 선생은 기묘사화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조선의 군왕과 권력가는 이렇게 무능하고 한심한데, 그래도 지조 있는 선비와 이 땅의 백성들은 적이 나와도 죽음이 두려워도 가장 먼저 맞서 싸우고 순국한다. 집안에도 조카와 5촌 당숙이 기묘사화를 당해 뜻을 버리고 낙향하고, 심지어 그렇게 만든 이들이 정국을 장악해도 을묘사변이 일어나자 왜적과 싸운 사람도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생각하면 이들의 미련함은 기축옥사에서 엿보인다. 동인들이 남인으로 관군으로 활동하고, 북인으로 의병으로 활동한다.

 

기축옥사에서 정여립과 관계되었다고 남명 조식 문하의 제자들이 크게 다쳤다. 명망 있는 선비 최영경과 정개청은 아무 죄도 없이 죽었고, 정여립을 동인으로 입당하게 한 이발과 이길 형제는 살점이 사라질 정도로 고문을 당했고, 이발의 노모는 압슬형에 어린 아들은 장을 맞아 머리가 터져 죽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괴롭히던 세력이 서인이다. 장군은 당쟁과 관계없으나 남인의 영수 류성룡의 지지가 있었고, 류성룡을 견제하던 서인의 세력에 늘 정치적 죽음을 당해야 했다. 원균이 서인 영수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인척에서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당익을 노리던 자를 보면서 한숨이 나올 수가 없었다.

 

기축옥사로 선조와 권력가에 대한 분노가 있어도 기축옥사 희생자의 인척들은 전쟁에 나와 왜적과 싸워 전사했다. 소설 징비록이나 혹은 여러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처럼 왜적과 싸우는 이유는 군왕이 아니라 이 나라 백성을 구원한다는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국가가 토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병기와 군수를 제대로 관리하여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하고, 병사들은 날래고 용맹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되려면 먼저 부정부패가 없어지고 지휘관들은 청렴하고 자신에게 엄정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군대 생활을 하나, 막상 <징비록>을 읽어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하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소설에서 인상 깊다. 가장 먼저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격군들이었다. 선창 아래 노를 저는 그들은 천민들이었다. 조선에서 천민은 양반이 시켜 때려죽여도 아무런 대응조차 할 수 없는 약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찾아와 고맙다고 말해주는 상관이 있으면, 세상 어디라도 따라갈 것 같다. 군에서 말단 병사들은 언제나 곤궁한 처지에서 2년 정도 시간을 빼앗긴 채 군복무를 한다. 집에도 가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군율은 엄하지만 백성들과 격군에게 매우 친절한 목민관이기도 했다. 조선은 이순신을 영웅인 것을 알아도 권력들은 눈에 가시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으면 마지막은 이순신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건천동 친구인 2사람은 민족의 구원자로 태어나 오명의 이름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날의 기록에서 다시 태어나 한국의 인물을 넘어 세계의 인물과 문화재로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은 국가의 국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국보라는 문화재로 남아서 안 될 것이다. 늘 우리가 기억하고 새기야 할 숙제이고 과제이다. 징비록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인구는 반으로 줄었다.

 

그리고 그런 슬픔은 병자호란에서 일어나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역사의 이야기는 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나갈 시초에 불과하니 어찌 슬프지 않을까? 돌아가신 아버지와 주변 친척어른이 나에게 말했다. 나의 할아버지 형제들은 일제 징용에 끌려가고, 한 분은 돌아오신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한국전쟁 당시 할아버지는 인민군과 한국군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밤에 시골집 근처 저수지 갈대밭에서 숨어 지냈다고 말이다. 만일 잡혔다면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징비록>의 계속 새겨야 하는 것이다. 430년 전 기축옥사의 슬픔이 집안에 새겨져 있는데, 하물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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