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월이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에 나는 영화 <군함도>를 보았다. 군함도란 이름을 이전에 몇 번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3~4년 전 조선의 근대사를 공부하면서 일제침략 시절 강제징용 역사에서 군함도에서 일어난 일들이 엄청난 만행이란 것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 것일까? 류승완 감독이 영화 <군함도>를 제작한다는 말에 군함도에 대한 역사학자의 도서 내지 소설가들의 이야기도 나왔다. 아마 이전에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군함도가 소개된 것이 있을 것이다. 군함도 이야기가 20177월 한국을 강타하기 전 시골에 있는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99세이다. 조만간 100세를 향해 가는데, 외할아버지가 태어난 시점은 일제강점기가 한참이던 시절이다. 외할아버지가 예전에 징용을 끌려간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만나보면서 일본에 징용을 갔는지 물어보니 끌려갔다고 했으며, 징용피해자에겐 1년마다 소정의 보상금이 나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징용을 가면서 엄청나게 많이 맞았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계신 노인복지센터에서 나온 후 이제는 아버지가 태어난 시골집으로 갔다.

 

본래 친할아버지가 살던 곳이나 친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으나, 작은 아버지가 시골에서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징용과 관련하여 이래저래 이야기하니, 우리 할아버지는 4형제 중 3번째인데, 4형제 중 제일 큰형과 막내가 징용에 끌려갔다고 했다.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 잠시 봤을 정도로 어느 정도 천수를 누렸지만, 제일 큰형이던 큰할아버지는 징용을 다녀온 후 병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집안에 일제에 의한 징용피해자가 3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일본이란 나라에 그렇게 적대심은 없고, 일본인에게 그래 나쁜 감정은 없지만, 일본정부와 기득권에 대한 분노는 강하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일제 앞잡이들이 다시 광복 후 권력을 잡았는데, 아버지나 작은아버지가 군사정권 시대의 기득권에게 상당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독재정권 시절, 독재정부에 이익을 보던 자들 대부분이 친일파들이었고, 친일파들은 남성들은 강제징용으로 여성들은 위안부로 강제로 보내는데 일조를 했다.

 

가끔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대해 과거 징용 내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점이고, 피해 받은 자들이 겪었던 슬픔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앙금이기 때문이다. 영화 <군함도>를 보기 전에 집안 상황을 다시 확인한 나로서는 군함도가 가진 의미가 단순히 지나간 일보단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형이란 사실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영화 <군함도>를 보면서 고증의 절차를 다시 생각했는데, 광부들이 지하 1,100m 정도 내려가면 더위도 문제지만, 산소도 부족하고, 게다가 석탄가루가 내려오니 폐병에 잘 걸렸고, 음식이나 휴식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으니 영양실조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사람들이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으면 그들에겐 별 의미는 없다. 다시 새로운 조선인을 데리고 와서 죽음의 섬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영화 <군함도>를 그런 시점에서 보고 나니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이 다시 스크린 위로 올라왔다. 영화 속에서도 비참함이 그대로 전해지지만, 실제 상황은 더욱 참혹하고 비참했다. 누구는 이 영화를 두고 너무 국뽕에 취해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드나, 영화로서 재미보단 이런 일이 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슬픈 영화라는 점은 분명했다. 영화에서는 그동안 짓눌린 억압에 대해 다시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군함도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자, 광복군 소속 장교가 군함도에 잠입하여 친일파를 제거하고, 모두 탈출하려 했다.

 

일본 입장에서 군함도에서 고생하던 조선인이 탈출하면 모든 만행이 드러나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되어 끝내 전쟁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자료를 모두 없애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증인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일본은 징용을 끌려간 조선인을 살해하거나,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했다. 역사에 가려진 조선인들의 원한은 21세기에 되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어질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대한민국은 징용피해자들의 원한을 대중에게 노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만일 일본이 그랬고, 그런 자들이 고생했다면, 중간에서 누가 그들을 죽음의 절망으로 떠밀었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그 사실을 드러내기 싫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영화 <군함도>가 많은 논란에서 시작된 원인도 그렇고, 또한 영화 내용조차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상당히 어두운데도 나름 유머를 잃지 않고 있다. 배우 황정민 씨의 연기력이 발휘하는 것은 아무리 절망의 나락에서도 어떻게든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 자신의 딸과 같이 탈출하기 바라는 아버지로 나오나, 뒤에는 자신이 죽더라도 딸의 미래를 걱정하며 눈을 감는 아버지가 된다.

 

조선인들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기에 처음에 어려울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 아래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 증거와 증인을 없애려는 그 마지막에도 일본의 인텔리적 요소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운명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옳다. 단지 그 선택의 조건과 상황이 어느 정도 부합되어야 성립된다. 영화 <군함도>에서 그런 상황이 주어진 게 특징이고, 그 상황을 맞추어 살아남았다는 게 특징이다.

 

단지 영화연출 요소에서 지나친 슈퍼히어로 요소가 가미되었기에 아쉬웠다. 광복군 장교라면 분명 뛰어난 두뇌와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다. 총을 관통하고 며칠도 되지 않은 상태에 과감한 전투장면, 부소장이 불에 타고 있을 때 한 손에 일본도를 가지고 목을 잘라 내버리는 것은 너무 지나친 설정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점이 국뽕적인 요소로 보일 수 있으며, 연애적인 요소에선 억지로 맞추어 넣는 신파적 요소 역시 없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영화 <군함도>1번을 봐야 하는 이유는 그때 살아가던 조선인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어갔는지, 또한 거기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군상과 다양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마지막에서 일본이 군함도를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했고, 거기에 있었던 잔인한 만행을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근대라는 역사적 유산에서 우리 인류는 발전이란 이름을 전쟁과 착취 그리고 파괴를 일삼아왔다. 근대와 현대는 연결되나, 근대에 새겨진 상처의 얼룩을 지우려 하면, 그 겉은 보이지 않아도, 속은 곪아 썩어가게 된다.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상해임시정부로 통해 광복 후에 정식으로 가진 이름이지만, 광복 전에 우리 한국인은 여전히 조선인이다. 군함도에 끌려가거나 그밖에 많은 죽음의 땅으로 끌려간 사람 모두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한국인이라고 말해도 조선인이라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인이란 이름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의 상처 입은 과거를 망각하고,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화 <군함도> 작품보다 그 영화를 통한 수입배급 체계나 혹은 작품 내 지나친 설정은 문제가 있지만, 영화 소재로 본다면 반드시 보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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