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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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학계를 그렇게 잘 아는 편은 않으나, 확실히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문학소설을 읽으면 기존 한국소설계는 뭔가 모르는 엄숙주의 내지 장편으로 전개되는 유형이 많았다. 물론 소설 중에 단편적인 부분도 많으나, 대부분 단편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꾸려진 경우는 드물지 않은 것 같다. 소재나 이야기의 주제성도 거대한 서사에서 점차 작은 이야기로 넘어가고, 예전에 읽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처럼 한국의 소설도 왠지 모르게 일본의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서브컬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가는 게 아닌가도 싶었다.

 

이번에 읽은 최제훈 소실모음집 <퀴르발 남자의 성>을 읽을 때 생각이 드는 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몽타주의 편집적 요소가 보인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요소가 조금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시간과 공간의 일치성보단 시간전개가 뒤죽박죽인 “퀴르발 남자의 성”, 추리 소설 <셜록 홈즈> 작가인 코난 도일을 최제훈 소설문집에서 셜록 홈즈가 발견한 피해자로 등장시키거나, 또는 정신적 해리증세를 가진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함 등을 작품에 반영시킨다.

 

최제훈 소설모음집은 이른바 추의 미학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고, 기존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반영한다. 인간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란 바로 오늘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추악함은 원래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만들어져 가는 것인가? 여러 가지 모습이 드러나겠지만, 점차 인간이 부패하가는 모습을 작가는 잘 맞춘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과 평이 있으며, 심지어 뒤에 보면 문학평론가의 심사평이 따른다.

 

나는 문학도가 아니고, 문학평론가는 전혀 관계없으니 굳이 그렇게 정리할 필요 없다. 단지 나대로 생각하여 그것이 타인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객관성을 추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찍어볼 것이란 문제다. 이 소설에 재미있기도 하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 서브컬처의 느낌이 나는 이유는 이미 이 이야기들이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등장할지 모르나, 서브컬처 내에서 그렇게 드물지 않은 이야기다. 영웅의 시대가 서사를 풍미하는 게 아니라 반영웅, 혹은 얼간이라도 주인공이 나오고, 별에 별 기막힌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서브컬처이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메데이아라는 마녀의 이름이 이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라는 게임 및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 단지 사람들은 마녀가 처음 가진 의미, 마녀의 시작과 그 변이과정을 잘 모를 뿐이다. 작가 최제훈은 마녀의 이야기에서 고증적인 연구를 많이 했다. 마녀사녕은 문명이 존재하는 인간세계에 얼마나 추악한 일들이 벌여졌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존재이다. 문제는 그것은 되풀이되는 하나의 세계이고, 이제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동체사회만이 아니라 사이버세계까지 이어진다.

 

그렇지 않을까? “그녀의 매듭”에서 고교동창생이 학원비를 벌기 위해 조건만남을 한 것을 알았던 주인공은 친구의 성공과 자신의 실패에 대한 분노로 뒤에서 공작을 펼친다. 그런 공작은 대학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에 나와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남자사람친구 주변 여자까지 견제에 들어간다. 마녀는 사실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마녀 같은 인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나, 형이상학적인 사이버세계에서 난무하고 있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타적 의식이 개인의 영역이 아닌 집단적 광기로 변화하여 한 개인을 괴물로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보다는 왜 악하게 되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의 아이를 죽여 괴물의 성에서 같이 향연을 열던 부모와 삼촌내외의 모습에서 우리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욕망에 이성과 도덕관을 잃어간다. 아니 처음부터 도덕이란 무엇인가? 개인에게 가해진 물리적, 사회적 폭력은 어느 한 개인을 자신도 모르게 괴물로 키워낸다. 그리고 자신을 한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거나,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기도 한다.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2사람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단 다른 사람의 이름을 꺼내어 그 주제에 맞추어 간다.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물론 나와 상대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상대만 조금 알고 나는 잘 모르는데, 그 사람을 하나의 가십거리를 삼아버리는 것은 현대사회 인간이 본인 자신을 타자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타자에 대한 욕망, 그것이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한 것이다. 사실 다른 책에서 흡혈귀와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글을 보면서 기억나는 게 미국대공황 이후 경제적 문제에서 흡혈귀는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고, 프랑켄슈타인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것을 하나로 모우는 것, 즉 현실에 대한 도전에 대한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보인 흡혈귀 아니 퀴르발 남작에서 그는 보통 사람마저 식인귀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미국에서 살던 가족들이 시집보낸 딸집에 간 이유는 경제적인 조건이 어려워서이다. 경제적 상황에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만 따지기에 효율성에서 개인과 개인의 집합에선 윤리적 가치를 따질 이유는 없다. 그런 모순은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처럼 코난 도일이 추리소설 <셜록 홈즈>의 작가이고, 홈즈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그가 죽었는데, 홈즈는 추리과정에서 혼선을 빚는다.

 

창조자가 코난 도일이고, 코난 도일을 찾아가는 홈즈는 그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다. 오리지널보다 카피 내지 만들어진 존재가 오히려 죽어버린 자신을 찾아가지만, 헛수고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녀의 매듭”처럼 자신의 소꿉친구의 얼굴사진을 도려, 이현정의 사진과 합성시킨 연화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다. 본질은 수동적이고, 본질이 아닌 가상, 허구, 복사, 잉여적 존재가 우리 일상을 움직이고 있다. 아마 소설의 제목을 여러 작품에서 “퀴르발 남자의 성”이라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분명 저 남자의 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에 삼켜지거나 그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 활보하는 세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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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9 1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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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2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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