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2 루소전집 1
장 자크 루소 지음, 박아르마 옮김 / 책세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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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의 <고백> 2권을 읽으면서, 1권 부분은 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이라면 이제 시작된 2권은 루소가 세상에 비로소 드러내는 시기다. 1권의 루소는 바랑부인의 만남 그리고 어린 시절의 방황 등이 주요 이야기다. 루소가 바랑부인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음악에 열중하고, 그녀에게 빠졌으나, 이내 루소를 대신할 근육질의 남자가 바랑의 애인이 되어주었다. 루소는 바랑부인을 무척이나 사랑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누구에게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 같은 루소로서는 바랑부인에 대한 집착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의 교감이란 한 쪽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양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한 쪽은 상대방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하는 불편함에 불과하다.

 

루소는 바랑부인을 떠난 후에 파리와 프랑스를 돌고,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스페인의 대사관에서 일하기도 한다. 루소의 성격을 보자면 소심하나 자신의 양심적 틀에 벗어나면 참을 수 없는 성격이다. 그 성격이기에 남들에게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기도 하나, 다른 사람들이 루소에게 함부로 대하는 순간 루소는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성격에 의한 결벽증으로 타인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우애를 보이면서도 그에 대한 배신을 느끼며 가차 없이 등을 돌린다. 보통 사람과 다르게 루소는 제 아무리 예전에 친한 자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위협하더라도 그들을 모함하거나 위협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고난으로 인해 그 고난의 출처에 대한 복수나 음모를 꾸미지 않은 점이다. 그가 계속 박해를 받는 이유는 루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물론 그 다른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루소의 가장 좋은 부분은 가장 최악의 부분이다. 그의 수줍고 양심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에게 2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믿을 수 있고 진심을 다해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는 그런 성격을 이용하여 이용해 먹거나 음모에 빠뜨리는 경우다. 인간의 사회는 온통 부조리만 가득한 이유는 인간의 문명이 바르지 못함이다.

 

왜 루소가 디종 아카데미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와 2번째 논문인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저술했을까? 인간사회에 보인 사회적 관계에서 오로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모습만 가득하다. 길가에 널린 불우하고 가난한 이들은 구걸과 좀도둑질로 하루를 연명하다 어느 순간 죄인으로 사로잡혀 형틀에 묶여 팔다리가 부러지는 비참한 죽음을 루소는 아주 강렬한 감정으로 담는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사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불우한 현실을 인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승냥이 같은 모습으로 남들을 공격한다. 나보다 약한 자들, 혹은 공격하기 좋은 자들을 말이다. 루소가 박해를 피해 온 섬에 주민들은 돌팔매질을 했고, 그 돌들은 유리창을 깨고, 벽을 부수었고, 루소의 눈 옆을 지나갈 정도로 흉폭했다.

 

그 현장을 보러 온 담당 관리는 이 장경을 보고 마치 채석장에 온 것 같다고 한다. 대낮에 산책하는 루소를 보고 돌을 던지고, 총을 가지고 와서 죽이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라면 루소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은 운명이다. 그가 운명의 비극에 빠진 것은 무엇이 시작인가? 루소는 <고백>을 1764년에 시작하여 1770년에 완성한다. <고백>을 완성한 시점에서 그가 그 책을 낭송하는 것조차 예전 친구들은 반대한다. 데피네 부인은 루소와 친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최고로 그를 억압하는 사람이 되었고, <고백> 최종본이 나온 다음해 1771년 낭송을 금지하도록 경찰에 요청했다.

 

루소의 운명의 수레바퀴는 바로 그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인망과 질투에서 시작된 것이다. 루소는 상당히 천재적인 인물이다. 음악에 조예가 없다가 그가 만든 <마을의 점쟁이>는 아직까지 음악으로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음악이다. 그런데 그 음악을 만든 것을 주변에서 시기하고, 극장의 주인은 루소의 자유 입장권을 몰수하고, 게다가 그 저작권마저 가로챘다. <마을의 점쟁이> 성공으로 루소는 이때까지 손대지 못할 정도로 금전적으로 성공했지만, 그 명성만큼 주변에 귀찮은 인간들만 생겼다. 루소는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 대상을 넓히지 않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인간이기에 그가 느끼는 인간의 첫인상이 무척 중요했다. 그런 모습은 대부분 좋은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지만, 그를 속이는 인간도 만들었다. 인간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주변 인간들을 대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사회적 조건과 상황 그리고 주변 인물의 영향에 의해 바뀌기 때문이다. 루소의 가장 장단점은 남에게 거짓으로 아부를 하지 않는다. 누구를 억지로 찬양하거나 누구를 억지로 내려까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다른 사람의 호의조차 거부하는 일도 많다.

 

권력자의 눈에 루소가 하는 행동은 건방진 짓이며, 라이벌이나 먼 곳에서 시기하는 사람에게 보기엔 오만한 짓이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바보 같은 짓이다. 루소가 처세술에 빈약했기에 오직 그만의 정신적 가치로서 행동했기에 <고백>이 나온 것이다. <고백>을 보면 루소가 모두 다 잘했다고 할 수 없다. 그가 저지른 실수도 있고 과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루소가 저지르든,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가 적이 된 디드로조차도 인간이란 점이다.

 

자신들의 잘못은 스스로가 인정하기 어렵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오히려 그런 지적을 하게 되는 순간, 상대방의 충고와 조언을 듣기보단 난폭한 비난과 비방으로 거부할 때가 많다. 루소의 현실적 처세술은 거의 낙점이다. 그러나 <고백>에서 나오는 그만의 처세술은 엄청난 수준이다. 그는 현실에서 처세술을 사용한 게 아니라 미래의 독자에게 처세술을 부린 것이다. 자신이 죽은 뒤에 보게 될 사람들을 말이다. 루소는 자신이 병약한 점에서 언제 병으로 쓰러질지 모른다고 여겼고, 게다가 박해를 가하는 정도가 심각하여 살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죽은 자의 명예를 죽은 자가 살릴 수 없다. 오직 그 명예는 살아있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고백>은 바로 그 시작이다. <고백>을 번역한 박아르마 교수의 말대로 루소의 필체는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나, 그 잘못을 두고 아무 근거도 없이 비난과 조롱을 삼가고, 루소 그 자체의 진실성을 봐달라고 강조한다. <고백>을 읽으면서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 프랑스대혁명에서 그 모든 시민들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이렇게도 한심한 적이 있었던가? 라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가질망정, 그 자체로 루소를 내려 까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루소가 자신 안의 신에게 맹세하고 적은 글이기 때문이다.

다소 마조히즘과 나르시시즘적인 모습은 루소 스스로가 자신을 채찍질을 하면서 그 채찍질이야말로 진실과 용기 있는 고백이란 점에서 자신의 숭고한 정신을 무시하지 마라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비웃되, 그 실수를 용기 내어 말하는 자신을 비웃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 관계에서 우리는 그를 이상하게 볼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게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이중성이다. 인간의 이중성이 왜 무서운가? 루소가 생피에르 섬에 갈 때 처음에 마을주민 전부가 아니어도 일부 환영을 받았고, 어느 사람들과는 좋은 이웃과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루소에게 가해진 박해에서 앞장 선 사람이 다름이 아닌 자신과 친하게 지낸 사람이란 점에서 루소는 충격을 받는다. 처음 초면에 다정한 얼굴로 착한 척하더니 뒤에 와서는 악의를 품고 공격을 가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라도 인간에 대한 공포와 비관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도 루소는 인간을 사랑했다. 단지 그 인간은 현실적 인간보단 자연에 있는 인간 혹은 이상적 인간이었다. 농촌에서 밭을 일구고 산에서 나무를 베는 농민들이 남을 헤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진정 자신의 이성과 올바른 판단력을 지닌 자라면 루소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올바른 감정과 이성이 있다면 그 누구에게나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나 혹은 지금이라도 그런 올바른 것들을 갖추기란 어렵다. 누군가 약점을 잡으면 거기를 잡고 무한히 늘어지는 자들, 저항할 힘이나 의지도 없는 자를 계속 공격하여 그를 궁지로 모는 자들, 그러면서 그 억압받고 박해받는 자가 어느 순간 그 마지막 모습을 드러낼 때 마치 불쌍하게 보는 눈빛, 인간이란 그런 이중적 잣대로 살아온 것이다. 루소가 느낀 그 사악한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정신마저 침식하여 결국 영국에 가서도 광기에 시달린다. 물론 <고백>의 마지막 부분은 생피에르 섬에서 나와 영국에 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데이비드 흄을 만나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도 루소는 자신을 괴롭히는 광기에 의해 모든 것을 의심한다.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한 것이란 정말 눈물 나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생명마저 빼앗으려고 든다면 더 무얼 말할까? <고백> 후반부에는 루소의 성공보단 오히려 고난과 박해의 시간만 이루어진 시간이다. 영광의 순간은 너무 짧고 빛이 났다. 불꽃이 가장 화려한 시기는 바로 소멸하기 전의 순간이다. <신 엘로이즈>의 발간은 온 유럽을 흔들었고, 모든 여성들의 마음을 훔쳤다. 책에 대한 인문도서를 알아보면 루소가 살던 시절, 책 1권이라면 일반 가정의 1~2주 정도 생계를 보낼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소설이 유럽을 강타했다. 물론 루소가 상대하던 여성들은 대부분 상류계급이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책 1권의 가격이 일반 민중들이 건들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것이 아닌 점, 또 다른 점은 소설은 문자로 이루어진 기록문학이다.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 역시 상류계급과 그들 옆에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신 엘로이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작품 주인공 생 프뢰는 높은 계급의 젊은이가 아니라 가난한 청년이다. 루소가 보던 파리, 그 파리의 모습은 루소에게 오로지 죄악과 모순 그리고 허영심으로 가득했다. 아마 그런 것을 느낀 이유는 루소가 상류계층과 어울리는 일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프랑스 파리에서 젊은 남자가 출세하기 위해서는 귀족부인들과 친분을 쌓아야 했으며, 그 귀족부인들의 소개로 다른 귀족부인을 통해 권력과 부를 가질 수 있었다. 루소는 이미 충분히 상류계층에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루소 덕분에 다른 사람들조차 그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루소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루소이기에 높은 분들에게 아첨하지 않은 점에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마을의 점쟁이> 성공 때부터 왕으로부터 충분히 사례를 받을 수 있었고, 수많은 귀족들에게 출세의 길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도 루소는 거부했다.

 

그 거부는 본래 그가 몸이 허약하고, 특히나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에 없는 점에서 소변을 참을 수 없는 루소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복합적인 요소로 루소는 상류층에 있는 것보다 조용한 자연과 은신처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상을 그를 계속 세상으로 나오기를 원했고, 때로는 조롱을 퍼붓기도 했다. 적들은 자신들의 희생양인 루소를 향한 모순에서 언제나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 원했다. 루소가 나오지 않은 이유란 바로 그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 상황에서 테레즈와의 만남은 물론 중요하다. 다른 여인들과 다르게 수줍고 착실하며 거짓 없이 자신을 대해준 테레즈, 루소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남자구실을 하지 못해도 테레즈는 곁에 남아주었다고 한다.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쾌락과 욕망은 남성이 강할 뿐이지 여성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고백> 상권에서도 아직 성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루소는 어느 누군가의 침대에 잠을 잘 때 왜 밤마다 시끄러운지 이해하지 못한 점을 본다면 말이다. 테레즈가 예전보다 애정이 식은 것도 그녀와 성관계를 하지 못한 점에서도 나온다. 현대사회에서 부부사이에서 아내가 남편이 부부생활을 충실하지 못한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실제 이런 모티브로 황신혜 씨와 문성근 씨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이란 영화에 등장한다).

 

그래도 테레즈는 루소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그의 명예를 지키며, 마지막 가난과 빈곤에서 죽을 때까지 의리를 지켰다. 루소가 병으로 서거하여 사람들이 몰려오자 테레즈는 몰려든 사람들에게  "만약 그가 성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성자라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루소의 박해는 곧 테레즈의 불운과 연결되었다. 테레즈는 평생 글자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검소하여도 숫자를 계산하지 못해 늘 살림이 빈곤했다. 게다가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 그리고 조카마저 테레즈를 괴롭히고 때로는 폭력과 협박까지 했다. 그런 테레즈였기에 루소의 옆에서 지켜주었을 것이다. 루소 역시 <고백>에서 테레즈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가득했다.

 

세상 그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도 오로지 테레즈만이 옆에 있을 것이란 점이다. 살아가다보면 가까운 친구조차도 사소한 갈등과 미묘한 오해 그리고 별 볼일 없는 이익으로 인해 갈리는 경우가 다분하다. 하다못해 친구를 우정으로 대하지 않고, 손익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그 끝은 안 봐도 아는 이야기다. 루소는 손익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배신을 당했다.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의 인생에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라고 할까? <고백> 상권을 봐도 그렇지만, 우리 인간 모두는 그렇게 현명하고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사소한 이익에 단합하다가 어느 순간 서로를 향하여 으르렁거리며, 윤리적 가치가 사라진 무비판적 집착에 매달려 중요한 근본을 놓치는 경우가 다분하다. 물론 그런 것을 알고 인정하여 고치는 것이란 쉽지 않다. 그런 문제로 잘못은 일어나고, 인간은 잘못을 할 수밖에 없다. 단지 그 잘못을 이용하여 꼬리 잡아 공격하고 이용하는 부당함에 인간들은 잘못된 것으로 인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노리고 달려든다. 스스로 자신의 쇠사슬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내가 치졸하게 생각하는 인간들이란 자신의 사소한 이익에 대해 아무런 의심의 여지도 없이 윤리적 의식을 배제하면서 늘 남들에게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부류다. 아마 많은 인간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런다고 내가 그렇게 좋은 인간이라 자부하지 않으나, 그런 이익에 내 마음을 기울이는 게 내 자신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 세상을 알아가고, 사회를 이해할수록 어떻게 하면 이익이 되는지 알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남의 것을 빼앗아가고, 자신의 배불리는 게 하는 수단이 된다. 최후에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치명적인 덫이 된다.

 

<고백>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모순된 심리와 그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루소다. 적어도 바보 같이 오늘도 자신들의 이중성에 정의를 말하는 현실을 보며 그들에게 과연 스스로를 고백할 수 있을까? 인간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적당히 수치스러운 과거의 일도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로서 흘러 보낸다. 하지만 정말 수치스러운 과거의 과오나 실수가 아니라, 정말 잘못된 것을 두고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손익을 따지고, 의미 없는 명예를 찾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조심해도 인간은 실수하게 마련이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것에 대해 단순히 나나 타인들이 비난하기보단 그것을 제대로 반성하고 인지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닐까? 루소의 <고백>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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