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는 첫 걸음>이란 작품은 본래 TVA로 나온 애니메이션으로 이번에 감상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꽃이 피는 첫 걸음>은 아직 킷스이소 여관이 폐관 이전에 일어난 일을 구성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주인공 오하나의 외삼촌인 시지마 에니시가 카와자리 타카코와 결혼 후에 일일 것이다. 시기적으로 킷스이쇼 여관이 폐관 이전에 일어난 일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그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두사람의 결혼과 더불어 TVA에서는 어느 이벤트가 발생한다. 그것은 예전에 오하나의 외할머니집에서 나온 어머니 사츠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킷스이쇼의 일을 도와주던 때다.

 

TVA 마지막화를 보면 어머니와 할머니는 서로 마음속으로 깊은 응어리를 맺고 있으나, 그 나름대로 서로를 이해해주는 모녀로서 등장한다. <꽃이 피는 첫 걸음>을 처음부터 보면 알겠으나, 오하나의 어머니인 사츠키는 집안일에 영 서툴며, 일이 바쁜 관계로 오하나를 혼자 내버려둔 채 계속 밖의 일에 몰두한다. 게다가 첫 화부터 사츠키의 애인이 빚으로 인해 오하나를 더 이상 맡을 수 없어서 시골에 있는 킷스이쇼에 보낸다. 하지만 문제는 킷스이쇼에 있는 가족들은 오랫동안 서로 교류가 없었다는 점과 거기에 보내진 오하나는 여관주인의 귀한 외손녀가 아니라 그저 말썽만 일으킨 딸이 낳은 아이에 불과했다.

 

여관에 도착하자말자 오하나는 여관집의 손녀가 아닌 여관집의 종업원이 되어야 했고, 그 속에서 학교친구들과 같이 일하면서 근로소녀로서 살아간다. 작은 공간이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일상 속에 충분히 있을 법한 사람이다. 드라마적인 요소 즉 Drama라는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과 같이 오하나의 인생은 그저 평범한 편모집안의 여고생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이야기다. 물론 자신만이 아니라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민코, 가정 일을 도우면서 여관일을 하는 나코 같이 다들 일을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킷스이쇼(하지만 애니메이션 작화에서는 모두 미소녀지만)이다.

이 전통일본식 여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주인공 오하나라는 존재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의미를 보여준다. 물론 킷스이쇼 여관이 과거의 산물이나, 그 과거 산물인 전통이란 이름을 지키기 위해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세상에 따라 같이 동조하며, 지킬 가치는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 가치는 받아들인 것으로서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전통이란 가치에서 우리 역사적인 현실에서 우리는 조선이란 국가가 최후의 왕조국가이고, 전통문화이다. 하지만 조선 이전의 고려나 발해, 삼국시대나 고조선의 문화적인 유산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한국의 제사문화를 비롯하여 묘소를 산으로 이장하는 것, 어업을 하는 어부가 용신굿을 하는 것은 한국의 전통문화가 계속 이어져 온 것이다. 이들 문화가 조선시대부터 있었을까? 조선시대는 유교문화이고, 특히 공자의 유학보다는 주자학이라고 불리는 성리학에 의해 진행된 유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문화가 아직도 향교문화라는 것으로 전해지고, 제사문화 내지 전통문화가 조선시대 유교문화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런다고 해도 그 유교문화가 그대로 이어진다고 하면 21세기 민주주의국가사회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통문화는 그 자리에 고인 썩은 물처럼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물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물을 내보내야 한다. 즉 물 그 자체는 흘러도 물을 담는 그릇인 매체는 그대로 존재하는 법처럼 말이다. 아니라면 좀 더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방법도 있다. 그런 과정이 바로 <꽃이 피는 첫 걸음>에서 보인다. 주인공이 오하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나, 막상 킷스이쇼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만든 오하나의 외할머니 스이의 모습에서 킷스이쇼는 단순히 스이의 집착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모두의 꿈이 있는 곳으로 승화해버린다.

 

그러나 꿈이 있기에 그 가치가 있기에 마지막화에 킷스이쇼는 폐관하게 이른다. 스이라는 늙은 안주인의 꿈은 자신을 사랑해주던 그녀의 남편, 아니 오하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깃든 곳이다. 스이의 남편은 자신이 사랑하던 아내 스이를 위해 킷스이쇼를 열었으나, 병으로 인해 죽고 만다. 남은 것은 스이와 여관 종업원들, 그 공간에서 사츠키와 에니시는 마음의 궁핍을 느낀다. 오하나의 어머니 사츠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소녀였고, 에니시는 누나 사츠키의 그늘에 가려진 마음이 여린 소년이었다. 어머니가 남매보다는 여관에 치중하자, 에니시를 돌보는 것은 사츠키가 되어야 했지만 오히려 에니시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사츠키가 가진 마음속 빈공간에 새로운 바람이 들어온다. 그것이 바로 <꽃이 피는 첫 걸음> 극장판의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TVA에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나온다. 그 사람은 바로 오하나의 아버지 마츠마에 아야토다. 그는 전문적인 사진작가로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킷스이쇼여관에 머물며, 주변의 경치를 한 폭의 사진으로 담는다. 거기서부터 사츠키의 운명은 변하고, 오하나의 탄생이 시작했다. 오하나가 일어로 보면 꽃님이겠지만, 이탈리어로 가족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가족의 탄생에서 꽃과 같은 오하나의 탄생에는 사츠키의 꿈과 눈물이 있던 것이다.

 

작품 초반에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츠키는 어머니 스이와 갈등을 빚고 있다. 언제나 여관 일만 치중하고, 사츠키 남매에게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어머니, 사츠키는 언제나 어머니에 대해 불만이었다. 공부한다고 하고선 시내에 가서 예쁜 속옷 세트를 사온 사츠키를 냉대하게 대하는 스이에게 사츠키는 자신은 이런 공간에서 그냥 묻히기는 싫고, 자신은 자신의 길을 찾아 빛나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망령을 쫓아가는 것이 어머니라는 말과 함께 사츠키는 여고생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 공간에서 아야토의 만남은 사츠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게 되었다.

 

사츠키는 이제 18세 소녀, 아직까지 그녀는 퍼스트 키스는 둘째치더라도 첫사랑조차 없었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아야토였고, 아야토가 떠나기 전날 기습 키스를 날린다. 그리고 자신은 사진작가인 아야토 옆에 당당히 서기 위해 편집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행복은 잠시, 아야토는 오하나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된다. 여기서부터 사츠키는 자신의 길이 어머니 스이와 겹치는 것을 알게 된다. 결코 질 수 없다는 심정을 말이다. 질 수 없는 그 무엇인가는 자신의 주변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스이는 남편이 죽은 뒤, 여관을 혼자 이끌어왔다는 것을 사츠키는 알고 있었다.

 

남편을 잃은 사츠키가 오하나를 친정에 맡길 때 바로 어머니 스이가 힘들어도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은 모습을 본 것이다. 덕분에 사츠키는 자기 자신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오하나를 여자 혼자서 키우기로 한다. 남편 없는 여자가 혼자서 돈 벌고 아이 키우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물론 남자 혼자서는 더욱 힘들지만 말이다. 그런 어려운 여건에서 사츠키는 그 빛나고 싶은 것을 찾았고, 또 찾아가려고 했다. 사츠키가 빛나는 모습은 스스로 볼 수 없었듯이 그 빛나는 모습을 유일하게 발견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아야토였다. 그런 사츠키가 아야토가 죽어도 그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다는 것은 아야토의 가족으로부터 아야토의 사진을 발견한 것에 대해 전화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아야토의 예전 사진을 찾아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사츠키, 겉으로 보면 어머니로서 낙제점을 받았으나, 사츠키라는 사람으로서는 백점인 인생을 살고 있었다. 자신의 빛을 찾게 해준 아야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하나를 얻었고, 편집자가 된 여자 사츠키였다. 그래서 사츠키는 자신의 어머니 스이가 여관운영에 만사를 기울이는 이유가 바로 사츠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그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있을 장소와 삶의 이유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그 정체성을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나 감정과 무의식에 의한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 감정보다도 무의식적인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정립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이성적으로 애를 혼자서 키우기도 어려운 사츠키나 남편 없이 킷스이쇼를 운영하는 스이나 두 모녀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같은 얼굴을 하기에 서로를 이해하지만 같은 공간에서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같은 얼굴이기에 서로를 보면 자기 자신의 맨 모습을 다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하나가 과거의 어머니가 아버지와 있었던 일을 알고, 외할머니가 만든 여관을 보면서 자신이 그 공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에 분하게 여겼다.

 

자신이 스스로 가야할 길을 가지 않고, 오히려 그 길을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쭉 같이 지낸 남자친구인 코이치가 자신에게 고백했을 때, 오하나는 그 대답에 대해 성실하게 답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 사츠키와 할머니 스이는 자신이 오히려 그 길을 찾아간 것이다. <꽃이 피는 첫 걸음> 극장판 <홈 스위트 홈>은 인간 오하나로 통해 보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물론 여정은 오하나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하나의 회상으로 어머니 사츠키가 구성된다. 소녀인 사츠키는 자신의 어머니인 스이와 매우 닮아있다. 이와 다르게 오하나는 머리색은 어머니나 느낌은 왠지 아버지와 닮아 보인다.

 

어떻게 보자면 어미니 사츠키와 할머니 스이의 대립성 즉 변증법적인 요소로서 오하나로 인물이 탄생한 게 아닌가 싶다. 오하나는 딱딱한 할머니와 공격적인 어머니보다는 밝고 다정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바쁜 이유로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으나, 사실 사츠키 역시 오하나를 사랑하나, 자신의 무책임한 일상으로서 오하나와의 일상을 지키려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하나는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이해하면서 어른이란 공간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꽃이 피는 첫 걸음>에서 오하나만 아니라 오하나의 친구인 민치로도 알 수 있다.

 

민치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만 만들지만, 정작 어린 손님이나 노인 손님이 오면 그들의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만들었다. 음식으로서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 요리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코는 계속 부모님을 돕기 위해 집안일을 챙기고(가계부를 나코가 작성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생들을 돌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부담에 힘겨워한다. 그래서 평소에는 착한 딸이지만, 나코의 여동생 마나가 집에서 가출할 때, 나코는 어머니에게 전화하여 마나의 소풍에 제발 따라가 달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타인의 입장만 보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힘든 부분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어른의 일이기도 하다. 그런다고 인간은 그렇게 <꽃이 피는 첫 걸음>에서 보여준 것처럼 쉽게 어른이 되어가지 않는다(물론 작품 내 주인공은 힘들겠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에겐 어렵지 않다). 단지 보여줌으로서 일상 속에 머무는 우리에게 빛나는 순간이 있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힘들다는 점이고, 그 과정을 넘어도 여전히 힘든 일은 다가온다. 어른이 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단지 어른이 되어가고 어른이 되는 것은 자기 인생의 길을 찾았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고, 그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걸어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