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철학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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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사실 마르크스의 서적들을 읽다보면 그가 철학자임은 분명하나 철학도서로 만들기 위해 철학자로서 활동을 한 적은 없다. 그의 책들은 하나의 사회과학 도서들이다. 혹이라면 정치학 내지 경제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세계의 철학사에서 마르크스의 단원은 매우 중요하다. 근대철학사상에서 마르크스는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와 더불어 그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정말 철학자로서 철학을 생산한 것인가? 그래서 나는 이 책 제목을 읽으면서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저술한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표지를 처음 보면서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라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어가는 사상가들을 보면 많은 철학자도 있고, 사상가, 혁명가, 문학가, 경제학자, 역사학자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철학은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예전에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예전에 내가 적은 그 책의 서평을 찾아보니 이런 문구가 나왔다.

 

“루이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인 견해는 관념적일 수도 없고, 유물론적일수도 없다고 했다. 아니라면 두 가지를 동시에 대립하면 꾸준히 발전해 나가야할 가치라고 했다. 그런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존재하는데, 그 철학이 철학으로서 생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철학이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철학에서 철학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철학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생애에서는 그는 분명 철학을 많이 알고 있었으나 그는 비판적인 경제학과 사회과학으로서 행동했다. 그런다고 해서 그가 철학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직접 철학적으로 행동했지만, 그런다고 그는 철학을 철학으로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경제학과 역사학 그리고 정치학에서 철학적인 관점이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를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본론>과 <공산당선언>을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내지 <프랑스 내전>과 같은 서적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정치적인 시각으로서 마르크스가 적은 도서다.

 

아직까지 나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나 마르크스의 철학적 변화에 대해 많은 설전이 오고간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시점이나 혹은 <자본>과 <공산당선언>에 대한 해석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많은 마르크스주의자까지 분파가 생기고,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한다. 재대로 이해하기 힘든 마르크스주의자 내지 그런 사상가에 대한 연구도서를 본 상태에서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을 읽는 순간, 마르크스의 사상적 기본은 잘 쉽게 설명했으나, 마르크스철학이란 단어를 이 책을 읽는 때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철학이나 혹은 마르크스주의라는 말만 들어본 정도다. 마르크스 철학보단 차라리 마르크스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에서 나온 그 소절 때문이었다. 루이 알튀세르는 프랑스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인 파리고등사범학교 철학을 전공하고, 다시 그 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어 가르친다. 20세기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도 하나, 철학사상도서에 보면 프랑스 구조주의자로 나오기도 한다.

 

혹은 알튀세르가 아니더라도 <맑스 재장전>을 읽어도 마르크스에 대한 관점이 매우 다르게 서로 해석된다. 물론 임승수 작가본인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란 모택동이나 레닌 등이 한 업적에서 마르크스가 가르친 것과 상당히 다르게 한 것과 그 후에 이어진 것들이 마르크스가 오히려 부수고 싶은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의문점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보다 임승수 작가가 더 많은 지식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외국에서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서적을 읽은 입장에서 다소 의문스런 것이 당연하다는 점이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내용이나 발견한 법칙에 대하여 본다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매우 어렵기로 소문난 <자본론>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고, 그런 이론적인 요소에서 실재 현실적 요건을 반영하여 적용했으니 이해가 매우 빠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도서가 독일, 프랑스, 영국, 심지어 미국조차도 나오는 점을 본다면 제목이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은 적절하지 못하고 차라리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사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히 말하여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대해 낯설거나 혹은 이상하게 여기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사회시간이나 역사시간이나 우리는 은근히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하면 역사는 주요인물로서 설명하나, 그 시대의 문화적 조건과 지리적 조건, 환경적 영향을 생각하면 역사에서 유물론적인 요소가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가령 내 개인적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그의 중원대륙에 향한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의 전국전쟁에서 보다시피 다이묘로 필두로 하여 여러 분파들의 귀족들이 대규모의 사병을 가지고 있었기에 절대권력자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신하들이 늘어나면 이들에 대한 포상이 필요하고, 자신이 가진 물자에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신하가 서로 좋은 사이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을 조선을 보내면 국내정치적 갈등은 안정될 수 있고, 전쟁 이후 살기로 넘치는 귀족과 무사집단 그리고 사병들까지도 정치적인 위해로 올 수 없다. 조선까지 땅이 넘어오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큰 이득이 온다. 일단 일본은 날씨가 습하고 농사가 어려운 토지이므로, 벼농사가 잘 되는 조선에서 식량을 조달하고, 조선의 문물을 들이면 국가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장한다.

 

또한 일본은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므로 타국의 침입이 용이하지 않기에 무역거래의 용이성에서 조선만큼 좋은 영토는 없는 것이다. 임승수 작가말대로 토대가 상부구조를 만드는 것이라 말이 딱 맞는 것이다. 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문화유물론>으로 가면 토대와 상부구조는 다시 상부구조, 구조, 하부구조로 분할된다. 왜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이토록 중요한가? 이른바 인류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역할이 무척이나 크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본론> 이외에도 여러 책들을 보면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는 역사부터 다룬다. 왜냐하면 인류는 생존을 위해 살아왔고, 그것을 위해 경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경제라는 것은 반드시 돈, 화폐만이 아니라 자급자족부터 시작하여 물물교환, 화폐와 상품의 가치교환까지도 포함이다. 문제는 <자본론>에서는 그런 경제적인 역사에서 착취라는 것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착취는 누군가는 일하고 고생하는데, 그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지만, 착취로 인해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고생도 없이 풍요와 쾌락을 보낸다. 그런데 그것이 곧 인간이 문명으로부터 시작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란 점이다. 그런 것을 최초로 밝힌 사람은 마르크스보단 사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이라고 말하고 싶다.

 

단지 마르크스는 그것을 경제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소상히 밝혀내었다. 하지만 인류학이란 학문에서 20세기 최고의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학의 시작은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이라고 한다. 그리고 레비 스트로스는 자신의 인류학에서 토대가 되는 것을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라고 한다. 인류의 형태는 결국 경제적인 조건, 즉 유물론적인 요소가 필요한 점이다. 따라서 착취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누군가는 그 착취로 이익을 보는 것이고, 착취는 단순히 그 사회만 아니라 다른 사회나 국가로까지 이어진다. 전쟁의 목적은 결국 인간의 광적인 관념이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생존수다이다. 경제학의 영역은 단순히 화폐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성이다.

 

얼마나 적게 일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가? 이것이 경제학이란 점이다. 그래서 원시부족들이 자본을 몰라도 경제적인 부분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유물론적인 조건, 눈앞에 일어나는 현상과 자연적, 지리적 조건 등이 결국 인간의 토대가 되는 점이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에서 문화는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물질에서 관념이 되는 경우도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풍요롭게 보일 수 있으나 그 풍요로운 세계란 실제 우리가 물리적으로 접근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이루어진 정보에 의해서다.

 

spectacle이라고 하는 흔히 아무 의미도 모른 채 사람들이 말하는 스펙타클, 이미지로 매개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아는 정보는 정말 우리가 아는 정보인지 그것으로 조장된 정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되었다.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가 이미지의 허구라도 그것이 하나의 사실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소 마르크스사상과 무슨 상관이 있을지 모르나, <스펙타클의 사회>를 저술한 사람은 프랑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다. 자본력의 의해 만들어진 미디어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밝힌 것이 그의 저서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연장선에 있는 독일 프랑크푸르크대학의 학자들이나 혹은 영국 버밍험대학교 학자들도 그런 의견을 내고 있다. 결국 마르크스가 주장한 인간에 대한 가치가 하나의 인간성에 의해 판단되는 게 아니라 상품으로서 판단되어 인간의 가치가 물품의 화폐로서 결정되는 물신주의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상품에서 이미지라는 것은 미디어에 의해 생산되므로 이미지가 결국 화폐의 새로운 척도가 되고, 이미지 중에서 상표나 기호 등이 결국 자본력을 좌우한다. 우리는 흔히 TV나 인터넷에서 브랜드 가치 내지 미디어의 상호로서 가치를 매긴다.

 

삼성자동차나 현대아파트나 엘지냉장고 모두 그 상호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여기지, 그 생산품에 대해 생산과정의 인간들은 모두 잊어버린다. 인간의 가치가 소실되고 이미지의 기호만이 등장하여, 노동하는 사람들은 상품에 의해 드러나지 않고 숨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몇몇 희생자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우리는 상품에 대해 구매가능하고, 결함이 있다면 교환이 가능하다. 상품의 교체는 가능해도, 인간의 교체는 대체할 수 없다. 이런 문제점이 마르크스는 이해했다. 지금 우리는 인간가 축소된다고 큰 고민을 한다. 그런 고민은 마르크스도 했다. 지나친 과로(18시간 내외 업무와 간간히 진행되는 철야작업)와 열악한 환경(더운 방, 먼지가 가득한 방, 통풍되지 않은 방)에 모두 병에 걸린 셈이다.

 

인간에게 노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재생산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재생산되어야 사회와 국가가 운영된다. 약 30년 주기로 인구가 사라지면 그 대체할 인구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균형이 무너지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다. 노동력을 대체인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지나친 노동은 인간수명을 단축시키고, 그 단축으로 인해 노동인구를 감소시킨다. 이에 반해 한국은 지나친 물가로 인해 인구를 감소하고, 노동인구를 단축시킨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자본을 위해 노동인구를 재생산하는 점을 각인하고 어느 정도 경영해야 하나 오히려 그 재생산 과정으로 통해 이득을 보는 것 같다.

 

이런 과정이 계속 이어지면 사회는 양적인 요소가 붕괴하여 질적인 변화가 온다. 양질관계의 변화에서 마르크스가 제기한 것처럼 우리도 그 문제에 봉착했다. 부부 1인당 1.2 내외의 아기를 가진다면 추후에 한국에 일할 사람도 없어지고, 국방력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킨다. 국방부 군인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육군부대의 규모가 조금씩 축소되는 것으로 아는데, 최근 내가 전역할 때는 군대에 필요한 지원시설에 대해 아웃소싱을 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재생산이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영속성을 유지하느냐 마느냐이다. 그런데 문제는 피라미드 구조와 빈부격차가 심하면 심할수록 인구감소와 국가적 안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해결대안으로 결국 빈부격차를 줄이고, 인구증가를 위한 지원을 해야 하나, 예산은 어디서부터 나오며 또한 그것을 모우기 위한 방편은 무엇인가? 빈부의 경제적 조건에서 중하위 계층이 많은 점을 감안하면 그들에게 모울 수 있는 금액이 한계가 있고, 상당한 부를 지닌 부자들의 세금을 거두려면 부자들의 반대가 이어진다. 상부구조가 토대로부터 이루어지면 부자들의 세금 추가징수 및 혹은 기업의 제재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구는 줄고, 사회적 문제를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변증법적인 대립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마르크스는 이런 변증법적인 관계로 통해 균형을 이룰 수 없다면 그 대치지점에서 축척되는 밸런스의 불균형으로 인해 질적 변화 즉 사회적 변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임승수 작가가 잘 지적한 프랑스대혁명의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그들은 프랑스 대혁명의 영웅이고, 법조인으로서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들이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좌파세력인 자코뱅당이다.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부르조아가 최초의 좌파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혁명이 가능하게 만든 것은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처럼 프랑스가 국가경제운영의 문제, 미국독립전쟁의 참전, 지방자치제가 아닌 중앙집권화로 이미 루이14세부터 경제적 위기가 시작한 점이다. 예산을 줄고, 세금을 필요한데 귀족들은 계속 납부를 거부하고, 할 수 없이 농민과 상인에게 세금을 거두게 되었다. 게다가 신흥 부르주아 세력은 우수한 두뇌와 재력이 있어도 신분상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도화선이 폭발한 것이 프랑스대혁명이다. 당초 삼부회소집에서 입헌군주제를 삼부회 부르주아 대표들이 요구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봉건세력과 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대립관계다. 이런 변증법적인 대립이 역사를 계속 바꾼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르크스를 안다는 것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 인류의 생산과 소비를 다루기에 인류학 영역까지 이어진다. 경제공황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던 시절, 마르크스가 그것을 밝혀내고 경제공황은 소비자는 일정한데 과잉생산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애덤 스미스의 시장경제주의적인 경제학은 생산과 소비가 일치했으나, 실제로 우리는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다. 부도가 나는 업체에서 물건을 생산해도 팔리지 않아 상품가치가 없다면 빚더미에 앉을 뿐이다. 양적인 부분이 한계지점에 도달하면 결국 파산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파산되는 것이 자본가인 업체 사장이냐?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업체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있고, 그 노동자에게 가족이 있다. 시장경제에서 소비의 주된 출처는 먹고 입고 자는 것이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서민경제는 파탄난다. 업체는 망하고, 경기는 침체하고, 돈은 없다면 노동자와 그 가족은 생계가 곤란하고, 그들의 생계로서 살아가는 상인 역시 곤란하다. 경제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나, 진짜 똑똑한 경영인이나 국가지도자라면 어느 정도 다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그래야지 자신의 상품이 팔린다.

 

노동자는 단순히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다른 상품을 구매하고 팔아주는 또 다른 고객이다. 그래서일까? 일본 문화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도서 어느 부분이 생각난다. 하다못해 노동자에게 국가는 있어도 소비자에게 국가는 없다. 소비자가 결국 기업과 국가를 살리는 것이다. 소비자를 죽이는 기업과 국가에게 미래란 없다. 자본으로 국경을 초월한 기업에겐 다른 시장을 찾으면 그만이나, 국가는 물리적으로 국경이 존재하므로 다른 선택지점이 없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을 읽고 쓴 글이지만, 이 책을 읽는 그 이상으로 말하자면 “우리들에게 날개란 없다(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제목).” 단지 추락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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