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현성환 역, 새물결(2008년)

알랭 바디우에게 사도 바울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국한된 인물이 아니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바울을 종교라는 층위에서 읽어내지 않는다. 그에게 바울은 “보편성의 반철학적 이론가”이며 보편주의의 실현을 위해 싸우는 행동가이자 투사, 그리고 조직가이다(바디우는 바울을 “모호한 마르크스를 그리스도로 삼은 레닌에 비교”한다).

예컨대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대인,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신앙 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를 직접 수행했던) ‘역사적’ 사도들과 의례 문제(그리스도교도가 된 이방인들에게 할례 등의 유대 의례를 행하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벌였던 갈등은, 바디우가 보기에 바울의 보편주의와 역사적 사도들의 특수주의(유대 공동체주의) 사이에 벌어진 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 알랭 바디우는 사도 바울의 사상과 그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성경 구절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해낸다. 우선 그는 바울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행적이나 가르침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과 부활은 결코 생물학적인 사태가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육체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생각은 생명입니다”(「로마서」, 8장 6절)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하나의 사유이자 분열된 주체의 두 갈래 길 중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 되며, ‘죽음을 향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체의 분열적 구성 안으로 진입하는) 죽음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부활 역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승리, 이러한 “죽음을 죽여버리는 것”이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은 그 승리의 가능성을 보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죄, 율법,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등의 개념이 정교하게 다시 해석되며, 너무도 유명한 세 단어 ― 믿음, 희망(소망), 사랑 ― 가 확신, 확실성, (보편적 힘으로서의) 사랑 등으로 다시 명명되고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얼굴의 바울, 우리 사회를 향해 말 건네고, (신자건 아니건) 우리 모두를 향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눈물짓고, 위협하고, 용서하고, 공격하며, 부드럽게 포용하는 바울과 만나게 된다.

‘하나의’ 진리(그리고 일신론)에서 ‘하나’란 바로 “예외가 없음”, “모두에 대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을 통해 차이에 대한 관용이라는 미명하에 보편적 진리에 대한 탐구는 애초에 포기되고, 자본이라는 추상적 보편성만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이 시대를 뚫고 헤쳐 나갈 사유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 출판사 리뷰 일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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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 조효원 역, 그린비(2012년)

타우베스는 사도 바울의「로마서」를 독해하면서 바울의 새로운 모습을 끌어내고 있다. 이에 의해 구원에 대한 바울의 믿음, 바울이 세우려 한 공동체 등이 정치적 문제가 된다. 타우베스는 바울의 「로마서」가 “정치신학이며 카이사르에 대한 정치적 선전포고”(45쪽)라는 테제를 내세운다. 당시 세계 질서는 로마 제국과 혈연 공동체로 나뉘어 있었다. 바울은 이 질서에 맞서 범이스라엘 사상을 주장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란 (유대인이라는) 혈연에 기반한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에 따른 ‘약속’과 ‘믿음’의 공동체이다. 하느님의 옛 백성인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포괄하는 이 범이스라엘은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질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범이스라엘’은 어떤 정치 질서를 지닌 공동체인가? 바울에게 세속의 정치 질서와 신의 질서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그에게 세속의 질서는 아무런 정당성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지상의 정치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인 [율]법의 폐기를 주장한다(「로마서」가 정치적 선전포고였던 점도, 로마 제국이 [율]법의 기초한 질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이 지상의 질서는 폐기되고, 믿음을 가진 자들은 구원받게 된다는 사상을 펼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저항이나 반항을 하는 대신,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면서 서로 사랑하라(‘이웃 사랑’의 계율)는 충고를 던진다. 그리하면 최후의 순간에 메시아가 도래할 때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타우베스가 해석하는 바울의 사유는 우리에게 낯선 것이다. 얼핏 이는 어차피 종말이 올 테니 이 세상의 문제에서 도피하라는 염세주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과 타우베스는 염세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들은 애세주의(愛世主義)자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이 세계를 무화하고 “지상의 질서를 틀 짓는 권력의 구조 자체를 폐기해 버리는 부정적 정치신학”을 작동시키려 했던 것이다(252쪽).

타우베스에게 20세기에 태어난 바울주의자는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이 청년 시기에 쓴 「신학, 정치적 단편 」과 「로마서」를 비교 독해함으로써 타우베스는 바울과 벤야민의 유사성을 밝혀낸다. 두 사람 모두 세속적인 것의 질서를 ‘니힐리즘’적으로 파악했다.

둘 모두 창조를 덧없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이 세계를 스러져 가는 것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청년 벤야민에게도 지상의 질서와 신의 질서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었으며, 벤야민 역시 세속적인 것의 질서를 폐기하는 메시아의 도래를 확신했다.   - 출판사 리뷰 일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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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김정아 역, 길(2007년)


지젝은 발터 벤야민의「역사철학테제」제1번을 뒤집는다. 즉 발터 벤야민이 유물론을 꼭두각시, 신학을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난쟁이에 비유했다면, 지젝은 이 테제를 뒤짚어 유물론을 난쟁이, 신학을 꼭두각시의 자리에 놓는다.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진 후 역사적 유물론이 파산한 이념으로 간주되지만, 여전히 우리 사유의 토대는 유물론이고 유물론이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의 또는 이념은 이제 종교적 신념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이 유력한 이념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다.

신이 죽은 사회, 즉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어쩌면 모든 것을 허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듯 모든 유형의 대의를 부정하며 소소한 일상적 삶의 쾌락을 누리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사회는 오히려 삶 자체를 상실한다. 즉 탈형이상학적 생존지상주의의 종착역은 먹기 위해 사는 삶, 죽음과 다름없는 삶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곧 “지배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섹스를 즐길 것, 죄의식을 느끼지 말 것을 명한다. 이때 우리가 죄의식의 부재에 대하여 치르는 대가는 불안이다.” 즉 불안은 우리의 실존적 체험의 근간을 이루고 이러한 불안을 해소할 이데올로기로서 ‘현행 기독교’는 우리에게 기만적인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불안 없는 쾌락을 향유할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것을 법과 죄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규범은 위반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지젝이 현행 기독교를 ‘도착적’ 기독교, 혹은 기독교를 가장한 쾌락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젝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가 도착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 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종교가 처벌받지 않고 삶을 즐기게 해주는 안전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라는 점은 무수히 많은 한국사회의 교회 피뢰침과 대도시 밤거리의 향락문화가 동시에 공존하는 모습에서도 역설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 출판사 리뷰 일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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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무엇이 나를 책으로 이끌까. 그 무엇이 나를 글쓰기로 이끌까. 일상의 일부에 불과한 단순한 습관일까. 아니면 지식에 대한 열정 때문일까. 하긴 그게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냥 읽고 쓰면 되는 것을. 어떤 것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그게 좋기 때문이다. 그냥 좋아서....단지 이게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2

줄곧 어떤 글을 쓸까, 어떤 책을 읽을까, 어떤 영화를 볼까. 어떤 음악을 듣고, 트럼펫은 잘 연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그것만이 자연스럽고 즐거워서다. 생각 같아선 평생 책 읽고 공부만하다 죽어도 좋겠다. 지극히 단조롭고, 재미없고, 정형화된 생활. 하지만 어쩌랴! 나만 행복하고 즐거우면 되니....   실상 내 생활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게 없다. 트럼펫 연습이 그나마 하는 유일한 소일거리이니 결국은 독서와 트럼펫 불기, 그리고 독서실 업무가 근자 내 생활의 전부라 할 수 있다.

 

특별히 누구 만나는 사람도 없고, 만나고싶지도 않다. 공식 모임은 오케스트라와 독서회 단 두 개지만 크게 불만은 없다. 아마 모임이 더 잦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다면 오히려 번거로울 것 같다. 바라기는 독서회가 좀 활성화되고, 영화감상 모임이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모임이라는게 생각처럼 쉬운게 아니다. 더욱이 내 뜻과 맞는 모임을 만든다는건 언감생심이니 그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해야한다.

 

쓰고 탄내가 날정도로 생두를 강하게 볶았다. 버리기가 아깝다. 열매 하나하나를 손으로 따고 건조하고, 완제품으로 만들기까지 공력을 생각하면 콩 알 하나 함부로 버릴 수 없다. 아침 식사로 바나나 두 개, 커피에 우유를 탄 밀크커피로 대신하다.

오전엔 <자유의 언덕>을 마저 감상. 오늘 중 한길문고에 들러 일전에 주문한 파트릭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이상철 <죽은 신의 인문학>,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전집 두 권 가져올것. 오는 길에 독서실 벤치에 칠할 방부목용 페인트 두 통 구입할 것.

 

3

10대 후반부터 60중반이 되도록 평생 책을 가까이했다. 이쯤이면 독서가 축에 드는셈인데, 나이에 따라 책읽기가 좀 차이가 있다. 가장 알찬 독서를 한 나이가 언제쯤일까. 청춘시절은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라 문학작품을 읽기에 적절하다. 촉촉한 감수성이 동반되지 않으면 쉬 감동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30대까지는 문학작품을 읽기엔 최상의 시기일듯싶다. 그렇다면 나이든 지금은 어떨까. 

 

일단 감동면에서는 예전만 못하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과<악령>을 접한 때가 10대후반이었다. 당시는 읽기는 읽었어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었다. 반면에 감동은 지금보다 더 컸다. 젊은 시절 특유의 감수성 탓이다.

 

밤을 지새워 소설을 읽고, 감동이 컸던 장면을 떠올리며 몽상에 잠기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단지 좋은 작품을 읽었다는 느낌일뿐 감동은 크지 않다. 요즘 읽고 있는 <전쟁과 평화>만해도 작가의 사상과 이념에 주목되는 편이지 작품 자체의 미학이나 스토리에 몰입되진 않는다. 이점은 철학서를 비롯한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젊은시절의 독서는 비록 이해도는 떨어지지만 감동만큼은 결코 적지 않다. 다만 인문학서는 논리적 이성에 따른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젊은시절보다 지금이 더 읽기에 적절할 것 같다. 

 

어느덧 40여년이라는 꽤 긴 세월을 책을 읽어왔다. 한데 나이 든 지금이 오히려 독서열이 더 왕성하고, 이해도도 깊다. 문.사.철 모두를 두루 탐독하고, 문학만하더라도 세계문학을 집중해서 읽기 때문에 열정으로보면 결코 젊은 시절에 뒤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해도가 과거와는 비교도 안되게 깊기 때문에 책읽기에 최상의 시기가 아닐까싶다. 다만 체력이나 그밖의 사정으로 집중력을 길게 가져갈 수 없다는것 하나가 문제일뿐이다. 그 외에는 시간, 돈, 열정, 그 어느것도 뒤질게 없다. 어찌보면 독서는 60대부터라는 말이 절로 나올정도다.

 

4 

나만의 방, 나만의 공간 확보. 늘 생각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동안 옥상 컨테이너를 이용한 탓도 있고 최근에 새로 꾸민 서재와 트럼펫 연습실을 겸한 큰방이 있지만 실제는 내 방이라고 할 수 없다. 가족들이 무시로 출입하는데다 큰방에 딸린 화장실에 세탁기까지 있다보니 들락날락 도무지 어수선해서 조용히 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이 무더운 여름에 냉방이 안 되니 실상 여름 한 철은 책을 보관한 서재라고나 할밖에.  

 

나 혼자만의 방이라니, 사치가 아닐까싶어 차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독서실 빈방이 있었지만 이조차 선뜻 내키지 않는다. 행여 이용자가 있지않을까, 이렇게 좋은 방을 굳이 나 혼자 사용해도될까. 어쩔 수 없는 소시민 근성은 결단을 자꾸 지연시켰다. 좀 더 자신에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지금 좋아하는 것, 당장 하고싶은게 있다면 뭘 망설여야하나. 일단 나만의 방을 만드는게 우선 순위다.

 

급기야 35도까지 치오르는 수은주를 보니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그동안 사용하던 큰방에서 독서실에 딸린 311호실로 옮겼다. 독서와 글쓰기, 낮잠은 조용한 이곳을 이용하고, 트럼펫 연습은 책으로 자연방음이 된 큰방을 이용하려고 한다

 

5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에서 인적이 없는 월든 호숫가, 숲속 자연생활을 하는 소로와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다. 가령 소로는 거의 금욕적인 생활 위주여서 여성은 물론이고 육식도 멀리한다. 그는 소박하고 잔잔하게 살지만 삶의 기쁨을 얻는데는 조르바와 별반 차이가 없어보인다. 한 사람은 욕망의 절제를 통해서 행복을 얻는반면, 다른 한 사람은 아예 욕망조차 뛰어넘는 자유분방한 삶을 산다. 이처럼 외견상 두 사람은 전혀 상반적인 삶 같지만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하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들은 물욕, 명예욕, 권력욕 등 세상의 그 어떤 가치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6

아내는 친정에 가고 지훈이와 둘이서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화염에 불타는듯한 여름 한낮. 다시 독서실로 오다. 311호실. 최근에 새로 만든 나의 휴식공간이자 공부방이기도 하다. 아침부터 저녁 근무전까지 여기서 줄창 시간을 보낸다. 워낙에 조용한 독서실 방이라 책을 읽거나 잠을 자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할게 없지만 그래도 이런 무더위에 시원하고 누구 찾는 사람없이 최상의 안식처이다.

 

 권의 책을 교대로 읽는다. <월든>, <전쟁과 평화> 권용선의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조재룡의 <번역과 책의 처소들> <번역의 유령들>,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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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사무실 서재에서 나리만 스카코브의 저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잠깐 읽다. 저자 약력을 보니 스탠포드 대학에서 슬라브어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워낙 책 내용이 촘촘하고 영화 분야에 두루 박식해서 깜박 영화학과 교수로 착각할정도. 타르코프스키를 다룬 책이 드물기도 하거니와 국내 저서로는 유일하게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김용규 교수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가 유일하다.

 

김 교수는 교양인문학의 한 방편으로 영화와 철학을 접목한 글을 많이 쓴 학자인데, 타르코프스키 외에도 폴란드 출신의 거장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십계> 연작을 분석한 장장 700여쪽 분량의 <데칼로그>를 출간한 바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세상의 수많은 영화감독 중 내가 으뜸으로 손꼽는 감독. 예술영화의 모범이자 교과서 같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은 이미 모두 감상한 바 있지만 두 번, 세 번, 아니 몇 번이라도 반복 감상해야 할 이유가 있다. 볼 때마다 새롭고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기 때문인데, 작품 하나하나가 이른바 고전의 전형을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과거 학교 실습선 승선시절에는 300여매 분량의 타르코프스키 영화관련 글을 쓴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은 전혀 집중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어서 늘 아쉽다.  

 

퇴직하면 어느 골목 단골카페에 자리잡고 커피 마시며, 종일 글이나 쓰고 책 읽는게 꿈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전혀 예기치않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다. 누가 배를 탈줄 알았으며, 그것도 동기생 중에서 가장 오래 탈줄 누가 알았으랴. 게다가 이 나이 되도록 독서실에 붙박힐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정 무렵,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올라오니 텅빈 건물, 집도 텅비어있다. 아내는 친정에 다니러 갔다. 나 홀로인 이 시간, 비록 하루동안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자유로움이 주는 느긋함, 여유가 너무 행복하다. 여름저녁, 고요함. 냉장고를 열고 캔맥주를 하나 꺼낸다. 프로젝터를 켜고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쪽으로 간 까닭은>을 볼까하다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을 감상하기로 하다. 대체 내 삶에서 책과 영화, 음악을 빼고나면 무엇이 남을까

 

홍상수와 타르코프스키의 차이점. 타르코프스키의 관심은 비일상적인 현실이라고 부르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는 본래 이 영역이 진정한 현실이며 일상생활에 매몰된 인간이 경험하는 일상적 현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현실은 그저 수많은 종류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이 고양된 인식 상태에 이르는 능력을 개발한다면 비일상적인 현실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다고 여긴다

 

반면 홍상수는 우리가 늘 겪고있는 일상적 현실이라고 부르는 낯익은 영역이다. 그는 하루하루 현실에 매몰된채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섬세하고, 주도면밀하게 보여준다. 감독의 역할은 그런 장면을 낱낱이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평소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일상생활을 정작 얼마나 모른채 살고 있는가, 얼마나 그런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한 것은 그가 보여주는 일상의 풍경은 분명 우리가 평소 습관처럼 하던 것이지만 영상으로 보는 순간 전혀 낯설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잠깐 말했다시피 우리가 일상에 워낙 매몰된 상태로 살다보니 영상 속 일상이 오히려 비일상적인 현실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숲을 보여준다면 홍상수는 나무를 보여준다. 타르코프스키가 나무를 놓치거나 홍상수가 숲을 놓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체로 전자가 우주, 세상, 인생이라는 거시적 주제, 틀에 관심을 갖는다면, 후자는 자잘한 일상, 생활, 개인의 버릇, 습관 같은 미시적 주제들이다. 그래서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카메라는 망원경, 홍상수는 현미경에 비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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