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은 우선 소설이 펼쳐내는 허구적 상상의 세계, 기기묘묘한 인간들의 삶을 재현해내는 것이 흥미로우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 지적인 즐거움,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자 하는 몇 가지 이유때문이다. 그런데 곤혹스러운 것은 소설이 단순히 즐거움과 아름다움의 향유만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파리대왕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하는 문학은 행복과 즐거움만이 아닌 어두운점, 악한 점, 고통스런 점까지 모두 소설화되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소설읽기의 즐거움이 아닌 어려움, 고통이 시작된다.

2
순수했던 젊은시절은 문학과 책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매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만큼 독서에 임하는 태도는 진지함을 넘어 책이 삶의 전부인양 착각했다. 하지만 나이들다보니 문학은 그저 문학이며, 책은 책에 불과할뿐 세상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지 않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 책 몇 권 읽는다고 크게 바뀌는 것 같지도 않고, 문학의 영향력은 아주 미미해서 기껏해야 세상의 많은 즐거움 가운데 한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읽기는 때로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또한 좋은 소설은 나를 둘러싼 세상과 삶에 대해 여러 의문과 문제를 제기한다.

 

3
영화 <파리대왕>을 감상하는내내 우울하고 공포스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만약 책읽기가 일차적으로 예술미의 향유와 쾌락을 맞보기 위해서라면 되도록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것만 골라 감상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고단한 세상사 희노애락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사람살이가 유쾌하고 즐거운것만은 아니듯이 영화, 문학도 마찬가지인거다.

4
윌리엄 골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리 후크의 <파리대왕>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이 그렇듯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집중적으로 해부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인간을 폭력과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 그런 폭력과 권력에 동조하거나 방관하는 나약한 존재로 묘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법과 질서가 있는 평화로운 곳이지만, 우리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어떤 곳에 폭력의 위험성이 도사릴 경우가 있다. 전국민에게 악몽같은 사건으로 각인된 윤일병의 죽음’, 어린아이를 삽자루만한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유아원 폭력, 중학 동급생끼리 수년간 돈뺐고, 조직적으로 구타한 학교폭력이 매일같이 자행되건만 부모, 교사 모두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윤일병의 의무대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과 동일한 세계이다. 이 소설에서 섬에 불시착한 소년들은 그들만의 전체주의적 질서를 만든다. 한국 군대는 불시착해버린 고립된 섬이었다. <파리 대왕> 소설과 동일하다. <진짜 사나이> 내무반에서는 자기 상관이 좋아하는 축구팀, 좋아하는 음식까지 시험을 봐야 했다. 폐쇄된 공간, 고립된 인간관계, 서열과 형님문화, 좌표 상실. 이곳에서는 죽거나 저항하거나 비굴하거나, 세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윌리엄 골딩은 인간 본성이 이타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침팬지와 인간은 차이가 없다. 조카 침팬지가 힘이 세면 삼촌 침팬지를 돌로 쳐서 머리를 박살낸다. 자기 바나나 먹었다고 해서. 여기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이 잔혹하게 자기 또래 아이들을 죽이고 배제해버린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주목하는 동물이고, 자기와 남을 비춰보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울을 닦지 못하게 구조적으로 규정되고, 압박을 받으면, 그 마음의 거울에는 때가 낀다. 반성능력은 사라진다. 내 바나나 먹었다고 삼촌 침팬지 대가리를 부수는 힘과 에너지만 남게 된다."   -  김종대 <지배하는 군대가 악마를 양성한다>

 

5
<파리대왕>은 무인도에 상륙한 일군의 소년들을 통해 인간의 폭력성, 악한 본성을 알레고리로 드러낸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랠프의 역할이 좀 유약하게 묘사되는반면 잭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다. 랠프와 돼지는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민주적 사고를 지닌 인물을 대표한다면, 잭과 그의 심복격인 로버트는 비합리적이고, 권력지향적이며 폭력적인 인간을 각각 대표한다.

영화는 초반, 여느 소년집단이 있을법한 일을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잠깐 놀랄일도 금방 어린아이 특유의 일로 여기지만 점점 진행되면서 폭력과 권력이 드러난다. 그런점에서 이 영화는 음악의 속도처럼, 라르고, 아다지오, 알레그로, 프레스토 식으로 진행된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가공할 공포를 느끼는 것은 지금까지 알고있던 세상의 황담함내지는 비상식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의 세상은 공평치못하고, 폭력적인반면, 다른 세상은 공평하고 평화롭다. 이 경우 어느 한 쪽이 진실이 아니라 둘 모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한쪽만을 보고믿는탓에 다른쪽을 미처 돌아볼 여유가 없다.

<파리 대왕>은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 폭력을, 그것도 평소 상상할 수 없던 가공할 폭력을 경험하는 기분을 느끼게한다.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날 느닷없이 불치병 선고를 받았을때의 기분이 이럴것이다. 평소 건강할때는 세상사람 모두가 건강하고 평화롭게 보이지만 내 자신이 아프면, 게다가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한순간 생각이 달라진다. 폭력도 마찬가지여서 한순간 세상은 부당함과 폭력으로 가득차있다고 생각한다.

6
우리는 애초에 책읽기의 즐거움만을 목표로 할 수 있다. 책과 문학은 일차적으로 쾌락의 대상이니까. 하지좋은 책은 세상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독자의 나이브한 태도를 용인하지 않는다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세상이 옳지않다고. 부당하고, 폭력적이며, 아름답지 않다고 질타한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이른바 즐거운 책읽기가 아닌 괴로운 책읽기로 바뀐다. 그럼 독자는 어떻게 해야하나? 세상사 내 알바니 여전히 책읽기만을 즐겨도 되나? 아니면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는데 일조 해야하나? 것은 각자의 실존적 선택이자 개인의 몫이다. 작가는 단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되어있다고 드러낼뿐이니까.



"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중의 의미를 띄고 있다. 우리는 책을 읽듯 세계를 읽을 수가 없다. 세계라는 책은 너무 크고 복잡하여, 그것의 구조를 곧 선명하게 드러낼 수 없다.

 

(...) 오늘날은 거의 모든 사람이 저마다 무당이며 점쟁이며 교사이어서, 어느 해석이 올바른 해석인가 알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책 속에서 읽은 대로 세계를 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읽은 대로 세계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행복스러운 것은 아니다.

 

보바리 부인의 경우에서처럼 책 속에서 본 대로 살려 하다가는 파멸하기가 더 쉽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 키호테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그 방황을 단순히 책상물림의 지적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 김현 <책읽기의 괴로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주 '그린파파야'에서 있었던 독서모임이 끝나고나서 두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민음사, 방미경 역)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에 관해서인데 첫째, 코스트카, 헬레나, 야로슬로프가 왜 별도의 쳅터로 등장하며, 그정도 비중있는 인물인가? 이들은 주인공이랄 수 있는 루드비크와 어떤 관계인가. 둘째, 루드비크가 진심으로 사랑한 루치에는 소설 상 중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왜 베일을 쓴듯 모호하게 등장하는가, 또 회원들의 관심사이기도 한데, 루치에는 코스트카와 루디비크 중 누구를 더 사랑했을까? 의문을 따져보기에 앞서 소설의 주제부터 살펴보자.

나는 토론 때 "<농담>은
역사의 도도한 물결 속에 파멸하는 한 개인의 운명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덧붙여 역사의 도도한 물결이란 1940년 후반 체코 공산정권 수립에서 1960년 후반 '프라하의 봄까지 진행된 교조적 사회주의를 뜻하고, 이런 배경 속에 루디비크의 엽서사건이 일어났다, 라고 말한바 있다.

즉,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를 문제삼는다는 거다. 그래서 <농담>은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를 타킷으로 삼기위해 먼저 여러 형태의 교주주의'를 소개한다. 가령 제마네크, 알렉세이의 교조적 사회주의에 대한 맹신을 비롯, 코스트카의 교조주의적 신앙, 야로슬라프의 시대착오적인 민속예찬, 헬레나의 루디비크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 등이 그것인데, 여러 형태의 교조주의 삽화는 '교조적 사회주의'를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한데 독서회가 끝나고 생각해보니 야로슬라프의 민속 예찬이 왜 교주주의적인지, 코스트카의 기독교가 왜 도그마며, 교주주의적 신앙인지, 나아가 헬레나의 사랑을 맹목적이라고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 정작 내 자신부터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루드비크는 자신을 파멸시킨 제마네크의 교조적 사회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을 견지하며, 복수심까지 품지만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엽서사건이 벌어진 대학시절, 당기위원장인 제마네크와 위원회 학생들에게 자신은 결코 사회주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격렬히 항의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회주의를 비난했다는 죄명으로 군대(수용소)에 끌려가면서도 여전히 제마네크, 알렉스의 교조적 사회주의만을 경멸을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교조주의에 대한 몇 개의 삽화들은 루드비크를 파멸케한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를 
부각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역시 의문이긴 마찬가지여서 모임이 끝나고도 영 개운치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집 <사유의 아름다움>(* 청년사, 김병욱 역)을 읽다가 아래와 같은 귀절을 발견했다.

내가 <농담>을 쓰기 시작한 날들을 생각해 본다. 애초부터 완전히 본능적으로 나는 야로슬라프라는 등장 인물을 통해 소설이 자신의 시선을 과거의(대중 예술의 과거의) 심층부 속으로 잠기게 하리란 것을, 그리고 나의 등장 인물의 <자아>가 그 시선에 의해 그 시선 안에서 드러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네 명의 주역도 이렇게 창조되었다 : 유럽의 네 과거에 접목된, 네 개의 개인적인 공산주의 세계 : 루드비크 : 신랄한 볼테르적 정신 위에서 자라는 공산주의 ; 야로슬라프 : 민속에 보존된 족장적 과거 시간을 재구성하려는 공산주의 ; 코스트카 : 복음서에 접목된 공산주의 유토피아 ; 헬레나 : 호모 센티멘탈리스의 열정의 원칙으로서의 공산주의. 이 개인적 우주들은 모두 그들이 해체되는 순간에 포착되었다. 공산주의 분해의 네 형태 ; 이는 또한 : 유럽의 오랜 네 모험의 붕괴를 의미한다.”   -  밀란 쿤데라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28쪽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코스트카, 야로슬로프, 헬레나가 등장하는 삽화는 내가 이해했던대로 교조적 사회주의를 부각키 위한 것이 아니라 네 가지 형태의 공산주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 좀더 부연해보자.


코스트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는 "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정신적 흐름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사회 평등과 사회주의로 이어진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초기 사회주의 시대의 열성적 공산주의자들을 떠올려보면, 가령 루치에를 내게 넘겨준 그 의장같은 사람들은 회의적인 볼테르파들보다는 독실한 신앙인에 가깝게 보입니다." (민음사판, <농담> 374쪽) 라고 루디비크에게 말한다.

그래서 루드비크의 사회주의가 아닌 기독교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고, 인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종교관은 원
시기독교의 주장과 유사하며,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이념과도 통한다. 과거 80년대 국내에 소개된 일본 신학자 다가와의 저서 <원시 그리스도교 연구>가 이런 내용들이며, 작가는 코스트카의 그리스도교를 통해 루디빅크가 신봉하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야로슬라프의 민속에 대한 강력한 애착이다. 루드비크는 야로슬라프의 민속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현대의 민속이 사회주의에 이용되는 점이 불만이다. - 우리나라 민속축제가 민족주의, 국수주의를 배경으로 체제 홍보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있다. - 한데 작가에 따르면, 이런 야로슬라프의 삽화, 즉 <왕들의 기마행렬>을 비롯한 민속의 과도한 열정과 집착은 "민속에 보존된 족장적 과거 시간을 재구성하려는 공산주의" 한 형태라는 거다.

헬레나의 등장은 상당히 흥미있다. 나는 헬레나를 교조적, 맹목적 사랑의 신봉자로 생각한데반해 작가는 호모 센티멘탈리스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도 등장하는 개념이다 - 의 구현자로 설정했다. 즉 "열정의 원칙으로서의 공산주의의 표본"이라는 거다. 인류 역사에서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공산주의 이상에 불타는 지식인들이 적지않았다. 그런데 <농담>에서 헬레나가 그런 인물을 표상하는 점은 재밌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앞에서 헬레나를 사랑의 교주주의라고 했는데,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점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끝으로, 루치에와 코스트카, 루드비크와의 관계를 살펴볼 차례다.

"코스트카는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의미하였고, 그녀를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하였으며, 그녀를 더 잘 사랑할 줄 알았다.(...)  즉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 쪽으로 향하고, 나에게 와 닿는 쪽에서만 그녀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모든 부분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그녀 자체의 모습, 그녀 혼자만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 그러나 나는 이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 <농담> 420쪽

루치에라는 캐릭터는 단순히 두 사람의 사랑뿐 아니라 코스트카의 기독교와 루디비크의 사회주의 이념과의 대립적 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즉 루드비크는 루치에를 진심으로 사랑한게 틀림없지만 코스트카가 보기에는 루디비크가 신봉한 사회주의 이념이 그랬듯이 "일종의 추상이고 전설이자 신화"  "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이기도 하다. 그래서 루치에는 루드비크가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을 했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노력했지만 불가능했다. 반면에 코스트카는 기독교적 정신, 사랑의 정신으로 루치에에게 다가섰기 때문에 사랑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루치에는 두 사람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여인일뿐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이나 기독교적 이념의 대상, 즉 민중, 인민 등 이름없이 역사의 곁을 스쳐가는 하나의 상징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아트앤스터디 김상봉 <그리스 비극론 1> 제 10강

 

나-운명의 동일성/타자성

 

그리스 비극의 특징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그다지 타자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신/운명은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규정이기도 하다. moira는 인간이 타고난 몫으로서 이 세계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범박하게 말하면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운명이지만 완전히 외재적인 무엇은 아니다. 운명은 삶의 굴레인 동시에 자기 규정이란 점에서 나의 안/밖에 걸쳐 있다.

 

이러한 이해에서 그리스인이 운명을 대하는 태도가 비롯된다. 그리스인에게 운명은 단순한 굴종의 대상이 아니었다. 신/운명과 개인적 의식(주체)의 관계는 동일성과 차이성의 공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극은 바로 이 긴장에서 발생한다. 운명과 내가 순수한 의미의 하나, 동일성 안에 있다면 비극은 싹트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나와 운명/신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타자적이라면 이때도 비극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신은 순수한 초월자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 분열을 상징한다. 우리 삶의 온갖 현실적인 것들이 신적인 힘에 의해 규정된다는 인식의 반영인 것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오레스테스를 좇는 에우메니데스(복수의 여신)들은 오레스테스를 사로잡는 양심의 가책으로 해석할 수 있다(최자영 『아테네 정치제도사』 참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 내면의 모든 것은 신적인 힘이 된다. 아폴론과 같은 빛의 신 뿐 아니라 에우메니데스 같은 어둠의 신도 인간 안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이미 서사시의 시대에 신은 인간성의 지평 속에 들어 와 있었다. 서정시의 경우에는 그것이 좁은 의미의 개인 안으로 들어온다. 비극에 오면 객관적 공공성과 서정시의 개별적 반성이 매개된다.

 

"기독교적 비극이 가능한가" 질문할 수 있다. 한편에선 가능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여호와가 "마지막에 합하여 선을 이루시니" 무슨 비극이 있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 경우 전제는, 비극은 본질적으로 결말이 비참하다는 것이다. 참된 의미의 비극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 계속 전제될 때만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신이 양쪽을 지양해 버리는 기독교적 세계에서 비극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반면 다른 이들은 비극의 본질을 다른 데서 찾는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보더라도 해피엔딩이 비극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은 아니다. 비참하고 끔찍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극 전체를 통해 인간성의 숭고를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적 세계 속에서도 비극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이들 입장이다.

 

합리성과 운명

 

운명이 합리성의 한계 바깥에 있는 듯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합리성은 비합리적인 것, 부당한 것을 배제해 나간다. 그러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운명이다. 이 대립이 파열할 때 오히려 파국이 온다. (cf. 우리의 기독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들의 문제점은 운명과 합리성이 충돌할 때 아무런 주저 없이 합리성을 버리고 맹목성으로 치닫는다는 데 있다.) 비극은 그 긴장을 유지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인들은 그 두 가지 계기가 모두 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왕』의 오이디푸스는 신/운명에 끝까지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신에게 자신을 의탁하며 장중히 퇴장한다. 인간의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 그리스 비극의 탁월함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실천적인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은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운명과 주체성의 충돌이라기보다 각기 다른 도덕적 정당성이라 할 것이다. 개인이 사회적 삶 속에서 떠맡을 수밖에 없는 악역의 정당성의 한계. 그것은 개인의 양심이나 도덕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라 하겠다.

 

아이스퀼로스 작품의 의의는 그리스 문학에서 처음으로 양심을 문제삼았다는 데 있다.


때때로 기독교적 양심과 그리스 도덕률을 비교하여 그리스인의 도덕률은 탁월함의 도덕률이었다고, 기독교적 양심은 그들에게 낯선 정념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 주체성의 발생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동시에 개인이 책임져야 할 정감이 생겼음을 의미했다는 점이다. 개인은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됨과 동시에, 폴리스 시민으로서 다른 누구에게도 자기 욕망의 책임을 돌리지 않고 떠맡아야 했다.

 

주체가 자기 일의 모든 정당성과 부당성을 책임지려 할 때 온전한 의미의 주체성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기원전 6세기에는 (철학적 차원과 별도로) 실천적 차원에서 양심이 문제가 되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 징후를 비극에서 본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행위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정점은 『오이디푸스왕』이다. 『오이디푸스왕』에는 두 가지 주체성이 결합해 나타난다. 한편에선 인식적 의미에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반성적 의식이 출현하고 있다. 다른 한편 실천적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선과 악을 가름하고 자기가 한 모든 행위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주체가 요구되었던 배경이 그리스 민주주의의 발전이다. 비극이 꽃을 피웠던 기원전 6세기∼5세기에 이르는 1백년 남짓한 기간은, 정치적 문맥에선 귀족 정치가 타파되고 폴리스 민주주의가 정착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스인들은 1인 참주정치의 체제 속에서 내부적으로는 권력을 평민들에게 분배하고자 애썼다. 그런데 민주주의적인 훈련이 안된 상황에서 시민들이 공공적 이성에 따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려면 각종 행정 절차를 정비하는 것만큼이나 시민교육으로서의 문예정책을 펼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리스 민주주의를 이룬 한 가지 계기가 페르시아 전쟁이라면 (아테네인들은 이 전쟁을 통해 민주주의적 자유 국가의 이상을 내면화할 수 있었다), 다른 한 가지는 비극 혹은 문학의 힘이다.

 

비극은 전국가적인 민족의 자기 계몽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참된 의미의 주체를 길러낼 수 있었고, 좋은 의미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계몽하고 교육하였다. 그것이 페리클레스 시대의 그리스 황금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아트앤스터디' 김상봉 <그리스 비극론 1> 제 9강

그리스 서정시의 시대는 철학의 시대와 시기적으로 거의 같다. 서정시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진전은 주체성이 등장한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개인에 대한 자각이 시작된 시대가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런데 서정시의 세계에서 '나'는 양날의 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에 대한 자각은 한편으론 사물/자연을 새롭게 보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계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모든 참된 사물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함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왜 그런가? 자기 의식은 반성적 의미의 사유의 출발인 동시에 나와 타자와의 거리를 의미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자와의 거리 사이에서 나를 인식한다. 서정시의 시대가 과학, 철학적 세계관의 시대이기도 한 것은 바로 이 거리 때문이다. 이 거리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마주할 수 있다.

 

서사시의 시대는 모든 것의 합일의 시대이다(총체성의 시대). 반면 서정시에서 나는 나이고 자연은 자연이다. 서정시에는 이탈되는 자립적 존재의 상이 등장한다(소외). 영웅적인 기사도를 숭상했던 서사시의 시대와 달리, 서정시의 시대는 다양성의 존중이 두드러진다. 나와 공동체 사이에는 일정한 심리적 거리가 출현하고 시인은 개별적 자아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사포 등)

 

나에 대한 자각은 자연과의 무차별한 합일로부터 벗어나 주체가 타자와 어떤 거리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의식의 일정한 진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자칫 자기 자신에 대한 탐닉과 집착으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서사시는 문자 그대로 (삼인칭 대상들을) '이야기'할 뿐이지만, 서정시는 주체의 자기 반성 속에서 1인칭 나를 말한다. 그런데 시인이 사사로운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한갓 개인의 넋두리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문학은 보편적 설득력(전달가능성)을 가질 때에만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서정시는, 서사시적 삶이 보여주는 총체적 지평만큼이나, 내가 보여주는 보편적 자아의 확대가 이루어질 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나의 자기 반성 속에서 세계의 총체성을 돌이켜 보려는 시도는 서사시적 정신의 발전 단계보다도 훨씬 고양된 정신 단계를 요구한다. 나의 정신의 외연이 무한히 확장되지 않고서는 삶의 보편적 진실을 길어내기가 쉽지 않다.

 

사사로이 자기에 대해 말하는 시와 나 속에서 보편적 주체의 진리를 드러내 보이는 시는 분명 다르다. 나를 통해 말하되 사사로운 '나'가 아닌 보편적인 나(주체성)에 대해 말할 때 참된 의미의 보편성과 문학적 정당성이 가능하다.

 

우리 문학에서 만해와 소월이 탁월한 까닭은 그들의 시에 개인의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사사로이 내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의 시인들은 그걸 본받지 못했다. 마치 개인적인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시의 진정성인 양 오해되는 시대이다. 한편,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산 것과 보편성을 등치시키는 일이 있다. 그러나 자기연민에 빠져 자기를 노래한 것에 공감하는 것은 사람들이 더불어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일 뿐,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이라고 볼 수 없다.

 

내가 나를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의미의 보편성을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나를 말하면서 1인칭으로서 삶을 반성하되, 사사로운 나로부터 이탈한 보편적 나를 사고하고 그럼으로써 보편적 주체성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만해, 소월). 그러나 이에 반해 사사로운 나에서 더 큰 나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작은 나로 함몰되는 구조가 있다(윤동주, 백석, 정지용 등). 똑같은 서정시라 할지라도 후자는 인간을 참된 의미에서 도야하지 못하고 유약하거나 이기적인 나에 머물게 한다. 이러한 자기반성은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우리 시는 점점 더 사사로운 자기 도취로 흐르고 있다. 나는 개별성 속에 함몰되어 어떠한 보편적 지평도 보여주지 않는다.

 

개인이 자각되는 시대에 이상의 도식은 언제나 하나의 문화적 시험이 된다. 자기를 자각함으로써 보편적인 나로 나아가는 시대는 새로운 문화를 열 수 있지만, 다시 사사로운 자기에게로 함몰하는 시대는 병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시인들은 나를 반성함에 있어 끊임없이 보편적 주체를 사고함으로써, 새로이 열린 개별성이 이기적 개인들의 대책 없는 충돌로 치닫지 않게끔 문학을 통해 동료 시민들을 교육했다. 그것은 서정시로부터 비극까지 이어지는, 그리스 문학의 중요한 화두이자 일관된 시대 정신이다.

 

우리 문학은 어떠한가? 신문학 이후 처음으로 개인의 자발성과 중요성이 의식될 무렵, 극소수의 위대한 시인들을 제외하고, 나 속에서 나를 잊고 삶의 총체성을 반성하는 문제는 내버려져 있었다. 그 결과 각자는 고립된 자기 반성으로 치달았을 뿐이다. 이것은 오늘날 현실적 삶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이를 알았던 까닭에 그리스 시인들은 주체 자각의 현실적 결말이 대책 없는 개인들의 충돌이 되지 않도록 서정시와 비극에서 남다른 노력을 보였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