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박태원 소설에 따라붙는 '세태소설'이라는 말은 그의 문학을 좀 폄하하는 말이다. 세태소설이란 말 그대로 인물들이 처한 그 시대, 세태의 표면을 그냥 스케치하는 정도다, 라는 평가니까. 하지만 이것은 일부의 평가일뿐이며 여전히 <천변풍경>은 우리문학사에서 훌륭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뚜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의 미덕은 사냥꾼이 경험하는 숲, 혹은 외딴 시골의 일상을 관찰하듯 스케치 하면서 강력한 주제의식이 깔린다는 점이다. 스토리가 전개되는 공간이 설령 초원지대든 깊은 산 속이든 아니면 노동하는 일터든 결국은 삶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문제는 여기서 벌어지는 이야기, 혹은 에피소드 속에 강력한 주제의식, 플롯을 끼어넣을 수만 있다면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탈바꿈 될것이다. 

가령 광활한 스탭지역을 태풍이 휘몰아치듯 말 타고 달리는 몽골인의 기상은 인간의 모습 속에서 원초적인 자연과 강력한 파우어를 간직한 조상 대대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노동현장에서 만나는 몽골인의 후예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천민자본주의적 실상에 내동댕이쳐진 신세다. 그런 몽골인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한데, 이들이 처한 삶의 비애를 냉정하게, 아이러니 형식으로 묘사해낸다면 어떨까. 

C씨의 글 <노변정담>은 굳이 필자를 밝히지 않아도 글쓴이가 누구인지 어렵지않게 짐작할수 있다. C씨의 글은 어떤 장르든 대개는 따스한 휴머니즘이 짙게 깔린다는 점인데 <노변정담>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어떤 글이 휴머니즘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특히 문학작품일 경우 장점이자 반대로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삶의 현장이 그렇듯, 소설의 장 역시 작가의 치열한 대결의식이 펼쳐지는 장이고, 이런 점에서 휴머니즘은 자칫 삶의 곡절, 변화무쌍함, 배리, 위선, 이중성 등등을 밝혀내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여기서 휴머니즘이라는 지적은 휴머니즘 그 자체가 문제라는 뜻이 아니고, 대체적으로 C씨의 글 속에 휴머니즘이 공통적으로 깔린다는 의미이다. 짐작컨대 본래 C씨의 심성이 모질지 못한 착한 심성, 따스한 마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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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에서    - 최영철(시인)

 

하루 예닐곱 번 들어오는 버스에서 아저씨 혼자 내린다
어디 갔다 오는교 물으니 그냥 시내까지 갔다 왔단다
그냥 하는 게 좋다 고갯마루까지 가 보는 거
누가 오나 안 오나 살피는 거 말고 먹은 거 소화시키는 거 말고
강물이 좀 불었나 건너마을 소들은 잘 있나 궁금한 거 말고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주머니 손 찔러넣고 건들건들
한나절 더 걸리든 말든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아저씨는 그냥 나갔다 온 게 기분 좋은지
휘파람 불며 그냥 집으로 가고
오랜만에 손님을 종점까지 태우고 온 버스는
쪼그리고 앉아 맛있게 담배 피고 있다
그냥 한번 들어와 봤다는 듯
바퀴들은 기지개도 켜지 않고 빈차로 출발했다
어디서 왔는지 아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새끼를
일곱이나 낳은 발발이 암캐와
고향 같은 건 곧 까먹고 말 아이 둘을 대처로 떠나보낸 나는
멀어져가는 버스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먼지를 덮어쓴 채 한참 

이 시의 묘미는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아이 둘을 대처로 떠나보낸 나" 라는 두 싯구의 대조에 있다. 앞만보고 분망히 살다보면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삶의 무상성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아마 낚시를 좋아하는건 이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설사 고기가 물지않아도, 출렁출렁 부딪치는 물살만 바라봐도 분망한 마음은 고요해지고 이내 평정심을 찾는다. 

 

그러나 내남할 것없이 무상성, 무심히 흐르는 세월에 그냥 몸을 맡길수가 없는게 우리네 삶이기도 하다. 그것은 '대처로 떠나보낸 아이'와 '발발이 암캐'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먼지' 뒤짚어쓴 채 살아내야 하는게 우리 삶의 모습이며 인간실존이다. 이유도 없이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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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원주박경리문학제 박경리문학상 수상 작가인 케냐 출신의 응구기 와 티옹오가 20일 오전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을 보니 케냐 출신의 소설가 응구기 와 티옹오가  2016년 제 6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원래 티옹오는 하루키와 함께 2016년 노벨문학상 유력한 수상 후보였다. 나는 내심 그가 수상하기를 기대했는데 밥 딜런이 받자 여간 서운한게 아니었다. 여하튼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하게됐다니 그나마 다행이고, 비록 두 상의 성격이 다르겠지만 내 보기에 이번만큼은 노벨상보다 박경리문학상쪽이 작가를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 2016년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는 노벨상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결정되었다) 

 

우리에게 제 3세계 문학, 특히 아프리카 소설은 그리 많이 소개된 편이 아니다. 그나마 '창작과 비평사'의 노력 덕분으로 몇몇 작가의 작품이 소개된 바 있다. '창작과비평사'의 제 3세계총서 중 한 권으로 응구기 와 티옹오의 소설 <피의 꽃잎, 1983>(김종철 역, 창작과비평사 전 2권)이 출간되어 진즉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였다. 이 소설은 후에 민음사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다음은 한겨레신문에서 옮긴 응구기 와 티옹오의 프로필이다.

 

응구기 와 티옹오는 1938년 케냐에서 태어나 우간다와 영국에서 대학을 마쳤다. 그가 태어날 당시 케냐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진 마우마우 독립전쟁은 청년기 그의 삶과 초기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62년 희곡 <검은 은둔자>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첫 소설 <울지 마, 아이야>(1964)를 비롯해 <한 톨의 밀알>(1967), <피의 꽃잎들>(1977) 등 같은 작품들에서 식민의 유산과 그에 대한 환멸을 그리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1977년 당국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그는 자신의 부족 언어인 기쿠유어로 된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를 감옥 화장지에 썼는데, 이 작품은 김지하의 담시 ‘오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뒤 그는 기쿠유어로 글을 먼저 쓰고 스스로 영어로 번역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1982년 영국으로 망명했던 그는 1989년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겨 지금은 어바인 캘리포니아대학 영문학 및 비교문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 한겨레신문 2016.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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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독일의 소설가 페터 바이스의<저항의 미학, 2016>(탁선미 외 역, 문학과지성사/ 전 3권)을 읽게된 계기부터 말해야겠다. 사실 페터 바이스는 최근 그의 대표작 <저항의 미학>을 읽으며 비로소 알았지만 작가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다. 중앙일보사에서 '오늘의 세계문학 시리즈' 중 한 권으로 간행된 소설 <부모와의 이별>이 오랫동안 서가에 비치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희곡 <마라/사드>도 일찍이 국내 연극계에 잘 알려졌는데, 이 작품의 제목 역시 낯익었지만 원작자가 페터 바이스라는것은 <저항의 미학>을 읽으면서 알았다.  

 

두 달 전 어느 TV프로에서 한국인 남편과 사는 독일 여성 부부를 소개했다. 남편 이희원씨는 미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학에 출강하고 있고 그의 독일인 아내는 한때 원주대학에서 독문학을 가르쳤던 전직 교수였다. 그렇잖아도 평소 미학에 관심이 많았던터라 이희원씨의 프로필이 궁금했다. 혹시 번역서나 저서가 있을까 검색해보니 <무감각은 범죄다, 2009>(이루)라는 저서가 출간되었다. 

 

그러니까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다름아닌 이희원씨의 저서 프로필을 통해서 알게된 셈이다. 프로필에 따르면 이희원씨에게 <저항의 미학>은 상당한 영향을 끼쳤나보았다. 나는 처음에 이희원씨의 전공이 미학이고, 페터 바이스의 작품 제목이 <저항의 미학>이라고해서 당연히 미학서인줄 알았다. 그러다 뒤늦게 소설임을 알고 더욱 호기심이 끌렸다. 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미학자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주었을까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이희원씨의 저서보다 그가 소개한 책을 먼저 읽게된 셈인데, 말 꺼낸김에 <저항의 미학>이 언급되는 이희원씨의 프로필을 잠깐 소개한다. 

 

(<무감각은 범죄다>의 저자 이희원은)독일 유학 초기, 브레히트 문학을 중심으로 유물론 미학의 다양한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던 중 “『자본론』 이후 최고의 책” 혹은 “20세기의 책”이라고까지 칭송된 『저항의 미학』을 접하게 된다. 미학적 문제제기는 물론이거니와 철학, 사회학, 역사학 등에서 다루어지는 주요 문제들이 ‘변증법적 종합’을 이룬 채 논의되고 있는 이 책에 매료된 순간, 저자의 기나긴 유학 생활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저항의 미학』이 제기하고 있는 미학적 측면의 문제, 즉 ‘왜 예술(활동)은 저항(행위)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주제를 탐색해 2000년 브레멘 대학에서 『예술, 앎 그리고 해방―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에 대하여』로 박사 학위(미학 전공)를 받았다. 이 논문은 브레멘 대학의 학술총서 제35권으로 출간되었다.

 

귀국 후, 짧은 기간의 강사 경험을 뒤로하고 귀향했다. 현재는 미학과 관련된 저술 작업을 통해 독자와의 직접적 대화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진행될 저술 작업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미학적 차원에 대한 성찰과 서구에서 ‘삶의 요소로서 저항’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인정받는 『저항의 미학』을 소개하는 일이 될 것이다.  - 이희원 <무감각은 범죄다> 저자 프로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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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인 코맥 매카시의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임재서 역, 올, 2008년)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묵시록이자 우화다. 여기서 노인은 갈데없이 짜부라진 현대인을 대변하고 악의 화신 시거는 현대자본주의 시스템이자 돈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듯. 소설은 헤밍웨이 문체가 그렇듯 짧고 건조하며 속도감으로 넘친다.   


행운과 불행이라는 두 얼굴. 아이러니한 것은 행운을 잡은 이가 불행으로 전락한다.  하긴 우리네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행운과  불행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와중에 끊임없이 아이러니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행운과 불행은 운명론적이다. 우리는 으레 운명론을 폄하한다. 만사를 운명에 맡기면 도대체 우리가 해야할 몫이 없지 않느냐것. 2000년 인간사가 수동적인 운명론에 맞서온 결과인데, 찬란하게 이룩한 인류문명인데, 그리스 비극도 아닌 현대소설이 운명론을 내세우다니!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인정하든 안 하든 상당 부분 운명적론인 측면이 있다. 가령 30년전 어느날 내가 모교를 우연히 찾지 않았다면 평생 해온 공무원 생활이 과연 가능했을까? 나아가 아내를 만날 수 있었을까? 어느날 아내가 시내에 있는 어느 약국을 찾은 것이 계기가 지금까지 오케스트라 활동은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이자 운명론적이다. 

나는 지금 코맥 매카시가 주장하는대로 행운과 불행을 운명론의 소치라며 거들 생각은 없다. 다만 운명론이 맞고 틀린다라기 보다 설사 인생이 운명적이라해도 맞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결론이 뭐 중뿔난게 아니고 이미 니체가 설파한 논리이자 모든 긍정론자의 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에서 자신을 죽이러 온 살인자들의 소식을 듣고도 가만 기다리는 닉의 운명처럼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 죽음에 맞서기는 하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슬픈 일이지만 인생은 결국 운명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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