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청춘시절부터 이 나이까지 평생 소설을 읽어왔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이해 안 되는 작품들이 몇 몇 있다. 가령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박상륭의 <칠조어론> 등이 그런 경우인데, 아직도 못 읽은 작가들이 많으니 굳이 난해한 작품에 연연할 필요없지, 하면서도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늘상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문학에 대한 이해력이 짧은 탓인지 과거에 이미 접한 작품도 60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해 되곤 했다. 그렇다면 조이스, 프루스트도 언젠가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하는 기대감은 버리지 않고 있다. 한데 문제는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나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같이 특별한 경우다. 도대체 한 쪽 읽기도 버거운 소설이라니! 그동안 어렵네, 어렵네하고 푸념한 <율리시스>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이들 작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 아닐까싶다. 그러니까 세상의 그 어떤 소설도 언젠가 도전하면 이해 가능하리라 생각되지만, 앞의 몇 작품들만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거다.      

불가능! 그런데도 미련이 아주 사라지지 않은건 <피네간의 경야> 기존 번역을 개역한 김종건 교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 때문이다. “개역과 주해를 끝내고 몹시 앓았어요. 이가 흔들리고 고열이 오르는 등 고통이 심했지요. 그러나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20세기의 걸작이라면 ‘피네간의 경야’는 포스트 모던 시대인 21세기의 걸작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지요. 이 작품에 도전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젊어지는 기분이 들었지요.”  정말 그럴까?

 

 

오랜만에 들른 서평가 이현우의 블로그 <로자의 저공비행>에 마침 이들 작품에 대한 짦은 코멘트가 있어 옮긴다. 코멘트 중 "심오해서가 아니다. 그냥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라는 부분이 특히 눈길을 끄는데, 이런 말을 전공자가 좀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그런 말 했다간 당장 밥줄이 끊길테니.....   

" 나는 조이스가 <율리시스>(1922) 정도에서 멈추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걸작이라고 부른 ‘괴물‘ <피네간의 경야>(1939)는 우주의 언어로 쓰였다는 말 그대로 인간의 언어로는 이해하거나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도단‘의 여실한 사례가 아닐까.

조이스 전문가로서 김종건 교수가 학자로서의 일생을 바쳐서 이 작품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였지만 결과를 놓고 보건대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번역의 불가능성 내지 무의미성을 보여주는 게 <피네간의 경야> 번역이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숱한 신조어를 옮기기 위해 역자는 생경한 한자어를 무수히 동원하는데 그로 인해 이 작품은 한글 번역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국한문혼용체 소설이 되어버리고 만다. 한자 병기를 생략하고 초반부를 읽어보자.


사랑의 재사, 트리스트람경, 단해 너머로부터, 그의 반도의 고전을 재차 휘두르기 위하여 소유럽의 험준한 수곡 차안의 북아모리카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니 오코노의 흐르는 샛강에 의한 톱소야의 암전이 항시 자신들의 감주수를 계속 배가하는 동안, 조지아주 로렌스군의 능보까지 아직 지나치게 쌓지 않았으니 뿐만 아니라 원화로부터 혼일성이 ‘나 여기 나 여기‘ 하고, 풀무하며 다변강풍으로 패트릭을 토탄세례하지 않았으니 또한 아직도, 비록 나중의 사슴고기이긴 하나, 아직도 피의 요술사 파넬이 얼빠진 늙은 아이작을 축출하지 않았으니, 비록 바네사 사랑의 유희에 있어서 모두 공평하였으나, 이들 쌍둥이 에스터 자매가 둘 혹은 하나의 나단조와 함께 과격하게 격노하지 않았나니, 아빠의 맥아주 한 홉마저도 젬 또는 셴으로 하여금 호등으로 발효하게 하지 않았나니, 그리하여 눈썹 무지개의 붉은 동쪽 끝이 바다 위에 반지마냥 보였을지라. - <복원된 피네간의 경야>,3쪽

<피네간의 경야>는 원어민들도 ‘읽을 수 없는 책‘으로 치부하며 독자보다 박사학위자가 더 많다고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첫 페이지에 나오는 한 문장을 예시했지만 우리말(?) 번역으로도 당연히 읽을 수 없는 작품이다. 심오해서가 아니다. 그냥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박상륭의 <칠조어론>이 이에 견줄 만한 사례라고 할까). 원문으로야 소수의 독자가 심오한 무엇을 찾아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투의 문장을 600쪽 넘게 읽고, 거기에 딸린 12000개가 넘는 주석을 읽어야 한다는 건 고문에 가깝다(책값은 48000원이다).

<피네간의 경야>가 심오한 걸작이라는 데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설사 그렇다 한들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작품이다. 내가 찾을 수 있는 의미는 조이스가 문학의 막다른 길, 문학의 벼랑을 보여주었다는 것. 덕분에 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그 벼랑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물론 그럼에도 남들은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굳이 그 벼랑길로 가보려는 독자도 있으리라. 나는 이쯤에서 그들을 배웅하고자 한다. 내가 동행할 수 있는 조이스는 <율리시스>까지만이다. 그 정도만으로도 조이스의 다이달루스적 기예는 충분히 훌륭했다. 추락의 기예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 이현우 <피네간의 경야>와 조이스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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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명을 '딜레탕트'라 지은건 딴에 생각이 있어서다. 평생 문학을 가까이했고, 독후감 몇 편 썼다해서 내 능력 누가 모를까. 정식 문학교육을 받지 못한 탓도 크지만 무엇보다 창조적인 글을 쓰기엔, 더구나 평문을 쓰기엔 내 머리가 너무 무디다고 판단되었다. 그랬기에 단 한 번 문단 데뷔를 생각한적 없고 실제 응모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애호가, 취미생활로 만족하자. 그랬던거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매일 문학을 생각하고 읽고, 쓰고 하지만 그냥 독자, 애호가일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다 죽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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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결되지 않은 숙제처럼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몇 가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를 완독하고 이해하는 것. 다음은 셰익스피어 전집 읽기. 우선 이 세 가지가 해결되면, 세계문학을 꼼꼼하게 다시 읽으며 독후감을 작성하는 일이다. 어찌생각하면 소박한 계획일 수 있지만 그간 미루고 미뤘뒀던 평생의 숙제를 일단 끝낸 후 다음을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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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트럼펫 레슨 샘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뭐 프로, 아마가 따로 있나요. 매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프로죠."  추측컨대 내가 열심히 하라는 격려 차원의 말일게고, 진정한 프로는 매일 열심히 하는것 외에 하는 일 자체가 생업이 되어야 한다. 생업이란 좋든 싫든 먹고 살기 위해서 무조건 해야하는것을 뜻한다. 그것도 잠깐 짬을 내서 하는게 아니라 하루종일, 1년 365일 줄기차게. 바로 그런 점에서 나의 문학사랑은 취미생활이자 애호가 수준의 심심풀이용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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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만나는 '화요 인문산책' 두 번째 모임 주제는 <우리시대의 바람직한 소설문학>. 소설가인 최 작가의 개인적 고민과 결부된 주제이기도 한데, 다소 광범위하고 애매한 측면이 있다. 가령 '우리시대'는 언제를 지칭하며 '바람직한 소설문학'은 구체적으로 어떤 문학을 뜻하는지, 또 한국문학 전반을 대상으로 해야할지, 최 작가 개인에 한정해야할지 등이 먼저 따져져야한다. 단톡방에 게시된 최 작가의 발제 가운데 지방에서 소설작가로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대중성(내지는 상업성)과 작품성 중 어떤 쪽을 우선해야하는지, 즉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어떤 작품을 써야하는지 조언을 듣고싶다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토론 주제를 우리시대 한국소설 전반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주로 최 작가 개인 작품에 국한해서 논의해야 할 것 같다. 다만 토론이 충실하기 위해서는 최 작가 작품을 중심으로 하되, 80년대에서부터 최근까지의 한국소설의 전반적 흐름을 개괄적이라도 살펴봐야 할것이다. 

최근 한국소설의 흐름과 주요 작가들의 작품은 어떤것이 있는지 파악하고, 토론자료도 준비할겸 김영찬의 평론집 <비평극장의 유령들>과 황종연의 평론집 <비루한 것의 카니발>, 석조동인지에 게재된 최 작가의 단편 세 편을 정독했다. 가능하면 90년 초반 주요 작품으로 거론되던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와 윤대녕의 <은어낚시 통신>, 은희경의 소설집 등을 재독하고싶지만 시간이 촉박하고, 게다가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까지 읽는다는건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다. 미흡한대로 평론집을 통해서나마 스케치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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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장편 <에세이스트의 책상>, 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은희경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 김연수 소설집 <스무 살>, 200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 2016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 김숨의 <뿌리 이야기>를 서가에서 빼놓다. 대략 3, 4일이면 읽을 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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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 전개의 작위성 
2. 인물 성격의 평면성, 상투성   
3. 플롯의 단순성
4.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 제거   
5. 도식적인 선과 악의 구분 
6. 평면적인 스토리 전개
7. 표피적, 상투적인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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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서회 전후

독서실 창밖, 낙옆 하나 둘, 골목길 어데론가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아침, 커피 한 잔. 완연한 가을 아침입니다. 오디오에서 임재범의 <만남>이 들려오는군요. 노래의 가사처럼 여러분과의 만남도 우연일까요? 함께 클래식을 연주하고, 책 읽고, 이야기 나누고, 글쎄 우연한 만남이긴한데 이만한 누림이라면 뭘 더 바라겠어요. 소복이 쌓이는 하얀 눈, 샤미센 선율, 다다미방, 찻물 끓이는 소리, 솔방울 소리, 적막,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꼭 읽어보세요.  

평생 살면서 <설국>을 네 번쯤 읽은것 같군요. 학생때, 40대, 50후반, 그리고 지금....스무살, 지식과 문학의 향연에 푹 빠져살던 그 무렵, 신구문화사에서 출간된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을 어느 헌책서점에서 구입했었죠. 이 작품이 특별히 뜻깊게 다가오는건 요즘 세상이 너무 빠르고 분주하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시마무라, 고마코, 요코...단지 서 너명 남짓한 등장인물, 시골 산 속의 어느 온천장, 샤미센, 게이샤, 소복이 쌓이는 눈, 눈, 눈. 이런 소설은 너무 빠르게 읽으면 안 됩니다. 차 한 잔 음미하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다지오 보다는 차라리 라르고 템포가 적절하겠군요. 시나브로 초겨울 문턱입니다. 독서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 <설국>이 전해주는 문학의 아름다움을 맘껏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역시 문학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움이 더하는것 같군요. <설국>을 사흘에 걸쳐 드문드문 읽다가 어젯밤 늦게까지 마저 다 읽었습니다. 시마무라의 짙은 고독감, 고마코의 뜨거운 관능미, 요코의 청순미가 손에 잡힐듯 느껴지는군요. 모임 날까지 하루 더 시간이 남아 <이즈의 무희> <천 마리 학>도 읽으려고 합니다. 중편 분량이라 하루면 다 읽을듯싶은데, 오늘 하루 가와바타 야스나리 특유의 섬세하고 서정적인 문장을 맘껏 즐겨봐야겠군요. 

고마코의 쓰러질듯 술취한 얼굴을 연상케 하는 농염하게 익은 홍시, 비록 샤미센 선율은 없었지만 새콤달콤 맛있는 유자차, 가을의 밑바닥을 녹색과 흰색으로 곱게 물들인 롤케익....여러분과 함께한 토론 시간 더없이 즐거웠죠. 시마무라에게 도쿄로 함께 가고싶다는 요코의 애잔함, 그리고 낙옆 쓸쓸한 늦가을 오후, 이런 날 <설국>은 더없이 적절한 소설 같습니다.

2. 일본 문학의 특징

소설가 이호철은 일본문학의 특징을 세 가지로 거론한바 있다. 사소설, 민중과의 괴리, 에로티시즘이 그것인데, 물론 이런 특징이 모든 작가에게 해당하는건 아닐테지만 최소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경우는 정확히 해당한다. 다만 초기작인 <이즈의 무희>의 경우 민중계층인 유랑 무희와 그녀의 가족이 주요 등장인물이라는 점에서 다소 예외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이호철이 든 특징에 해당한다.

<이즈의 무희>는 황석영의 단편 <삼포가는 길>과 분위기가 흡사한 면이 있어 한일 양국의 문학적 특징을 비교하는데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가령 <이즈의 무희>에서 학생 신분의 화자는 무희 소녀 가족을 단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 - 화자는 무희 소녀에 대한 이성으로서의 관심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는데 반해, <삼포 가는 길>의 등장인물 모두는 민중계층이고, 실제 민중들의 고단한 삶 자체가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3.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이기도 한 <설국>에서 작가의 분신 격인 시마무라의 시선을 통해 고마코에 요코에 대한 묘사는 치밀하고, 집요하게 이뤄진다. 마치 '하이퍼 리얼리즘'이 연상될 정도로 세밀한 묘사는 자연 풍경 묘사와 더불어 한 편의 인물화와 풍경화를 함께 보는듯한 착각이 들게하는데, 이점은 <천 마리의 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호철은 '사소설'의 특징은 작가 한 개인만이 모든 소설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개인적 관심사가 전부인 작가는 괴기스러움, 에로티슴으로 밖에 탈출구가 없음을 함께 지적한다. 또한 그는 일본문학계에서 자살하는 작가들을 심심찮케 볼 수 있는데, 작가가 양심적일수록 결국 도달하는건 자살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대다수 일본 작가들이 자살을 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런 지적은 편견일 수 있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 경우는 상당히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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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자신이 차버린 정부(情婦)를 끔찍이 싫어하듯이 그는 바다를 끔찍이 싫어했다. 그는 얼어붙는 돌풍이 몰아치는 속에서 거대한 활대들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삭구들을 가지고 몸부림쳐야 했던 사람이 바다 생활에 대해 갖게 되는 증오심으로 그렇게 바다를 싫어했다.

(...) 뭍에서 생의 반을 살았던 콘라드에게 바다 생활은 늘 무료한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경험한 것보다 나중에 회고했을 때의 바다를 훨씬 더 좋아했다. 그가 매리엇 선장에 대해 한 말처럼, "그는 첫째로 조국을 사랑했고, 두 번째로 봉사하는 것을 사랑했으며, 그리고 어쩌면 바다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콘라드는 너무나 다른 두 삶을 연결시키려 하면서 갑판(deck)과 책상(desk)을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바다에 간 것과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모두 똑같이 알 수 없는 이유들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나를 그렇게 몰아간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막연한 필연성, 완전히 베일에 싸인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바다에서의 삶과 문학적 삶 모두, 무한하면서도 숨막힐 듯한,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고독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 제프리 마이어스 <조셉 콘라드>(책세상), 196~197쪽

17년간 바다생활을 한 조셉 콘라드 보다 두 배 더 바다에서 지내야했던 나 역시 왜 바다에 갔는지, 왜 그토록 오래 배를 탔는지, 그리고 나이든 지금까지 문학을 좋아하고, 이렇게 잡글들을 써야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또한 콘라드처럼 나도 바다를 너무 싫어했다. 10년간의 대서양 원양어선, 계속된 학교 실습선...선장이라는 막중한 책임감, 거칠고 힘든 생활, 고립감, 거기에 무료함까지 더한 바다생활은 단지 먹고 살기위한 수단일뿐이었다. 어느 한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낯선 항구의 입항, 야간항해, 혹은 협수도항해, 무시로 푹풍우와 마주해야 하는 바다는 결코 로맨틱한 곳이 아니다. 그런 속에서도 유일한 위안이라면 아마 자유롭게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정도였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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